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무 없는 세상의 나무
1. 고원에서
정재분
고원은 내게 막연부지이다. 무엇 하나 구체적인 것이라고는 없어서 마음껏 그리워할 수 있는 곳이다. 땅이 치솟아 하늘에 가까우니 장대를 들어 올리면 뜬구름 귀퉁이에라도 가닿지 않을까. 실처럼 풀리는 구름을 돌돌 말아서 솜사탕이라도 만들어 먹을라치면 한껏 가벼워져서 무구한 아이처럼 되지 않을까. 무슨 생각인가 떠오를라치면 어느새 구름 속에서 현시되었다가 사라지는 구름을 보며 불현듯 한 깨침으로 무릎을 치게 만드는 곳, 넘침도 모자람도 사라지는 곳, 너와 내가 야생노루처럼 뛰어다니다가 멈춰 서서 올려다보던 산기슭의 모과열매와 으름과 다래가 익어가는, 그 환희가 덧없음 속의 섬광이라 해도 순연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땅, 고원은 아주 먼 곳에 있어서 물 흐르듯이 그리움이 앞장서 간다. 악보에도 없는 노래를 부르면서 바람타고 간다.
부푼 내게 전언을 넣은 그 무엇이 바람결인가 꿈결인가.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전경은 구름을 뚫고 솟아오른 산봉우리들이 전설과 신화의 땅임을 알린다. 구름자락이 미처 감추지 못한 바짝 마른 황색 구릉이 언제부터인지 저렇게 붙박여 있었을 것이다. 고요와 쏟아지는 햇빛 아래 움직임이 드문드문 포착된다. 아, 사람들이다. 발 빠른 바람이 한 올 습기를 마저 말려도 아이는 태어날 것이고 부풀어 오른 것들이 또다시 꾸들꾸들 말라갈 것이다. 그네들 틈에 있는 동안에 부스럭거리는 내 속내가 날숨에 섞여 나올라치면 귀 어둔 아부라카다브라라 할지라도 용케 알아듣고 무슨 비방이라도 귀띔해 주지 않으려나. 마음을 내려놓게 하는 평온 한 줌 얻어 갈 수 있으려나. 뜬금없게도 고원은 내게 줄거리는 잊어버리고 이미지만 어렴풋한 소설의 배경이다. 비스듬히 떨어지는 햇살이 풀쐐기마냥 따가워서 놀라다가도 어느새 아득해지고 곰삭아 흐물흐물해지는 곳, 분침이 조금씩 늦어지고 시침이 따라 늦어지는 별다른 근거 없이 8요일이 자라는 곳이다.
2. 알룽창포 강변의 자작나무
해발 삼천 오백 고지인 티벳의 수도 라싸에서 맞이하는 아침이다. 목욕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권유를 들었지만 쉬이 납득이 되지 않아 호기롭게 사워를 하고 일어난 둘째 날이다. 승합차는 얄룽창포강을 끼고 달린다. 창밖으로 내다본 풍경은 스크린이나 사진에서 보던 풍경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영상으로 보아오던 풍경은 서늘하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보는 사람살이는 영상으로 볼 때와 현저하게 다르다. 삶을 감내하는 모습은 그간의 감상을 삽시에 몰아낸다. 시시로 바뀌는 눈빛과 복색과 추위에 익은 발그레한 볼이 전하는 메시지는 고원의 햇살처럼 차고 따갑다. 검은 머리하며 노란 피부에 광대뼈까지, 생김새가 우리와 별반 다를 것이 없어서인지 모종의 안타까움이 줄곧 따라다닌다. 안타까움이라니, 어쩌면 지극히 실례가 될 기우이지 않은가. 5월임에도 날씨가 여행객에겐 너무나 차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일행의 옷을 얻어 겹쳐 입는다.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고 나의 부정맥과 피돌기가 서서히 느려진다.
