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목동아'
유수 설창환
학창시절, 음악 시간에 배웠던 노래 중에 평생 기억에 남는 노래들이 더러 있다.
그중에 하나가 ‘아 목동아’이다. 이 노래는 애절한 선율과 목가적인 가사가 합쳐져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요즈음에는 노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악기로도 연주된다. 특히 색소폰 연주자들에게 이 곡은 거의 로망이나 다름없다. 최근에는 하모니카와 오카리나 등으로도 많이 연주된다. 무슨 악기이든지 잘 연주하기만 하면 이 곡은 효과가 매우 크다. 연주자들에게 좋은 곡을 선곡하는 것은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 면에서 ‘아 목동아’는 최고의 곡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이 노래는 아일랜드 민요인 ‘런던데리 에어’(London Derry Air)라는 곡이다. 19세기 중엽, 아일랜드 제2의 도시인 런던데리에서 널리 불리게 되면서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민요가 되었다. ‘당신의 가슴을 장식하는 능금 꽃이 되고 싶어요’라는 사랑의 노래이다.
이 곡은 아일랜드의 역사를 담은 곡이기에 간략하게나마 아일랜드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일랜드는 1169년부터 1939년까지 무려 770년 동안이나 이웃 나라인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던 중 1845년부터 아일랜드 전역에 감자 마름병이 생겨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인 감자 생산량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그로 인해 7년에 걸쳐 굶어 죽은 사람이 100만여 명이었고, 굶주림을 피해 해외로 이주한 사람도 100만여 명이나 되었다. 당시 아일랜드의 인구가 850만여 명이었다고 하니 전 국민의 1/4 정도에 해당하는 엄청난 수이다.
이주자들의 행선지는 미국이었지만, 그들은 도착하기도 전에 배 안에서 이미 절반이나 사망하였다. 그 정도로 배 안의 상황은 열악하였다. 이들은 ‘굶어 죽으나 배를 타고 죽으나’ 하는 절박한 심정이었으리라. 이때 아일랜드인들이 죽어가면서 불렀던 한 맺힌 노래가 바로 ‘런던데리 에어’였다. 아마도 우리나라의 ‘아리랑’ 같은 한 많은 민족의 한 많은 노래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이 노래는 후에 놀라운 변신을 한다. 1913년, 영국의 작곡가 프레데릭 웨드리가 처제가 보내준 ‘런던데리 에어’라는 곡을 듣고 크게 감명받는다. 어느 날, 웨드리는 예전에 자신이 써 둔 시가 생각나서 이 곡과 비교해 보니 놀랍게도 운율이 딱 맞았다. 흥분한 그는 곧바로 이 곡에 자신의 시를 붙여 ‘Danny Boy’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고, 크게 히트하게 된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아 목동아’는 원곡인 ‘런던데리 에어’의 가사가 아니고 웨드리의 ‘대니 보이’ 가사이다. 이 가사의 내용은 얼핏 보면 매우 목가적이고 낭만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사실은 자식을 전쟁터에 보내고 잠 못 이루는 어머니의 애타는 심정을 담은 슬픈 시이다. 요즘도 아일랜드인에게 '대니 보이'는 비공식 국가(國歌)로 여겨질 정도로 각별한 노래이다.
우리나라 음악 교과서에 실린 ‘아 목동아’는 대구 출신 작곡가 현제명 선생이 번안하여 붙인 가사이다. 이 곡은 요즈음에는 여러 버전으로 가사가 번역되어 있지만, 교과서의 임팩트가 강해서인지 대부분 이 가사로 노래하고 있다.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는 산골짝마다 울려 퍼지고
여름은 가고 꽃은 떨어지니 너도 가고 또 나도 가야지
저 목장에는 여름철이 가고 산골짝마다 눈이 덮여도
나 항상 오래 여기 살리라 아 목동아 아 목동아 내 사랑아” (1절 가사)
여기서 피리 소리는 징집을 명령하는 백파이프 소리이다. 징집의 소리가 산골짝마다 울려 퍼져 사랑하는 아들 ‘대니’도 결국 전쟁터로 끌려간다. 여름이 되고 겨울이 되어도 아들은 소식이 없고,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2절은 주로 성악가들이 부르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지만, 죽어서라도 아들을 기다리겠다는 애끓는 가사여서인지 교과서에는 빠져 있다.
“그 고운 꽃은 떨어져서 죽고 나 또한 죽어 땅에 묻히면
내가 자는 곳을 돌아보며 거룩하다고 불러 다오
네 고운 목소리 들으면 내 묻힌 무덤도 따듯하리라
너 항상 나를 사랑하여 주면 네가 올 때까지 내가 잘 지키리라” (2절 가사)
요즘도 아들을 군대에 보내는 어머니들은 마음이 몹시 불안할 테다. 비록 1년 반 정도의 짧은 기간이고 군대의 환경도 획기적으로 좋아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들의 걱정은 클 듯하다. 어제께 축구장에서 만난 현역 상근 군인의 이야기로는, 이번 달 월급으로 120만 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나 때는 병장 월급이 2,700원 정도로 기억하는데 그때와 비교하면 놀라운 변화이다. 아무튼, 당시 아일랜드는 전쟁이 빈발하였고, 기약도 없는 전쟁터로 아들을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오죽했겠는가. 이 노래는 이런 슬픈 가사가 숨어 있지만,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목가적인 풍경에 취해 감상적으로 노래하고 듣게 된다. 이 또한 듣는 이의 몫이고 자유이리라.
오랜만에 이 곡을 다시 들으면서 음악 교과서의 위력도 실감하게 된다. 초등 때는 동심이 가득한 동요로, 중ㆍ고등 시절에는 풍부한 정서를 담은 가곡으로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 준 음악 교과서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