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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시인 임영조
이동하(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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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임영조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저 미아리 제4강의실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1965년도의 일이다.
지금은 서라벌고등학교가 차지하고 있는, 미아리 돌산 위의 그 황량한 캠퍼스에는, 부속건물인 대학극장까지 포함하여 단지 세 동의 건물만 서 있었다. 그중 가운데의 3층짜리 빈약한 본부건물 동쪽 끝방이 문예창작과 전용의 제4강의실이었다. 햇볕이 잘 들고 조용한 이 방에서 우리는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이범선, 김구용 선생을 비롯 여러 고명한 시인 작가들의 강의를 경청하고 또, 그분들 앞에서 저마다의 글솜씨를 과시하느라 곧잘 불꽃 튀는 논전을 벌이곤 하였다.
그해 첫 학기 중반쯤의 일이 아닌가 싶다. 미당 서정주 선생님의 시간에 습작시 한 편을 발표하였다. 이건 임영조 얘기가 아니라 나의 얘기다. 예의 제4강의실 분위기에 잔뜩 주눅이 든 채 그때까지만 해도 뒷전에 박혀 소설을 쓴답시고 혼자 끙끙거리고 있던 내가 그 살벌한 합평시간에, 그것도 전날 밤에 졸속으로 끄적거린 습작시를 들고 감히 뛰어든 데에는 그만한 사정이 또 따로 있지만, 그러나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어쨌거나, 복사기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시 전문을 칠판 위에다 직접 판서한 다음 한 차례 낭독까지 해야 하는 그 일이 나로서는 실로 끔찍스러웠다. 떨리는 손으로 어찌어찌 판서는 했으나 그 다음과정이 낭패였다. 목구멍이 숫제 얼어붙어버린 탓이었다. 그때 선뜻 나서서 나를 대신해 시원스레 낭독해 준 사람이 있었다. 그가 동급생 임세순, 훗날의 임영조였다.
내가 이때의 일을 굳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까닭인즉 그 이전까지는 피차 데면데면한 사이였기 때문이다. 얼굴 알고 이름 대충 기억하는 정도였다는 얘기다. 이 말은 또한, 4강의실의 내로라는 문재(文才)들 속에서 그나 나나 그다지 드러나 보이지 않던 존재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의 임영조를 말하자면, 용모나 복장이나 행동거지나 간에 별스럽달만한 구석은 전혀 없었다고 회상된다. 온통 씨끌짝한 괴짜들 속에서 오히려 얌전한 범생 같았다고나 해야 하리라. 굳이 말하자면, 비쩍 마른 몸매에 균형 잘 잡힌 동안과 그리고, 훗날 미당 선생이 ‘耳笑’라 부르신, 귀까지 따라 웃는 듯한 특유의 웃음이 기억날 뿐이다. 하여간, 그 일을 계기로 우리는 서로 마음문을 열기 시작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해가 바뀌어 2학년 1학기를 끝내고 그는 입대하였다. 내가 임영조의 어떤 면, 문학도로서의 앞모습에 가려져 있던, 그런 점에서 그의 진면목이랄 수도 있는 생활인의 모습을 접하게 된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는 진작부터 마포구 공덕동의 뚝방촌에서 초등학교 아이들의 과외선생을 하고 있었던바 입대하면서 그 업을 나에게 고스란히 물려주었던 것이다. 거의 수직에 가까운 나무계단을 기어올라야 하는, 허리도 펼 수 없는 다락방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무척 성실하게 가르쳤으므로 아이들의 숫자는 열 명이 넘었고, 학부모들의 신임도 그만큼 도타웠던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런 여건일망정 수입은 괜찮아서 학비를 충당하고도 약간의 저축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가 일구어 놓은 일터를 그대로 인계받았지만 고작 서너 달이나 버티었을까, 곧 손들고 말았다. 가르치는 일의 어려움을, 그 학동들에게서 진작 경험했던 셈이다. 그 올망졸망한 눈망울들 앞에서 도무지 속수무책이던 나는 새삼 전임자를 재평가하는 마음이었다. 예의 다락방을 철수하던 날, 주인여자가 들려주던 말이 기억난다. 