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贈 領議政 行 禮曹判書 吉昌府院君 諱 悏
권협(權悏)의 부 남강공(南崗公) 상(常) 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는데 효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사람을 감동케 하였으므로 선조(宣祖)가 매우 기특하게 여기었다. 1587년(선조 20년) 80세가 되자 노인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직질(職 秩)을 더하고 마을에 정문을 세워주었으며 부조 3대에 추은이 내려졌다. 이 사실은 영 상(領相)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이 지 은 묘지(墓誌)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충정공(忠貞公) 협(悏)은 명종 8년 한 성부 주동(鑄洞)에서 남강공 상(常)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나 이관(李琯)에게서 수학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선조 10년 알성시 (謁聖試)을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을 시작으로 통진 현감을 지내고 내직으로 사 헌부, 사간원, 홍문관 직임을 맏고 전한(典 翰)에 보임되었는데 지제교를 겸대하였다. 왜란이 일어 한성을 사수해야 한다고 진력 하니 임금이 패검(佩劍)을 내렸다. 관서의 운량어사(運糧御使)가 되어 3도의 군량을 모집하였으며 이어 삼남 도체찰사부(三南 都體察使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군무를 전담하였다. 정유재란에 원병을 청하러 명나라에 가 서 우리나라의 지리와 군정을 질문하니 상세히 답변하니 중국 제신(諸臣)들이 현재 (賢才)라 칭찬하고 발병(發兵)과 군량을 성사시켰다. 귀국하여 호조참의가 되고 곧 황해관찰사, 나주목사를 역임하고 정유재란 원병을 청한 공으로 선무공신에 녹훈되고 길 창군(吉昌君)에 봉호 되었다. 공은 호 조참판,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전라도관찰사, 전주부윤이 되고 선조 40년 예조판서 (禮曹判書)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을 지냈다. 광해군 8년에 사은 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병 이 들어 광해군 10년 66세에 졸하니 대광 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 겸 령경연(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관상감사(觀 象監事) 세자사(世子師) 길창부원군(吉昌 府院君)으로 추증되고 충정(忠貞)의 시호 가 내렸다. 구로구 궁동에 합부하였으며 조 경(趙絅)이 신도 비문을 짓고 미수 허목(許 穆)이 글을 썼다. 배위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안정 나 (安定 羅)씨는 고려 지후(紙候) 나직경(羅 直卿)의 후손이자 어모장군(禦侮將軍) 나 운걸(羅云傑)의 여식으로 일찍부터 고운 외모로 20세에 시집와서 문안에 들어온 이 후 권상(權常)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고 친 히 시어머니를 봉양하는데 힘쓰고 친척에 게도 이루어 행하니 모두 일컬어 효부라고 하였는데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다. 아들 5명을 낳았다. 여기에 충정공과 임난 사에 대한 소사를 기록한다. 협은 태어날 때부터 골격이 장대하고 모 습이 풍만하고 총명이 뛰어 났고 관례(冠 禮)를 치르자마자 문장에 주력하여 24세 때 정시(庭試)에 장원하고 1577년(선조 10 년) 알성문과(謁聖文科) 을과(乙科)에 합격하였다. 이에 승문원(承文院) 춘추관(春 秋館)을 거쳐 승정원 주서(承政院 注書)를 지냈다. 예전에는 예문춘추관이라고 하다 태종 때 예문관과 춘추관으로 나뉘어 이곳에서 사관들이 왕조실록 작성의 자료가 되는 사 기의 원고를 꾸몄다. 이를 한림(翰林) 또는 사신이라고 하였는데 협은 한림이 되었다. 그는 한림이 되자 명종실록 작성에 참여하 여 실록의 역사가 되는 편년체로 꾸몄는데 한림 또는 사신은 비록 낮은 벼슬이지 만 앞으로 출세가 보장되는 수재들의 등용문이었다. 명종실록은 1545년 7월부터 1567 년까지 22년 동안의 역사적 사실을 편년체로 기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협은 임금 에게 그의 재주를 인정받아 통진 현감, 병, 형, 예조 난관을 거쳐 동벽(東壁: 벼슬아치가 출근하여 모여 앉을 때 좌석의 동쪽에 앉은 벼슬로 의정부의 좌참찬 통례원 승정원의 우승지 좌부승지 등이 이에 해당)에 이르는 동안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 하였다. 권협은 1586년(선조 19년) 8월 사헌부 지 평(持平)정5품에서 성균관 직강(直講)정5 품으로 직을 옮겼다. 1588년 권협이 수찬으로 있을 때 평양 근 방으로부터 역질이 번지고 있었다. 역질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를 거쳐 충청도와 호남일대까지 번졌다. 