해발 삼천오백 고지에서 흐르는 강은 영상과 다름없이 신비스럽다. 소용돌이가 이는 곳에서 수장이 행해진다는 몇 군데를 제외하면 강물의 유속은 느리다. 강물이 흐르기는 하되 바다로 유입될 것 같지가 않다. 이곳이 워낙 깊숙한 내륙이라서 바다에 닿기도 전에 증발하거나 목마른 목숨들과 초목의 목을 축인 나머지는 마른 땅으로 모조리 스며들 것 같다. 탁 트여서 호수처럼 보이는 강변 주위로 연둣빛이 감돈다. 강가에 뿌리내린 버드나무며 자작나무를 보니 여간 반가운 것이 아니다. 둥치라야 양손아귀에 들어올 정도에 불과하지만 여린 연둣빛 광휘를 쏟아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나무가 자라는 곳이라면 사람이 터전으로 삼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멀지 않은 곳에 버티고 있는 민둥산의 모래바람이 연둣빛 풍경을 신산스럽게 한다. 지리적 조건을 감당하며 봄의 소명을 수행하는 연둣빛이 무량 애잔하고 지평선을 가로막는 민둥산이 영화의 한 장면인 민머리 율 브린너의 왕권만치나 고압적이다. 거대한 절망을 표상하는 고봉밥처럼 한 가득 수북한 담황빛 민둥산을 나는 그저 묵묵히 바라본다. 독수리도 숨어버린 저 산 너머에 어쩌면 초월의 경지에 이른 사람만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조장이 행해지고 있을 것인가.
사람살이 따위엔 아랑곳없을, 그래서 인간을 더욱 조아리게 만드는 땅, 가장 높이 하늘로 솟아올라서 스스로 거룩해진 땅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은 가르쳐주는 이 하나 없이도 저절로 알았을 것이다. 이곳은 신들의 땅, 애초에 인간에겐 허락되지 않은 땅을 터전으로 삼았으니 어찌할 것인가. 대지의 초대를 받지 못하고 거류지로 삼았으니 적응하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일 터이다. 일찍 철난 아이처럼 어머니 품 같은 대지에게 투정 한 번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순응하는 것부터 배웠을 것이다. 사람에게 비우호적인 땅을 보면서 나는 전라도에서 자생한 곱씹을수록 맛이 나는 토속어를 떠올린다. ‘사람의 간을 본다.’라는 것인데 여기에는 생존을 위한 눈물겨운 전략이 숨어있다. 관찰하는 한 쪽이 상대를 가늠해 보고 상대가 여문지 무른지를 거의 동물적 감각으로 알고 취하는 본능적 태도를 일컫는다. 이 메마른 땅의 간을 본 사람들은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매일매일 마니차를 돌리고 소원을 읊조린다할지라도 그것은 남자의 젖꼭지처럼 무위한 배냇짓일 터이다. 욕망을 내려놓고 최소한의 조건에 자족하는 사람들은 참고 견딤으로써 이기는 자들이다. 인내를 전제한 내핍은 마침내 거대한 자연의 힘으로부터 묵인을 이끌어내고 자구적 평화에 이르렀을 것이다. 뿌리를 내린 그곳에서 순박한 웃음을 피워내는 그들이 나무 같다. 나무그늘을 찾아들듯이 전 세계 사람들이 히말라야 산줄기 티베트를 기웃거리는 것이 아닌가. 평균율을 훌쩍 웃도는 내세에 대한 집중력을 일면 흠모하는 상당수의 여행객들은 종교적 일상에 잠시 동안일망정 고무되거나 최소한 자기 성찰적 태도를 취한다. 그러나 나는 너무 잘 참아서 나를 꼼짝달싹 못하게 했던 당신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과정과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이기고야 마는 모든 종류의 인내심은 언제나 나를 좌절시킨다. 어쩌면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을 것인데 당신의 필요가 이런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내 자신이 마치 도시에서 유입된 바이러스 같다. 그런 자괴감을 읊조리며 쓴 졸시를 옮겨 적으려 한다.
