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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2:19-23) 왕의 빚쟁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중심으로 <왕의 빚쟁이>라고 하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왕의 빚쟁이'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미국이 국가 부도의 위기가 올지도 모른다고 하여 우려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빚이 천문학적 숫자로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언제 미국이 경제적으로 부도가 날지 모른다고 하는데 우려로 끝나면 좋겠습니다. 어쨌거나 미국이 국가부도의 우려가 현실이 된다고 하면, 우리나라에도 결코 좋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므로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제1의 채무국 역시 미국이었습니다. 그러나 UN에서 공식적으로 조사할 때 미국을 제1채무국으로 넣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그 자체 내의 국가 생산력이 다른 나라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월등하기 때문에, 그 빚이 단순히 빚의 의미로 받아 들여 질 수가 없어서 채무국 1위는 항상 브라질 쪽으로 넘어 갔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상황이 점점 더 악화되어서 그런 얘기를 할 수 없게 되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경제적으로 부도가 날수도 있다는 말 자체가 나온 현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할 상황 아니었습니까? 빚쟁이가 채무국이 되었다는 것이에요.
여러분! 오늘 제목이 ‘왕의 빚쟁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그 옛날에 누구라서 왕에게 빚을 주는 사람이 있었겠습니까? 그 권력과 그 부와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왕에게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더 많이 갖고 있으면 왕의 빚쟁이 위치에 설 수 있겠습니까? 도저히 불가능한 얘기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그 옛날로 돌아가서 말하자면 신앙인은 그 옛날의 용어로 오늘의 우리들의 신앙인의 삶을 말한다면, 왕의 빚쟁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왕에게 조차도 꾸이지 않고 꾸어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포로로 잡혀온 집안의 후손인 모르드개가, 왕에게 그 생명을 빚지게 만들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스더서는 소설형식으로 하나님이 소설을 써 내려가시는 겁니다. 소설의 이야기처럼 진짜 우연한 사건과 일들이 이렇게 서로 톱니바퀴 맞아 들어가듯이 맞아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어요.
오늘 사건은 대제국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 왕의 목숨을 모르드개가 구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왕이 모르드개에게 자기의 목숨을 빚지는 자가 된다는 얘기입니다. 페르시아라고 하는 나라 아시잖아요. 127개의 도로 나누었어요. 지중해서부터 인도까지 그리고 남쪽으로는 구스 에티오피아로부터 북쪽으로는 흑해까지 그 넓은 대륙과도 같은 이 제국의 왕이 일개 하급관원에 불과한 모르드개, 포로로 잡혀온 집안의 자손인 이 모르드개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을 빚지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의 소설은 우리의 현실이에요. 이런 말은 기억해 두시지요. 여러분! 하나님의 소설은 우리의 현실입니다. 당신 마음대로 작가 마음대로지요. 그러나 그 하나님의 소설은 픽션(허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로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의 현실로 나타나는 소설 속에서 모르드개가 왕의 빚쟁이가 됩니다. 그 목숨을 살려주는 빚쟁이가 되었다는 겁니다. 왕의 침실에서 시중을 들고 있는 두 내시가 왕을 모반하여 암살하려는 계획을 숙의하는데 모르드개가 듣게 됩니다. 기가 막혀요. 아니 그 큰 제국의 왕을 죽이려고 하는데, 어떻게 모르드개 같은 힘없고 빽없는 사람이 특별히 몰래 숨어들어갔다가, 우연히 듣게 된 것도 아니고 자기가 있어야 될 자리 성문에 앉아 있는데 어떻게 그런 얘기를 듣게 되느냐는 겁니다. 무슨 모반을 이렇게 엉성하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거나 하나님의 역사 아니었겠어요? 모르드개가 찾아가서 그 사람들의 숙의 장면을 본 게 아니라, 모르드개가 들을 수 있는 곳으로 하나님께서 둘을 데려와서 모반을 숙의 하도록 만드신 거예요. 그러니까 앉아 있다가 들은 겁니다.