나의 무능을 지적하는 대신 그녀는 ‘임씨 학생의 야무짐’에 대해 한바탕 사설을 늘어놓았던 것이다. 그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다루는 일을 얼마나 야무지게 잘 해냈으며, 부엌 없는 다락방에서의 자취생활 또한 얼마나 절제 있게 잘 해냈는지에 대해 그녀는 거듭 상찬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와 나는 참 비슷한 처지였다. 내가 경상도 경산 출신 촌놈이듯이 그는 충청도 보령 출신의 촌놈이었다. 없는 집구석에 형제간 많기로도 처지가 같았고, 그런 집안의 장남인 점도 피차 그랬다. 동갑내기들에 비해 대학을 몇 해씩 지각 입학한 것도 그렇고, 서울바닥에서 어디 한군데 기댈 곳 없는 신세인 것도 그러하였다. 등 뒤에 줄줄이 늘어서있는 동생들 생각하면 매양 어깨가 축 처지는 신세이면서도 엉뚱하게 시니 소설이니 하는, 먹고사는 일과는 도무지 인연이 먼 동네서 얼쩡거리고 있는 점이 또한 그랬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도 나와는 다른 면모가 분명 그에게는 있었는데 말하자면 위의 경우에서 그 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자유분방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순진무구하다고나 해야 할지 하여간 환상을 좇는 문학청년의 모습만이 아닌, 성실하고 야무진 생활인의 모습 같은 것을 그는 이때 이미 나에게 보여주었던 것이다.
2
37개월간의 군 생활을 거뜬히 치루어내고 우리 곁으로 되돌아온 그는 변함없는 세상살이의 고달픔 가운데에서도 70년대 벽두 등단의 꿈을 이루어냈다. 1970년도 [월간문학] 제6회 신인상 시 당선과 이듬해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이 그것이다.
이때는 내가 마침 월간문학사(한국문인협회) 편집부에 근무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바로 곁에서 그의 기쁨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쁨에 합당한 술자리 한번 제대로 가져본 기억이 없는 게 이상하다. 아마도 세상살이의 신산함 때문에 피차 마음의 여유가 없었거나 아니면, 내 쪽이 더 다급했던 나머지 그냥 지나쳤거나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치 고달팠던 세월이었다.
그랬다. 제대 후 출판사 잡지사 등을 한 해가 멀다고 전전하던 그가 지금의 직장인 태평양화학 홍보실에 닻을 내린 70년대 중반까지의 기간은 아마도 그의 삶에서 가장 힘겨웠던 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울러,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고도 생각된다. 위에서 얘기했던대로 시인의 꿈을 이루었을 뿐더러, 고인이 된 임홍재 씨를 비롯 정대구, 이인해 제씨와 함께 ‘육성동인’을 결성하여 사화집을 내는 등 시작활동을 호기있게 펼쳤었고, 그리고 결혼하여 일남일녀를 둔 것, 잠실 아파트단지에 비록 작은 평수나마 완벽하게 내집 마련을 한 것 등등이 모두 이 무렵 곧 70년대 중반을 전후하여 있었던 까닭에서이다.
잠실아파트 얘기가 나왔으니 덧붙이는 말이지만, 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처지이던 나 역시 같은 무렵에 그 동네로 이사를 했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각선으로 바라보는 위치였다. 한동네 사람이 된 것이다. 그 몇 년 후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잠실을 떠났던 두 집은 그로부터 10년쯤 뒤인 80년대 중반에 지금의 과천에서 다시 한동네 사람이 되었다.
지난 70년대는 정치 사회적으로도 억압과 긴장이 점증하던 연대이다. 그런 상황 아래서, 지금 되돌아보면, 우리의 개인사적 삶에 있어서도 가장 숨 가빴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웃해 살면서도 서로를 들여다볼 여유 없이 저마다 제몫의 인생을 살아내기에 급급해 하던, 어찌 보면 더없이 삭막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느새 불혹의 나이로 다가서고 있었던 것이다.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아침마다 창황히 집을 나섰다가 늦은 시간 귀갓길에서 축 처진 어깨를 하고 흐느적거리는, 갈데없는 월급쟁이의 모습을 이따금씩 서로에게 들키곤 하였다.
