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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세 휘 문인갑(文仁甲)◈ 생년 : 1923,7,11 졸년 : 2008,2,17 시대 : 일제 강점기~대한민국 활동분야 : 애국지사
[상세내용] 문인갑(文仁甲)에 대하여 1923년 7월 11일~2008년 2월 17일. 일제 강점기 애국지사. 본적과 출생지는 경상남도 동래군(東萊郡: 현 부산광역시)이다. 부인은 오남식이다. 1941년 12월 동래고등보통학교(東萊高等普通學校)에 재학하 든 중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에 가입하여 농민 지도 등의 일을 담당 하였다. 또한 탄약고 폭파 등을 거사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시행하지 못하였다. 이후 1944년 8월 조선독립당의 조직이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일본 경찰에 체포 된 뒤 부산형무소에서 1년 동안 수감되던 중 1945년 광복되자 석방되었다. 1982년 대통령표창을 받았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2008년 향년 85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참고문헌] 뉴시스(2008. 02. 18) 세계일보(2008. 02. 29) 26세 판서공파 인갑(仁甲) 1923. 7.11~ 부산 동래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 판도판서공파 25세 영택(榮澤)님과 경주박씨의 4남(막내)으로 1923년 출생 자녀 는 아들 무형(武亨) 손자 봉성(鳳晟) 동래중학교 재학 중 1941년 겨울에 항일학생조직인 조선독립당(朝鮮獨立黨)에 가입하였다. 조선독립당은 동래중학생 김일규(金一圭), 양중모(梁仲模) 등이 앞서 1940년에 조직하였던 독서회를 강화, 개편한 것으로서 당원들은 조국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였다. 1942년 봄에 이들은 남기명(南基明)의 집에서 2차 회합을 갖고 강령을 정하는 한편 항일투쟁에 관한 구체적 방안을 세우며 본격적인 활동준비에 착수하였다. 이 때 그는 행동반으로서 농민지도 및 국내조사 등의 일을 맡았다. 그 후 당원들은 여러차례 비밀회합을 거듭하면서 행동방략을 협의하다가, 1943년 졸업과 동시에 실제행동을 개시하였으며 당원간의 연락은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암호를 취하도록 하였다. 1944년 8월 1일에 동 당원들은 양중모의 집에 모여 그 동안의 활동을 정리, 분석하고 군사기밀 탐지·일군 탄약고 폭파·군용열차 통과 시 구포(龜浦)다리 폭파 등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약 거사가 실패할 경우에는 일군에 입대한 후 연합군 진영으로 탈출하여 중국에서 다시 만난다는 대비책도 세워 놓았다. 한편 조선독립당은 항일결사 자일회(紫一會),순국당(殉國黨)등과도 연락을 통하면서 항일투쟁을 광범위하게 전개하고자 했다. 특히 순국당은 1944년 5월 결성 때부터 조선독립당원 이관수(李觀洙)가 그 조직을 지도하였기 때문에 조선독립당과 행동내용, 조직 등이 거의 같았을 뿐 아니라 조선독립당의 세포당 역할을 하였다. 그런데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전, 1944년 7월에 순국당의 조직이 일경에 탄로가 나게 되어 동년 8월에 조선독립당의 조직도 발각되었으며 이로 인 하여 그도 당원들과 함께 일경에 피체되었다. 피체 후 미결수로 부산형무소에서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註 : 부산교도소장 발행 수감자명부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15·816면
◈17세 휘 문헌징(文獻徵◈) 생년 : 1631(인조 9) 졸년 : ?(미상) 시대 : 조선 중기 본관 : 남평(南平) 활동분야 : 문신 > 문신
[관련정보] [문과]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6위(16/33)
[상세내용] 문헌징(文獻徵)에 대하여 1631년(인조 9)∼미상. 본관은 남평(南平). 증조부는 문검(文儉), 조부는 문유장(文有章), 부는 문사청(文士淸)이다. 통덕랑(通德郞)으로 있으면서 1669년(현종 10)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6위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1671년(현종 12)가주서(假注書)‧중학훈도(中學訓導)를 거쳐 1675년(숙종 1) 에 하양현감(河陽縣監), 1681년(숙종 7)에 유곡찰방(幽谷察訪), 1683년(숙종 9)에 봉상주부(奉常主簿), 1684년(숙종 10)에 예조정랑(禮曹正郞)과 낭청 (郞廳) 등을 지냈다.
