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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2:1-17(7)) 개기일식 인생의 행복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의 번제 하나님말씀 함께 봅니다. 아가서 2장 말씀 보겠습니다.
아가서 2장 1절부터 17절 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1-7절까지만 읽고 나머지는 여러분 각자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같이 읽습니다.
1.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2.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3.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
4.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6.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
7.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개기일식 인생의 행복>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개기일식 인생의 행복’
여러분! 개기일식 현상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일식(日蝕)'이라는 말 자체가 ‘태양을 좀먹었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구의 입장에서 볼 때 달이 지구의 어느 위치에 있는 사람의 시야를 정확하게 가려서 태양이 완전히 달의 뒤에 감추어져 버리는 것을 일식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주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우리 인생에 갖고 와서 이번에는 지구의 위치에 내가 서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 인생이 태양의 위치에 서 있다고 한 번 생각을 해 봅니다.
태양을 가리키는 한자가 날 일(日)자 아닙니까? 그 날은 우리 인생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루하루 지나는 인생의 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의 날들을 태양의 위치에 서게 합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인생에 평생 동안 지속되는 과제가 뭡니까? 이렇게 놓고 보면 분명해 지지요. 지구에, 이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거예요. 태양빛이 비추듯이 내가 지구에 나의 인생의 빛을 비추는 것을 인생의 꽃 피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받아들여집니다. 이 세상에서 보여 집니다. 연예인들 같은 경우 우리 인간들의 욕망을 대변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인기.
엊그제 일본하고 축구를 했더군요. 저는 경기를 보지 못하고 골 넣는 장면만 봤는데 박지성 선수가 아주 멋지게 골을 넣고 또 박주영 선수가 페널티킥으로 2:0으로 이기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속의 욕망을 대변해 주고 대신 만족시켜 주고 있지요. 이런 욕망을 통해서 예를 들어 박지성 선수가 유명해 졌다면 우리 속에도 그런 것이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이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나를 알아주고 나를 봐줄 수 있는 그 무엇인가가 내 속에 있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인생이 꽃피었다. 인생이 떴다. 인생이 잘 나간다. 인생이 성공했다. 형통했다'는 것이 다 빛을 비추듯이 내가 지구에 있는 사람들에게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당연하게 모두가 다 그렇게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진짜 행복은 무엇입니까?내가 자발적으로 원하는 무엇인가에 의해서 완전히 내 인생이 가려져서 아예 지구에 있는 세상에는 내가 보여 지지 않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 의식 속에서 전혀 나 스스로가 세상에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세상과 나 사이에 태양과 지구사이에 달이 있듯이 달과 같은 존재를 자발적으로 찾을 수 있는 사람, 내가 완전히 가려져도 괜찮은 사람, 완전히 그의 그림자와 그의 그늘 속에 들어가 버려도 괜찮은 대상을 찾는 것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는 겁니다.
늘 이런 분위기의 이야기가 진전되면 꼭 반복해서 나오는 이야기가 마르린몬로인데 그 여자가 어떤 분이었습니까? 세상에 자기가 태양처럼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지구위에서 태양이 비추듯이 빛나는 사람이었습니다.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그랬습니다. 근데 불행했어요.
헤밍웨이가 노벨상 받았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작가로서 그의 성공을 알리는 인기를 확인할 수 있을 때에 엽총으로 자살을 합니다. 행복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어떨 때 행복이 있느냐? 자발적으로 내가 이 세상에 완전히 가려질 수 있는 대상을 찾을 때 진정한 행복이 다가오는 겁니다. 사람들은 내가 이 세상에 보여야 행복할 줄로 알아요. 잘 보여야 행복할 줄로 압니다. 아닙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잖아요.