박대통령의 피살, 광주 민주화운동 등 연이은 충격과 더불어 80년대가 왔다. 그 벽두의 혼란 속에서 나는 참으로 엉뚱하게도 남도 끝 목포로 이사를 갔다. 낯선 고장에서 뜻밖의 직장을 얻었던 것이다. 망설임 없이 이삿짐을 꾸리는 나의 태도를 가장 못마땅하게 바라보던 사람 중 하나가 임영조였다. 그의 말인즉 이랬다. 다른 친구들은 서울바닥에서 죄다 잘도 버티고 사는데 이형은 도대체 어디가 못나 그 멀고 낯선 곳까지 식솔들 끌고 밥 빌러 가야하는 거냐, 말하자면 그런 시선이었다. 하기사, 남도 천리를 향하는 우리 부부의 발길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하필이면 때늦은 눈보라가 맵던 2월 마지막 날, 우리를 떠나보내던 그와 그의 가족은 꽤나 측은해 하는 얼굴들이었다.
아마도 그런 심정에서였으리라. 그해 여름이던가, 휴가를 이용하여 그가 가족을 이끌고 목포로 내려왔다. 두 가족은 얼씨구나 하고 함께 피서길에 올랐다. 그래서 홍도에서의 3박4일을 유감없이 보냈다. 똑같이 일남일녀를 둔 처지라 썩 잘 어울리는 가족동반여행이었다.
그런데, 이 여행길에서 그가 난데없이 난(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잘 알려져 있듯 홍도는 빼어난 자연경관으로도 유명하지만, 못지않게 풍란의 자생지로도 이름이 높다. 한번은 그가 무슨 귀중한 거라도 얻은 양 비닐봉투에 담아온 것을 내게 보여주었다. 섬 주민에게서 산 건데 이게 바로 홍도풍란이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실소하였다. 목포 거리에서 무시로 보곤 하던 석란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작은 실수를 두고 우리는 한바탕 웃었고, 그러고는 그 일이나 난 따위에 대해서는 나는 아주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로부터 두어 해쯤 뒤의 일이다. 서울길에 과천 그의 집을 찾았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베란다에 층층이 늘어놓은 많은 난분들을 보았던 것이다. 그런 쪽엔 도무지 관심이 없던 나는 뜻밖의 광경에 입만 뻥하니 벌렸을 따름이었다. 그는 대단한 자부심 같은 것을 가지고 나에게 이것저것들을 설명하였다. 다양한 품종에도 새삼 놀랐지만, 그것들의 값에는 더 놀랐다. 듣고본즉 그는 이미 난에 깊숙이 빠져들어 있었다. 기왕 거기에 털어 넣은 돈도 돈이려니와, 무엇보다 거기에 기울이고 있는 열정이 나를 두고두고 놀라게 만들었다.
그 놀라움의 감정이란 말하자면 이런 것이었다. 이렇듯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한 가정 건사하기에도 실상 숨이 찬 노릇인데 우리 처지로 말하자면 거기다가 시니 소설이니 하고 또 무시로 끄적거려야만 직성이 풀리지 않던가. 그런 신세라는 점에서는 그나 나나 피장파장일 터. 사정이 그런데도 불구하고 도대체 그의 어디에 이런 데까지 기웃거릴 여유가 남아 있더란 말인가? 말하자면 나로서는 그 점이 실로 기이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이는 아마도 시인기질의 일단이 아닐까 하고, 나는 나름대로 이해는 하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로서는 왠지 그의 난취미가 탐탁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술이나 도박 같은 데 빠지는 것보다는 얼마나 고상하냐는 생각-실인즉 이 생각은 부인 쪽의 것이지만-도 가능하나, 그렇다고는 해도 나로서는 여전히 엉뚱한 호사취미로 보였다. 내가 아는 임영조의 모습과는 어딘지 걸맞지 않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어딘가 걸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나의 느낌-그러니까 어느 정도 허세이거나 도피심리 같은 것이 작동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던 나의 생각은 대체로 적중하였다. 그는 벌써 여러 해째 시 쓰기와는 담을 쌓은 채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연보를 살펴보면,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중반에 이르는 약 10년 가까운 시기가 바로 이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생활인의 차원에서는 변함없이 야무지고 성실했던 반면, 시인의 차원에서는 무슨 까닭에서였는지 잠시 돌아앉아 있었던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난에 열중한 채 허장성세(?)를 부리면서 말이다.
