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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밝을 명의 권세>의 줄거리:
이 땅에 오신 태초의 말씀이시며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냥 말뿐인 자녀가 아니라 진짜 자녀라면 갖게 되는 이 권세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일까요? 바로 밝을명의 권세입니다. 이 권세를 한 번 가져보세요. 깜짝놀라실 겁니다. 정말 신기하게 그 동안의 모든 문제가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릴테니까요.
밝을 명(明)의 권세
(요1:9-13)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밝을 명(明)의 권세>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밝을 명(明)의 권세’
밝을 명(明)자는 해를 말하는 일(日)자와 달을 말하는 월(月)자가 합쳐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사람이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두 개의 빛을 갖다 붙여놓은 게 밝을 명(明)자입니다.
그래서 이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서 이루어진 단어는, 제일 먼저 우리가 생활 속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 설명(說明), 설명이라면 어떤 일이나 대상의 내용을 상대방이 잘 알 수 있도록 밝혀서 말한다는 뜻이에요.
나 자신에 대해서 설명을 하는 것, 이게 아마 생각일 것입니다.
어떤 일이나 대상을 나 자신이 생각하는 것, 나 자신에게 설명을 하는 거죠, 이해를 하려고 하는 거예요.
다음에 해명(解明)이 있습니다, 해명이라 함은 까닭이나 내용을 풀어서 밝힌다, 밝힌다는 거예요, 이렇게 명(明)자가 들어가면 밝힌다는 말이 꼭 따라붙습니다.
그리고 판명(判明)이 있습니다, 설명 해명 판명, 전부 비슷한 뜻입니다.
또한 명(明)자는 아니지만 철학이라고 할 때 철(哲)자가 밝을 철자입니다.
세계와 인간에 대해서 밝히는 것이 철학입니다.
뿐만 아니라, ‘명확하다’에도 밝을 명자가 들어있습니다.
명백하다, 명쾌하다, 분명하다, 다 밝을 명(明)자가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밝을 명(明)자가 진짜로 효과가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빛이신 예수님이 영접되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어요.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다’ 그 다음에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다’
참 빛인데,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지어졌다, 예수님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설명(說明)이 안 됩니다, 밝을 명(明)자가 효과를 나타내지 못한다는 겁니다.
판명(判明)이 안 되고, 해명(解明)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영접되지 않으면 명쾌(明快)해지는 것이 없고, 명확(明確)해지는 것이 없고, 명백(明白)한 것이 없고, 분명(分明)한 것이 없습니다.
밝을 명(明)자가 사라져버린다는 얘기에요.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참 빛이시니까, 그 참 빛이신 예수님을 내 생활 속에 마음속에 영접하지 않으면 내 마음과 내 생활 속에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고, 해명할 수 있는 길이 없고, 판명할 수 있는 길이 없고, 명쾌한 것이 하나도 없고, 분명한 게 없다는 얘깁니다.
예를 들어, 박근혜 씨와 문재인 씨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TV토론에 나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미래에 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참 빛이신, 참 밝을 명(明)자이신 예수님을 마음에 모셔 들이지 않았다면 그들의 말은 명쾌한 게 없고, 분명한 게 없고, 명백한 게 없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으면서 설명하고 있고, 그들은 아무것도 해명하고 판명할 수 없으면서 판명하고 해명하고 있는 겁니다.
이것 참 문제죠?
이건희 씨가 10조가 넘는 재산을 갖고 있어도, 그분이 참된 밝을 명(明)자 되시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 갖고 있는 수 조원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돈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거예요, 갖고만 있을 뿐이지요.
돈에 대한 철학도 생기지를 않는 겁니다, 철학의 철(哲)자가 밝을 철자입니다.
돈을 많이 모으면서 돈에 대한 올바른 철학이 생길 수가 없다는 얘깁니다.
정치철학, 교육철학, 사업철학, 기업인으로서의 철학, 부모로서 자녀양육에 대한 철학, 이런 게 성립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접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그 어떤 사람의 그 어떤 설명도 믿지 마세요.
그 어떤 사람의 그 어떤 해명과 판명도 받아들이지 마세요, 다 거짓말입니다.
다 거짓말이라는 얘기를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소크라테스가 한 겁니다.
지금 요한이 이 지상에서 초라하게 사셨던 나사렛 예수님을 태초의 말씀으로 선언을 하시고 있는 이 상황이 어떤 상황입니까?
로고스, 말의 천지에 태초의 말씀으로 선언해 들어가고 있는 겁니다.
소크라테스 때의 아테네 시민들, 예수님 때까지도 로마제국이 그 영향 아래 있었던 것이에요.
지금도 서양사상사의 원천은 바로 이 소크라테스를 전후로 하는 헬라문화였습니다.
이때 아테네 시민들이 직접민주정치를 실시하던 사람들입니다.
모든 문제를 모든 시민이 다 참여해서 모두가 다 자기의 의견을 말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을 일로 삼고 살던 그런 문화권이었습니다.
그러니 쉽게 말해 모두가 다 안당이에요, 사람들이 모르는 게 없는 거예요.