산천에 제사를 지내라는 선조의 명을 받고 출정의 행장 을 갖추고 일행과 함께 평양을 향해 달렸다. 권협의 일행이 주야로 달려 황주 지방에 이르렀을 때 강 건너 들판과 산비탈 서너 군데에서 불길이 솟고 있었다. 맥없이 그곳을 바라보고 있다 길을 재촉하여 떠났다. 권협 이 함경도 땅에 들어서 감사의 안내를 받아 준비된 제단으로 안내했다. 그곳에 는 부사 군수가 동석했고 그밖에 인근 고 을의 많은 지방관들과 토호들이 참석하여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냈다. 그런데 어느 날 일기가 살을 에는 설풍(雪風)으로 돌변 하고 의원들이 역질에 대한 매실의 관계를 밝히면서 팔도 천지가 얼어붙은 절기도 도 와 이윽고 역질은 기세가 꺾였다. 도성 안 에 투입됐던 못된 병은 왕자 의안군의 목숨과 많은 인명을 빼앗아 갔다. 함경도에 치제를 시행하기 위하여 특파된 권 협이 귀환하였다. 권협은 1591년(선조 24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전해 장령(掌令)으로 임명되었 다. 장령은 사헌부의 종4품의 관직이다. 그 때 나라의 정세는 갈수록 당파싸움에 시달려 국정을 논할 때마다 몸을 움츠리고 그 직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권협은 어느 직에 있던 흔들림 없이 누구에게도 얽매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행동하니 그의 성품을 아는 사람은 사람됨을 흠모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이 많았다. 어느 당파에도 가담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오로지 직무에 충실했으니 그의 천성이 얼마나 강직하고 또 선비 정신이 투철했는가를 알 것 같다. 권협의 집안은 고려시대 구 봉군(九封君) 국재공 보(溥)의 후손으로 이름난 집안이 지만 아버지 권상(權常)은 효(孝)와 문학으로 빛난 인물로 주역에 능했다. 그래서 아들 협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내 아들 협(悏)은 성질이 믿음직스럽고 조용한 성격으로 남들로부터 칭찬을 받으며 선량한 사람으로 평가받을 것이다. 겉으로 보기와는 다르게 강한 추진력과 용기가 있어 한번 일을 시작하면 남들에게 뒤지기를 싫어하고 끝까지 일을 완벽하게 하는 성격이나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서 주위사 람들로부터 시기를 받고 구설수가 생기기 쉬우니 대인관계에 있어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함이 필요하겠다. 이것만 주의하면 재 주가 뛰어나서 장차 그 이름이 후세에 전 할 것이다 하였다. 1592년(임진년:선조 25년)에 왜구 침입의 급보가 당도한 것은 왜적이 김해를 함락시 킨 4월17일 경상좌수사 김홍의 장계에 의 해서였다. 도승지 이항복이 침실에 있는 선조에게 장계를 보고하니 대신들을 불러들이라 하였다. 권협이 급보를 받고 궁으로 들어왔다. 이미 어전에는 영의정 이산해, 좌의정 유성룡, 우의정 이양원, 도승지 이항복, 비 변사 당상들이 어전에 부복하여 있었다. 왜 적은 부산포를 함락시키고 북상 중에 있다는 보고였다. 새벽안개가 자욱한 부산포 항구는 일본군 15만이 조용히 접근하였다. 조 선군에 비해 실로 엄청난 인원이었다. 4월 13일 새벽안개가 자욱한 부산포 항구를 적선이 바다를 건너 들어왔다. 적은 동래에 당도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공격명령을 내려 전투가 시작되었으나 물밀듯이 밀려 오는 왜적을 당해내지 못하고 왜장의 칼날 에 장렬히 전사했다. 동래부성이 함락되자 왜군은 승승장구 북상하였다. 4월24일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상주에서 패하고 충주에서 신립이 패하니 4월18일부터 매일 패전 보고가 속속 들어왔다. 조선군대는 물밀듯이 밀려드는 왜군을 당해내지 못했다.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조정에서 는 도성(都城)을 떠나려고 어전회의가 있었다. 민심은 벌써 조정을 떠나 있었다. 도성이 흉흉하였다. 이를 생각하며 권협은 어전에서 이르기를 청컨대 서울을 고수하소서. 파천은 아니 되옵니다. 도성의 백성들 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으므로 도성을 고수하고 싶어도 그럴 형편이 못되옵니다. 민심 이 술렁이는 도성을 지켜 주시오소서 그 말소리가 지나치게 크고 또 선조의 눈앞에까지 이르렀기에 좌의정 유성룡이 권협에게 꾸짖었다. 아무리 위급하고 혼란할 때라 하더라도 군신간의 예의가 이러할 수 없으니 당장 물러나서 아뢰도록 하라 하고 큰 소리로 일렀다. 이에 권협은 오히려 굽힘이 없이 유성룡을 향하여 부르짖었다. 좌상께서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권협은 잇달아 부르짖었다. 그러자 유성룡은 권협의 의기찬 물음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선조에게 아뢰기를 권협의 말이 충성스러우나 단지 사세가 나가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전하 하고 권협 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다시 아뢰었다. 