수묵으로 그려놓은 바윗덩이인줄 알았습니다
언제부터 이러고 계셨습니까 포탈라 궁전 담벼락에
민들레가 피었습니다만 아직은 날이 찹니다 어여 들어가시지요
언 볼이 붉어 차라리 고운 당신
영상에선 잔인하리만치 아름답습니다
사진 속 설산은 수은주를 떨어뜨리지 못하지만
저는 못 견디게 춥습니다
마니차를 돌리며 무엇을 찾으십니까
수천 년간 내일을 찾아 저 설산을 넘는다 들었습니다만
차라리 오늘을 찾으심이 어떠실지요
이따금 내일은,
까치발로 서게 하고 팔짝팔짝 뛰게도 만듭니다만 닿으면 사라지는 신기루입니다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도마뱀입니다
탈주로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어머니
당신이 매번 참으시니 덩달아 참을 수밖에요
저는 차라리 차돌이 되고 싶습니다
우리 단단해져서 부싯돌로 맞부딪쳐 불씨 하나 피우는 건 어떨까요
프로메테우스처럼 불씨를 훔쳐 늘 똑같은 건 몽땅 불살라버릴까요
잘 꺾어지는 무릎을 납으로 용접 할까요
수천 년간 한결같으니 당신의 인고는 약초가 되겠습니다
사실 어디에서 왔는지 모를 여행객들은
당신의 광대뼈에 핀 실핏줄 연지와
자벌레처럼 땅 뼘 재는 당신을 보며 제 속병을 달랩니다만
어머니, 당신은 진통제십니다
세상의 병은 점점 억세고 약은 약속을 아주 잘 할 뿐입니다
식탁에 오르는 야채로 살고 싶습니다
바로바로 건사치 않으면 차라리 썩어버리는
참을성 없는 성질머리 고얀 채소로
(「도시 바이러스」 정재분)
어느새 승합차는 알룽창포강을 놓아주고 황막한 능선을 휘감아 오른다. 서두르지 않고 기어오른다. 황폐한 담황색 둔덕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것이 있다. 야크다! 풀을 뜯는 모양이다. 내게는 보이지 않는 풀이 야크에게는 보이는 것인가. 티벳탄과 야크를 보면서 사람이 넘볼 수 있는 땅의 지경을 풀이 자라는 곳까지라고 임의설정 했다가 슬그머니 물린다. 오십 보 백 보의 차이도 아니겠으나 야크가 사는 곳이면 인간에게 허락된 땅이라고 우기고 싶은 것이다.
야크와 티벳탄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다. 이들의 관계는 예전 우리네 모습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신은 끼니를 걸러도 쇠죽을 쑤어 외양간 식구에게 먹이던 일이 결코 오래 전 일이 아니다. 제 밥을 챙겨주는 주인을 그렁그렁한 큰 눈으로 바라보던 누렁 소는 야크가 그러하듯이 알고 있을까. 생명이 혼곤한 모순성을 기반으로 한다는 것을, 하여 서로를 연민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일까. 사람과 울안 짐승과의 오랜 교감으로 순응은 더욱 모질어져서 제 목숨을 거두려는 주인에게 유감을 갖지 않는 것일까. 한 때 제 목숨을 돌본 주인의 처분을 다만 슬퍼하는 것일까.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묵화」김종삼)
야크 또한 우정 갸륵하다. 이곳 사람들이 야크에의 의존도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리만치 밀접하다. 같은 공간에서 기식하며 함께 노동하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다. 사람들은 위층에서 야크는 아래층에서 기거하면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 터이다. 사람들은 야크의 젖을 먹고 남은 것으로 야크버터를 만들고 야크차를 만들어 마시고 그의 털을 잘라 모포를 만들어 추위를 막고 그의 똥을 맨손으로 주물러서 연료를 만든다. 그리고 불사라서 마침내 그의 고기를 구워먹는다. 누군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렇게 주는 것인가. 이 땅이 요구하는 것은 야크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표본을 내세우고 실물을 내세워 가르치는 것 같다. 사람과 동물이 무언의 소통을 이루고 거친 숨소리를 듣고 휘어진 등허리의 정도를 헤아리며 묵묵히 따르는 존재, 이 극단의 비이기적 존재방식이 전하는 메시지는 도무지 간단하지 않다. 야크와 인간! 모종의 보상 같은 야크가 없다면 이 땅의 막막함을 사람이 어찌 견딜 것인가.