두 내시가 누군가 봤더니 이 문을 관장한다고 하는데 이것은 궁궐 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샤프'라고 하는 히브리어 단어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면 '왕실의 침실 문'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왕의 침실을 관장하는, 마치 느헤미야가 술 관원으로서 왕의 측근이었던 것처럼 측근 중의 측근들이었을 겁니다. 이 사람들이 왕을 죽이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까짓 것 문제가 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아니 침실에서 시중드는 내시가 왕을 죽이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모르드개가 듣는데 와서, 그런 역적모의를 숙의 하느냐는 겁니다. 모르드개가 듣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왕후 에스더에게( 질녀) 알려 주고, 에스더가 왕에게 얘기해서 불러다가 내시들을 내사하고 조사한 결과, 사실인 것이 확인이 되어서 그들을 죽이고 왕이 살아남고, 그리고 이 이야기를 궁중일기장에 기록해 놓습니다. 궁중 문서에 기록을 해 놓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다 잊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왕을 빚쟁이로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자,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향한 특별한 계획과 섭리를 진행 중에 계십니다. 누가 원한 것도 아니에요. 읽어 가면 읽어갈수록 나타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본문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절을 해야 됨에도 절을 하지 않는 그런 모습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라’는 율법에 충실한 신앙인이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가 있습니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지금 그들이 주도권을 쥐고 살 수 있는 아무런 영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하나님께서 주차장에서 끌고 나오시는 인생의 차를 몰고 가시는 가운데 이들은 계속 올라타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단 하나님께서 몰고 가시는 인생의 차를 올라타게 될 경우에 나타나는 특징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바로 왕의 빚쟁이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을 우리가 믿고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뭘 뜻하는 것이냐? 베드로전서 2장9절에서 베드로가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라고 말한 것처럼 여기서 '왕 같은 제사장'이란 말이 나옵니다. 절대로 하나님께서 주차장에서 몰고 나오시는 차를 타는 사람들 그 사람들은 왕에게 조차도 빚쟁이로 만들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에스더가 자기의 종족과 민족에 대하여 자기 출신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모르드개가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것은 뭘 뜻하느냐? 모르드개가 느끼기에 아직 유대민족에 대한 아하수에로 왕의 생각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느낍니다. 변방에 위치하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에요. 유대나라가 가까이 있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 멀리 떨어져 있는 거리를 하나님께서 단 한 번의 사건을 통해서 완전히 뒤바꾸어서, 아하수에로 왕의 목숨을 건지게 만들어 버리십니다. 지금 유다백성이 구원을 받으려면 아하수에로 왕의 덕을 봐야 됩니다. 그런데 신앙인의 관계에서 어떻게 이끌어 가시느냐? 아하수에로 왕이 먼저 신앙인에게 덕을 보게 합니다. 먼저 은혜를 입게 만들어 버립니다.
요셉의 경우를 봅니다. 바로 왕이 요셉을 자기 바로 밑에 총리로 두고 요셉에게 자기의 모든 권력을 다 위임해 버립니다. 그런데 요셉이 바로 왕의 덕을 본 것이 아니에요. 꿈을 꾸고 나서 어쩔 줄 모르고, 그 꿈대로라면 애굽이 이제 5년 뒤에 풍년이 지나고 나면 다 멸절하게 되어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것을 요셉이 구해주는 겁니다. 천하에 지금의 미국과도 같은 그런 나라였던 애굽의 왕이, 감옥에 갇혀 있던 히브리 족속 유랑민의 아들이었던 감옥에 있는 죄수의 덕을 보게 만드십니다. 아, 신기하지 않아요? 여러분. 왕이라는 자리가 뭡니까? 상징적인 의미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추구해 가고 있는 인류가 자기자리에서 각자, 각자 추구해 가고 있는 꿈이에요. 높은 자리 아닙니까? 거기까지는 못가더라도 하여간 그것을 향하여 상승 가도를 달리고 싶은 것이 인간이에요.