우리는 주님을 보고 있었습니다. 2000년 전에 우리 인간들은 주님을 보고 있었지만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말과 행동들은 다 아버지가 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발적으로 아버지 뒤에 숨어서 당신은 안 보이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원리라는 거예요. 그런데 전부 거꾸로 살고 있지요. 내가 세상에 보이기를 원합니다. 여자분들 중에서는 남자의 드늘을 원하는 분들도 있어요. 그래도 현명한 여자입니다. 내가 드러나서 행복하겠다고 하는 것 보다 나를 가려 줄 남자를 찾는 마음이 더 현명합니다. 바로 그 마음이 오늘 술람미 여인의 마음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어요. 내가 그늘 속에 가려지고 내가 그림자 속에 가려지기를 원하는 마음, 진정한 행복을 향해 다가서고 있는 술람미 여인의 마음이 오늘 이 성경 속에서 묘사되어 지고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진 구절이 3절입니다.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열매는 내 입에 달았도다”라고 합니다.
솔로몬이 '사과나무'라는 겁니다. 들판의 사과나무가 얼마나 돋보였겠습니까?
‘그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서 그 사과나무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으면서 그 사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행복을 느낀다.’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게 바로 술람미 여인뿐만 아니라 인생행복의 포인트를 얘기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행복해 지느냐의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인데 그늘에 가려져야 합니다. 누구의 그늘인가는 자발적으로 원하는 자의 그늘에 가려질 때 행복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회사에 소속되기를 원합니다. 삼성, LG, SK, 대한항공, 아시아나, 이런 큰 회사들이 있잖아요. 그런 회사들에 들어가서 그 회사의 그늘 안에 있을 때 마음에 안정과 평안을 느끼게 돼요. 그냥 나 혼자 들판에 쓸쓸하게 나와 있다면 이건 불안한 거예요. 안정과 평안이 없는 거예요. 하여간 누군가의 그늘 안으로 들어가 있어야 돼요. 이건희씨의 그늘 안에 들어가 있는 자들이 삼성직원들 아닙니까? 대한항공 사장님의 그늘 안에 있는 자들이 대한항공직원들 아닙니까? 다 그런 거지요. 이 그늘에 들어가 있는 인생, 이게 행복한 건데 바로 이 상황을 그대로 신앙으로 갖고 오기를 원하는 것이 이 아가서의 의도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 보면 어떻게 그늘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인가? 누구의 그늘 입니까? 솔로몬의 위치에 누가 서야 됩니까? 주님이 서셔야 되고 하나님이 서시면 됩니다. 그래서 본문의 아가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느냐?
진짜 행복하고 싶으십니까? / 예! / 그러면 개기일식의 인생을 사세요. / 달이 누구냐? / 하나님이시고 주님이십니다. 그 달에 내가 가려져야 됩니다. 내 인생의 날들, 날 일(日)자, 해 일자, 그 인생의 날들이 가려져서 이 세상이 보이지 않고 보이기를 원하지 않고 나는 달만 바라봅니다.
더 이상 내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이 나를 봐주기를 원하지 않는 마음이 생길 때 짜~잔 하고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10절 이하의 말씀으로 대전환이 이루어지지 않습니까?
10-14절 까지 “겨울이 지나가고 비가 많고(중동의 겨울이 그렇잖아요.) 으슬으슬하고 바람이 불고하는 겨울이 지나고 만물이 생성되고 약동하는 봄이 돌아오면서”
이제 3장으로 가면서 결혼이 시작됩니다. 결혼이야기가 본격적으로 나옵니다. 이런 결합이 시작되는 것처럼 진정한 행복은 솔로몬의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것입니다. 그 그늘에 가려져 있다는 말을 또 다른 표현으로 4절에 보면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칫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은 내 위에 깃발이로구나”라고 하는데 이 말이 같은 말입니다.