[참고문헌] 朝鮮王朝實錄 承政院日記 國朝文科榜目
◈3세 휘 문극겸(文克謙)◈ [상세정보] 자 덕병(德柄) 시호 충숙(忠肅) 생년 1122(예종 17) 졸년 1189(명종 19) 시대 고려 중기 본관 남평(南平) 활동분야 문신 > 문신 부 문공유(文公裕)
[관련정보] [고려문과] 의종(毅宗) 12년(1158) 무인(戊寅) 무인방(戊寅榜) 을과(乙科) 3위(3/27)
[상세내용] 문극겸(文克謙)에 대하여 1122년(예종 17)∼1189년(명종 19). 고려 중기의 문신. 본관은 남평 (南平). 자는 덕병(德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집현전대학사 경정공(敬靖公) 문공유 (文公裕)의 아들이다. 큰아버지 문공인(文公仁)의 음보(蔭補)로 산정도감판관(删定都監判官) 이 된 뒤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의종 때 급제 하였다. 누천(累遷)하여 좌정언(左正言)이 되어서 위복(威福)을 자행하던 환자 (宦者) 백선연(白善淵)과 탐욕을 일삼던 술인(術人) 영의(榮儀) 등을 탄핵하다가 황주판관으로 좌천되었다. 이때 왕 측근자의 모함으로 다시 진주판관으로 좌천되려다가 “직신(直臣) 을 외관(外官)으로 좌천하는 것은 언로(言路)를 막는 것”이라는 유사(有司) 의 상주(上奏)로 안으로 들어와 각문지후(閣門祗候)가 되었고 다시 전중 내급사(殿中內給事)가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죽음을 당할 뻔 하였으나 앞서 좌정언 으로 있을 때 백선연 등의 비행을 탄핵하여 좌천된 것이 직신으로 알려져 화를 면하였으며, 의종이 거제도로 추방될 때 문극겸의 말을 따르지 않았음을 후회 하였다고 한다.
그해 명종이 즉위하자 이의방(李義方)의 추천으로 우승선(右承宣)‧어사중승 (御史中丞)이 되어 이공승(李公升) 등 많은 문신들의 화를 면하게 하였다. 무신들에 대하여 고사(故事)의 자문에 응하였으며, 뒤이어 용호군대장군 (龍虎軍大將軍)을 겸하였고 뒤 그 재상이 된 뒤에도 상장군을 겸하여 무신정권 기에 문신으로 문무를 겸하는 독특한 존재가 되었다. 딸을 이의방의 아우 이린 (李璘)에게 출가시켰으며 이 때문에 계사의 난에 일족이 다 화를 면하였다. 다시 대부소경(大府少卿)에 이어 예부시랑이 되었으며, 1173년 예부시랑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최시행(崔時幸) 등 진사 32인을 뽑았다. 뒤에 추밀원사가 되었는데, 1179년(명종 9)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 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좌천되었다. 1180년 태자소사(太子少師)가 되었고, 이듬해 수대위(守大尉)가 되었으며, 1183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고, 이듬해 참지정사(參知政事)로 지공거가 되어 금극의(琴克儀) 등 진사 31인과 명경(明經) 5인을 선발하였다. 1185년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어 아상(亞相)이 되었으며, 다시 수국사 (修國史)‧판병부사(判兵部事) 등을 거쳐 1187년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 書吏部事)가 되었다. 명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4세 휘 문유필(文惟弼)◈ [상세정보] 생년 ?(미상) 졸년 1228(고종 15) 시대 고려 중기 본관 남평(南平) 활동분야 문신 > 문신