말하고 연구하고 토론하면 다 규명이 되는 것이고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델포이신전에 있는 무녀에게 가서 질문을 합니다.
소크라테스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니 델포이신전의 무녀가 ‘없다!’고 한 마디 합니다.
당시에는 무녀의 답이 신께서 넣어주신 신탁으로 통하는 거였습니다.
신탁이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
소크라테스가 그 얘기를 듣고 ‘내가 대체 무엇 때문에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신탁을 받게 되었을까?’하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는 온 세상의 안다고 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해봅니다.
결론을 내립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나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데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자기들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고, 나는 그들처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차이 때문에 델포이신전의 무녀가 내가 가장 지혜롭다고 말한 것이로구나!’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무엇인가 자기의 삶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아테네 시민들에게 찾아가서, ‘당신은 실지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것을, 신이 자기에게 준 사명으로 생각하고 무지(無知)에 대한 지(知)를 깨닫게 하기 위해 살다가, 결국은 그것에 불만을 느낀 사람들에 의해 사형되고 말지요.
소크라테스가 보고 있는 이 아테네 시민의 상태, 자기 삶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데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상태, 이게 바로 무지이고 어둠이고 죄악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게 되는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겁니다, 이 어둠과 무지가.
오늘 본문에 보면, ‘자녀가 되는 권세’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이 하나님의 권세의 구체적인 내용이 뭘까요?
그냥 내가 ‘하나님의 자녀다, 하나님의 자녀다’ 떠들고 다닐 게 아니라, 진짜 하나님의 자녀라면 권세가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대체 이 권세가 어디서 어떻게 표현되어지는 겁니까? 그 내용이 뭐에요?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됨이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자, 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가 바로 밝을 명(明)자의 권세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은 돈 문제가 주어졌을 때, 돈을 벌어서 돈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결합니까?
돈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돈 문제를 해결하는 거예요.
근데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 겁니까?
오늘 본문에도,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해요, 앞에서도 그랬죠? 주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세상에 되어 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그 이유가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하시려고 하는 모든 생각을 예수님께 넣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하나님아버지가 같이, 그러니까 비유적으로 얘기하자면, 하나님의 생각이 내용이 된다면 그 내용의 표현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겁니다.
Content와 Expression.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 우리가 듣고 있는 말 속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 하나님아버지가 갖고 계신 거라고 한다면, 그 내용의 표현은 주님께서 갖고 계신 겁니다.
그러니까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셨다고 할 때 예수님을 통해 지어진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지요.
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돈을 생각하시고 예수님께서 돈이라는 걸 이 땅에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지는 게 자녀의 권세가 아닙니다.
하나님아버지가 돈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돈에 대해서 하나님아버지가 갖고 계신 생각이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은 무엇이다, 라고 하는 하나님아버지의 느낌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느낌이 그대로 내 마음속에 전달되어 온다는 얘깁니다.
창조주가 갖고 있는 돈에 대한 느낌이 내 마음의 느낌으로, 창조주아버지가 갖고 계신 돈의 정체에 대한 파악이 내 마음에 파악되어질 때, 돈이 문제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이 권세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초대교회에서 유무상통으로 나타납니다.
이 권세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로는 돈 버는 일에 대해 생각하지를 않게 됩니다.
이 권세가 어떻게 나타나느냐? 바리새인들이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했는데, 사도바울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도바울이 돈을 좋아했던 것이 너무 부끄러워서 뭐라고 얘기하는가 하면, 마음속으로 돈을 빨아들여서 마음속에 돈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 돈을 배설물처럼 여겨서 배출시켜버리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권세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돈에 대해 쩔쩔매고 부들부들 떨며 무서워하고 있는데, 창조주가 돈을 만드셨을 때 ‘돈이 어떤 것이다’라고 정한 그 창조주의 생각을 갖게 됩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자녀 됨의 권세라는 겁니다, 이게 권세라는 거예요.
돈을 벌어서 해결하는 게 아니라, 돈을 알아서 돈 문제가 사라져버리는 겁니다.
죽음이라는 게 두렵습니다.
그렇잖아요? 죽음이 두려워요.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기 바로 전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이제 우리는 다 떠나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나는 사형을 받아 죽음의 길로 떠나고, 여러분은 다시 여러분의 삶의 터전으로 살기 위해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도 모릅니다. 죽음을 향해 가는 나의 앞에 놓여 진 것이 더 행복하고 좋은 것인지, 삶을 향해 가는 여러분 앞에 놓여 져 있는 게 더 좋고 행복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오직 신만이 아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고 최후의 변론을 마치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훌륭한 것이에요, 모르는 거예요.
왜 이렇게 오래 살고 싶어 발버둥 칩니까?
왜 이렇게 건강이 최고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저승보다 낫다, 이런 말들을 하는 겁니까?
왜 극락이다, 윤회다, 이런 추측성의 발언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몰라서, 몰라서. 모르니까 무서워서.