솔로몬의 그늘에 가려졌다는 말과, 나의 깃발이라는 말이 같은 말인 것은 예를 들어 잔칫집에 큰 궁정파티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그런데 아주 돋보입니다. 왜 돋보이느냐? 너무 촌스럽고 너무 거무칙칙하고 세련미라고는 없어서 돋보입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와~ 하는 시선이 아니라 ‘쟤, 뭐야 아주 폭탄이네 폭탄이야’ (젊은 사람들이 그러잖아요. 얼굴 못 생긴 여자를 향해서 짓궂게도 폭탄이라는 말을 씁니다. 마음에 폭격을 가한다는 겁니다.) 그때 솔로몬이 나타납니다. 모든 사람이 왕이 나타난다고 왕을 향하여 기립박수를 칩니다. ‘왕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런데 이때 솔로몬이 왕좌에 앉기 전에 어디로 가느냐 저 구석에 그렇게 모든 사람들이 촌티난다고 껄껄대고 웃었던 그 술람미 아가씨에게로 가서 손을 잡고 왕좌 옆에 앉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깃발이라는 겁니다. 깃발. 그늘아래 거하는 겁니다. 솔로몬의 그늘아래 거하는 거예요. 그늘아래. 같은 뜻이에요. 지금 그 내용이.
그리고 6절에 “그가 왼팔로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라고 합니다.
‘왼팔로 머리를 고이고 오른팔로 나를 안는구나’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지금 술람미 여인의 마음상태가 어떤 상태냐? 7절에 보시면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을 두고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라고 합니다.
자, 솔로몬의 품에 안겼습니다. 술람미 여인을 안고 솔로몬이 잠이 들었나 봐요. 그런데 이 아가씨는 잠이 오지 않습니다. 나를 지금 이렇게 품에 안아주고 있는 이 분이 이 나라에 왕이신데, 이 분 자체만의 매력으로도 예루살렘 여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사람이 없는데 이 분이 나를 품에 꼭 포옹을 해 주고 있으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 조마조마 합니다. 그 조마조마한 마음, 혹시 이렇게 나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왕이 잠이 깰 까봐 잠이 깨서 일어나서 포옹된 상태가 끝이 날까봐,
‘노루와 사슴을 두고 말하노니 예루살렘의 여자들아 깨우지 마라, 깨우지 마라.’라고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오직 잠든 이 솔로몬 임금님의 품에 안겨 있기를 원하니 제발 노루와 사슴 같은 조바심을 가지고 너희에게 당부한다. 이 행복이 깨어질까봐 바들바들 떠는데 그게 어떤 행복입니까? 역시 솔로몬의 그늘에 가려진 행복이라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주님의 그늘에 정식으로 가려질 수 있습니까?
내가 지금 주님의 그늘에 있느냐? 주님의 그늘에 없느냐는 어떻게 구분이 갑니까?
우선 내 마음이 항상 기쁘고, 쉬지 않고 주님을 찾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느냐로 확인할 수 있고 내 마음이 지금 행복 하느냐로 확인할 수 있고,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아직도 이 세상에서 내가 뭔가를 이루고 싶으냐? 그런 마음이 있으면 주님의 그늘에 가려진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일식현상 중에서도 부분일식이 있어요. 태양이 가려지긴 가려지는데 일부는 드러납니다. 금환일식이라고 해서 반지모양으로 해의 가장자리가 동그랗게 보이는 일식도 있고 또 아니면 원이 겹치는 것처럼 일부만 가려지는 것이 있어요.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이렇게 주님을 믿기는 믿는데, 교회 가는 시간, 교회 봉사하는 시간, 기도하는 시간, 세상 사람들의 눈에 가려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이유가 뭐냐? 계속 세상을 향해 고개를 들면서 세상이 나를 봐 줄 수 있는 위치에, 세상의 시선을 모을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기를 원합니다. 그러니까 행복이 없는 거예요.