3. 암드록쵸 가는 길
와, 암드록초다! 라는 탄성에 두리번거린다. 구불구불한 산등성이를 오르느라 멀미로 고생하던 일행들도 몸을 곧추어 일제히 창밖을 본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호수는 버스가 몇 번인가 방향을 바꾸어 오르기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감추기를 반복한다. 4,794미터 캄바라산 정상을 불과 300여 미터 앞 둔 지점에 암드록쵸는 와불처럼 누워있다. 버스에서 내려 호수가로 내려가니 시리도록 파란물빛이 비현실적으로 현시되어있다. 하늘빛을 빼닮다 못해 더더욱 푸른 암드록쵸는 ‘푸른 보석’ ‘선녀의 호수’라고 불린다. 애칭에 어울리게도 이 호수의 여신이 티벳 최초의 왕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일까 한눈에 드러나는 여타의 풍경과는 달리 암드록초는 여인네의 자태마냥 단번에 조망되기를 거부한다. 길이가 무려 180킬로인 암드록쵸는 땅에 발을 디딘 사람에게 모습 전체를 공개하지 않는다. 에메랄드빛 호수는 담황빛 완고함을 휘돌며 달래듯이 감싸는 모양이 요염하기까지 한다. 퉁명스러운 담황빛 무거움을 고즈넉이 담아내는 암드록쵸, 그 시린 물빛에 민둥산은 해가 지도록 빠져있다. 분노한 신들의 안식처라는 전언이 없을지라도 암드록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드는 것이다. 벽옥 빛 호수가 담황의 무거운 이마를 닦아주는 이곳은 물새와 철새의 보금자리이기도하다. 무리지은 새들의 군무를 볼 수는 없었으나 백로를 닮은 새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멀리감치에 있으면서도 새들은 이방인을 의식하는 것일까, 그들의 움직임이 자차분하다. 물가엔 먼저 다녀간 사람들이 쌓아놓은 돌무지가 한가롭고 호수 건너엔 4대 신산 중 하나라는 카로라(7200미터)산이 웅장하다. 상봉에 뒤덮인 만년설의 흰빛이, 암드록쵸의 옥빛이, 크고 작은 민둥산의 담황빛과 어우러져 마치 마티스의 색감을 연상시킨다. 보색대비와 완만한 곡선이 부드럽게 드리워진 단조로운 색의 조합이 무슨 환각지대로 들어선 듯이 아연해지는 것이다.
히말라야 산과 북쪽에 자리한 티베트고원은 바다가 융기하여 생성된 지대이다. 암드록쵸를 비롯하여 3대 호수로 꼽히는 남쵸, 마나사로바호수가 바닷물이 지상으로 솟구쳐 만들어진 호수이다. 바다가 융기된 지역을 가게 되면 물의 자의식을 상상하게 된다. 창세에 관한 기록에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나뉘고, 홍수 때에 궁창의 물 삼분의 일이 마저 쏟아졌다는 기록이 아니더라도 순환의 원리를 따르는 지상에 있는 상당량의 물이 궁창에서 한 때를 보내었음이다. 지상에 있게 된 바다가 하늘을 그리워할 것이라는 상상은 다반사이다. “수평선은 바다의 끝이 아니라/ 하늘과 바다의 데칼코마니/ 일 년 내내 마르지 않는 파란 물감 (봄 바다를 봄/ 제미정)라고 묘사한다.
바다가 하늘로 가고 싶었던 때는 바다의 자의식이 훌쩍 자란 이후였을 것이다. 먹구름이 자욱한 날이면 바다는 거부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바다의 출렁거림은 응축되고 가공할 만한 것이 되어 솟구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곳의 물이 동시다발적으로 꿈의 실현을 목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침내 여기저기에서 바다의 자의식들이 일제히 융기한 그날, 하늘에서는 번개가 번쩍거리고 엄청난 천둥소리에 폭풍이 휘몰아쳤을 것이다. 이 지상에서는 파도가 태산처럼 솟아오르고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불덩이들이 용솟음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한, 바다는 승천하지 못했음이 자명하다. 그중에 가장 높이 오른 X바다가 넘어진 곳이 히말라야 일대일 것이다. 가장 앞서서 그리고 가장 높이 솟아오른 히말라야는 ‘지구의 지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 절대고독으로 날마다 신성해지는 히말라야는 바람과 냉기류의 호위를 받으며 신비로워진다. 절망적 신비에 이끌린 사람들은 호시탐탐 오르기를 꿈꾸고 히말라야는 사람의 발걸음을 좀체 허락지 않는다.
세계 곳곳에서 바다의 유적이 발견되는데, 록키산맥이라든가 여타 군에 속하는 Y바다는 티베트고원처럼 높이 솟아오르지 못했다. 록키산의 최고봉, 롭슨 마운틴이 3954미터로 암드록쵸호수 보다 낮고 히말라야의 높이에 비해서 절반도 되지 않는다. 이는 인간에겐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다. 록키산맥이 많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것은 너무 높이 오르지 않아서이다. 록키산맥 일대에도 바위로 솟은 바다의 좌절된 꿈들이 적지 않다. 만장절애로, 담황의 침묵으로 솟아올랐으나 록키는 허리 아래로 짐승들과 초목과 인간들과 다정한 비경들을 품고 있다.