[상세내용] 문유필(文惟弼)에 대하여 미상∼1228년(고종 15). 고려 무인집권기의 문신‧재상. 본관은 남평(南平). 할아버지는 의종 때 지문하성사 집현전대학사(知門下省事集賢殿大學士)를 지낸 공유(公裕)이고, 부친은 명종 때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를 지낸 극겸(克謙)이다. 벼슬에 나아간 시기와 방법은 확인되지 않으며, 1216년(고종 3) 추밀원사(樞密院使)로서 이미 재추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1220년 독직사건(瀆職事件)에 관계되어 안서부사(安西副使)로 좌천되었으나, 다음해 곧 수사공 좌복야(守司空左僕射)로 승진하였다. 그뒤 순탄한 관로를 밟아 1222년 지문하성사, 1227년 참지정사 판예부사 (參知政事判禮部事)가 되었으며, 다음해 지문하성사로 있다가 죽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2세 휘 문공유 [文公裕]◈ 이칭별칭 : 자 항적(亢迪), 시호 경정(敬靖) 유형 : 인물 시대 : 고려 출생-사망 : 미상 ~ 1159년(의종 13) 성격 : 문신 성별 : 남 본관 : 남평(南平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저서(작품) : 묘향산보현사창사비명 대표관직(경력) : 직문하성, 충주목부사, 예부상서, 병부상서
개설 본관은 남평(南平). 개명(改名)은 고수(顧壽), 자는 항적(亢迪). 우산기 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의 아들이고, 공인(公仁)·공원(公元)과 조계종 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의 동생이다. 김국진(金國珍)·민수(閔脩) 김원석(金元碩)·김장(金璋) 등은 매제이다. 한안인(韓安仁)의 사위로 극겸 (克謙)·극순(克純)·극이(克易)는 아들이다. 1104년(숙종 9) 한림학사 정문(鄭文) 주관하의 남성시(南省試)에 합격하고, 1112년(예종 7) 오연총(吳延寵)·임언(林彦) 주관하의 문과에 급제하였다.
생애와 활동 인종의 즉위 후 이자겸(李資謙)이 집권하자, 그와 맞섰던 장인 한안인이 죽게 되었으며, 합문지후(閤門祗候)였던 그는 형인공인정극영(鄭克永)· 이영(李永)· 임원준(任元濬 형인공인정극영(鄭克永)·이영(李永)·임원준 (任元濬)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이자겸이 몰락한 뒤, 1127년(인종 5) 합문지후에 복직되고, 1129년 금 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33년 형인 공인과는 대조적으로 시어사로서 직문하성(直門下省) 이중(李仲)과 함께, 묘청과 백수한(白壽翰)을 성인(聖人)으로 삼고 천거한 근신(近臣)김안(金安)· 정지상(鄭知常)·이중부(李仲孚)와 환자(宦者) 유개 (庾開) 및 이들을 추종한 대신들 을 배척하라고 요청하였다가 충주목부사로 좌천되었다. 묘청의 난이 진압된 뒤 충의(忠義)로서 탁용되어 호부낭중 동궁시독사 지제고 (戶部郎中東宮侍讀事知制誥)가 되었다. 1147년(의종 1) 지어사대사 로서 우정언 정지원(鄭知源)과 함께 시사(時事)를 간언하였다. 1148년 서북면병마사 시우산기상시(西北面兵馬使試右散騎常侍), 1149년 보문각학사 시형부상서(寶文閣學士試刑部尙書), 1150년 예부상서, 1152년 형부상서·병부상서를 역임하였다.
