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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2:1-23) 이진법 삶의 “우연히와 마침”
오늘 읽은 룻기 2장 말씀으로 <이진법 삶의 “우연히와 마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본문 3-4절에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제 룻이 시어머니를 따라 이스라엘 땅 베들레헴으로 이민을 왔습니다. 친정집 다 버리고 이민을 왔는데 룻의 비참한 삶이 시작이 됩니다. 아시는 대로 이스라엘에서 이삭을 줍는 자들은 빈민자들에게 허용된 것입니다. 율법이 빈민들에게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는 한 방법으로 ‘이삭을 줍도록 내버려두라’고 하는 규정이 있는 것 다 기억하실 줄 압니다. 시어머니를 따라서 유대 땅으로 와서 밭에서 이삭줍기를 시작하는 그런 빈민의 삶이 룻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시어머니를 통해서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친정집을 떠날 만큼 그 하나님을 사랑하고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없는데 남편이 죽었는데 그렇게 까지 하지 않아도 될 것인데 하나님이 좋아서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될지라."라는 고백과 함께 이스라엘 땅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을 통해서 앞뒤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그렇게 좋아하는 하나님을 통해서 룻이 자기의 삶을 개선시키려고 한다든지, 뭔가 좀 향상시키려는 바람이나 소원 어떠한 삶을 더 나아지게 하려는 계획이 있는 것처럼 보이질 않습니다. 그 하나님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 낯선 땅에 와서 하나님에게 뭔가를 바라는 기색이 없습니다. 그냥 자기에게 처해진 현실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평범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생계를 위해서 지금 나오미와 룻의 재정형편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이삭을 줍는 것입니다. 그런 삶에 대한 어떤 생각과 행동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겁니다. 또 바라는 것이 룻에게 가능했겠나 싶어요. 시어머니를 통해서 시댁의 어른들이나 남편이나 시아주버니를 통해서 룻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발견한 것은 어떤 하나님이었습니까?
룻은 주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전부 가져가시는 하나님만 보았습니다. 가져가심으로 비로소 발견되는 하나님. 시어머니 나오미가 남편 잃어버리고 아들 둘 잃어버리고 재산 다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뚜렷하게 발견하는 모습을 보고, 그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뭔가를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을 본 적이 없는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이 좋아서 여기까지 따라 왔으므로 룻이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개선하려고 하는 노력을 할 리가 만무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도 다 경험이 있어야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간증하잖아요. 하나님께 기도했더니 '무엇을 이루어 주셨다. 이루어 주셨다.'라고 간증을 하는 것은 경험이 있어서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바로 이렇게 시작하는 룻의 삶속에 보아스가 끼어들게 됩니다. 시아버지 엘리멜렉의 친족 중의 아주 유력한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땅도 많이 있었고 능력 있는 보아스가 끼어 들어오게 되면서 우연히 룻이 보아스의 밭에 이삭을 줍기 위해 가게 되고 또 룻이 이삭을 줍는 바로 그 때, 마침 베들레헴 시내에서 자기 밭 있는 곳으로 보아스가 곡식을 베는 사람들을 보기 위해서 들렸다가 룻과 마주치게 됩니다. 결국 이러한 만남이 발단이 되어서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보아스가 룻과 결혼해서 오벳을 낳고 오벳이 이새를 낳고 이새가 다윗을 낳지 않습니까? 결국 다윗왕의 증조할머니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는데 등극이란 말을 써도 되지 않겠어요.
빈민으로 이삭줍기로 이민 와서 사는 삶, 오직 하나님이 좋아서 그러나 그 하나님께 무엇을 바랄수도 없는 상태에서 빈민들이 하는 일을 자기도 그대로 한 것뿐입니다. 특별한 야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긍정적인 삶의 비전을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고, 삶의 무슨 목적이 이끄는 동기로 이끌려졌던 것도 아니에요. 보통 자기 수준의 삶을 사는 빈민들이 하는 것을 그냥 했을 뿐인데 이 행동을 통하여 결국 왕가의 가문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보여주고 있는 이진법 복음의 삶이에요. 우연히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룻이 이삭을 주우러 왔을 때 바로 그 때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 밭으로 오게 되고 두 사람이 만나게 되는데 우연히와 마침이 계속 반복되는 것입니다.
