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023] 백거이(白居易)시 秋遊(추유)
秋遊(추유) - 가을놀이
백거이(白居易,772-846,唐 詩人)
下馬閒行伊水頭(하마한행이수두)
: 말에서 내려 한가히 이수 가를 걸으니
涼風淸景勝春遊(량풍청경승춘유)
: 서늘한 바람 맑은 경치가 봄나들이 보다 좋아라.
何事古今詩句裏(하사고금시구리)
: 무슨 일로 고금에 시구 안에는
不多說著洛陽秋(부다설저낙양추)
: 낙양의 가을을 논하여 적은 글이 많지 않았을까.
*(行=갈행. 伊=저이. 著=지을저.)
백거이의 자는 낙천(樂天)이며,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또는 취음선생(醉吟先生)이다.
그는 낙양 부근 신정(新鄭)의 하층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과 숙부들은 모두 관직 생활을 했으나 그가 태어날 즈음에는
가세가 기울어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하는데,
태어난 지 6개월 만에 ‘갈 지(之)’ 자와 ‘없을 무(無)’ 자 두 자를 구분할 수 있었고,
다섯 살에는 시 짓는 방법을 배웠다고 전한다.
또한 그는 열여섯 살 무렵 이미 시로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백거이는 지방의 하층 사대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출세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합격해야만 했다. 755년에 일어난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기존의 계층 구조가 흔들려 당나라 중기에는 하층 사대부들도
과거를 통해서 중앙의 고위 관리로 등용될 수 있었다.
이에 선주(宣州)의 지방시험에서 합격한 백거이도 수도 장안에 가서
과거를 준비했다.
800년 스물아홉 살의 백거이는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여 진사가 되었고,
803년 비서성 교서랑에 임명되었다. 그는 동료 원진(元縝)과 함께 당시
정세를 진단하고, 각종 폐단들을 고해 올렸다. 또한 민생 안정을 위해
감세 정책과 극형 폐지 등을 주장했으나 권세가들의 반감을 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교서랑의 임기를 마친 백거이는 806년 장안에서 가까운 현의 현위로 파견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당시의 유명한 처사 진홍(陳鴻), 왕질부(王質夫)와 친분을 쌓고
그들과 함께 마외파를 유람하고, 양귀비의 묘를 찾았다.
백거이는 왕질부의 제의로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담은 장편시 〈장한가〉를 썼다.
808년 백거이는 조정의 부름을 받아 황제에게 직접 간언할 수 있는 좌습유에 임명되었다. 비록 높은 관직은 아니었으나 그는 황제에게 위민 정책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직접 진언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시대의 병폐를 지적하고
황제와 관리들의 잘못을 직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시들을 지었다.
그러나 이런 개혁적인 정치적 성향과 비판적 견해는 권문세가들의 미움을 샀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불편함을 느꼈던 당 현종은 결국 그를 경조부의 호조참군으로
강등시켰다. 811년 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812년 딸까지 병으로 죽자
그는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