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간 여행
어느 날이었다
어느 날 나는 ‘어느 날이었다.’를 만났어.
충청남도 당진 시골 마을에 ‘북창초등학교’가 있어. 내가 다닐 때는 ‘북창국민학교’였지.
새내기 1학년부터 3학년까지 학교에서 배우는 것들은 늘 새로워서 신기했어.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던 때라
‘국어’는 무슨 이야기책 같아서 좋아하는 과목이었어. 일요일에 책가방을 들고 나선 적도 있다니까. 그만큼 학교에 가는 게 재밌었어.
어럽쇼, 4학년이 되고 보니 ‘특별활동’ 시간이라는 게 있는 거야. 3학년까지는 그런 시간이 없었거든. 처음엔 그게 뭔지 몰랐어. 알고 보니 예체능 분야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걸 선택해서 활동할 수 있는 거였어.
음악, 미술, 체육, 독서, 문예 다섯 개 반에서 선택하는 거야. 음악반, 미술반은 준비물 때문에 제외. 체육은 달리기 실력이 거북이여서 제외, 독서반도 하고 싶었지만, 나는 문예반을 선택했어. 문예반에서는 글짓기를 한다고 했거든. 준비물도 원고지만 있으면 됐고.
문예반에서 작문과 동시를 배우고 썼어. 작문 시간에는 내가 경험한 것들을 썼는데 첫 문장이 늘 ‘어느 날이었다.’였어. ‘어느 날이었다.’로 시작하면 그다음 글 쓰기가 쉬웠거든. 첫 문장이 평범하면 좋은 글이 아니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렇거나 말거나. 마냥 글을 쓴다는 게 즐거웠어.
작문에 재미를 붙일 무렵 동시를 알게 됐어. 문예반 지도 선생님께서 여러 편의 동시를 소개해 주고 쓰게 했거든. 그때 지도 선생님은 나중에 동화 작가가 되신 신동일 선생님이야.
다른 지면에도 이런 과정을 소개한 적이 있어.
선생님께서 읽어주신 동시 중에 제목이 「감」이었던가. 아닐 수도 있어.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으니까. 누가 썼는지 학생 작품이었는지 시인 작품이었는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용은 또렷하게 기억해.
동생이 먹는 감이 먹고 싶어서
업어준다, 해놓고 한 입 먹고
안아준다, 해놓고 두 입 먹고
어느새 동생 손엔 까만 씨만 가득
동시를 듣는 순간 내 심장에 2만 볼트의 전기가 흐르는 것 같았어. 어떻게 저런 동시를 다 쓸 수 있는 거지? 얼마나 강렬했으면 50년이나 흘렀는데 아직도 외우고 있겠어. 한동안 「감」에 꽂혀 비슷하게 흉내를 냈고 혼자 뿌듯해했어. 그때부터야. 시인이 되겠다고 마음먹은 게.
5학년 때는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더 이상 문예반 활동을 할 수 없었어. 점점 글 쓰기에서 멀어졌지. 장장 20년이 넘도록.
20년이 넘는 동안 나는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고, 시를 쓰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었어. 시간은 쉬지 않고 흘러갔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시인이 되겠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으므로 몇 권 시집을 낼 수 있었어.
동시를 다시 만난 건 시 쓰기가 제 자리에서 뱅뱅 맴돌 때야. 선배 글쟁이들에게 물어봤는데 그럴 때가 있다는 거야. 브레이크가 걸렸는지 앞으로 나가지 못했어. 시를 쓰고 싶은데 쓸 수 없는 상황이 힘들었어. 고민하던 나는 문학의 출발점인 북창초등학교 4학년 2반 교실을 떠올렸지. ‘어느 날이었다.’를 다시 만나고 싶었어. 그러면 뭔가 쓸 수 있을 것 같았거든.
긴 세월을 돌아서 동시를 만났어.
더벅머리 소년이 중늙은이가 되어 처음 쓴 동시가 「넌 무슨 운동을 했니?」라는 작품이야.
울퉁불퉁 고구마
알통 고구마
땅속에서 넌
무슨 운동을 했니?
나는 지금 꿈꾸고 있어. 다시 시인이 되겠다는 꿈. 4학년 2반 교실에서 들었던 「감」이라는 동시처럼 멋진 동시를 쓰고 싶다는 꿈.
저것 봐. 내 꿈을 응원하는지 찡긋찡긋 커서가 자꾸 윙크하네. 나는 원고지를 채워나가듯 한 자 한 자 자판을 두드려. 타닥타닥 타다닥……, 신기하게도 모니터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해.
어느 날이었다.
차승호 hosung38@hanmail.net
2004년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8년 《푸른 동시놀이터》동시가 추천되었다. 2020년 《전북일보》신춘문예 동화가 당선되었고. 시집으로『난장』등과 동화집 『도깨비 창고』동시집 『안녕, 피노키오』등을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