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홍모 목사
오늘은 엔젤스 찬양대의 발표회와 여전도회 화보 발행 감사예배를 드리기에 아주 간단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여성들의 봉사로 인하여 발전된 교회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 사회에서 '현숙한 여인'이라는 칭호는 대단한 칭호입니다. 10절로 31절까지는 22절인데, 매 절의 첫 단어는 히브리어 알파벳의 자음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어 아주 특이한 문장이라고 봅니다. 10절은 히브리어 첫 글자인 알레프, 11절은 베트 31절은 타우로 끝나고 있습니다. 10절에는 알레프로 시작하는 '잇샤'인데, 여자, 부인, 여성이란 말입니다. 11절에서는 히브리어 두 번째 글자인 베트로 된 글자인 '바타흐'라는 말로 시작하는데, 믿는다, 신뢰하다, 의지하다는 뜻입니다. 31절에는 마지막 글자인 타우로 시작하는 말인데, 돌아간다는 말로 '티누'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머리가 대단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시편 가운데도 이러한 알파벳 형태의 시들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의 가치는 진주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3:15에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8:11에서도 "대저 지혜는 진주보다 나으므로 원하는 모든 것을 이에 비교할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지혜를 의인화하여 현숙한 여인으로 표현한다고 할 수 있지만, 문자 그대로 한 여성의 값을 말하고 있습니다. 현숙한 여인이라고 하면 현숙하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하일"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힘이 있다, 능력이 있다. 덕망이 있다, 훌륭하다, 선하다 재능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일"이라는 말을 들으면 가장 칭찬하는 말입니다. 우리말에 현모양처, 요조숙녀, 재원이라는 말입니다.
예전에 진주라고 하면 가장 값이 나가는 보석이었습니다. 진주라고 하면 당시에 보석을 가공할 수 없었기에 천연진주가 가장 값나가는 보석이 되었습니다.
현숙한 여인은 보통 값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여자라고 하여 다 현숙한 여인이 아닙니다. 현숙한 여인은 보통 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그가 하는 일을 보고서 현숙한 여인인지 알 수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는 여성, 지혜롭게 투자합니다. 시간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합니다. 미리미리 계획을 세울 줄 압니다. 자기 가정을 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가정까지 돌아봅니다. 남편을 존경할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상담자로,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현숙한 여인인 것을 증명하는 것은 나중에 가서 자식들이 일어나 감사하며, 남편이 칭찬을 합니다. "덕행 있는 여자가 많으나 그대는 모든 여자보다 뛰어납니다" 자식들이 한 여인의 현숙함을 드러내주고, 그의 남편이 증명해주어야 합니다. 한 여인의 현숙함은 자식들이 증명해줄 것입니다. 그의 남편이 그의 현숙함을 증명해줍니다.
30절입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1969년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큰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온 세계가 주목하고 지켜보아야 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베냐민 샤리트라는 유대인 엘리트요 해군사관학교를 나온 해군 소령이 있었습니다. 그는 영국에 유학하면서 기독교인 영국 여성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두었습니다. 두 아이가 유대인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는데 가정 환경 조사서를 작성하라고 보냈습니다. 가정환경 조사서에 종교난이 있었습니다.
두 가지를 표시하게 되었습니다.
첫째 어느 민족인가?
둘째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가?
샤리트 소령은 주저하지 않고 아이들은 유대인이라고 썼습니다.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시당국의 교육위원회에서는 그 조사서를 가정으로 되돌려보냈습니다. 그들의 자녀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기타난에 표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당국의 주장에 의하면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은 이교도의 어머니가 낳은 아이는 유대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유대인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샤리트 소령은 곧 법원에 고소하였습니다. 당시의 정통파 유대인들은 10-20% 정도에 불과하였지만, 그들이 승리하여 결국 샤리트의 아이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스라엘인으로 등록하라고 판정하였습니다. 탈무드에 의하면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어야 유대인이다"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유대인 남성이라도 이방 여성과 결혼하면 그의 자녀들은 유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민은 어머니에 의하여 결정됩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보면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어보낼 때에 하나님은 사라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창세기 21:12에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말을 듣고 하갈과 그에게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단호하게 내어보냅니다.
이삭은 부인 리브가를 두었습니다. 리브가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작은 아들 야곱으로 하여금 아버지의 축복을 받게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결정에 따른 것입니다. 사라의 결단과 리브가의 결단으로 판가름이 났습니다. 여러 자식들이 있지만, 어머니의 결정에 의하여 선민이 확정되었습니다.
나이 50세가 넘어가면 사실 다 똑같은 얼굴이 됩니다. 고운 것도 잠시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름답다, 멋지다, 대단하다는 칭찬하던 말도 다 헛될 뿐입니다. 하나님 잘 믿은 여성만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 한 여성이 그의 일생을 어떻게 살아왔느냐 하는 것으로 그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은 대단히 부지런한 여인이요, 허리를 묶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는 여성이었습니다. 밤에도 불을 끄지 않고 물레질을 하였습니다. 옷을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하여 번 것을 가지고 이웃을 도와 함께 잘 살려고 하였습니다. 그는 땀을 흘려 일하고 후일에 가서 웃겠다고 작정하였습니다.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아니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어떤 사람과도 다투지 않고 화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생명을 낳고 기르는 사명을 여성들에게 주었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하와라고 지었는데, 남자의 반대인 여자라는 의미보다는 "생명을 주는 자"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양식을 먹고 자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먹고 자라나는 법입니다.
유대인의 격언에 "한 자루의 촛불로 여러 개의 초에 불을 붙여도 처음의 춧불의 빛은 약해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의 촛불은 많은 사람에게 나눠주어도 그 빛의 양이나 질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말인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10남매나 되는 여러 자식을 사랑하는데, 치우치지 않고 다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어머니의 사랑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계속하여 타오른다는 말입니다. 자식은 내리내리 사랑하고 있습니다. 큰 자식에게 사랑을 다 주었는데, 여전히 작은 자식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말에도 "자식 사랑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 사랑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고 식어지지 않고 내려갑니다. 어머니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여전도회 회원들이 힘을 내어 예배당을 건축해주고, 이렇게 화보도 발행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자기 가정에서 어머니로, 또 아내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식들을 잘 키워서 하나님의 일꾼을 만들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여러 여전도회원들 위에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마데 테레사 수녀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12살 때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헌신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행복한 가정에서 자라난 18살의 테레사는 수녀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가 수녀가 되어 1946년 피정의 집으로 가기 위하여 기차를 타고 가는데, 모든 것을 버리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 계신 주님을 섬기러 빈민촌으로 주님을 따라오라는 명령을 받게 됩니다. 그는 종신서원을 하였기에 수도원에서 빠져 나올 수 없었지만, 교황청에 서한을 올리고 허락을 받아 수녀원을 나와 재속 수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전혀 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거리를 방황하는 어린 아이들을 모아 글자를 가르치고 그들을 돌아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인도의 캘커타에서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는 일생 죽어가는 수십만 명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구나 테레사 같이 되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하늘이 내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며, 누구를 따라가기 위하여 목숨을 걸어야 하는지 결단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는 우리가 나서고, 일어나야 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최선을 다하여 주님을 위하여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