좌상께서도 그런 말씀 을 하십니까? 그러면 서울을 버린다는 것입니까? 전 하, 어명을 거두소서. 한양을 떠나서는 아니 됩니다. 전 하께서 한양을 떠나는 날 이 나라의 운명 은 어찌 되겠습니까 권협은 선조에게 서울 사수를 강하게 주장했다. 선조를 비롯한 대소 신료들은 권협의 말에 동조하는 기색이 보였으나 사세가 이미 기울어져 있어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요경의 충정은 알겠다는 선조는 짧게 대답 했다. 선조는 그 의기를 칭찬하고 감탄하여 차고 있던 <패검>을 권협에게 하사하였다. 이때 이미 그렇게도 입에 담기가 어려웠던 몽진이 결정된 셈이다. 밤 이경(二更)에 선조 일행은 숭례문(崇禮門)을 지나자 급히 달려온 권협이 말굴레를 지고 선조일행을 수행하였다. 권협은 도성을 떠나 어가를 모시고 개성 행재소에 도착하였는데 양사가 제일 먼저 파천을 주장한 영의정 이산해를 논핵하여 멀리 귀양 보내거나 벼슬을 삭탈 관직하기를 청했다. 선조는 육승지와 어가를 호종한 신하들을 부청(府廳)에서 인견하였는데 모두 의견들 이 파천의 실수를 공격하고 그 계획이 이 산해로부터 나왔다고 하여 분한 감정이 복 받쳐 그를 박살하자는 논의도 나왔다. 권 협을 비롯 사간 이곽, 장령 정희번 이유중, 지평 이경기, 헌납 이정신 등은 모두 이산 해의 중벌을 청했고 대사간 이헌국은 이산해가 젊어서부터 재주가 뛰어났고 문장 의 실력도 뛰어났는데 국사를 맡은 지 오래 인데 오점을 남겼으니 중론을 따르심이 마땅하다 여겨집니다. 하면서 권협이 서울사수를 주장할 때도 파천을 강력히 주장하여 어의를 흐리게 하여 나라를 이 지경으로 이끌었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강력히 주장하였으나 선조는 아무 대꾸도 없이 갈 곳을 재촉하였다. 선조 일행은 다시 개성을 떠나 평양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권협은 행재소에서 새로이 마음을 가다듬고 있는데 바로 서울을 떠날 때 생사조차 몰랐던 셋째 형님 권희(權熺)가 그의 아들 권익 중, 권의중과 함께 어려움을 무릅쓰고 종묘 의 신주들을 받들고 들어오자 반가워 어찌 할 줄 몰랐다.
선조는 6월23일 어렵게 의주에 도착하여 의주목사의 아사인 용관만을 행궁으로 삼았다. 의주 용만관 행궁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권력의 속성이 그대로 나타났다. 선조의 시선이 이항복을 향했다. 행궁으로 자리 잡는 의주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촌락은 쓸쓸하고 관청의 창고는 텅 비어있었다.
“권협을 들게 하라” 선조는 용만관 행궁에서 승지에게 영을 내렸다. 선조에게 명을 받은 승자는 권협에게 이르기를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 권협은 갑자기 임금이 찾는다는 승지의 말을 듣고 마음을 조아리며 급히 빠른 걸음으로 행궁으로 들어왔는데 행궁으로 들어오는 권협을 보고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몇몇 대신이 있었다. “전하 찾으셨습니까?” “곧 명나라 군사가 입국한다 하니 긴급한 것은 군량과 말먹이다. 그대를 관서 운량어사로 삼노니 명나라 군사의 군량과 말먹이가 급하여 삼현의 곡식을 정주 안주 등으로 선운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경서3도의 군량조달을 총독 하여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할 군량과 말먹이를 책임지고 운송하라.” 권협이 행재소에 들어와 어명을 받은 것은 사시 경이었으니 선조의 심중을 깊이 헤아릴 것 같았다.대가가 이곳에 온지도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 국가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대부가 군부의 위급을 구하려는 뜻이 없었다. 1592(선조25년)12월24일 명나라 도독 이여성이 구원병과 후속부대까지 합쳐 5만 명이 용맹스러운 장수 50여 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나라 구원병이 압록강을 건너 건너자 군량미와 화약이 속속 실려 왔다. 이여송이 안주에 이르렀을 때 도체찰사의 자격으로 유성용이 권협을 대동하고 그를 맞아드렸다. 유성용은 평양의 지형과 군대가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자세히 설명토록 권협에게 지시하자 권협은 이여송에게 평양의 위치와 지형을 설명하니 이여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리를 장담했다. 권협은 평양의 주둔한 왜적과 싸울 때 임금의 명을 받아 삼도의 군량과 마초를 도촉하여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하여 군사가 포식하고 말이 날뛰니 평론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1596년(선조29년)에 권협을 삼남도 체찰 사부 종사관으로 중책을 맡기고 군무를 전관 하도록 하고 영남과 호남의 군대를 위유하라는 명을 내렸다. 권협은 선조의 명을 받고 영남을 향해 출발하였다.