이 세상에 대해서는 개기일식(皆旣日蝕), '개'자가 모두 '개'자가 아닙니까? 모든 인생의 날들이 싹 다 가려져 버리기를 자발적으로 원할 때, 그리고 오직 사람들이 나를 찾으면 내 앞에 계시는 주님만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될 때에 그때 진정한 행복이 주어지는 겁니다. 아직도 내가 세상에 어필하기를 원하고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한다면 이건 아직 개기일식 인생의 행복을 모르는 것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주님에 의해서 완전히 가려집니까? 말은 하는데 ‘어떻게'는 얘기하지 않아요? 어떻게 가려지는가 하면 우선 1절을 보면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이 ‘사론’이라는 것은 한 90km되는 산지를 말해요. 길이가 90km 폭이 10-18km 되는 그 산지에 수선화나 골짜기의 백합화는 아주 흔합니다. 곳곳마다 너무너무 많이 피어 있습니다. 이 여자는 솔로몬왕의 그러한 사랑의 고백을 통해서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솔로몬의 애인으로 자처하게 되었지만 자기가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이 ‘자아의식’에서 부터 문제가 있는 것이에요. 술람미 여인은 자기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맨날 성경에 근거해서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하면 ‘하나님이 당신을 특별하게 쓰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하고, 내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것하고 같아요? 지금 솔로몬에게는 이 여자가 누구냐 하면 2절에 보세요.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사론의 숲속에 있는 백합화가 아니고 골짜기에 핀 백합화가 아니라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다. 굳이 백합화를 고집할 것이면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라는 겁니다. 솔로몬에게는 그렇게 특별해요.
그런데 본인 자신은 백합화가 널려있는 들판에 한 송이에 불과한 나를 솔로몬이 그렇게 사랑했다는 거예요. 자아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자꾸 세상은 뭐라고 하느냐? 긍정해라, 너는 귀하다. 너는 대단하다. 자꾸 이렇게 자기 자신에게 최면을 걸라는 겁니다. 아니라는 겁니다.
완전히 가려지려면 자아의식이 분명해야 되는데,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아의식이 분명해야 되느냐? 주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겁니다. 어떤 존재입니까? 주님의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그렇게 살 찢기고 피 흘리며 죽어야 될 정도의 존재가 바로 나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된다는 겁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돼요. 이 의식에서부터 출발하는 겁니다.
그리고 둘째, 이것이 바로 제로 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제로 됨이 바로 여기 있는 겁니다. 자아의식에서 제로 되는 겁니다. 자꾸 팽창된 자아의식을 갖지 말라는 거예요.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하는데 뭘 할 수 있어요? 왜 자꾸 거짓말에 속아 넘어 갑니까?
‘하면 돼. 꿈은 이루어져.’라고 하는데 꿈꾸지 말아요. 진짜 꿈같은 소릴 하고 있어요. 그러면 안 되지요. 우리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꿈꾸면 돼요? 하나님이 되게 해 주세요. 자기 인생의 꿈을 더 좋아하는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가를 시험하시기 위해서 하나님 모르는 자들의 꿈도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자아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나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예요. 내 자리로 그게 마땅한 자리예요. 그 이상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고 나서 어떤 일이 있느냐? 여러분, 3절에 “그늘에 감추어진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해 말하잖아요.” 그런데 5절에 보면 결정적인 그늘에 가려지는 비법이 나옵니다.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하게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
‘사랑하므로 병이 생겼음이라’고 하는데 병이 나야 됩니다. 무엇 때문에?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나야 돼요. 사랑 병이 나야 됩니다. 상사병은 아니고 (상사병은 혼자 좋아하는 거니까) 솔로몬이 좋아하고 있으니까, 전신에 맥이 쑥 빠져 버리는 너무너무 좋아서 힘이 다 사라지는, 그럴 정도로 누구를 좋아해 봤습니까? 여러분! 그래서 하도 힘이 없어서 조그만 건포도 한 알 먹으면 힘이 생길 정도로, 기력이 바닥이 돼 버린 겁니다. 지금 8, 9절에 보면 솔로몬이 자기를 향해서 오늘 온다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떨어져 있으면서 그리워하느라고, 솔로몬이 보고 싶어서 병이나 버린 겁니다. 병이. 바로 이겁니다. 이 두 가지.