이진법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이 말이 반복되는 겁니다.
'우연히, 마침. 우연히, 마침. 우연히 때마침' 이것이 반복되면서 하나님이 하시는 삶이 진행되는 것이에요. '우연히' 라는 말은 룻의 입장에서 '우연히' 라는 것입니다.
룻이 다 사전조사를 해서 에리멜렉의 친족 중에 계대결혼을 할 수 있는 유력자가 누군가 조사해서 보아스를 찾아내고 보아스의 밭을 꼲아보고 노리고 겨냥해서 간 것이 아니라, 그냥 그 많은 밭 중에 이삭을 주우러 간 것이 보아스의 밭에 간 것인데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입니다. 룻의 입장에서는 계획이 없었으므로 '우연히' 라고 말합니다마는 우연이 어디 있습니까? 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요. 왜 하필 보아스가 그때에 나타납니까?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 계획도 없습니다. 소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연히, 때마침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우연히, 마침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계산해서 이끌어 가시는 것이에요. 이 이진법 복음의 삶에 아주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지금 룻은 어떤 상태입니까? 자기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 무엇을 간구할 수도 없는 그러한 출발점에서 신앙을 출발했어요. 저는 이 룻기를 읽으면서 "야, 참 기독교가 이런 하나님의 신앙을 말하는 것이로구나."라고 하는 것을 너무너무 새삼스럽게 느끼게 됩니다. 주시는 하나님으로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룻의 신앙을 보면.
여러분! 예수님 때를 한번 비교를 해 봐요. 병자를 고치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기적을 수없이 행하셨습니다. 다 봤어요. 그러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이 깡그리 뺏어 가시는 십자가사건이 일어날 때 모두가 다 떠나갑니다. 기적을 보고 온갖 주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 떠나고 마는데 이것으로 전도되는 것이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예수님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고 당신의 신분을 드러내시고 메시야 되심을 드러내시고 그래서 주님이 계속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나를 믿어라 나를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행하는 일을 보고 나를 믿어라 왜냐하면 내가 행하는 일들은 내가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것이니까, 아버지가 나를 보내셨다는 사실을 믿어라, 믿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요. 결국 성령님이 임하시고 성령님이 마음을 포로 잡듯이 붙잡으셔서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지, 기적을 보고 오는 사람이 진짜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뭐냐? 이 세상의 일을 해결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기를 소원하는 동안 하나님은 못 만납니다. 절대 못 만납니다.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것은 병을 고쳐주니까 만납니다. 그러면 의사선생님의 아내 되시는 분은 의사선생님을 왜 만납니까? 병 고쳐주니까? 아니 상관없어요. 그래서 만나는 게 아니잖아요. 그냥 그 의사선생님 자신을 만나는 겁니다. 인간으로서. 마찬가지에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주시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 뺏어 가심으로써 하나님만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 만 가 져 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에 받아들이는 하나님이 진짜 기독교의 하나님이요. 기독교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게 받아들이고 그냥 내 처지에서 바라는 것도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생계를 위해서 이삭을 주운 것뿐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의 소원이 있으시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시고, 하나님의 꿈이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 그 룻의 발길을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시고, 그리고 결혼하게 하시고 이삭을 줍는 그 순간에 보아스의 마음을 격동시키셔서 움직이셔서 그 때 밭으로 오게 하시고 만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것 경험해 보세요? 우리가 이렇게 룻처럼 완전히 제로 되지 못 했더라도 어느 정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사실 이런 경험 많이 하게 됩니다. "진짜 목회를 하면서 내가 배운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교회에서 경험한 목회적인 이미지를 갖지 않고 그냥 하나님께 내 마음을 제로로 놓고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얻은 답이 사실은 이 선교회입니다. 