그곳은 대개 농민과 노비를 주축으로 하고 명망 있는 유생이나 전직 관리가 의병장을 맡아 활약하고 있었다. 이때의 한강이남 고을은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들판에는 푸른 풀이 없었는데 소매를 떨치고 가서 백성을 주야로 어루만지고 안심시켜 그 일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왔다. 1996년(선조29년) 6월25일 권 협이 홍문관교리로 제수 받고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경상 좌병사 감응서의 급보를 받았다. 이날 13일에 왜적의 배가 150척이 와서 정박하였다고 하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온데 대한 보고였다. 김d서의 장계를 받은 조정에서는 중신과 비변사의 당상들과 대신들을 입시케 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새로 호남에서피를 마시며 맹약(盟約)을 한 뒤 다시 준동하려고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별다른 계책이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원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선조가 신하들을 살펴보고 “사신의 임무를 잘 수행할 사람은 권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 하루라도 빨리 명나라의 보내야 할 일이니 속히 시행함이 오를 것이다. 권 협을 명나라의 보내도록 조치하라. 명나라황제에게 알리는 주민 내용의 모름지기 권 협이 가는 일과 이번에 논한 두 조항을 언급해야한다. 다른 일은 성지를 기다린 뒤에 하도록 하라.” 선조는 이덕형에게 거듭 명하였다. 권 협은 그때 응교(應敎)로 있다가 당상으로 승진되어 다음날 명을 받고 오시에 입궐하여 선조를 아련하였다. “짐의 명을 받들고 급히 명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하고 소임을 다하고 돌아오도록 하라.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있음을 명심하라.” 1957년(선조30년) 2월 초 권 협은 급히 달려가 연경에 도착하여 병부군문(兵部軍門)에 국서(國書)를 전달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우리나라의 사항을 통렬히 개진하였다. 병부상서가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의 산천의 형세, 도로의 근원. 왜적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점령하였으며 그대 나라가 방어한 곳이 얼마나 되고 비축해둔 군량이 얼마나 되며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그림은 그려서 가지고 오십시오.”라고 하였다. 권 협은 평소의 동국지지(東國地誌)를 익혔으므로 화공(畵工)에게 입으로 설명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며 그림을 만들어 올리니 병부 사랑이 그림을 펼쳐놓고 권 협에게 일일이 따져가며 물어보자 권 협이 막힘없이 대답했다. 권 협이 그곳을 물러서자 사람이 통역관 표정 구를 불러 권 협의 관직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나서 말하기를 “저런 사람이 일국(一國)에 제일가는 재주인데 어찌 흔하게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곧바로 심의 보고하여 남북의 전함(戰艦)과 보병(步兵)을 징발하고 또 산동(山東)의 군량을 조달해 공급하기로 하였다. 권협(權俠)은 천자(天子)의 큰 은혜를 우러러 사례하고 머리를 조아리다 피가 흘러내린 얼굴로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지금 고갈(枯渴)의 처지에 놓여 조석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서강(西江)을 더 놓는다 하더라도 제때에 구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평(永平)에는 남병(南兵)과 군량이 많으니 영평은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수레와 소로 교차해 실어 나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인(大人)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주선하여 도탄에 빠진 사람을 구제할 때 필시 조금도 지체하지 않을 줄로 여깁니다.” 고하니 국문이권 협의 말을 받아드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청을 인준하였다. 권 협이 근각(筋覺)과 초황(硝黃)을 요청하여 싣고 돌아왔는데 군자(君子)들이 말하기를 “그의 민첩은 따라갈 수 있으나 그의 충성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1597년(선조30년) 8월 10일 연경에서 임무를 맞히고 돌아온 권 협을 선조는 호조참의로 관직을 제수하고 예조의 명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은혜의 감사한 표문을 지어 보내라 명하였다. 권 협이 1598년(선조31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1600년(선조33년) 2월8일 나주 목사로 발령을 받고 근무했는데 모두 명성이 났었다. 1602년(선조36년)7월2일 승정원으로 들어와 동부승지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다시 우부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1604년(선조37년)6월21일 공신등급 3등으로 내리고 같은 해 6월25일 특명으로 효충장의선무공신(效忠仗義宣武功臣)이란 훈공을 내리고 길창군(吉昌君)으로 봉하였는데 1604년(선조37년)7월12일 꾸민대가없이 수수하고 둔하며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우부승지에서 한성부우윤으로 직을 옮겼다. 그해 9월1일 선조는 권 협에게 명나라 동유격(童遊擊)을 잘 접대하여 남쪽으로 내려 보내 대마도와 잘 협상토록 하라는 명을 받고 한강에서 동유 격을 전별연(餞別宴)을 후하게 베풀어 보냈는데 그 일이 있는지 2일이 지난9월3일 일을 잘 처리하여 효행이 있었다. 하여 호조참판으로 자리를 옮겼다.
1604년(선조37년)12월 2일 대사헌 (사헌부의 장관)으로 관직을 옮겼는데 11월 혹사가 있었다. 가을에 승진되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 觀察使)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1606년4월 2일 밤 혜성이 삼태성아래 북극사이에서 나와 당위성과 천원성 자리 아래로 옮겨가서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불안하였는데 1606년(선조39년) 4월 24일 남원부의 군기고에서 불이나 보관된 군기가 모두 소실되었다는 보고였다. 그리고 부의 노비들이 신공(身貢) 및 각항 수군의 가포(價布)와 목면(木棉) 등 물건도 다른 곡간이 없어 군기고 한구석에 보관해 두었는데 모두 불탔다는 남원부사 정사호(鄭賜湖)의 복이었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남원군기고에서 일어난 불이 권 협의 무능하여 부하를 다스리지 못한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논란이 계속되어 권협에게는 큰 손상을 주었다. 그때 당시의 명망을 지닌 어느 고을 수령이 세력을 믿고 법을 농락하자 권협이 축출하고 조금도 봐주지 않았으나 그 사람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가 요직에 등용되어 말하기를 “권협처럼 법을 지켜 청렴하고 근신한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으니 곧은 도리로 행하는 고인의 기풍이 있는 이라고 말할만하다. 권협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지 2년이 넘었다. 관찰사는 1년에 한 번씩 교체하는 조정자의법인데 전의 있던 하삼도의 관찰사가 임시로 영문을 설치한 관계로 2년을 기한으로 하였다. 그런데 권협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지 2년이 지났으니 직을 교체하는 헌부의 건의가 있자 선조는 1607년(선조40년) 6월5일 예조판서로 제수하였다. 선조가 병이 들어 위독했다. 1608년 2월 선조는 교지를 내리기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광해는 옥쇄와 인장을 넘겨받고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조가 승하하자 대북인의 상소가 빗발쳤다 예조판서에 있는 권협 일자리를 공경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명으로 글을 올려 탄핵상소가 빗발쳤다.