모든 사람이 이 육체가 죽는 것을 무서워할 때, 하나님 자녀 되는 권세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하나님자녀 됨의 권세는 건강관리를 잘하고 질병을 기적적으로 고치고, 오래오래 산다고 해서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서른세 살에 죽어도, 박해 받아서 마흔 살에 죽어도, 비참하게 불에 타죽어도, 이 육체를 창조하실 때 창조주께서 아버지가 되셔서 창조하실 때 육체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아버지의 생각과 앎, 아버지가 육체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그 내용이 전달되면서, 죽음이란 것 자체가 무서워할 것이 아니고, 죽음 이후에 더 좋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게 바로 자녀 됨의 권세라는 얘깁니다.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삶을 향해서 나가고 있지만 삶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돈을 벌어야 되는 줄 알고, 건강을 지켜서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줄 알고, 세상 사람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따라 형통이 좋은 줄 알고 발버둥 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의 권세가 어떻게 나타납니까?
밝을 명(明)자의 권세로 나타나는 겁니다.
주님을 받아들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갖고 계신 contents, 모든 이 세상에 대한 내용들 concept, 개념들이 주님 안에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받아들일 때, 주님에게 당신의 contents, concept을 그대로 알려주셨던 이유는 다 독생자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무한테나 다 알려주시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에 인간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있지만, 지구상에 태어난 인간 앞으로 태어날 인간 모두 합쳐서 하나님께서 아들로 생각하는 분은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예수님만 아들로 여기시고, 예수님에게만 당신의 모든 생각을 알려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에서 잃어버리자마자, 독생자이신 예수님에게 보내고 있는 하나님아버지의 모든 사랑으로부터 제외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그 다음에 예수님과 따로 독립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이 세상 끝날 때까지 예수님에게만 아버지로서의 모든 것을 보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한번 ‘영접했습니다!’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끊임없이 예수님께로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 16절에 뭐라고 하십니까?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 장대를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저를 믿으면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는 겁니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 마음을 보내면 왜 자녀가 되는 권세가 생깁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만, 이 지구상에서 오직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에게만 하나님은 창조주요 섭리주가 아니고, 아버지로서 모든 것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자리에 마음을 보낼 때,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독생자라서 보내고 있는 아버지의 모든 사랑이 덩달아 내 것으로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마음에서 잊어버리고, 십자가를 떠나 내 마음이 사업장으로 갈 때도 하나님은, 오직 사업장에 있는 나에게 아버지의 아들로 사랑을 보내고 계시는 게 아니라, 여전히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께만 사랑을 보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업장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밝을 명(明)자의 권세를 가지고 사업을 하려면, 사업장에서도 한순간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잊지 말라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이 지구 전체 중에 오직 아들로서 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주의 사랑이 있고 섭리주의 사랑 절대주권자로서의 사랑이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로서 주는 사랑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향해서만 가고 있기 때문에.
덩달아서 우리가 독생자이신 예수님께 주는 사랑을 받으려면, 마음에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이렇게 십자가의 예수님을 잊어버리지 않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는 고백이 영접하는 것이고, 이 마음속에 주님을 모셔 들이는 것이 지속될 때, 그 십자가의 주님, 독생자를 향하여 주시는 아버지로서의 모든 사랑이 덩달아 내 것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덩달아 내 것이 될 때 나타나는 일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내 사업장에서 사업에 대해 갖고 계신 그 생각이 알려집니다.
내가 하는 이 사업이 창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떤 거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지구상에서 문제가 되는 게 무엇이겠습니까?
내 자식을 기른다, 창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 내 자식에게 창조주가 느끼는 문제가 뭐겠어요?
그 자식의 지혜, 능력, 모든 것을 다 지으신 분인데, 창조주가 느끼는 문제가 뭐겠어요?
없어요.
그런데 그 창조주가 내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실 때 내 아버지가 되십니다.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은 내 자식과 내 사업과 내가 접하는 모든 것에 대해 창조주로서 갖고 계신 본래의 생각을 자식이기 때문에 다 내 마음속에 깨닫게 넣어주신다는 거예요.
밝을 명(明)자가 온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아버지가 갖고 계신 마음의 그 생각이 내게 빛으로 올 때, 그 하나님의 생각이 빛이죠, 밝을 명(明)자가 올 때 나타나는 그 권세는 기적을 행하고 능력을 행하고 방언을 행하고 예언을 행하는 이런 능력과는 다른 거예요.
이건 상대가 안 되는 것이고 비교가 안 되는 겁니다.
아, 생각만 해도 미쳐버릴 것이에요.
밝을 명(明)자의 권세를 가지고 한번 나가보세요!
갑자기 이 추운 겨울 같았던 모든 문제들이 봄바람에 눈 녹듯이 다~ 사라져버리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것이고, 그때 밝을 명(明)자로써 하나님아버지께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가 알려지면 그대로 하면 될 겁니다.
문제가 없는 세상에서 사명만을 갖고 살아갈 때 충만한 삶이 나타날 것이라고 다음 부분에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직 십자가의 주님에게만 지금 이 지구상에서 유일한 포인트로서 주어지고 있는 아버지로서의 그 모든 사랑이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임으로써 덩달아서 우리의 것이 되고, 그럼으로써 밝을 명(明)자의 자녀 됨의 권세를 가지고 오늘 하루를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