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인물의 행동과 사고는 시대적 환경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 374~412)이 살았던 4~5세기 동아시아는 매우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면서 새로운 질서를 찾는 격변의 시대였다. 광개토태왕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동아시아 정세를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마침 KBS1에서 광개토태왕에 대해 드라마로 방영 중인데, 자칫하면 역사드라마속의 픽션을 사실로 볼 가능성이 있다.
먼저 중국본토의 상황은 400년 이상 유지된 한(漢)이 망하고, 위(조비)·촉(유비)·오(손권)가 정립하는 삼국시대가 들어선다. 이후 제갈량과 경쟁했던 사마의(179∼251)의 손자인 사마염이 265년에 위(魏)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서진을 건국한다. 이후 서진은 팔왕의 난과 영가의 난이 겹치면서 결국 남흉노의 유연이 세운 전조(前趙: 304∼329)의 유총에게 망하고, 317년에 사마예(276∼322)가 동진을 세운다.
이후 만주지역과 북중국에 흉노족, 저족, 강족, 갈족, 선비족의 5호가 남침해 5호16국 시대(304∼439)가 시작된다. 16국은 보통 1성(成: 성한), 2조(趙: 전조·후조), 3진(秦: 전진·서진·후진), 4연(燕: 전연·후연·남연·북연), 5량(凉: 전량·후량·서량·북량·남량), 1하(夏)라고 부른다. 고구려는 이 가운데 선비족의 모용부와 운명적인 전쟁을 벌인다. 먼저 모용황(297∼348)이 세운 전연(337∼370)이 342년에 고구려를 침략해 고국원왕의 어머니와 왕비를 인질로 잡아가고, 미천왕의 시신까지 파간다. 이후 전연은 370년 전진(351∼394)의 부견과 왕맹의 공격에 의해망한다.
이후 소수림왕은 전진과 통교하면서 불교 도입, 태학 설립, 율령 반포 등 국가 체제를 정비한다. 소수림왕 이후 동생인 이련(伊連)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이 인물이 광개토태왕의 부친인 고국양왕이다. 한편 같은 시기에 모용황의 아들이자 문무를 겸비한 걸출한 영웅인 모용수(慕容垂)가 384년에 후연을 세우면서 고구려와 대립한다. 근초고왕과 광개토태왕 드라마에 등장하는 바로 그 모용수다.
광개토태왕은 391년 18세에 즉위한 후, 선비모용부의 모용수→모용보→모용성→모용희로 이어지는 집권자들과 만주·요서를 두고 투쟁한다. 특히 광개토태왕은 모용수의 아들인 모용희 집권기에 수년간에 걸쳐 보복공격을 단행해 숙군성, 요동성 등 후연의 요동땅을 점령한다. 한편 후연에서는 407년 풍발이 모반하여 모용보의 양자인 모용운을 황제로 세우는데, 모용운은 고국원왕 때 전연으로 끌려간 고구려인 고화(高和)의 손자로 이름은 고운(高雲)이다. 고구려인이 후연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광개토태왕은 모용운에 사신을 보내 동족의 우의를 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운은 409년에 암살당하고, 광개토태왕 드라마에 후연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풍발(馮跋)이 즉위하여 북연을 세우면서 후연은 사라진다. 이와같이 광개토태왕은 선비모용부가 세운 후연과의 대외항쟁을 결국 승리로 장식한다. 놀라운 점은 광개토태왕이 이룩한 업적이 주로 20~30대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다음 대선과 총선에서는 21세기의 한반도와 대구·경북를 책임질, 광개토태왕의 기개를 닮은 30~40대 지도자들이 많이 출현하기를 고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