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에 먹은 고량주 한홉(소주 반병 정도)이 내 주량에는 정량이었다. 마침 기분이 조금 업될 정도로 아주 편하게 자고 아침에 기분 좋게 자리를 떨치고 일어날 정도였다.
오대산에서 투숙한 호텔(호빈산장)입구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 투숙객이 나 혼자 였다. 이 호텔을 전세내어 사용한 셈이다. 전날은 모르고 있었으니 마음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이곳은 그래도 관광 단지 내이고 주변에 호텔이나 식당등이 많이 있어서 치안이 불안하지는 않았다.
지난 2000년 8월에 호남성의 악양(두보의 시 '악양루에 올라'에 나오는 악양)에 가서 동정호(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호수)에 있는 섬인 군산에 간적이 있었다.악양루 밑에 있는 부두에서 모터 보트를 타고 20분 정도를 가서도착한 섬인데 이곳에서 보는 낙조가 절경이라기에 하루를 묵으며 낙조를 감상하기로 했고 숙소를 알아보니 동정산장이 조용하고 낙조 감상에 적합하다는 소개가 있어서 모터보트에서 내려 빵차(면빠오:만두를 말하며 중국의 만두는 속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밀가루빵을 말하며 그 모양이 우리나라 다마스와 거의 같은데 중국 택시 중에 꼭 닮은 형태의 차를 빵차라고 부른다.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먹는 만두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되는데, 둥근모양으로 만들어 쪄서 먹는 만두는 포자(빠오즈;찐만두),만두국을 만들때 들어가는 넓적한 송편모양의 만두는 교자(짜오즈;물만두)라고 부르고 동북지방(요령성,길림성,흑룡강성)이 유명하다. 빵차를 타고 동정산장에 도착하니 정말 호젓하고 조용한 곳에 자리잡고 있고 동정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위치라서 마음에 들었다. 짐을 풀고 호텔을 나와 주변지역을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다가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며보니 호텔에 투숙객이 너무 없었다. 식당종업원에게 물으니 아니나다를까 그날 호텔의 투숙객이 나 혼자라는 것이다.섬의 외딴곳에 있는 호텔에 혼자 투숙을 한다니 불안감이 들어 나가는 배편을 물어보니 벌써 끊겼다는 대답에 불안감이 깊어졌다. 속모르는 종업원은 안전을 ㅇ여러차례 말하며 안심시키려 했지만 어디 안심이 될일인가 어쨋거나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서 방을 살펴보니 방이 2층이기는 하지만 창이 낮아서 밑에 의자를 하나만 발판으로 삼아도 창을 통해서 침입이 가능할 정도이고 방문도 철제가 아니라 합판으로 제작되어 들어올려면 간단하게 들어올수 있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창쪽으로는 커튼을 치고 커튼위에 보온병을 올려 놓아누가 건드리면 보온병이 떨어져 소리가 나게 만들고 방문에는 방안에 있는 간이 탁자와 그 위에 텔레비젼을 올려 놓아 들어오기 어렵게 만들고 정전에 대비해 맥라이트 소형 후레쉬와 비상시 바로 사용할수 있게빅토리녹스 나이프도 칼날을 꺼내놓아 즉시 사용할수 있게 준비하여 손이 닿는 곳에 두었다. 나름대로 준비는 했다고 하지만잠이 들려니 잠이 오지않아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냈다.날이 밝자마자 배낭을 메고 호텔을 빠져나와어제 도착한 부두 쪽으로 가다보니 큼직한 사당이 있고 곳곳에 차밭이 있었다. 바로 중국의 명차 중 하나로 황실에 진상품이던 군산 은침차(차잎이 바늘모양을 하고있고차잎에 가는털같은 것이 덮여있어 음빛을 띠고 있다 그리고 가지에 붙이잇는쪽의 무게가 무거워 물을 부으면잎이 수직으로 서서 찻잔속에 은빛 바늘을 세워놓은 것 같아서 은침차라고 부른다.)의 재배지가 바로 이곳이었다. 하지만 차밭의 정경은 보성녹차밭에 비할바가 아니었다.동정호변에 사당이 하나있어 들어가보니 삼국지에 나오는 2교(자매로 언니가 대교: 오나라 손권의 형손책의 부인 동생이 소교:오나라 총사령관 주유의 부인으로 얼마전에 상영된 적벽대전에도 등장하는미인)의 사당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시내버스 정차장이 있었다. 군산은 완전한 섬이 아니라 섬 뒤편으로는 차길이 나잇어 시내버스가 들어오고 있었다. 무식이 죄였다.어제 알았다면 하룻밤을 뜬눈으로 새우는 고생을 하지 않았을것 아닌가절차장에서 기다리니 시내버스가들어와 시내버스를 타고 악양시내로 들어오는 길에 보니 마주오는 버스 앞에 붙은 행선지 표시에 '화용'이라는 지명이 보였다 바로 적벽대전에서 패배해 도주하는 조조를 관우가 살려준화용도가 바로 이부근이고 적벽대전의 전장인 적벽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악양과 군산은 완전하게 연결된 것은아니고 중간에 버스를 바지선에 올려 이동하였다.
