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교에 대한 몰 이해가 불러온 불편한 진실 >
글 : 김 강석 목사
기독교는 여타 종교와 다르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실체)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걸 보이는 세계로 설명을 해 놓았기 때문에 그걸 모르는 게 죽음의 상태이고 그게 죄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국어사전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학문적으로 분류하는 측면에서는 하나의 종교라고 세상이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타 종교와는 사실 전혀 차원이 다른 믿음이 반드시 전제되어서만이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기독교를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 받는 사람들이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여타의 다른 종교와 다를 바가 없는 하나의 종교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를 국어사전적인 타종교의 하나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국어사전에서 정의하고 있는 여타 다른 종교들처럼 종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타종교는 인간의 관점에서 신을 찾고 신을 달래고 그 결과물로 인간의 목적을 성취합니다.
그러나 그와 반면에 기독교는 인간이 신을 찾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불가항력적인 절대주권으로 인간을 찾아오셔서 자신을 계시하시고 믿게 만들어 버리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어서 이 세상의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하늘의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타 종교들이 추구하는 바와 완전히 다르단 말입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는 완전히 극과 극, 대척점에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본래 종교라는 건 인간들이 이 고난의 바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통과하면서 겪은 그 고난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자신의 소원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인간 측의 그 창작물인 선행체계(도덕과 윤리, 종교행위 등등) 중의 하나가 종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기독교에서만 경험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전혀 경험해 보지도 못하고, 배워 보지도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냥 기독교를 하나의 타 종교와 같은 부류의 종교로 분류하여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도 기독교를 고작 그 정도의 종교로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를 다니고 있는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에게조차 기독교가 다른 여타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저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소원성취를 이루고 병이나 고치고, 귀신이나 쫓아내고, 거기다가 하나 더 보태서 천국도 보장받는 그런 손해보험이나 생명보험 같은 그런 것으로 인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타 다른 종교가 이런 저런 물증을 갖다 대면서 우리가 맞다! 우리가 우월하다하고 디밀면 금방 흔들려 버리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인의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여타 종교와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원하고 요구하는 게 거의 일맥상통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이름만 달리 부르는 것뿐입니다. 알라나, 부처나, 통일교나, 신천지나 카톡릭인 천주교나 예수나 별반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러한 종교를 통하여 얻어 내고자 하는 것은 거의 대동소이 합니다. 그 꼭지점에서 결국은 다 만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데에서 뭔가 신빙성 있는 물증을 제시하면 거기로 혹! 하고 금방 흔들리는 게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의 신앙 수준인 것입니다. 그건 지금까지 기독교가 기독교에서 추구해야 할 바와 기독교에서 우리가 경험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가르치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올바로 해석된 말씀의 진의를 통하여서만 경험할 수 있는 그 신앙의 진수의 경험들을 오늘날 교회가 경험해 보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것들이 나오게 되면은 이리 흔들렸다 저리 흔들렸다 내가 진짜 제대로 믿고 있는 건 맞는가? 분명한 신앙의 확신이 서지 못하여 수시로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진짜 이단으로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허경영씨 한테도 빠지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그러나 기독교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 이 세상의 고난을 피해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런 저급한 종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들에게 주관적으로 직접 찾아오셔서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므로 말미암아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영생을 살게 되는 것인지를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며 그러한 영생이 과연 무엇이며, 그건 어떠한 상태이며, 영생의 조건은 무엇인지를 가르치시면서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게 기독교의 하나님의 자기계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역사와 우리의 인생을 통해서 왜 인간이 지고의 복인 그러한 영원한 영생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비워야 하는, 자기부인을 배우게 하시고, 그렇지 못할 때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되는지를 보여 주시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죄'라는 소품을 사용하여 성경전체적인 언약의 내용을 통전적으로, 다양성과 통일성을 갖고 구속사적으로 창세기 1장부터 시작하여 계시록에 이르기 까지 이제 설명을 해 가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그 죄를 해결하시고, 즉 어떻게 하나님이 그 불가능한 존재들을 가능함 속으로 인도하시는지 그걸 죄의 해결로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들에게 어떻게 영생을 주시는지를 설명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런 죄의 문제와 언약의 경륜에 따른 하나님 나라라는 기독교의 핵심 사상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욕심이나 채우는 데에 종교를 이용하려는 마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람들은 언제든지 다른 여타 종교로 이사를 하거나 교회를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니면 좀비처럼 교회를 자기유익의 재료로 삼아 사탄의 역할로 서든지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우주와 역사와 인생이라는 소품과 무대장치 속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은 무엇을 위해, 어떠한 상태로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가를 잘 배우고 하나님 나라로 입성을 하는, 그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적 자기계시입니다.
