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이야기〛2
누구든 가치 있는 것을 위해 평생 혼을 바쳐 추구하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은가? 에밀레 종은 소리의 극치를 위해 자식까지 바쳤으니 숭고하다. 궁극의 소리를 위해 독공하는 명창들의 모습도 역시 경외롭다.
하지만 소리꾼은 조선 시대에 호적에 무(巫)로 표기해 재인청에 소속되었고, 재인청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 3개도에 설치되어 관리했다. 명창들은 가문을 중심으로 소리를 계승했고 혼인도 소리꾼 집안과 이루어져 천부적인 소질이 전해지기도 했다. 대대로 명창을 배출한 집안은 남원 운봉의 송씨 가문, 강경의 김씨 가문, 나주의 정(丁)씨 가문, 보성의 정(鄭)씨 가문 등이 있다.
판소리는 숙종 말엽부터 시작되어 경기 이남의 서민층에서 큰 인기를 얻은 후, 고종 시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 무렵 고창의 아전이며 거부였던 신재효가 김세종 명창을 초빙해 소리청을 열었다. 그는 판소리 이론에 해박하여, 판소리 사설을 봉건적 이념에 맞게 재구성했고, 맞지 않은 내용은 삭제했다. 이후 명창들은 양반의 기호에 맞게 소리를 불렀고, 심지어 궁궐의 어전에서도 소리를 해서 높은 관직과 포상을 받았다.
1885년 전라도 감영에서 벌인 잔치의 회계기록에는 당시 몸값이 기록되어 있다. 서편제의 이날치와 동편제의 장자백은 50냥씩을 받았고, 김세종은 100냥을 받았다. 당시 서울 기와집 한 채가 150냥이었으니, 당백전 발행 이후 고물가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100냥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요즘 서울 아파트가 15억이라면 10억을 받은 셈 아닌가?)
그럼에도 1894년 갑오개혁으로 대다수 광대들은 어려움을 겪었다. 주 수입원이던 과거 급제자를 위한 행사가 없어지고, 국가의 큰 행사들이 폐지되면서 상당수가 사당패로 흘러가게 되었다. 그들은 악조건 속에서도 오늘날까지 서민예술을 이어온 진정한 광대가 되었다.
사제간의 무릅학습은 녹음기가 없던 시절이라 배우기가 어려웠다. 동편제의 명창 유성준은 성격이 괴팍해서 제자들과 불편했던 일화가 많다.
남원 명창 김정문은 유성준의 누님 아들이었지만 소리를 따라하지 못한다고, 유성준이 목침을 들어 김정문의 머리를 내리쳐 버렸다. 머리를 맞고 기절했다 깨어난 김정문은 유성준의 문하를 떠나고 말았다. 김연수 명창은 학식이 많아, 사설이며 장단을 자꾸 따졌다. 화가 난 유성준은 "사설을 그렇게 따지니 과거를 보는 것이 좋겠다. 네가 선생해라!"하고는 떠나버렸다. 강도근 명창도 소리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고, 유성준이 담뱃불로 이마를 지져버렸다. 이후 강도근도 유성준을 떠났다.
반면 임방울은 마음씨가 좋아, 목침으로 얻어맞으면서도 소리를 배웠다. 유성준은 임방울을 자식처럼 생각했고, 임방울도 그를 '아버지'라고 불렀다. 구한말에 이르러 명창들은 근대 5명창을 번갈아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에 유파간 경계가 없어지면서, 최근에는 동초제(김연수), 보성소리(정응민), 만정제(김소희)로 구분하고 있다.
판소리는 원래 서민의 애환을 달래주는 음악이었으나 점차 사설이 어려워지고, 가요, 외국 팝송과 경쟁하면서 대중들로부터 멀어졌다. 그러나 최근에 젊은 소리꾼들이 등장하면서 세계무대로 도약을 시도하고 있다. 얼마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는 유튜브, 페이스북에서 6억 뷰 이상의 조회를 기록했다. 판소리의 세계화를 보여준 놀라운 사례다.
우리 고장, 남도 소리의 맛을 이해하려는 사람도 늘고 있다. 우리도 귀명창이 되어 노년을 즐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