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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29-40
JQ는 낮추어야하고 SQ가 높여야 합니다 / 조상호 목사
현대를 ‘지수의 홍수시대’라고 말합니다. 오늘 비 올 확률이 몇 %다, 오늘 컨디션이 몇 %다, 비행기가 사고 날 확률이 몇 %다, 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모든 것을 숫자로 표시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지수를 사용하는 대표적인 것을 몇 가지 뽑아봤습니다. ‘IQ(Intelligent Quotient)’라고 부르는 지능지수가 있습니다. 'EQ(Emotional Quotient)'라고 감성지수가 있습니다. 'MQ(Moral Quotient)'라고 부르는 도덕지수가 있습니다. 이외에도 우리가 별로 들어보지 못한 지수들이지만, 서서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수들이 있습니다. 'NQ(Network Quotient)'라고 부르는 인간관계지수가 있고, 'CQ(Creation Quotient)'라고 부르는 창의성지수가 있고, 'IQ(Information Quotient)'라고 부르는 정보지수가 있고, ‘CQ(Changing Quotient)’라고 부르는 변화지수가 있고, ‘AQ(Adversity Quotient)'라고 부르는 역경지수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DDRQ‘, ’VJRQ‘, ’BBQ‘, ’JQ‘ 등의 지수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지수를 들어보셨습니까? ’DDR‘은 우스갯소리로 될 대로 대라 지수라고 합니다. ’VJR‘는 배째라 지수라고 하고, ’BBQ‘는 뻔뻔지수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JQ‘는 무슨 지수를 의미할까요? ’JQ(Janmuri Quotient)‘는 잔머리지수를 의미합니다. 잔머리는 얕은 꾀라는 뜻을 가진 ’잔꾀‘라는 말의 속어로서, 거기에 지능지수, 감성지수 등에 사용되는 지수를 붙여서 만들어진 신조어입니다. 주위에 잔꾀를 잘 부리거나 눈치가 빠르고 약은 사람을 JQ가 높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웃는 말로 대한민국의 평균 IQ(지능지수)가 106이지만, 잔머리 굴리는 지수인 JQ는 IQ보다 훨씬 높아 세계 어느 민족도 한국인의 잔 머리를 따라올 수 없다고 주장한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중앙일보에서 취업정보 포털사이트인 '잡링크(www.joblink.co.kr)'의 도움을 받아 잡링크 회원 1,028명을 대상으로 e-메일을 통해 "잔머리를 얼마나 자주 굴리는가"라는 질문을 했더니, "내 인생에 잔머리란 없다"고 외친 '우직파'는 4.4%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그 대신 가장 많은 42.2%의 응답자가 "눈치 봐가면서 종종"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회 닿을 때마다 놓치지 않고" 잔머리를 굴린다고 대답한 응답자도 17.8%나 되었고, "어쩔 수 없을 때만" 굴린다고 답한 응답자는 35.6%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이유든지 100명 중 4.4명만 잔머리를 굴리지 않을 뿐, 무려 95.6명의 사람이 잔머리를 자주 굴린다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잔머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13.3%나 되는 사람이 "내가 굴리면 괜찮지만, 남이 굴리면 짜증난다"고 대답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조사가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자기는 어떻게든 잔머리를 굴리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잔머리’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잔머리 굴리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떠오릅니까? 만약 제가 여러분들에게 ”집사님, 집사님은 왜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세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을 할 것 같습니까?
아마도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 자리에 ”너, 자꾸 잔머리 굴리니? 제발 좀 잔머리 굴리지 마라!"는 말을 듣고, “야, 나는 머리가 참 좋은 사람이구나, 나를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화를 내든지 따지든지 할 것입니다. 또 “저 친구는 잔머리가 발달했어. 김집사는 너무 잔머리를 굴린단 말이야. 저 형제는 어쩜 그렇게 잔머리를 굴리는지 모르겠어?”라는 말을 들으면,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생각보다 나쁜 생각이 떠오르는 것이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싫어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도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싫어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멀리하시는데 반해, 믿음의 사람을 좋아하시고 믿음의 사람을 축복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JQ(Janmuri Quotient)‘는 낮추고, 영성지수라고 불리는 'SQ(Spiritual Quotient)'가 높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옆에 계신 분들과 인사하시겠습니다. “잔머리 굴리지 맙시다.” 다시 한번 인사하실까요? “JQ는 낮추고 SQ를 높이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잔머리를 잘 굴리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아합이라는 왕입니다. 아합 왕은 잔머리 굴리는데 천재였습니다. 오늘 저는 잔머리 굴리는 아합 왕을 살펴보며 함께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원래 아람 왕 벤하닷이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에게 전쟁에서 패하자, 이스라엘로부터 빼앗은 길르앗 라못을 돌려주기로 약속을 했습니다. 그러나 벤하닷이 약속을 어기고 길르앗 라못을 돌려주지 않자, 아합은 다시 벤하닷을 공격하려고 했습니다.