제 입장에서 보면 우연입니다. 선교회를 꿈꿔 본적이 없어요. 생각해 본적이 없어요. 서초동에 왜 오게 되었느냐? 저로서는 우연입니다. 여기 서초동을 계획해 본적이 없어요. 서울시내 어디쯤에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어요. 다 이게 우연이지요. '마침'이라는 이 단어를 어떻게 표현해야 될까요? 또 여기 처음에 아무도 없을 때 일을 시작하게 되신 분, 같이 몇몇 분이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 분들, 영락교회 계시던 분들, 저랑 한번 만나서 대화도 식사도 한번 해보지 못한 분들, 또 밴쿠버에 자녀가 유학 왔다가 오셔서 우연히 만났던 분들, 그런 분들이 여기서 이런 일을 같이 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우연히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생 살면서 하는 일은 뭐냐? 그냥 룻이 다 뺏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저 뺏어 가시는 하나님을 좋아하려면 내가 내 자식을 좋아하고 내 가정을 좋아하고 내 사업을 좋아하면서는 하나님 좋아할 수가 없어요. 내가 사랑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도저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 전개될 때가 많기 때문에, 그것들을 좋아하고 있는 한 도저히 하나님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능력과 우리의 지혜와 우리의 판단 가지고는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는 삶속에서 내가 좋아하고 내가 사랑하는 것들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면 하나님과 동행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 말고 모든 것을 좋아하고 그것을 내 마음에 품으려고 해서 계획하고 걱정하고 근심하게 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완전히 죽고 하나님만 좋아하는 것을 계속해 나가는 겁니다. 매일 같이.
그러면 우연히, 마침이 반복되면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우연히 일이 시작되고 마침 누구를 만나게 되고 마침 일이 시작되게 되고 계속 우연히와 마침이 반복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계획한 바가 없고 나는 구상한바가 없고 바랐던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고 하나님이 소원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들이 계속 반복해서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어제 주일날 "무서운 암탉"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했습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말이 여자를 탄압하는 말같이 보이지만 심리학적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여자의 어떤 신비한 능력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그런 말이 나왔다는 말을 했습니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인귀속을 자꾸 타인에게 돌리려고 하는 것이 불신앙으로 다른 사람의 힘을 막강하다고 믿기 때문이라는 말씀 드렸어요.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내안에 하나님을 모시면 됩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빈민의 삶을 시작하게 됩니다. 룻이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 밖에는 할 것이 없고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상태에서 그 빈민의 처지에 대해서 그냥 남들이 하는 것처럼 이삭을 주운 것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것 밖에는 한 일이 없습니다. 그 하나님을 모시고 있었는데 인류를 구원하시는 메시야가 태어나시는 계보 안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스라엘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 다윗왕의 계보 안으로 끼어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기의 당대에서도 보아스 유력자와 결혼하여 아주 유복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이게 지금 다 뭐예요? 룻은 하나도 계획한바가 없어요. 하나님이 그렇게 계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자는 거에요. 우리 현실에 문제가 생기고 가정에 문제가 생기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자녀들이 문제가 생기고 이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내 마음에 하나님을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모셔 들여서 지금 주어진 환경과 하나님이 맞닥뜨려지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시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으십니다. 너무 막연해 보여요? 제가 어저께 그런 예를 말씀드렸어요. 대한민국에 대운하를 만드는데 국론이 분열된다. 국론이 분열돼서 난리가 날 때 TV를 보다가 "내 잘못이다. 내 잘못이다. 내 탓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웃는다고 했어요.