악양루 에서 하차하여 악양루에 들어갔다.악양루에올라가 바라본 동정호는 두보의 시에 나오는 것처럼 하늘과 물이 맞닿아있었다.악양루 바로 아래에 장강에 홍수가 났을때의 수위가 표시되어 있었다. 상당히 높은 위치인 악양루 바로 아래까지 수위가 올라 갔다면 정말 장강 주변 지역은 난리가 났을 거라는 걸 미뤄 짐작할수 있었다.
악양루를 나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천주교 성당의 위치를 물었더니 위치를 설명하다가 내가 못알아 듣자 직접 성달까지 안내해 주엇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성당이 있어 8월 15일 성모승천대축일 미사를 중국에서 참예하였다. 작년에도 8월 15일 미사를 연길에 있는 한인성당에서 보았는데 올해는 악양이었다. 방학기간에 중국여행을 하다보니 중국에서 성당에 나가는 일이 여러번 잇었다.
미사후에 성당 사무실에서 신부님과 필담으로 대화를 나누었다.성당에서 점심을 같아하자고 권유하셨지만, 작년 연길성당에서 물을마시고 백두산으로 이동하는 길에 배가 아파서 고생한 기억에 고사를 하고 악 장사행 기차에 올랐다. 가서 장ㅅ 행 기차표를 사고 역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기차에 올랐다. 다행히 그때까지는 아직 여행이 그리 유행하지는 않아서 죄석을 잡을 수 있었다.
기차좌석에 앉아 가는 길에 조금 곤란한 일은 시선을 둘데가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중국도 여름에는젊은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다.그렇데 이 처자들이 옷차림에 주의가 부족해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열차 앞좌석에 발을 올려 놓고 가기도 한다. 더 심할 경우는 미니스커트 차림으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기도하고 심지어 장춘의 남호공원에서는 해먹침대에 벌렁 누워있는 경우도 있었다.
장사에 도착하여역 부근을 벗어나 오일로(전형적인 공산주의 국가의 성격을 보여주는 도로명으로노동자의 (메이데이)인5월 1일을 상징해서 붙인 이름으로 서울의 세종로에 해당하는 가장 중심도로)에있는 부용대반점에 투숙했다. 군산에서의 악몽이 상기되어 그 이후 중국에서의 숙소는 가급적 가격이 조금 비싸더라도 좋은 숙소를 찾이 투숙했다. 짐을 풀고 주변에 있는 식당을 찾아가 저녁 식사를 했다.호남성음식인 상채(호남성의 대표적인 강인 상강에서 유래해서 붙인요리이름으로 얼큰해서한국인의 입맛에 잘 맞는다. 중국음싣중 사천음식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매운맛이 나는 음식이다.또한 매운음식을 좋아하는 지방에서 인재가 많이 나온단다.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뚱(모택동)이 호남성출신이고 부도옹(넘어지지 않는 노인:즉 오뚜기)이라고 불리는 떵샤오핑(등소평)도 사천성 출신이다.돌아오는 길에 호남성 공안국옆(우리나라의 도 경찰청에 해당)에있는 발마사지 집에 들어갔다. 들어가 보니 공안국에서 수익사업으로 운영하는 곳이었다. 시설도 좋고 안마사의 실력도 좋아보였다.90분에 우리돈 12,000원으로 중국에서는 조금 높은 비용이었지만 아주만족한곳이다. 장사에 가는 사람은 이곳이 괜챃은 곳이다.
아침에 일어나 작은 배낭만 지고 호텔을 나와 오늘은 호남성박물관을 가기로 했다.길가 간이식당에서 간단히 요기를 하고 호남성 박물관으로 갔다. 호남성박물관은 규모와 전시물도 충실하지만 특히 마왕퇴 한묘관련 특화된 박물관으로 마왕퇴 한묘 특별 전시관이 있어 발굴된 여성의 미이라와 출토 유물들이 있다. 특히 미이라와 같이 출토된 유물중에 미이라를 감싼 수의 와 같이 발견된 명주 천에 새겨진 중국인의 사후세계관을 보여주는 유물에는 고구려 고분 벽화에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세발 까마귀로 태양을 상징하며 고구려 건국 설화에 나오는 해모수를 나타낸 것으로 본다)가 있어 나름 의미가 깊다.
박물관 관람을마치고 나와 시내 중심지로 돌아오는 길에 잊지 못할 경험을 했다
무심코 길을 가는데 내 앞과 뒤를 방탄조끼를 입고 권총을 두손을 모아 앞에들고 사방을 수색하듯 경계하는 사람(영화에 무장한 범인이 숨은 건물을 수색하는 경찰들의 자세)이 서고 가운데는 길이 1미터에 폭과 높이능 60센티 남짓한 알루미늄제 가방을 두사람이 마주든사람이 있었다.은행에 현금을 운송하는 일행이었다. 만약에 현금을 탈취하기위한사람이 있다면 총격전이 벌어질 것이고 나는그 가운데 무방비로 노출된 상황이었다.머리카락이 곤두 서는 듯한 느낌이었다. 걸음을 조금씩 늦춰서 자연스럽게 일행에서 빠져나와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평요 역에서 내려걸어서 고성을 찾아갔다.역에서 죄측으로 난 길을 따라500미터 가량오니 높이10미터가 넘어보이는 성벽이 나타나다행히 방향을 잘잡은것 같았다. 성안으로 들어와 명청가(명나라와 청나라때 조성된 전통거리)를 찾아야하는데 잘모르겠기에 다행히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물어 명청가릉ㄹ 찾아갔다.