이번에 일으키려고 하는 전쟁은 전에 행했던 전쟁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할 수 있었습니다. 우선 남왕국 유다 왕 여호사밧이 적극적인 지원을 약속했습니다.
또한 400명의 자문위원들은 벤하닷을 공격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구동성으로 격려해주었습니다. 이제는 망설일 이유 없이 벤하닷을 공격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합 왕이 벤하닷을 공격하기 전에 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었습니다.
전쟁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묻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결국 아합 왕은 남왕국 유다의 여호사밧 왕의 충고대로 미가야라는 선지자를 불러다가 하나님의 뜻을 물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는 한 번도 아닌 두 번씩이나 하나님께 받은 환상을 설명해 주면서 "만약 아합 왕이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면 반드시 패할 뿐 아니라, 아합 왕이 죽임을 당한다“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쯤 되면 아합 왕은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지 않아야 합니다. 미가야 선지자를 통해 전해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벤하닷을 공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어느 누구의 말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상한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올라가지 말라고 불길한 예언을 한 미가야 선지자를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로 남 유다 여호사밧 왕과 함께 아람 나라와 전쟁을 하기 위해 길르앗 라몬으로 공격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을 뭐라고 하는 줄 아십니까?
‘아무도 몰 말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무대뽀 인간’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혹시 아합 왕처럼 하나님께서 가지 말라고 하는데도 기어코 가버리는 무대뽀 같은 사람은 아닙니까? 아합 왕처럼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기어코 해버리는 사람은 아닙니까?
미가야 선지자가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예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합 왕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냥 가기에는 찜찜했는지, 한 가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다같이 30절을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의 왕이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이 말을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호사밧 왕이여, 당신이 왕복을 입고 우리 연합군을 지휘하십시오. 나는 변장을 하고 사병처럼 당신의 지휘를 받겠습니다. 당신이 앞에서 이끄십시오. 나는 뒤에서 사병처럼 열심히 돕겠습니다."
자기의 지휘권을 내어놓은 아합 왕을 언뜻 보면,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을 존중해주는 겸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기는 일반 백성들처럼 변장을 하고 최전방에서 목숨 걸고 싸움을 하겠다는 용감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정말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합 왕이 변장한 이유는 겸손해서도 아니고 용감해서도 아닙니다. 그는 순진한 여호사밧 왕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숨을 건지려는 간교한 음모를 꾸몄습니다. 만약 아람 군대와 전쟁을 하다가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죽게 된다 할지라도, 자기에게는 아무런 손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다가 여호사밧 왕이 왕복을 입고 있으면 아람 군대는 자기가 아닌 여호사밧 왕을 표적으로 삼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떻든지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재빠르게 손익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잔머리를 굴렸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남 유다 여호사밧 왕을 존경하는 척했지만, 사실은 적군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 백성들 속에 숨어 있겠다는 얄팍한 꾀를 쓴 것입니다.
제리 포엘은 미국의 '모랄 매이저리티'(Moral Majority) 라는 유명한 보수주의 정치운동을 하는 목사인데, 베긴 전 이스라엘 수상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습니다.
한번은 두 사람이 사석에서 만나 담소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포엘 목사가 베긴 수상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중동전에서 기막힌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습니까?" 베긴 수상이 잠깐 동안 생각을 하다가 참 의미 있는 말 한마디를 들려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이스라엘 군대의 용기, 특별히 지휘관의 용기 때문입니다. 우리 이스라엘 지휘관들은 전쟁터에 나갈 때 부하들에게 절대로 사용해서는 안 되는 명령이 있는데, 그것은 '앞으로 전진!' 이라는 명령입니다. 우리 이스라엘 지휘관들은 '앞으로 전진!' 이라는 명령을 내리는 대신, '나를 따르라!' 는 명령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우리 이스라엘을 승리하게 만든 비결입니다.“
여러분, 어떤 모습이 진정한 리더십의 모습인 줄 아십니까?