바꿔 말하면 여타의 종교가 추구하고 그런 것을 얻어내는, 그런 무당, 사이비가 아니란 말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 나라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나님 나라에 가서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것을 목적으로 이 땅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와 여러분은 저와 여러분이 갖고 있는 그 힘을 저와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쓰지 못하고 그동안 원수처럼 여겼던 그 이웃인 원수를 위해 쏟아 내어 주는 삶으로 자꾸 바보처럼 바뀌어 가는 자기애로부터 이웃으로 옮겨가는 것이 기독교 신자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래서 옛날 같았으면 저걸 그냥 확! 한 대 패줘! 근데 지금은 내가 그렇게 못하고 있단 말입니다. "에이 대충 그냥 이렇게 살지 뭐?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볼 땐 " 너는 왜 이렇게 바보가 됐어? " 라고 이야기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게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는 삶의 자리란 말입니다.
어떻게 하나님 말고 다른 존재가 자기를 위해서 쓰던 힘을 원수에게 돌려 그를 유익하게 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를 용서하고 어떻게 그를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잘 안되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내 안에 내주하여 믿음으로 나를 장악함으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그런 삶이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의 능력의 성품이 나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나타나고 드러나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우리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과 예수님의 이름이, 성품이 나타나게 되면 우리는 점점 비워지고 털리는 삶을 살게 되고, 죽은 흙덩어리, 티끌로, 거름더미, 배설물로, nothing 없음으로 폭로가 되고,
결국 세상에서의 그 옛 사람적 육적자아의 죽음으로 그 삶이 조금씩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걸 가리켜 우리의 육신이 죽는 다고 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주체가 바뀌는 삶으로 말입니다. 주체의 자리에서 본래의 피조물의 자리인 객체의 자리로 이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는 계속 죽고 죽고 죽고 또 죽다가 그 육적 자아인 그 옛 사람적 육적자아의 육신의 죽음으로 완전히 죽어감으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그리스도가 최종 승리를 하는 것입니다. 요3:30절에서 세례요한이 자신을 가리켜 나는 쇠하여야 하고 오실 예수가 흥해야 한다는 말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 육신이 죽는 순간, 나의 옛 사람적 육적 자아가 점점 소멸 됨으로 말미암아 나는 점점 쇠하여 십자가 뒤로 숨겨지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고, 그게 이 세상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승리하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이게 성경의 원리이고 이게 신앙생활의 원리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가 그리스도 안에서 최종승리, 승리의 절정이라면 저와 여러분의 삶은 어디로 수렴되야 되겠습니까? 계속 내 육적 자아가 죽는 쪽으로 수렴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니까...그래서 기독교는 여타 종교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점점 더 쇠하여 nothing이 되어지고 반면에 그분, 예수그리스도가 흥하는 삶으로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성품이 나를 통해서 가시적으로 드러나게 되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도 신자가 고지 꼭대기 올라가서 상을 타고, 말을 하고 박수를 친다고 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깐요?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함 받는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공격에 제대로 응전을 하지 못하는 자로 그렇게 점점 지어져 가게 되는데 그걸 성숙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굳이 신학적인 용어로 표현을 한다면 그게 성화, 성숙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화라는 말은 과거, 현재, 미래가 다 포함되어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 하나님의 능력이, 하나님의 강함이 신자인 우리를 감싸 안고 그 삶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고, 그 일을 위해 그리스도의 영, 성령이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령이 오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순교자가 되리라, 라고 이야기 하시는 것입니다. 근데도 다른 타 종교와 똑같은 목적을 갖고 있으니까 기독교가 그것들과 뭐가 다르냐?는 것입니다.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 이리로 갔다가 저리로 갔다가 언제든지 여길(교회를) 떠날 수도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게 오늘날 지상교회 안의 교인들의 실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뭐가 다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