어제 우리 신데렐라의 꿈 말했잖아요. 일맥상통하는 것이지요. 모두가 다 그러고 있어요. 그게 최고봉입니다. 우리 모두가 좋은 대학가고 싶어 하고 돈 많이 벌고 싶어 하고 건강하고 오래살고 싶은 것,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것, 또 내가 조그만 모임에서라도 가정에서라도 내 뜻대로 하고 싶은 것, 좌지우지 하고 싶은 것이 다 왕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인간의 최고봉에 서있고 그것을 실현한 그 자들에게 빚쟁이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요, 하나님께서 몰고 가시는 인생의 자동차를 올라탄 자들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절대로 자유롭습니다. 사람에게 덕을 보려고 하는 것에서 자유롭습니다. '누가 나를 좀 도와줘야 되는데? 누가 나를 좀 알아줘야 되는데? 누가 내 말을 좀 들어줘야 되는데?'라고 하는 누구에게서 은혜와 덕과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한 자들이 바로 신앙인들입니다. 아직도 누구의 덕이 누구의 은혜가 누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그런 사람 그런 마음이 있다면,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 번 반복해서 말씀을 드렸어요. 저에게는 특별한 경험이기 때문에, 참으로 기도하면서 선교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 선교회를 시작하면서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이사회 구성이었어요. 그 이사회 구성을 왜 생각했느냐? 첫째 원인이 재정적인 소스였습니다. 운영은 해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제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영락교회 계신 분들을 제일 많이 아니까, 몇몇 능력이 있다할 만 한 분들, 제가 덕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몇몇 분들을 찾아 갔습니다. 그 분들이 다 그럴 분들이 아니에요. 그 옛날에 같이 지내던 정리를 생각하면 제가 무슨 일을 벌인다고 하면 맨 발 벗고 나설 분들인데 다 거절당했어요. 저는 그냥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여깁니다. 그건 신앙인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사람들에게 덕을 보려고 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선교회를 이끌어 가겠습니까? 그 마음에는 선교회를 이끌 수 있는 어떤 영향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수가 없다는 것을 제가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맨 처음에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그냥 원룸하나를 빌려서 거기서 나 혼자 촬영하고 설교를 하면서라도 시작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밴쿠버에서 나온 거예요. 거기까지는 맞았어요. 그래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나와서 며칠 지내다 보니까, 마음이 그렇게 움직여 가면서 혼자 의지가지가 없었고 신앙이 없어졌던 거지요. 그래서 사람을 찾아 다녔던 것입니다. 거절당하면서 혼자 머물고 있을 때, 방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기도하면서 깨닫게 됩니다.
'아! 내가 잘못생각하고 있구나.' 사람들이 내게 덕을 봐야지. 왜 내가 사람들의 덕을 보려고 하고 있느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내가 지금 여기서 선교회를 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이것을 통해서 꽃피우려고 하는 게 아닌데. 하나님 알았으면 지금 죽는 것이 그 분의 품에 안기는 게 최고의 복인데 하나님이 선교회를 하게 하신다면, 나의 덕을 보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고 내가 빚쟁이가 되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빚을 꾸려고 하느냐?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내가 선교회를 위해서 무엇을 하겠다.'라고 이런 마음을 갖고 오시는 분들에게 맞지 않는 겁니다. 태 목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쨌든 이쪽으로 부어주셔서 선교회 관여되는 분들에게 말씀이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잖아요. 이렇게 해서 나갈 수밖에 없게 구조적으로 되어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분들이 선교회에 오셔야 되느냐? 고마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과 그런 위치에서 선교회로 오시는 분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주시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선교회를 위해서 뭘 해야지? 뭘 해야지?'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결국 아하수에로 왕이 유대인을 구원하는 일에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는 모르드개가 자기의 생명을 구해줬다고 하는 은혜를 입은 자로서 출발을 하는 거예요. 혹시 선교회 오셔서 큰일을 하게 된다면 그 마음가짐이 어때야 되느냐? 너무너무 고마워서 이 선교회를 통하여 자기에게 주시는 은혜가 너무 고맙고 ‘당신! 나가’ 그러면 벌벌 떨 정도로 여기가 고맙고 감사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셔도 하시는 것이지요. '내가 여기서 뭘 좀 해야 되겠는데?'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동서남북을 해도 그래요. '내가 뭘 가르쳐야 되겠는데? 내 말 좀 들어야 되겠는데?'라는 마음가짐을 갖고는 선교회에서 그렇게 허용되지 않을 겁니다. 그런 마음 갖고 있는 사람들, 반드시 마음이 변해서 겸손하게 낮아지고, 은혜를 입고 덕을 입고하는 입장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거예요. 왜냐하면 제가 여러분에게 덕을 보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조적으로 제가 여러분에게 덕을 보려고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겠습니까? 그러면 선교회가 망조가 드는 거예요.