“앞으로 전진”이라고 말하지 않고, "나를 따르라"고 말하는 것이 진정한 리더쉽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마든지 제자들로부터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겉옷을 벗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적어도 어떤 그룹의 리더쉽이라고 한다면, 그룹 구성원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라고 한다면, 큰 소리만 치기보다 가족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한 부서의 청지기라고 한다면, 뒤에서 명령만 내리기보다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전쟁을 치르는 군대의 지휘관이라고 한다면, 앞장서서 부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고, 목숨 걸고 자기 부하들과 자기 나라를 돕기 위해 온 남 유다 군대를 책임지려는 자세를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목숨 하나 살리겠다고 여호사밧 왕을 화살 받이로 앞장 세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목숨을 방패삼아 자기만 살겠다는 잔머리를 굴렸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 어떻게 되었을까요?
잔머리 굴리던 아합 왕의 계획대로 되었을까요?
아닙니다.
다같이 31절을 보겠습니다.
“아람 왕이 그의 병거의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와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과 싸우라 한지라.”
여기 ‘병거의 지휘관 32명’은 오늘날로 말하면 공수특전단이나 해병대처럼 아람 왕 벤하닷이 신뢰하는 특수부대 장교들이었습니다.
벤하닷은 그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우리의 목표는 아합 왕이다. 이스라엘의 다른 군사들은 상관하지 말고 오직 아합 왕만 죽이라. 너희들은 아합 왕만 죽이면 된다."
벤하닷의 이 명령을 받은 32명의 특수부대원들은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왕복을 입은 한 사람을 발견하자, 그들은 “이스라엘 아합 왕이 여기 있다. 이 사람이 틀림없는 이스라엘 왕이다.”고 소리를 치며 그 사람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이 입는 옷으로 변장한 자신을 아람 군대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반면, 엉뚱하게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은 아람 군대의 추격을 받아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아합 왕의 잔꾀는 그런 대로 잘 통했습니다. 여기까지는 잔머리를 굴린 아합의 의도대로 진행되었습니다.
어느 글에서 교통경찰에 걸린 운전사들의 여러 가지 반응을 적어 놓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교통경찰에 걸리면 순순히 “예, 내가 잘못했습니다.”라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운전사들을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급해서, 집에 아이가 아파서, 중요한 사업계약이 있어서...'등의 이유를 댄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음주단속을 피하기 위해서 잔머리를 굴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차에 항상 상주들이 쓰는 두건을 넣고 다녔습니다. 교통경찰들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슬픔 가운데 있는 상주를 보고 어지간하면 봐주기 때문에, 그는 음주운전 단속에 걸리지 않고 넘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루는 또 술을 먹고 운전을 하는데, 앞에서 교통경찰이 차를 세웠습니다. 이 사람은 평소 때처럼 손을 뻗어 뒷자리에 있는 두건을 머리에 쓰고 "경찰 아저씨, 실은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셔서..."라고 말하고 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교통경찰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저씨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리 내려 보세요." 이 사람은 경찰이 혹시 못 보았나 싶어서 자기 머리에 쓴 두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경찰 아저씨, 실은 저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내가 너무 슬퍼서...."라고 하며 그럴듯하게 연기를 하는데 물끄러미 바라보던 경찰이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저씨, 민방위 완장을 머리에 쓰고 지금 뭐하는 겁니까?"
우리가 사는 이 시대에도 사실 '잔꾀'는 어느 정도까지 통합니다.
만약 잔머리가 전혀 통하지 않는다면, 잔머리를 굴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잔머리가 통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잔머리를 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잔꾀는 얼마 가지 못합니다. 잔머리 굴리는 사람이 처음에는 성공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아람 군대는 왕복을 입은 사람이 아합 왕인 줄 알고 추격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들이 추격하고 있는 아합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끝났다면 잔머리를 굴린 아합 왕이 성공했다고 본문이 마무리되어야 하지만, 오늘 본문은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 34절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맞힌지라.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여기에 언급된 '한 사람'은 아람 왕 벤하닷으로부터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살해하라는 명령을 받은 32명의 특수부대원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이름도, 성도 알 수 없는 무명의 군인입니다.
그런데 이 무명의 군인이 쏜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파고 들었습니다.