내가 십자가에 달여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없는 인간이다. 능력도 지혜도 인격도 외모도 모든 면에서 나는 형편없다. 못생긴 분들 들으세요. 못 생겼다고 생각하는 분들 잘 됐어요. 까짓것 십자가에 매달리기 더 좋지요. 뭘 그래요? 예뻐서 나가기만 하면 사람들이 야, 예쁘다, 예쁘다 그래 봐요? 나도 모르게 나를 자꾸 세상에 들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요. 주님의 그늘에 가려지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단 말입니다. 못생겼으면 은혜지 뭘 그래요? 다 포기해 버리고 그래, 날 예뻐할 남자가 누구냐? 날 멋지다고 할 여자가 누가 있느냐? 까짓것 못생긴 김에 하나님의 그늘에 가려져 버리기나 하자. 십자가에 매달려 버리는 겁니다. 죽는 거예요.
죽어라고 돈이 안 벌려요. 잘 됐어요. 난 돈 못 버는 사람으로 정해 버리세요.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겁니다. 이제는 주님의 그늘에나 들어가자.
나는 그런 사람이야! 공부 지질이도 못했습니까? 잘 됐어요. 이번 기회에 아주 공부 못하는 것에 더 지나서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버리자고요. 하는 일마다 안 돼요? 잘 됐어요. 잘 됐어. 까짓것 안 된 김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것보다 안 되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보다 안 되는 일은 없어요.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요. 그것이 내 진짜 모습을 찾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십자가에서 죽어서 이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의 의식자체가 십자가 그늘에 가려져 버려서 제로 된 다음에 병나세요. 하나님을 향해서 하나님 만나고 싶고 살아계셔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고 아버지 옆에 계시며 성령을 통해 내 옆에 와 계신 그 예수님을 만나고 실제로 느끼기 위해서 병나세요. 예수님 그리워하고 하나님 그리워하면서.
이 두 가지가 있으면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와 주시고 나를 만나 주시고, 내 속에서 거하시게 될 때에 이제 드디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라는 고백이 우리 입에서도 나올 겁니다. 베드로가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와~ 달려 왔어요. 이때 베드로가 자발적으로 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아, 사람들아 왜들 이러느냐? 왜 나를 경배하려고 하느냐? 내 안에 그리스도가 행하신 일이다.’라고 뒤로 숨어 버립니다. 주님이 아버지 뒤로 숨고 베드로가 주님 뒤로 숨고 사도바울이 주님 뒤로 숨고 바로 이러한 모습 속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거예요. 사람들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를 볼 겁니다. 가족도 보고 이웃도 보고 또 저처럼 인터넷 방송을 하면 저를 보기도 하지요. 그러나 제 의식은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가려지고 죽어 버리는 거예요. 죽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 너머에 세상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사과나무 그늘에 앉아서 그 열매를 따 먹으며 행복해 하는 이 술람미 여인의 모습처럼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너머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는 ‘날 알아 줘라, 날 알아 줘라’ 고개를 들지 않는 거예요. 여러분, 설교를 해도 그냥 주님께서 내게 시키시는 일이라고 해서 주님 때문에 하고 주님을 향해 설교하는 것과, 주님의 이름으로 설교를 하면서도 세상이 나를 좀 봐 주었으면 하고 하는 것과 다릅니다. 세상이 나를 좀 봐 주었으면 하고 해의 자리에서 달을 넘어서 고개를 내밀면 그때부터 불행이 시작됩니다. 누가 어떻게 했다가 문제가 아니라 나 스스로 불행이 시작되는 겁니다.
‘왜, 안 보나? 왜, 클릭수가 요것밖에 안 되나? 왜, 교인 수가 요것밖에 안 되나? 왜, 돈 벌이가 요것밖에 안 되나? 내가 좀 멋진 차를 타고 다녀야 되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고 세상이 나를 알아주고 세상에서 뻐기면서 다니고 싶어 하고 그런 마음이 시작되면서부터 불행이 시작되고 지옥이 되는 겁니다.