상소 내용은 중상모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권력을 잡은 대북인을 당할 장사가 없었다. 상소내용은 권협이 앞서 전라도 감사로 있으면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고 오로지 여자의 말만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조판서로 돌아오는 날에 짐을 실은 수레가 길을 메웠으므로 여론이 오랫동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권협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 시키고 용서치 마옵소서.. 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승하하였는데 예조판서가 상례(喪禮)를 주관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온 관례였으므로 신중히 일을 보되 오직 선왕이 제정한 예절을 준수하니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된지 6년 권협이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두문불출한지 5년이 지난 1614년 광해군은 다시 권협을 불러들였다. 광해군은 광협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진질하였다. 조정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대북의 협조를 소홀히 하는 자를 조정에서 몰아붙여 죽었으므로 서인 중 조정에 남아있는 몇몇 대신들도 몸을 움츠렸다. 대북의 횡포가 날로 심해가고 명나라에서도 전운이 돌아 온 나라를 긴장 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 누루하치(여진족)의 세력이 커져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후금이라 칭했다. 광해는 이를 대비하여 대포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우리조정에 10만의 지원군을 요청해왔다.
1616년 광해는 “명나라의 동짓날을 축하하러가는 사신을 원 사신 권 경우, 부사신 목대홍, 서장관 정홍원 등이 표문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권협을 변무 (사은사; 중국이 구사에 대하여 잘못 해석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정정 또는 해명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신)로 함께 가도록 하라. 그래서 이 나라의 어려운 실정을 명나라의 알리 도록하라.”하고 명했다. 광해는 권협의 인격과 문장경륜도 뛰어났거니와 정유재란 때 명나라에 가서 큰 공을 세운일이 있었으므로 변무사은사(辨誣謝恩使)로 적격자라 판단한 것이다.
선조는 6월23일 어렵게 의주에 도착하여 의주 목사의 아사(衙舍)인 용만관을 행궁으로 삼았다. 의주 용만관 행궁에서도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려는 국력의 속성이 그대로 나타났다. 선조의 시선이 이항복을 향했다 행궁으로 자리 잡은 의주는 해마다 흉년이 들어 촌락은 쓸쓸하고 관청의 창고는 텅 비어있었다. 권협을 들게 하라 선조는 용만관 행궁에서 승지에게 영을 내렸다. 선조에게 명을 받은 승지는 권협에게 이르기를 전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권협은 갑자기 임금이 찾는다는 말을 듣고 마음을 조아리며 급히 빠른 걸음으로 행궁으로 돌아 왔는데 행궁으로 돌아오는 권협을 보고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몇몇 대신이 있었다. 전하 찾으셨습니까. 곧 명나라 군사가 입국한다 하니 긴급한 것은 구량과 말먹이다. 그대를 관서운량어사로 삼노니 명나라 군사의 군량과 말먹이가 급하여 삼현의 곡식을 청주 안주 등으로 선운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경서 3도의 군량과 말먹이를 조달하여 책임지고 운송하라. 권 협이 형재소에 들어와 어명을 받은 것은 사시 경이었으니 선조의 심중을 깊이 헤아릴 것 같다. 대가가 이곳에 온지도 여러 날이 되었는데 국가의 기강이 헤이 해져서 사대부가 군부의 위급을 구하려는 뜻이 없었다.
1592년 선조 (25년) 12월 24일 명나라 도독(都督) 이여송이 구원병과 후속부대까지 합쳐 5만명이 용맹스러운 장수 50여 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왔다. 명나라 구원병이 압록강을 건너자 군량미와 화약이 속속 실려 왔다. 이여송이 안주에 이르렀을 때 도체찰사의 자격으로 유성용이 권협을 대동하고 그를 맞아드렸다. 유성용은 평양의 위치와 지형과 설명하니 이여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승리를 장담했다. 권협은 평양의 주둔한 왜적과 싸울 때 임금의 명을 받아 삼도의 군랴과 마초를 독촉하여 명나라 군사에게 공급하여 병사가 포식하고 말이 날뛰니 평론하는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1596년 (선조 29년)에 권협을 삼남도체찰사부 종사관으로 중책을 맞기고 군무를 전관하도록 하고 영남이고 호남의 군대를 위유하라는 명을 내렸다. 권협은 선조의 명을 받고 영남을 향해 출발 하였다.
그곳은 대개 농민과 노비를 주축으로 하고 명망 있는 유생이나 전직관리가 의병장을 맡아 활약하고 있었다. 이때의 한강이남 고을은 백성이 뿔뿔이 흩어지고 들판에서 푸른 풀이 없었는데 소매를 떨치고 가서 주야로 백성을 어루만지고 안심시켜 그 일을 무사히 끝마치고 돌아왔다.