4. 의미에서 뒷모습 무의미
캄바라 산으로 갈 때 보았던 것인데 땅거미 지는 하산 길에도 여전히 시선을 사로잡는 것이 있다. 바로 사다리그림이 그것이다. 바위의 수직면이면 예외 없이 사다리 그림들이 들어차 있다. 흰색 페인트로 대충 그려진 것이 무슨 기호 같아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앞좌석의 누군가가 질문을 했다. 아마 재채기하듯 그렇게 질문이 튀어나왔을 것이다. 고산증세에다 멀미까지 겹쳐 잠잠하던 가이드가 목청을 가다듬는다. ‘죽은 영혼이 사다리를 밟고 하늘로 올라가라고 망자의 가족들이 그려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살게 되면 하늘에 대한 열망이 각별해 지는 것인가. 이곳은 하늘에 가고 싶은 바다와 하늘로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의 땅인가. 신을 닮아가는 사람들의 마을에서는 허설이란 없다. 그것은 곧 전설이며 신화로의 생명력을 갖는다.
사다리와 관련된 전설에 따르면, ‘오래전에 신과 인간 세상을 이어주는 사다리가 있었다고 한다. 인간들은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사다리를 이용해 하늘로 올라가 신에게 질문을 했고 신들도 가끔 인간 세상으로 내려오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늘 사다리가 끊기고 말았다. 신들은 인간에게 많은 지식을 선물했지만 인간들은 하늘나라를 너무 소란스럽게 만들고 지켜야 할 규칙들을 무시하고 자연까지 파괴해 인간에게 분노한 신들은 하늘로 이어진 사다리를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하지만 티베탄의 하늘로 가고자하는 염원은 사다리를 그리기에 이르렀다. 여행객의 주의를 끄는 사다리 그림은 망자가 밟고 하늘로 올라가는 통과제의의 기호인 셈이다.
바람에 나부끼는 오방색의 타르쵸가 곳곳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경구들이 타르쵸에 적혀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타르쵸가 바람에 날리는 소리를 들었으니, 그것은 바람이 경전을 읽고 가는 소리이며 동시에 바람이 읽어 주는 경전 소리를 듣는 것이다. 바람은 형이상학이다. 형체가 없으나 존재를 부정할 수 없으니 그러하다. 보이지 않으나 존재 하는 대상은 영이다. 영기(靈氣)인 바람은 나뭇잎을 흔들고 머리카락을 휘날린다. 살갗을 어르며 지나가는 바람의 손길이 있어서 바깥은 늘 유혹적일 것인가. 바람소리를 경전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구전의 방식이다. 서사적 방식으로의 한 양태가 현대문명의 한켠에 여전히 존속하고 있음을 확인시키는 셈이다. 그러나 바람이 전하는 경전은 언제나 목마르다. 그 결핍이 자기 귀결에 가닿는다. 본연이 드러나도록 만드는 것이다. 라이프니치의 단자 개념을 빌린다면 인과 관계에 의해서가 아닌 내적 원리에 의해 작용하는 것이다. 내적 원리에 기인한 것은 자기 충족적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속성에 입각해서 받아들일 수 있기에 그러하다. ‘네 자신이 부처’라거나 ‘양심’ ‘성향’과 같은 원형성에 봉사하는 언표들이 이를 수렴할 것이다. 듣고 보는 것 이전의, 의식의 절대적 직관으로 받아들인 경전은 자기충족적이다. 별다른 회의 없이 일상생활에 스며들어 의미들을 재생산한다.
그랬다. 문득 허구한 의미들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허망하기 이를 데 없던 무의미의 의미가 이 순간, 유용성을 획득하며 반짝거린다. 의미들에 봉사하고 의미들에 파괴되었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개인들이 무의미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일 터이다. 의미들과 불화하는 주체의 여정에서 반어적 무의미가 자기구제의 방편으로 고안되었을 것이다. 시대와 불화한 개인이 의미로부터 헐거워질 수 있는 대안으로 등극한 무의미는 의미의 대척점에서 의미의 난민보호소가 되어준다. 의미의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의미들로부터 보호받고자했던 노력들은 주요하며 여전히 난공불락일지 모른다. 그러나 의미에 비껴있는 주체에게 사회적 규범과 가치체계로 중무장한 의미들의 폭력은 가차 없다. 따라서 “추구할 수 없는 구원은 예술 속에서 부질없는 의미들을 내려놓는 것이다.” 라는 쇼펜하우어의 사유의 우산을 펼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