시편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다 치우쳐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뭐가 더러운 자 입니까? 술람미 여인에게 적용시켜 봐요. 술람미 여인이 어떻게 하면 더러운 자가 됩니까? 자꾸 다른 남자 기웃거리는 것이에요. 그냥 솔로몬만 보고 다른 세상 사람들이 나를 보지 못해도 상관없다. 이런 마음이 돼야 되는데. 자꾸 다른 남자 기웃거리고 고개를 내밀고 다른 남자를 보는 겁니다. 마찬가지예요. 자꾸 세상을 향해서 고개를 내미는데 이게 바로 더러운 자가 되는 겁니다. 더러운 자가 되는 것이에요.
다 치우쳐 여호와를 찾는 자가 없되 하나도 없도다. 자아의식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자아의식에. ‘내가 아직 뭘 할 수 있다.’라고 하는데 아니에요. 하나님이 내 삶에 들어오셔서 하시는 만큼 이루어지면 되는 겁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어요? 왜 자꾸 거짓말을 하고 거짓말로 쓴 책들을 읽고 거짓말을 하는 설교들을 듣고 난리들입니까? 속지마세요. 속지마세요.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했더니 됐다? 하나님이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내 모습이 정답입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려 있으면서 뭘 하겠습니까? 밥을 먹을 수 있겠어요? 밥벌이를 할 수 있겠어요? 애를 키울 수 있겠어요?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장가를 갈 수 있겠어요? 아무것도 못해요.
그럼 이제 뭐만 바라봅니까? 십자가의 주님만 바라봅니다.
그런 찬송가 있지요?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 하네’ 왜 십자가 그늘 밑에서 쉬어요? 나무그늘에서 쉬고, 삼성그늘에서 쉬고, LG그늘에서 쉬고, 돈 많은 부모그늘에서 쉬고, 돈 잘 벌고 성공한 아내그늘에서 쉬지? 남편그늘에서 쉬지? 왜 십자가그늘에서 쉬어요? 십자가 그늘만이 쉼이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 그늘에서 십자가만을 바라보는 바람에 십자가에 마음을 다 두는 바람에 세상에 시선이 미치든 안 미치든 상관없어요. 내 마음에 개기일식 현상이 일어납니다. 나는 세상에 아무것도 안 보여도 상관없다. 상관없다. 그리고 주님을 그리워하며 병나세요. 이제는 그 지각을 가지세요.
시편14, 53편에 ‘지각이 있어’라고 하는데 이 지각이 뭐예요? 하나님을 그리워해야 되는 것이 인생의 본분이다. 깨달음이 있다는 것이에요. 아직 그리워하지 않더라도 우러나오는 그리움이 없더라도 내가 하나님을 그리워하지 않고 있구나. 이것만이라도 깨닫자 이겁니다.
십자가에서 매달려 죽은 자아의식을 통해 세상에 나를 보이고 싶어 하는 마음을 제로 되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과 주님만을 그리워하다가 병이 나시면 이제 우리가 찾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병이 나는 것뿐이에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 나선다고 우리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손으로 움켜 쥘 수 있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한 병이 나는 것을 보시고서야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자신을 드러내 주십니다.
8-9절에 그분이 다가오시는 겁니다. 모든 장애를 뚫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실 때 이제 세상과 나는 간데없어요.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세상 속에 있는 나 간데없어요. 구속한 주 만 보이게 되는 것이고, 이러한 개기일식의 인생에서만 참 행복은 주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개기일식의 삶을 원합니다. 자발적으로 주님의 십자가, 십자가의 주님, 그리고 우리 하나님에 의해서 내가 세상에 대해서 완전히 가려지기를 원합니다. 나를 보며 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나를 이끄시는 주님을 보는 그러한 개기일식의 삶이 일어나 참된 행복의 복지의 삶을 누리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