대운하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는 것이 ‘내 잘못이다.’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웃을 것이다. 너무너무 관계가 없으니까 주제넘은 발상이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왜 이 나라의 대운하, 큰일들이 태 목사와 무관하겠습니까? 여러분, 모압 땅 이방 여인 룻과 다윗 왕이 태어나는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무슨 관계가 있겠어요? 모압 땅에서 살고 있는 룻이 어떻게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겠습니까? 그것이 가능합니까?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아무 상관이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은 계획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 계획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만 좋아해서 마음에 담으면 되는데, 우리가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렇게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무슨 계획이 있느냐? 그래도 사람이 할 일은 다 해야지."라고 이 따위 말들을 해대고 있는 겁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나는 아주 그냥 그 입을 솜으로 콱 틀어막아 버리고 싶습니다. 꼭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면 하는 말들이 ‘그래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은 다 해야지?’라고 하는데 뭘? 뭘 다 해요?
모압 땅의 룻이 다윗 왕가의 증조할머니가 되기 위하여 인간으로서 한 일이 뭐가 있었겠습니까? 뭘, 뭘 할까요? 다 망쳐 놓는 겁니다. 하나님이 계획하고 계신 일들이 다 망쳐지고 있는 겁니다. 아니 룻에게만 그런 계획을 갖고 계시겠어요? 나 자신,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그런 계획 안 갖고 계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지요. 문제는 우리가 룻처럼 제로 된 상태로 아무것도 하나님께 바라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상일을 위해서 "이랬으면 좋겠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갖지 않고 다 뺏어 가신 하나님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남편 뺏어가고 시아버지 뺏어가고 시아주버니 뺏어가고 시댁의 재산 다 뺏어가고 다 가져가신 하나님만 보면서 하나님을 전도 받았어요. 그 하나님 좋아하려니 뭘 바라서 될 일이 아니거든요. 다 뺏어 가시는 하나님이니 그냥 하나님만 좋아했는데 이것이 제로 되는 겁니다. 세상에 대해서 제로 되고 하나님만 마음에 모셔 들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1되셔서 하나님이 켜지셔서 하나님의 계획이 켜지고 하나님의 소원이 켜지고 하나님의 뜻이 켜지고 룻을 우연히, 마침. 우연히, 마침. 우연히, 마침... 계속 될 거예요. 결국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된 것 우연히, 마침이 아닙니까?
룻으로서는 꿈도 꾼 적이 없고 이스라엘 땅으로 나오미를 따라 올 때 거지로 왔습니다. 거지로 오면서 이스라엘 왕가가 나로부터 나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겠습니까? 했으면 또라이지요. 했을 리가 없지요. 그러나 하나님 한 분 가졌어요. 그리고 룻을 향한 하나님의 소원이 그렇게 이루어져 갑니다. 여러분! 보아스가 결혼을 해야 될 사람이었으면 이스라엘 땅에 여자가 지천입니다. 아니 그 여자들 중에 하나 구하지 왜 하필 이방 땅에서 온 여자와 결혼을 합니까? 모압이 대한민국 같아서 딱 갔더니 동양적인 사람으로 생겨서 마음이 혹했던 것도 아니고 다 셈족이고 같은 족속들인데 그 족속이 그 족속인데 이게, 이게 이상한 것이지요. 이게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십니다. 내 형편 다 알고 계십니다. 지금 굉장히 어렵지요? 어려우시지요? 그러나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세요. 그저 다 갖고 가시는 하나님,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갖고 가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마음 깊이깊이 좋아하시고 사랑하시고 하루하루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살아가세요. 어떤 사람 그런 분들 계세요. 이전에는 잘 살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잘 못살아요. 그러면 이전에 잘 살았던 그 때를 자꾸 생각하시는데 그러지 마세요. 지금의 못 사는 사람으로 그냥 살아가는 거예요. 룻이 빈민으로 이삭 주우러 가는것처럼, 세상의 눈에 어떻게 보이던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 지금 내 형편이라면 그래,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려니 하고 이 형편에 맞게 살아가세요. 하나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으십니다.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이진법 복음의 삶에 우연히와 마침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