1596년 선조 29년 6월25일 권협이 홍문관 교리로 제수 받고 어전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는데 경상 좌병사 김응서의 급보를 받았다. 이날 왜적의 배 150척이 와서 정박하였다고 하였다. 왜적이 바다를 건너온 것에 대한 보고였다. 김응서의 장계를 받은 조정에서는 중신과 비변사의 당상관들과 대신들을 입시케 하여 대책을 숙의 하였다. 소서행장(小西行長)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새로 호남에서 피를 마시며 맹약을 한 뒤 다시 중동하려고 하였다. 조정의 논의가 별다른 계책이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지원병을 요청하고자 하였다 선조가 신하들을 살펴보고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권협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 하루라도 빨리 명나라의 보내야 할 일이니 속히 시행함이 옳을 것이다. 권협을 명나라의 보내도록 조치하라. 명나라 황제에게 알리는 주문 내용에 모름지기 권협이 가는 일과 이번에 논한 두 조항을 언급해양한다. 다른 일은 성지를 기다린 뒤에 하도록 하라. 선조는 이덕형에게 거듭 명하였다.
권협은 그 때 응교(應敎)로 있다가 당상으로 승진되어 고급사(告急使)가 되어 다음날 명을 받고 오시에 입궐하여 선조를 아련하였다. 짐의 명령을 받고 급히 명나라에 가서 구원을 청하고 소임을 다하고 돌아오도록 하라. 나라의 운명이 경각에 있으매 명심하라.
1597년 2월초 (선조 30년)권협은 급히 달려가 연경에 도착하여 병부궁문의 국서를 전달하고 국서를 전달하고 위태로운 처지에 놓인 우리나라의 상항을 통렬히 개진하였다. 병부상서가 공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 산천의 행서 도로의 근원 애적이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점령하였으며 그대 나라가 방어한곳이 얼마나 되고 비축해둔 군량미가 얼마나 되며 군사가 몇 명이나 되는지 그림을 그려서 가지고 오십시오. 라고 하였다.
권협은 평소에 동국지지(東國地誌)를 익혔으므로 화공(畵工)에게 입으로 설명하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며 그림을 만들어 올리니 병부시랑이 그림을 펼쳐놓고 권협에게 일일이 따져가며 물어보자 권협이 그곳을 물러서자 사람이 통역관 표정 구를 불러 권협의 관직이 무엇인지 물어보고 나서 말하기를 저런 사람이 일국의 제일가는 재주인데 어찌 흔하게 얻을수 있겠는가? 하고 곧바로 심의 보고하여 남북의 전함과 보병을 징발하고 또 산동의 군량을 조달해 공급하기로 하였다.
권협응 천자의 큰 은혜를 우러러 사례하고 머리를 조아리다 피가 흘러내린 얼굴로 나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지금 고갈의 처지에 놓여 조석으로 아우성을 치고 있으니 서강을 터놓는다 하더라도 제때에 구제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영평은 우리나라와 인접해 있으므로 수레와 소로 교체해 실어 나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대인께서 천자의 명을 받들어 주선하여 토탄에 빠진 사람을 구제할 때 필시 조금도 지체하지 않을 줄로 여깁니다. 고하니 국문이 권협의 말을 받아들여 말이 끝나기도 전에 요청을 인준하였다. 권협이 근각과 초황을 요청하여 싣고 돌아왔는데 군자들이 말하기를 그의 민 첩은 따라갈 수 있으나 그의 충성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1597년 선조 30년 8월 10일 연경에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권협을 선조는 호조참의(戶曹參議)로 관직을 제수하고 예조의 명하여 명나라 황제에게 은혜의 감사한 표문을 지어 보내라 명하였다.
권협이 1598년 선조 31년에 황해도 관찰사로 1600년 선조 33년 2월 8일 나주목사로 발령을 받고 근무했는데 모두 명성이 났었다. 1602년 선조35년 7월2일 승정원으로 들어와 동부승지로 발령을 받았다. 그리고 그해 다시우부승지로 자리를 옮겼다.
1604년 선조37년 6월 21일 공신등급이 3등에 녹훈되었던 것을 2등으로 하였는데 후에 다시 3등으로 내리고 같은 해 6월25일 특명으로 효충장의 선무공신(效忠丈義 宣撫功臣)이란 훈공을 내리고 길창군(吉昌君)으로 봉하였는데 1604년 선조 37년 7월12일 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고 둔하며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우부승지에서 한성부우윤으로 직을 옮겼다.
1604년 선조 37년 12월2일 대사헌 (사헌부司憲府)의 장관)으로 관직을 옮겼는데 11월에 옥사가 있었다. 가을에 승진되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 觀察使) 겸 전주부윤(全州府尹)이 되었다. 1606년 4월 2일 밤 혜성이 삼태성아래 북극성사이에 나와 당위성과 천왕성자리 아래로 옮겨가서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불길한 생각이 들어 불안하였는데 1606년 선조 39년 4월2 4일 남원부에 군기고에서 불이나 보관된 군기가 모두 소실되었다는 보고였다. 그리고 부의 노비들의 신공 및 각항수군의 가포와 목면은 물건도 다른 곡간이 없어 군기고 한구석에 보관해 두었는데 모두 불탔다는 남원부사 정사호의 보고였다. 그런데 조정에서는 남원군기고에서 일어난 불이 권협이 무능하여 부하를 다스리지 못한데서 일어난 일이라고 논란이 계속되어 권협에게 큰 손상을 주었다. 그때당시의 명망을 지닌 어느 고을 수령이 세력을 믿고 법을 농락하자 권협이 축출하고 조금도 봐주지 않았으나 그 사람이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고 그가 요직에 등용되어 말하기를 권협처럼 사람을 법을 지켜 청렴하고 근실한 사람을 어찌 쉽게 얻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니 곧은 도리로 행하는 고인의 기풍이 있는 사람이라고 이를만하다. 권협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지 2년이 지났다. 관찰사는 일 년마다 교체하는 것이 조종조의 법인데 전에 있던 하삼도의 관찰사가 임시로 역문을 설치한관계로 2년을 기한으로 하였다. 그런데 권협이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한지 2년이 지났으니 직을 교체하라는 헌부의 견의가 있다 선조는 1607년 선조40년 6월5일 예조판서로 제수되었다. 조가 병이 들어 위독했다. 1608년2월선 조는 교지를 내리기 전에 운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광희는 옥쇠와 문장을 왕위를 계승하였다.