저술활동 글씨에 능했으며, 주로 문한직을 역임하였다. 작품으로는 「묘향산 보현사창사비명 妙香山普賢寺創寺碑銘」과 음기(陰記)가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경정(敬靖)이다. 묘향산 보현사 비문 / 문공유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한국금석문추보(韓國金石文追補)』 (이난영 편, 아세아문화사, 1976) 「고려전기(高麗前期)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신분문제(身分問題)」 (박용운,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21·22합집, 1979) 「고려시대토성연구(高麗時代土姓硏究)」상(이수건, 『아세아학보(亞細亞學報)』 12, 1976)
◈2세 휘 문공인 [ 文公仁 ]◈ 이칭별칭 시호 충의(忠懿) 유형 ;인물 시대 ; 고려 출생-사망 ; 미상 ~ 1137년(인종 15) 성격 ; 문신 성별 ; 남 본관 ; 남평(南平 : 지금의 전라남도 나주)
생애와 활동사항 상훈과 추모
정의 ?∼1137(인종 15). 고려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남평(南平). 초명은 공미(公美).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낸 익(翼)의 맏아들로, 공원(公元)과 조계종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 공유(公裕)의 형이다. 김국진(金國珍)·민수(閔脩)·김원석(金元碩)·김장 (金璋)은 매제(妹弟)들이다. 한안인(韓安仁)과는 사돈지간이며 이자겸 (李資謙)과는 동서지간이다. 생애와 활동사항집이 한미했으나 문과에 급제해 직한림원(直翰林院)이 되고 권문(權門)의 사위로서 호사하였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으로 사신이 되어 요나라에 갔을 때에는 사사로이 진귀한 물건을 선물해 물의 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115년(예종 10) 호부시랑(戶部侍郞)으로 이부상 서왕자지(王字之)와 함께 송나라에 사은사로 가서는 진사(進士) 김단 (金端)·견유지(甄惟厎)·조석(趙奭)· 강취정(姜就正)·권적(權適) 등을 태학(太學)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듬해 귀국해 우부승선(右副承宣)이 되고, 1117년 전중소감우승선 겸 태자우찬선(殿中少監右承宣兼太子右贊善), 1122년 예빈소경추밀원지 주사 (禮賓少卿樞密院知奏事)를 지냈다. 그 해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추밀원부사가 되었다. 한안인을 중심으로 이영(李永)·정극영(鄭克永) 등과 함께 이자겸을 반대하다가 최사전(崔思全)의 참소로 유배되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몰락하자 이듬해 이부상서가 되고, 예부상서 지제고 동지추밀원사(禮部尙書知制誥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1128년에는 지공거가 되어 이원철(李元哲) 등을 시취(試取: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는 것)하였다. 한편 이중부(李仲孚)·임경제(林京濟)·김안(金安) 등과 더불어 서경천도(西京遷都) 주장에 동조하였다. 동생인 공유가 묘청 (妙淸)을 극력 반대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지상 (鄭知常)과 함께 묘청을 성인(聖人)이라 추앙하였다. 그리고 묘청에게 국가사(國家 事)를 자문하게 하라는 상소까지 올렸다. 그러나 김부식(金富軾)·임원애(任元敳)·이지저(李之氐) 등 소수의 반대에 부딪혔다. 1129년 이부상서 지문하성사(吏部尙書知門下省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그리고 이듬해 검교사공중서시랑평장사(檢校司空中書侍郎平章事)가 되었다. 1132년 내시인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중부와 더불어 어의(御衣)를 받들고 서경에 가서 묘청이 만들어 낸 법사(法事)를 행하였다. 그리고 다음해 판상 서병부사 감수국사(判尙書兵部事監修國史)가 되었다. 1135년 서경에서 묘청의 난을 진압하던 김부식이 난에 가담했다가 항복한 윤첨(尹瞻)을 관대하게 대우하도록 요청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문공인은 한유충(韓惟忠) 등과 더불어 이에 반대하고 윤첨을 옥에 가두게 함으로써 서경인들이 재차 반란을 일으키는 결과를 초래시켰다. 뒤에 좌상시(左常 侍)이중(李仲)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이지저가 묘청을 추앙한 대신을 처형 하라는 소를 올리자 그 이듬해 간관(諫官)들의 탄핵을 받아 수태위 판국자 감사(守太尉判國子監事)로 좌천되었다. 상훈과 추모시호는 충의(忠懿)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전기(高麗前期)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신분문제(身分問題)」 (박용운, 『한국사연구』21·22합집, 1979) 「고려시대토성연구(高麗時代土姓硏究) 상(上)」(이수건,『아세아학보』 12, 1976)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08, 한국학중앙연구원