그러나 또 달리 생각할 수도 있다. 한 포기의 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통해 기실 시적 영혼의 한 차원 더 높은 성숙과 그것의 눈부신 개화를 은밀히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첫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를 때늦게 세상에 내놓은 1985년도부터 지난 해 간행한 세 번째 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까지 이르는 최근 대여섯 해 동안 그가 시 쓰기에서 보여준 놀라운 정력은 가위 권토중래의 기세였음을 보아도 그 점이 실감된다.
그래, 바로 그것이 임영조의 진면목인 것이다. 난에 대한 관심을 죄다 호사취미로 치부할 일은 아니라고 해도, 그만은 그런 데에 오래 정신을 팔고 있을 사람이 아닌 것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임영조는 그렇다. 사는 일에 열중하거나 아니면 시 쓰기에 열중하거나이다. 또는, 동시에 그 둘을 다 감당하겠다고-그것도 완벽하게!-전전긍긍하고 있거나 인 것이다. 실은 그 두 가지를 다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는 점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리라.
요즘 그의 집 난들을 보면 주인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는지를 실감할 수 있다. 한때 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고가의 난들이 이제는 길섶의 흔한 풀처럼 방치되고 있음을 금방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러 대엽풍란의 꽃을 자랑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은 이미 거기에 머물고 있지 않다. 말일까지 세 편을 더 만들어야 되는데-라고, 그는 말한다. 한번 날아오른 시혼은 좀처럼 날개를 접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다.
3
빈틈없이 세련되고 성실한 생활인의 모습과 어딘가 순진하고 마음이 여린 시인의 모습-이 두 얼굴을, 나는 임영조에게서 너무나 자주 발견하곤 한다. 어찌 보면 다분히 상충될 것도 같은 이 양성의 기질이, 그러나 그에게는 조금도 어긋남 없이 혼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성실한 생활인이며 유능한 직장인이다. 안에서나 밖에서나 매사 깔끔하게 처신한다. 시인 또는 문사 기질이라고 흔히 말하는, 어딘가 엉뚱하다거나 혹은 반사회성 같은 것을 드러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가정에서는 식구들의 옷이나 생필품 같은 것을 직접 사 나를 만큼 충실한 가장이며, 직장에서는 관장하고 있는 일들을 매양 빈틈없이 추진해내는 중견간부인 것이다. 도무지 흠 잡을 데 없는 처신이요 솜씨여서 때로는 그가 시인이라는 사실마저 잊어버리게 한다.
그러나 그는 역시 타고난 시인이다. 실천적 생활인의 그것을 넘어서는, 그래서 갈데없는 시인의 품성이랄 수밖에 없는, 그런 기질의 소유자인 것이다. 일테면, 그는 무척 마음이 여리다. 아무리 작은 경우라도 신세진 것이 있으면 꼭 갚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런 사람이다. 밥 한 끼, 술 한 잔이라도 그냥 지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못할뿐더러 늘 서둘러서 앞장서는 사람이다. 그는 또, 사람을 무척 좋아한다. 누가 찾든 거절할 줄을 모른다. 그의 잦은 술자리는 그 당연한 결과다. 덕분에 나는 바깥세상 정보를 늘 그에게서 얻어 챙기는 편이다. 그는 또, 좌중의 화제를 곧잘 독점하곤 한다. 말솜씨도 솜씨지만, 세상사에 대한 그의 다양한 관심과 섬세한 눈, 그리고 뛰어난 기억력 때문에 매양 귓맛이 난다. 그래서 그와 마주하고 앉으면 누구나 마음이 편해지기 마련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만남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으리라.
요즘 우리는 과거사보다 미래사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한다. 5년 후 또는 10년 후에는 어떤 식으로 살 것인가에 대해 열심히 떠들어대는 것이다. 몇 가지 점에서 곧잘 의견의 일치를 보곤 한다. 그때 가서도 굳이 이놈의 오염된 도시에서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 어딘가로 소개를 가더라도 기왕이면 한동네를 찾아보자는 것 등이다. 그러고 본즉 우리는 어느새 50줄에 들어와 있음을 깨닫게 된다. 저 60년대 중반, 황량한 미아리 돌산 위의 캠퍼스에서 처음 만나던 때가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저만치 가깝게 보이는데도 말이다. 그에게서 동안과 耳笑를 이제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대신, 깊이 패인 주름들과 더 자주 깜빡이는 눈, 그리고 세 권의 시집을 나는 본다. * (시와시학, 1993.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