선조(宣祖)가 승하(昇遐)하자 대북인의 상소가 빗발쳤다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자리에 있는 권협이 일자리를 공경스럽게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명으로 글을 올려 탄핵상소가 빗발쳤다. 상소내용은 중상모략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권력을 잡은 대북인 을 당할 장사가 없었다. 상소내용은 권협이 앞서 전라도 감사로 있으면서 몸가짐을 신중히 하지 않고 오로지 여자의 말만을 따랐습니다. 그런데 예조판서로 돌아오는 날에 짐을 실은 수례가 길을 메웠으므로 여론이 오래 동안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권협에게 책임을 물어 파직시키고 용서치 마옵소서. 하였다. 그리고 선조가 승하였는데 예조판서가 상례를 주관하는 것은 예부터 내려온 관례이므로 신중히 일을 보돼 오직 선왕이 제정한 예절을 준수하니 아무런 손상이 없었다. 광해군이 임금이 된지 6년 권협이 관직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두문불출한지 5년이 지난 1614년 광해군은 다시 권협을 불었다. 광해군은 권협에게 숭정대부(崇政大夫) 진질(晉秩)하였다.
조정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대북의 협조를 소홀이하는 자를 조정에서 밀어붙여 죽였으므로 서인 중 조정에 남아있는 몇몇 대신들의 몸을 움츠렸다. 대북의 횡포가 날로 심해가고 명나라에서도 전운이 나라를 긴장시키고 있었다. 이 무렵 만주에서 누루하치 세력이 커저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후금이라 칭했다. 광해는 이를 대비하여 대포를 만들고 무기를 만들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우조 정에 10만의 지원군을 요청해왔다.
1616년 광해는 명나라의 동진 날을 축하하러가는 사신을 원사신 권 경우 부사신 목대홍 서장관 정홍원등이 표문을 가지고 가도록 하고 권협을 변무사은사(辨誣謝恩使;중국이 국사의 대하여 잘못해석 하는 일이 있을 때 이를 정정 또는 해명하기위하여 파견된 사신)로 함께 가도록 하라. 그래서 이 나라의 어려운 실정을 명나라의 알리도록 하라.하고 명했다. 광해는 권협의 인격과 문장 경륜도 뛰어나거니와 정유재란 때 명나라의 가서 큰 공을 세운일이 있었으므로 변무사은사로 적격자라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광해는 그를 천거했는데 권협이 이 관직에서 떠나 시골에서 몇 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이었기 때문에 정신이 이따금 어지러워져 명나라대신과 대화를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엄청난 임무를 감당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변명을 하니 광해는 관례의 의해 행하라고 명하였다. 권협은 명 사신 권 경우 일행과 함께 무더운 여름 길을 떠났다. 길가에 극심한 가뭄을 보았다. 근고에 없던 것으로 온 들판에 싹이 하나도 없고 마을마다 짐승이 하나도 없는 것을 목격하였다. 권협은 노령의 지친 몸으로 북경에 도착하여 명나라조정대신들을 만나 우리나라 어려운 사정을 아뢰며 외교활동을 전개하다 동지를 지나 그해 겨울에 병을 얻어 환국하였다. 광해는 명나라에서 임무를 맞히고 환궁하였으나 병이 깊어 거동을 하지 못하여 입궁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전갈을 받고 매우 애통해 하였다. 권협은 시골집에서 의원에게 치료를 받았으나 효험이 없어 무오년에 매우 위독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의식을 잃어다. 이 소식을 듣고 중형 황이 찾아왔다. 광해가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문제가 일고 있었고 형 셋째형 희가 인목대비 폐비청정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해직되었다고 하자 이말을 듣고 병이 더욱 악화되었다. 5천리 길을 지척처럼 여겨 사명을 완수하고 돌아왔는데 그때는 엄동설한 이었으므로 꽉짜인 일정의 노인의 기혈이 어찌 상로에 손상되지 않았는가? 이듬해 1617년 광해군9년에 병석에 누웠다가 1618년 광해 10년 정월 27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66세였다. 권협의 부음을 광해에게 보고하자 임금이 조부을 내리고 재상에서 증직을 내리게 하여 그를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연경연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에 추증하고 길창 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위신봉사왈 충이요 청백수절왈 정 이라 하여 충정의 시호가 내렸다. 그래서 불천지위의 특전과 영세케 빛나도록 그 모습을 그려 후세에 전하도록 하였다. 권협이 막 세상을 떠났을 때 묘소가 맞지 않아 부평 수탄리 에다 임시 장례를 치러다가 그 이듬해 봄에 그 삼등성이 계좌정향에 묻히었다. 후사는 信中·必中·景中·正重.謹中·心中·偉中과 2녀를 두었다. 吉興君·信中 선조 8년 한성에서 출생하여 여 임난 38년 중광시 급제하였다.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형조정랑刑曹正郞)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내고 외직으로 청평현령(淸平縣令) 김제 단얀 김제 여산 단양군수(端陽郡守) 풍덕군수(豊德郡守) 교수 장단 진관병마병마동전제사를 지내고 통정대부(通靖大夫)가 되었다. 천성이 효우(孝友)하고 관직에 염근(廉謹)하나 혜정비(惠政碑)가 세워졌다.
