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조 창작의 실제 〔시조시인 16인이 말하는 시조작법〕
■ 나의 시조 이렇게 썼다.
14․ 장편 서사시조의 시도 / 조주환
사할린의 민들레
1. 백두(白頭), 고을물이/ 하늘에 닿아 굽이트던
그날 그 징소리가/ 낙화(落花)로 와 뚝뚝 질 땐
천 길 늪 말굽을 젖히고/ 송이, 떨기 뿜더니,
2. 동해 한 굽이/ 피무늬로 뜨던 그날
찢겨 간 생가지가/ 탄가루에 삭아 떨다
야윈 손 허공에 담군 채/ 꽃대궁만 외로 섰다.
오호츠크 해류에 뜬/ 생채기만 그냥 남아
무명, 흰 옷섶엔/ 이가 누런 사투리들
멍 박힌 씨앗은 벌어/ 갯벌 허허 날고 있다.
3. 누이야, 네 넋이 떨/ 북간도 별빛을 찾아
황토빛 풀씨 하나/ 죽지 떨며 헤어가다
시방도 길섶에 떨어져/ 혼꽃으로 피고 있다.
4. 살아, 단 한 번/ 내 핏줄은 만나고 싶다.
고독이 뼈에 닿아/ 먹빛으로 떨구는
그 목숨 통한(痛恨)의 목청이/ 허공에 떠 울먹인다.
5. 보신각 쇠북에 깬/ 갈숲 먼 산자락엔
긴긴 밤 해류를 건너/ 성묘로 온 메아리에
도래솔 고목이 울어/ 선산(先山)을 죄 흔든다.
6. 북위 오십도 밖/ 뼈에 밴 아픔을 털며
절룩여 헤어와도/ 생살이 터 목맨 강물
칠흑길 어둠을 빠갤/ 쇠북이여 울거라
이 작품을 처음 시작한 1980년대 초 한반도 남녘에서 바라본 북위 50도 밖의 사할린은
동서 냉전으로 인해 닿을 수 없는 섬으로, 칠흑의 얼부푼 이념의 빙벽으로 싸여 오고갈
수 있는 길이 없었음은 물론, 단 한 점의 소식도 들을 수 없는 땅이었다.
그 누가 빙벽이 녹아 오고갈 수 있는 길이 트이리라 짐작이나 했으랴.
작품을 처음 시작한 뒤 6․7년간 이 한편을 붙들고 씨름하는 동안에 체력이 달려 비틀
대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칠흑의 빙벽에 갇혀 뼈에 닿도록 육친을 그리며 서늘히 떨고
있을 사할린의 서느런 핏줄들을 떠올리며 스스로 몸을 가누고 채찍질해 왔다.
사할린의 민들레!
그들은 참담했던 우리 민족사의 한 부분인 일제치하에서 끊일 듯 모진 목숨을 이어가던
이 땅의 소작농, 화전민, 날품꾼 등 대부분 밟히고 짓밟히던 핏줄들로, 징용이란 일제의
사람 사냥의 덫에 걸려 생가지 찢기듯 끌려가 지상 최악의 땅이란 천 길 탄광의 막장에
서 갖은 고통을 당하며 더러는 오호츠크해 물굽이 위나 그 툰드라의 허공에 외마디 비
명을 떨구며 숨져갔고, 살아 목숨이 붙은 사람도 시신같은 눈시울로 종전을 맞았으나,
다시 소련군의 점령으로 칠흑 속에 떨어져 오직 귀국의 꿈만 뼈 속에 새기어 목줄기 빼
어들고 지금도 오호츠크 물굽이 너머 먼 이 땅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이 작품에 손을 댄 동기는 실제 징용에 끌려갔던 家親과 어릴 적 동네 어른들의
피묻은 체험담을 듣고 일제에 대한 일종의 증오심을 느꼈고, 어릴 때부터 국사에 무척
흥미를 가졌으며, 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며 역사를 연구하려고, 중등교사 자격
증을 얻기도 했다. 대학이후 더욱 근세사에 관심을 가지면서 사할린에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고 버려진 핏줄들이 내 혈육처럼 느껴지게 되었다. 종전 반세기가 가까워도 끌고 간
일본이나 피해를 당한 우리들마저도 꺼질 듯 깜박이는 제 핏줄을 구출하기 위한 그 어
떤 손길을 건네지 않았음에도 있지만, 그보다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천길 나락의 핏줄들
을 두고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하여 남의 일인 듯 흘려 넘기는 굴절된 인간의 양심에
대한 고발의 뜻이 있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 비록 분단된 조국이기는 하지만 내 땅에 발을 붙이고 산다. 끌려가 처절한
고통을 당하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려고 몸부림치고, 울부짖는 핏줄들을 외면하고 권력
을 잡은 자는 정권의 연장이나 억압의 서슬을 펴왔고, 억눌린 자들은 그 억압에 항거하
는 일에 많은 힘을 쏟아왔다.
도대체 조국은 무엇이며, 국가란 무엇인가. 그리고 겨레란 또 무엇인가. 역사는 늘 이기
는 자, 힘있는 자들만의 것인가. 외세에 의해 이렇게 밟히고 짓밟힌 제 핏줄을 팽개칠
수 있는 것인가.
