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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강해(3)
골 1:3~8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7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8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알린 자니라.
3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가 감사한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시작됩니다.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감사했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감사의 원천이십니다.
한 사람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되며, 한 공동체가 신실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세워지기 위해서, 오직 필요한 것은 하나님 아버지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은 2절에서 이렇게 기원합니다.
‘...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공급되는 은혜가 평강’, 우리에게 이것만 있으면 됩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이유는 4절에 나옵니다.
근데, 왜 감사했을까요?
‘감사한다’에 사용된 헬라어 ‘유카리스테오’(ευχαριστουμεν)입니다.
여기서 ‘유’는 ‘좋은’이라는 뜻이고, ‘카리스’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은혜, 자비, 기쁨, 선물’을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사했던 이유는 그의 눈에 골로새 교회 안에 하나님이 행하신 ‘좋은 은혜’가, 듣는 중에 확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하나님께 감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살전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유사 그리스도인’일 것입니다. 감사는 ‘범사에’ 해야 합니다. ‘모든 시간, 모든 상황에서, 모든 영역에서’ 감사합니다. 좋든지, 나쁘든지, 항상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도들의 모든 상황에 함께 하시고, 결국 이 현실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모든 능력과 은혜는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잠3:6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 감사했던 이유는 3가지입니다.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4,5절 다시 읽어봅니다.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이 감사했던 이유,
첫 번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유지되고 있었던 성도들이 믿음’이 보였기에, 바울은 진심으로 기뻐했습니다.
그 예가 2:5이라고, 지난주에 말씀드렸는데요,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가 질서 있게 행함과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이 굳건한 것을 기쁘게 봄이라.’
영국의 한 목사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대단히 행복한 구절이다. 그것은 독자에게 골로새 교회가 ’거짓 형제들‘로 말미암아 위험에 처하고, 바울이 많은 염려를 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해피엔딩이 되리라는 소망을 준다.”
크게 공감합니다. 대단히 행복한 구절입니다.
비록, 교회를 향한 거짓 교사들의 위협이 있지만, 골로새 성도들의 ’질서 있음‘과 ’굳건한‘ 영적 상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질서 있음‘과 ’굳건함‘에 사용된 헬라어 단어는 군대 용어입니다. 교회 밖에서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성도들은 질서 정연한 상태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굳건하게, 견고하게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그럼, 나중은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를 한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행 19:9,10입니다.
9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10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두 해 동안, 사도 바울은 두란노(티라누스) 서원에서 매일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다른 사본은 보면, 19:9에 “제5시부터 10시까지”라는 내용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요즘 시간으로 계산하면, 오전 11시부터 오후 4시까지입니다.
아마, 이 시간대는 대개 무더위를 피해 쉬는 시간이기에, 사도 바울이 두란노 서원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불어, 행20장에 나오는 바울의 고별설교 중에 20, 31절을 보면,
20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종합해 보면, 바울은 두란노 서원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뿐만 아니라, 기회만 생기면, 공중 앞에서, 각 집에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고, 훈계했던 것입니다. 약 3년 동안.
이때는 성경책이 완성되기도 전이며, 특히 양피지에 기록된 책 한 권의 가격이 일반 노동자의 10년 치 연봉을 모아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귀족 혹은 부자가 아니면, 책 한 권 갖기도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고, 도서 보급도 원활하지 않았기에, 사도 바울은 두란노 서원에 모여든 사람들을 위해, 오직 ’말‘로 가르칠 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밤낮으로,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말‘로 가르쳐야 했습니다. 복음과 진리에 대한 바울의 열정입니다.
복음과 진리가 선포되는 이 자리에, 에바브라도 함께 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10절에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
바울이 열정적으로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치는 자리에 에바브라가 있었습니다.
골1:7에서 바울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한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바울은 에바브라를 ’종‘, 즉, ’사랑하는 동료 종‘이라고 부릅니다.
에바브라를 제외하고는 바울이 자신 동역자를 ’사랑하는 동요 종‘이라고 부른 적이 없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신실한 일꾼‘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복음과 진리 전파에 신실한 종이었습니다.
4:13에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언하노라.‘
바울의 이 정도의 증언이면, 에바브라가 에베소에서 바울로부터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 열정을 본받아, 에바브라는 골로새, 라오디게아 히엘라폴리스에서 복음 전파에 헌신했습니다.
이 한 사람의 헌신에 신앙 공동체는 동참했습니다.
에바브라에게 배웠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있는 말씀 위에 세워져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거짓 가르침의 위협이 있더라도, 그들은 질서 있음과 믿음의 굳건함(견고함)을 유지했던 것이죠.
사도 바울이 설립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은혜 가운데, 동일한 진리 위에 세우신 신앙 공동체를 보았고, 그 안에 속한 믿음에 신실한 성도들을 보았기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교회는 복음과 진리 말씀 위에 서야 합니다.