아들 대임이 귀히 되자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으로 추증되고 기흥군(吉興君)에 봉해졌으며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으로 가증 되었다. 장남 대임(大任)은 선조 28년 출생하여 총민(聰敏)하니 선조 7년 정선옹주(貞善翁主)를 상하여 길 성위(吉城尉)에 직위를 받고 임금의 총애가 깊었는데 필법 또한 우수하니 상사가 많았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 공주로 몽진할 때 호가한 공으로 봉헌대부(奉獻大夫)가 되고 인조 13년 길 성군(吉城君)이 되었다.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에서 근왕(勤王)하여 숭덕대부로 가좌되고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이 되었다. 3년 후 산양에가 불모를 되려오니 사람들이 공의 덕에 감복하였다. 인조 23년 53세로 졸하니 임금이 진도(震悼)하였다. 묘소는 서울 구로구 궁동조고묘하에 합부이고 미수 허목(許穆)이 신도비문을 지었다.
차남 대명(大鳴)은 선조 30년 출생하여 동지중추부사 (同知中樞府事) 이고
3남은 대식(大式)이다. 필중은 선조 12년 한성에서 출생하여 임난 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이 녹훈되고 광해군 5년 증광시 유학으로 생원 급제하였다. 광해군 7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지내고 인조 22년 졸하니 향년 66세였다.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추증되고 묘소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환희 리에 있다. 장남 대덕은 선무원종공신으로 인조 5년 무과하고 통정대부 부사에 이르렀다. 차남은 大淳, 3남은 大淑 4남은 大宙 5남은 大華 6남은 大夏로 자손이 번창 하였다. 경중은 선조 14년 출생하여 임란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선조 38년 무과 하여 무안 현감에 나가고 인조3년 45세로 졸하니 병조참의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 환희 리에 있다. 아들 대복(大復) 대장(大壯)형제는 임란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정중은 선조 17년에 출생하여 임란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인조 5년 정묘호란에 감찰로서 임금을 강화도로 호종하고 환도하여 석성현감에 제수되었다. 인조 18년 57세로 졸하니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부천이었는데 파주 금천 낙원공원묘지로 이장하였다. 근중은 선조 19년 출생하여 임란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되었다. 인조 14년 회인현감을 지내고 효우돈후(孝友敦厚)하고 부모상에 여묘하였다. 효종1년 65세로 졸하니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되고 후에 아들 대운이 귀히 되니 영의정(領議政)에 가증되었다. 묘소는 구로구 궁동에 쌍분이며 미수 허목이 비문을 지었다. 아들은 대운(大運) 대윤(大胤) 대원(大遠) 대술(大述) 과 2녀를 두었다.
석담공 대운(大運)은 공은 광해 4년 (1612년) 출생하여 인조 20년(1642년) 31세에 식년시 합격하고 인조 27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현종 11년(1670년) 호조판서로 승차하였으며 연이어 형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숙종이 즉위하자 우의정에 오르고 이어 좌의정이 되고 숙종 15년 숙종이 원자 경종을 책봉하면서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니 공은 78세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숙종28년 88세로 졸하니 숙종은 벼슬을 맡아 오래도록 청백(淸白)하였는데 가상하다 고 하였다. 아들은 위(瑋)와 규(珪)를 두었다.
심중은 선조 21년 출생하여 임란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인조 2년 증광시 진사 급제하고 좌랑에 이르렀으나 인조 19년 54세로 졸하니 좌승지(左承旨)로 추증되었다. 묘소는 부천에 있었는데 전북 임실군 상계면 인리로 이장하였다. 아들 대민(大敏)은 전주로 낙향하고 대익(大益)은 숙종22년 무과 하여 흥양현감 하동부사를 지냈다.
위중(偉中)은 선조 31년 출생하여 임란유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아들 대째가 귀히 됨에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돈 간재(敦艮齋) 대재(大載)는 광해군 12년에 출생하여 인조 23년 식년시생원진사 양장에 급제하고 효종 4년 별시문과을과에 급제하였다. 또 효종 9년 문과증시에 정자로 병과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 창평현괌을 지내고 숙종 1년 형조참의를 거쳐 전라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 숙종 5년 대사헌, 숙종 10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숙종 15년 홍문관제학과 호조판서가 되고 기로 사에 들어갔는데 70세에 졸하였다. 서화에 능하여 저술 독역수차, 중용변의, 사림평요 등을 남겼다. 대재는 아들셋을 두었는데 장남해는 인조 7년에 출생하여 현종 1년 식년시 급제하고 현종1년 정시문과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현종 15년 고부사의 서정관으로 청나라의 다녀와 사간원 정원이 되고 현종 16년 경상도어사로 나갔다. 숙종 5년 지냈다. 남인의 반목으로 청도로 유배되었는데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대사간, 대사성, 제학, 평안도관찰사, 호조참판, 형조참판을 숙종23년 69세로 졸하였다.
成均館 典儀 權貞澤 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