이 땅의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 학생 등의 그 수많은 단체나 개인은 끌려간 제 핏줄을
구하기 위한 그 어떤 군중집회나 불덩이같은 구호나 귀환운동같은 것은 왜 하나도 없다
는 것인가. 왜 이런 곳에는 국내외 인권단체들이 그토록 냉담한가. 그 서느런 목숨을 위
해 한 점 까만 불빛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간절한 그 무엇이 내 가슴속에서 영혼의 불길
로 타오르고 있었다. 민족의 한 부분이 천길 나락에서 신음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민족
의 양심, 시인의 양심은 이를 외면하고, 그 어떤 곳에 마음을 두고 찬란한 조명을 바라
고 있지는 않은가. 모두가 이를 외면한다고 해도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시조 속에 이 모
든 것을 담으려고 작정했다.
그리하여 1981년 가을부터 시상을 가다듬으며 고심하다가 `82년 겨울 30여 일의 면벽 고
뇌 끝에 서시에 해당하는 부분(앞에 제시한 8수)을 얻어 발표하게 되었고, 마침 徐伐시
인의 격려와 함께 시조단의 불모지인 대하 서사시조로 써볼 것을 간곡히 권유했다. 여러
번 생각을 거듭했으나 너무나 방대하고 처음 하는 일이라 막막하기만 했다.
그러나 자유시쪽에서도 素月의 시적 성취나 巴人의 위대한 실패는 둘 다 한국시사에서
시적 진폭과 깊이를 더해 주고 있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리라 믿었다.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은 素月쪽을 선호하고 巴人쪽을 피하려 해도 나는 巴人의 위대한 실패
를 그리며, 지금도 흩날리는 눈발을 뚫고 이 반도 빈 벌판이나 깊은 산 응달진 계곡을
절룩이며 걷고 있을 古山子의 드높은 혼을 우러르며, 이 길에 나서리라 다짐했다.
자료 수집에 나서 「조선독립운동전사」며, 일본의 르뽀라이터 三品英彬의 「나의 조국
일본을 고발한다」등 40여 권의 자료를 참고하여 줄거리를 구상하고 대하소설이나 대하
드라마를 연상하며 단형․중형․장형시조 등을 동원하여 그런 것들과는 다른 서사시조
를 써보려고 했으며, 고도의 비유나 상징보다는 가급적 쉽게 읽히게 하려고도 노력했다.
그리하여 당시 백성의 팔할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며 일제의 학정에 시달리다 스러지듯,
일제의 징병에 가장 많이 끌려갔던 삼남지방 농민들의 참상을 배경으로 경상도 동북부
지방인 영덕․ 영양․ 영일(포항) 등을 그리며, 그 속에 실제 사할린에 끌려갔던 영양군
의 이의팔이란 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의 조부와 부, 본인에 이르는 3대의 이야
기를 그리게 되었다.
이야기의 전개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를 회상하고 다시 현재로 돌아오게 했다. 곧 일흔
노구의 주인공이 왓카나이 갯벌에 나와 귀국의 꿈을 그리며 오호츠크해류 너머 먼 동해
를 향해, 사할린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그들의 뿌리인 조국과 민족혼을 깨우치게 하는 내
용(Ⅱ), 한말(韓末)의 흔들리는 왕조와 정세 속에서 평민 의병장 신돌석을 등장시켜 주
인공의 조부와 함께 의병활동을 하는 내용(Ⅲ), 주인공 아버지의 3․1운동 참여와 그 당
시 토지를 빼앗긴 화전민 유랑민의 생활상, 상해 임시정부와 청산리전투 등을 그리며
(Ⅳ), 관동 대지진 때의 조선인 학살, 원산 대파업, 광주 학생의거 및 애국지사들의 활동
(Ⅴ), 일제의 잔악한 수탈과 탄압 등(Ⅵ,Ⅶ)을 그렸으며, 주인공이 노무자 사냥의 덫에
걸려 사할린에 끌려가는 내용(Ⅷ)을, 끌려가 탄광 막장에서 겪은 참상과 2차대전의 진행
(Ⅸ), 종전과 함께 조국은 광복되었으나 소련군의 침공으로 다시 칠흑 속에 떨어진 모습
(Ⅹ), 소련군의 점령아래서의 탄광생활과 무국적이 된 민들레의 아픔(?), 끌려갈 때는
일본 국적이었으나 광복으로 국적을 잃었다며 그들 가족만 귀환시키고 반도인은 팽개치
는 국제사회의 비정함과 북한 노무자들이 밀려오면서 이념으로 인한 동족간의 피흘림
(?), 귀환의 꿈을 안고 몸부림치듯 울부짖는 처절함, 귀환을 기다리며 끝까지 무국적을
고집한 풀꽃들의 골수에 박힌 아픔, 이제 끌려간 세대들은 거의 70대로 스스로 고독이
아파 목숨을 떨구는 참상과 주인공의 죽음(ⅩⅢ)으로 막을 내리게 했다.
인간이 인간을 버린 이 비극을 처음의 각오처럼 모두를 다 바쳐 그린다고 하였으나 워
낙 무딘 사람으로 의욕만 앞서고 거친 곳이 많음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또한 비슷한 참
상을 계속 그리자니 같은 말의 중복도 많고 장면을 바꾸는 데 호흡이 단절되는 점도 많
으리라 본다. 처음 발표할 때와는 달리 순서에 다소 차질이 있으나 1,226수로 끝을 맺었
다. <조주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