◈2세 휘 문공원 [ 文公元 ]◈ 이칭별칭 ; 시호 정경(貞敬) 유형 ; 인물 시대 ; 고려 출생-사망 ; 1084년(선종 1) ~ 1156년(의종 10) 성격 ; 문신 성별 ;남 본관 ; 남평(南平) 대표관직(경력)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 수사공, 서경유수사 문하시랑동평장사
정의 1084(선종 1)∼1156(의종 10). 고려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남평(南平).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익(翼)의 아들이며, 이자연 (李子淵)의 아들이자 이자겸(李資謙)의 숙부인 의(?)의 사위이다. 공인 (公仁)의 아우이고, 조계종대선사(曹溪宗大禪師) 가관(可觀) 공유(公裕) 의 형이며, 최사추(崔思諏)ㆍ한안인(韓安仁)과는 사돈간이다. 내용아버지의 음서(蔭敍)로 기용되었다가 예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다. 인종 때 우정언지제고(右正言知制誥)에 발탁되고, 1130년(인종 8) 전중시 어사로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이주연(李周衍), 중승 임원준(任元濬), 잡단(雜端) 황보 양(皇甫讓), 시어사 고당유(高唐愈)와 함께 시폐(時弊)를 상소하였으나 2, 3사(事)만 받아들여졌다. 1135년 낭중으로 금나라에 가서 만수절(萬壽節)을 하례하였다. 1148년(의종 2)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어사대부지 추밀원사판삼사사(御史大夫知 樞密院事判三司事)가 되었다. 1150년 지공거를 역임하였으며 이어 참지정사에 올랐다. 1151년 판형부사(判刑部事)가 되었다. 이 해 대령후 경(大寧侯暻 : 의종의 동생)과 교결(交結)했다고 하여 내시낭중(內侍郎中) 정서 (鄭敍)를 탄핵하였다. 또한 대간을 무고한 천례 출신인 환관 정함 (鄭?)을 탄핵하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 판이부사(中書侍郎平章 事判吏部事)를 거쳐 수사공(守司空)이 되었다. 1152년 서경유수사 문하시랑동평장사(西京留守使門下侍郎同平章 事)에 올랐으나, 우간의 신숙(申淑)의 정함 탄핵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의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문공원묘지) 「고려전기(高麗前期)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신분문제(身分問題)」 (박용운, 『한국사연구(韓國史硏究)』 21·22합집, 1979) 「고려시대사성연구(高麗時代土姓硏究) 상(上)」(이수건, 『아세아학보(亞細亞學報)』 12, 1976)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2010, 한국학중앙연구원
◈9세 휘 문달한 [文達漢]◈ 유형 ; 인물 시대 : 고려 출생-사망 : 미상 ~ 1392년(공양왕 4) 성격 : 문신 성별 : 남 본관 : 남평(南平) 대표관직(경력) 문하평리, 찬성사, 삼사우사 목차정의 내용 정의?∼1392(공양왕 4).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평(南平). 찬성사 경(璟)의 아들이다. 우왕 때 대호군(大護軍) 이 되고,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때 추성익조공신(推誠翊祚功臣)이 되었으며,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거쳐 1388년(우왕 14) 문하평리 (門下評理)로서 양광경상도도체찰사(楊廣慶尙道都體察使)로 나갔다. 이때 왜구 1,000여명이 옥주(沃州)ㆍ보령(保寧) 등지를 함락, 개태사 (開泰寺)에 침입하는 등 계룡산일대를 노략질하자 왕안덕(王安德)ㆍ 도흥(都興)ㆍ김사혁(金斯革)ㆍ박수년(朴壽年) 등과 함께 이를 공격하여 공주 반룡사(盤龍寺)에서 대파하였다. 뒤에 우왕이 원중포(元中浦)에 갈 때 한 물가에 이르러, 말을 탄 채 뛰어 건너려는 것을 만류하였다가 비위를 거슬려 삭직되었다. 오랫동안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다가 최영(崔瑩) 등의 노력으로 복직, 다시 문하평리가 되어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輔祚功臣)의 호를 받고 찬성사에 올랐다. 그 뒤 탐학이 심하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합포(合浦)ㆍ철원 등지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나 삼사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공양왕의 즉위초 이림(李琳)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다시 유배되었다. 그뒤 풀려나 1392년 순평군(順平君)에 봉하여졌다. 김제의 저산서원(楮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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