평요 고성 명청가에서 누각(종루 ㅋ도는 고루)을 배경으로
명청가는 옛날의 전통거리를 재현한 곳으로 많은 상점과 객잔(호텔)과 식당이 모여 있다. 그중에 한 객잔인 운금성빈관에 숙소를 정했다.
평요 고성에서 투숙한 운금성빈관의 입구사진
운금성빈관의 로비
중국의 전통 기옥양식인 사합원(입구자형의 가옥구조를 갖춘전통가옥양식)구조를 가진 호텔 내부와 호텔설립자의 흉상, 좌측에하얀 천이 덮인 문이 열린 방이 내가 투숙한 방이다.
to be continued
첫댓글 무열이의 기행문 덕분에 가만히 앉아서 중국여행을 두루 하는 상상에 빠져드네~!
핵교 댕길 때 읽었던 무협지와 만화의 배경이라서 무열에게는 더욱 와 닿겠다.
14차까지 다녀온 기행문을 따로 올릴 수 방을 마련하겠네...
중국의 역대 왕조와 연대표까지 올려 주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네~!
하-은-주 서주와 동주로 나뉘고 동주를 춘추 전국시대라고도 부른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인물이 진시황으로 중국을 차이나라고 부르는 계기가 진을 지나로 지나가 차이나로 부르게 된다.
조금 더 설명하면
1. 진시황은 폭군이 아니다.주나라때 부터 중국은 지방을봉건제로 다스린다.
봉건제는 장남에게는 왕위를 세습하고 그외의 아들에게 지방을 나누어 주어 다스리게하는 것으로 땅을 받은 제후(영주는 영토의 크기에 따라영토가 큰 순서대로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작위가 수여된다. 이작위는 영지와 더불어 세습된다. 단 작위는 1세대가 지나면 1등급씩강등된다 공작의 아들은 후작의 작위를 다음세대에는 백작-다음은 자작-남작이됨
2. 만리장성은
2. 만리 장성은 진시황이 쌓은 것이아니다. 진시황이 완성했을 뿐이다. 진이 중국을 통일하기 전에 중국은 약 400년의 분열기를 겪었다. 이시기 각국의 제후들이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성을 쌓았다.각구이 필요한 부분만 쌓기 때분에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진시황은 연결이 되지 않은 부분에 성을 쌓아 동쪽으로는 산해관에서 서쪽의 가욕관까지 완성했다
진나라 다음이 한나라(중국의 정체성이 확립된 왕조 중국인=한족중국문자=한자. 종이가 발명된 시기도 이때라서 한지라고 부른다.
한
무열아 정치인들 출판기념회 많이 하던데. 고창북중11회를 대표해 출판기념회 한번열자.
이익금은 당연이 동창회 발전기금으로 접수하고 ㅎ ㅎ ㅎ
나도 무열이의 중국 여행기를 모두 모아서 출판하는데 대 찬성~!
관우가 재신이 된 사연은 삼국지의 주인공중 한명이고 멋진수염을길러 미염공(이름다운 수염을 가진 공(왕 다음이 공작-후작-백작-자작-남작의 순으로 봉건제후들의 작위가 수여되는데 사실 관우는 공(공작)이 아니라 후(조조에게서 수정후)작이었다. 장비도 환후- 제갈량도 무후(그래서 촉한의 수도였던 성도에 제갈량의 사당이 무후사이다)관우의 고향이 산서성운청이었고 일찍부터 산서성은 북방국경방어의 요충지로 많은 병력이 주둔했고 이 병력을 유지하고 먹여살리는 병참이 발달하여 산서성상인들은 군량미조달과 군마조달 등으로 크게 성장하였다.
산서성은 일찌기 진(晉)나라의 영역으로 산서성의 약자가 晉이다. 산서성 소속 자동차 번호판은 晉-0000이다.산서상인을 晉商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전국 각지에 진출하여 상업적인 제능과 그들만의 유통망을 이용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고 자기들이 부를 축적하는 에는 관우의 보살핌이 있다고 생각했고 또 상업활동 중에 도적이나 산적으로부터 지켜주기를 자라는 마음에서 집이나 상점에 큼직한 청룡도를 비껴든 관우의 상을 안치하고향을 피우고 기원을 하였다. 전후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관우가 재물이 신이고 산서상인들이 부자가 된것도 재물신 관우의 보살핌이라고 생각하여 관우=재물신이라는 공식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