목사님이 교회에서 교인과 장로 권사 집사님들의 덕을 보고 은혜를 입으려고 하면 그 교회는 망조가 드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목사님을 통해서 보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워서 빚진 자의 마음으로 봉사를 해도 하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했는데 나를 안 알아주느냐?'라는 마음 갖고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이 세상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에요. 누구의 덕을 보려고 하지 마세요. 어떤 사람의 은혜를 입어야 된다고 마음 졸여 하지 마세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내 인생에 대한 계획이 있으시고 몰고 나가시고 진행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자꾸 내가 계획하고 내가 몰고 나가려고 하는 운전자의 입장에 서 있으려고 하는 내 죄성을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이 몰고 가시는 인생의 차에 올라타면, 하나님께서 다 필요한 대로 이끌어 가시면서 사람은혜 입지 못해 안절부절 하는 마음으로부터 온전히 해방시키고 나를 만나는 사람마다 내덕을 보게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 안에 하나님이 가득하니까. 내 안에 하나님이 가득한 상태에서 그 하나님이 자꾸 전달이 되면 그 사람들의 생명을 빚지고 있는 거예요. 생명이 내게 빚 진자 되는 거예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지금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살려줬는데. 제가 하나님으로 가득해서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생명이 제게 빚진 자 된 것이 아닙니까? 내가 여러분의 빚쟁이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요. 저는 통로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직책상 조직상 회사 같은데서 내가 낮은 자리에 있습니다. 내가 과장인데 부장님 전무님 상무님 사장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업하는데 바이어의 덕을 보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무슨 의뢰인의 덕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 가득차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버스에 올라타서 만나는 사람에게 마다, 그들의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흘러 내려가는 거예요. 그 비어져 있는 첫 번째 샴페인 잔이 되어서 내가 먼저 가득차서 밑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겁니다. 내가 채워지지 않는 한 밑으로 내려 갈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누구의 덕을 보고 누구의 은혜를 입고 살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단지 믿음의 형제들끼리는, 내게 온 은혜가 그리로 갈 수 있고 그에게 온 은혜가 내게 올 수 있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통로가 되어주는 그 사람이 귀한 것이고, 그 사람의 존재가 감사한 것이지요. 내가 믿음이 약해질 때, 옆에 사람을 보면서 강해지고 그 존재가 감사한 것이고 고마운 것이지요. 서로가 서로에게. 왜냐하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띠로 연결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고 여기에는 덕을 보고 은혜를 입고 서로 서로가 교통한다고 하잖아요. 성도의 교통함, 성도의 교제, 여기에는 덕을 보고 은혜를 끼치고 함이라는 것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덕이 되고 은혜가 되는 것이지요.
제가 아까 선교회를 말씀드린 것은, 선교회 운영과 연관이 되어서 내가 사람의 힘을 빌어서 덕을 입어서 은혜를 입어서, 선교회를 운영해 보겠다고 하는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태 목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허락하시는 은혜가 너무 고맙고 빚진 자의 마음이 되어서 선교회를 위해서 봉사하세요. 그 빚진 자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지 않으십니다.
오늘 아하수에로 왕이 형편없는 집안 출신이요, 하급관리인 모르드개에게 생명을 빚진 자가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에요. 모든 신앙인은 세상에 나가서 누구의 덕을 보고, 누구의 은혜를 입기위해 노심초사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나누어 주는 자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 빚쟁이로 살아가세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위에 있는 상사가 나를 밉게 보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며 삽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에서 능력이 있는 자들,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사장님 이들의 덕을 보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불신앙인 것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이 몰고 가시는 인생의 자동차에 올라탄 자들이라면 마땅히 세상에 대해 심지어는 왕에 대해서조차도 빚쟁이가 되어야함을 우리가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아버지가 몰고 가시는 자동차에 올라타는 자들 되게 해 주시고 내 마음 안에 아버지로 가득가득 채워서 가는 곳마다 죽어가는 영혼들을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세상의 빚쟁이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