성도들이 모두 여기에 한마음과 정성을 모아야 합니다.
스스로 교회를 복음과 말씀의 진리 위에 세우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상 교회는 위기를 겪에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믿음은 늘 세상과 사람들의 공격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바울이 감사했던 이유는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원문 그대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모든 성도에 대하여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
눈에 띄는 단어는 ’모든 성도‘입니다.
이 모든 성도는 골로새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폴리스에 있는 성도들까지 포함하는 표현일 것입니다.
바울이 들은 것은 골로새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입니다.
믿음 안에서 입증되는 사랑을 들은 것이며,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혹은 증명되는 믿음을 들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과 사랑, 이 두 가지는 그리스도인의 영적 표지이며, 중요한 특징입니다.
잠시, 살전1:2,3를 찾아봅니다.
2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일단, 골로새서 유사하죠?
골로새서에는 그냥 ’믿음, 사랑, 소망‘으로 되어 있지만,
데살로니가 전서에는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믿음, 사랑, 소망‘이 갖는 특성을 각각 추가했습니다.
믿음에는 ’역사‘라는 단어가, 사랑에는 ’수고‘라는 단어, 소망에는 ’인내‘라는 단어가 덧붙여져 있습니다. 이 중에 ’사랑의 수고‘를 확인해 봅니다.
’수고‘에 사용된 단어는 ’코포스‘(ko,pou)입니다.
이 단어는 고전 헬라어 “때리다, 치다, 맞다”라는 말에 왔는데요, 쉽게 표현하면, “두들겨 맞는 것, 매질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에서 왔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수고하세요‘, ’수고하십니다‘라는 느낌보다는 ’고생, 고통, 노동‘, 이런 의미가 포함된 단어가 살전1:3에서 말하는 ’수고‘입니다.
이 수고를 고린도후서 6, 11장에 나오는 내용으로 읽어 드리면,
고후6:3-5
3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4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5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κοποις)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고후 11:23-27
23 ... 내가 수고(κοποις)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κοπω)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수고‘는 ’죽을 고생‘을 의미합니다. 단순한 ’수고‘가 아니죠.
의미가 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 안에서, ’고생과 고통이 내포된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이기에, 사도 바울은 그 사랑을 본받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던, 골로새 성도의 사랑은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즉, 고통과 고생이 함께 하는 사랑을 듣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느낌‘도 아닙니다.
고전 13장입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故 박윤선 목사는 자신의 주석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고전 13장의 사랑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온 것이니,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계된 사랑이다.”
정확한 표현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관련된 사랑이며,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랑입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주께서 보여 주신 사랑으로, 우리가 성도를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에서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로 끝납니다.
참는 것이 쉽던가요?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은 쉬울까요?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알랭 드 보통이라는 작가가 있습니다. 저랑 동갑인데요,
한 강연에서 사랑이 어려운 이유 2가지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에 충분한 수준에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고
둘째, 우리가 남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심리를 파악할만한 사람이 못 된다.
(We cant understand other people well enough.)
그는 사람의 심리를 파악하는데 2년 정도가 걸린다고 강연했습니다.
저는 그 이상 걸린다고 봅니다.
또, 강준만 교수가 쓴 『인간사색』 - 설명
이처럼, 나 자신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와 사랑 속에서 살아내려면, 자신의 인격을 때리고, 또 때려야 합니다.
그러니 사랑은 감정이 아닙니다. ’고생이며, 고통‘입니다.
만약, 우리가 성도를 사랑할 때, ’오래 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고‘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수고가 많구나 혹은 사랑의 수고를 하고 있구나‘로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로, 바울이 감사했던 이유는 5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이렇게 됩니다. ’하늘에 보관된 소망 때문에‘
즉, 골로새 성도들이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며,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의 수고에 최선을 다한 이유는 ’하늘에 보관된 소망‘ 때문입니다. 하늘 소망이 삶의 동력이었습니다. 소망이 없다면, 믿음도, 사랑도 없는 삶을 살아냈습니다.
소망은 ’하늘에 보관되어‘(수동태) 있습니다. 능동태로 고치면, 하나님이 소망을 하늘에 보관하셨습니다. 히6:17-19에, 이 소망은 거짓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고 있기에, 그 약속을 하나님이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소망‘에 사용된 단어는 ’엘피스‘, ’소망하는 대상 혹은 소망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런 뜻에서, 골로새서에서 말하는 소망의 내용은 소망하는 대상, 즉 예수 그리스도, 그분입니다.
1:27에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영광의 소망‘이란 ’영광을 함께 나누게 될 소망‘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 골로새 성도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영광을 나눌 것입니다. 그분은 영광 중에 오십니다. 영광 중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분과 함께 영광스럽게 될 것입니다.
고후3:18에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빌3:21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보관된 영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받아 들일 때에 이미 들은 것‘(1:5)이기에, 약속하신대로 이루실 것입니다.
골3:4의 말씀을 읽어 드리고,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