고대에는 병사들이 가슴 부분을 쇠로 덮은 갑옷을 입고, 하복부를 가리기 위해 금속 조각들을 매어 달았습니다. 여기 ‘갑옷 솔기’라는 말은 갑옷에 붙여놓은 철판과 철판을 연결시키는 이음새를 말합니다. 이 이음새는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갑옷을 만들 때, 철판을 촘촘히 연결시켜 놓기 때문에 철판과 철판 사이가 매주 좁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어느 무명 군인이 쏜 화살이 바로 그 틈 사이로 파고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우연히’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반해, 개역개정판에는 원래 의미에 좀 더 가깝게 ‘무심코’라고 변역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히브리어원어로 “레투모”라는 단어인데, “그저 되는대로, 별 생각 없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무명의 어떤 병사가 저격수처럼 아합 왕을 향하여 정조준 한 후 활을 당긴 것이 아닙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활을 당긴 후 공중에 날려버렸는데, 그 화살이 아합 왕이 입고 있는 갑옷 솔기를 파고들었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35절을 보겠습니다.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화살이 아합 왕의 몸에 깊숙이 박혔습니다. 너무 정확히 박혔기 때문에 뺄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는 피를 흘리며 서서히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34절 중반절을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도 부하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왕이 그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내가 전쟁터에서 나가게 하라.”
그는 죽어가면서도 "어떻게 좀 해봐라. 병거를 가지고 포위망을 좀 뚫어봐라"고 하면서 살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잔머리 굴리며 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던 아합 왕도 적군의 포위망을 빠져나가지도 못한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습니다. 결국 저녁이 되었을 때 그는 과다출혈로 끝내 죽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 바로 앞부분을 보면 아합 왕이 이렇게 될 것을 미가야 선지자가 예언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열왕기상 22장 17절을 제가 읽어 보겠습니다. "그가 가로되 내가 보니 온 이스라엘이 목자 없는 양 같이 산에 흩어졌는데, 야훼의 말씀이 이 무리가 주인이 없으니 각각 평안히 자기의 집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셨나이다."
미가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예언한 내용은 이러한 내용이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면, 당신과 함께 한 모든 백성들은 목숨을 건지게 되겠지만, 당신은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백성들은 뿔뿔이 다 흩어질 것입니다.“ ]
이 예언은 정확히 성취되었습니다.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아합 왕이 죽자, 백성들은 다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또 3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38절을 다같이 보겠습니다.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 씻으매 개들이 그 피를 핥았으니, 야훼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의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이것은 열왕기상 21장 19절에서 이미 예언한 이야기가 성취된 사건입니다.
제가 열왕기상 21장 19절을 읽겠습니다.
"너는 저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야훼의 말씀이 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제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셨다 하라."
엘리야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너의 피를 개들이 핥을 것"이라고 예언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합은 비록 사마리아 땅에 장사되긴 했지만, 그의 병거에 고여 있는 피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어 낼 때 개들이 와서 그것을 핥아먹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사건이 우연하게 벌어진 사건일까요?
우연하게 한 병사가 활을 쏘았고, 우연하게 그 화살이 아합 왕의 갑옷 솔기를 뚫고 들어가 그를 죽였을까요?
그리고 아합 왕이 흘린 피를 우연하게 개들이 와서 핥아먹었을까요?
아닙니다.
우연하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 우연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만 있을 뿐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덜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 다음 절인 30절에 보면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바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으면 10만 개, 많으면 20만 개나 되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하나님께서는 하나하나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사건의 배후에는 항상 하나님의 손길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아합 왕이 죽은 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 주위에 보면, 아합 왕과 같이 잔꾀를 부리고 잔머리 굴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뭔가를 이루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들통 날 것이 뻔한데도 자꾸만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매어달리면 되는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손 벌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직하게 믿음으로 인내하면 되는데,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잔머리 굴린다고 인간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고, 잔꾀를 부린다고 꼭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해결되는 경우도 있지만,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잔꾀를 동원하면 꼭 나중에 더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 주중에 어느 가정이 영주권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 가정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본인이 밝히실지 모르겠지만, 그 가정이 영주권을 얻게 된 것은 누가 들어도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 금요집회에서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제가 호주에서 영주권이 없어서 7년 동안 많은 고통을 당한 적이 있기 때문에, 영주권이 없는 성도님들이나 영주권이 없는 가정들을 보면 꼭 제가 영주권이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취업비자, 사업비자, 영주권을 위해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마다 기도합니다. 그 가정도 영주권이 없어 오랫동안 고생을 했기 때문에 중보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영주권이 나왔다는 전화를 주셔서 그 가정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해서 그 가족과 함께 거실바닥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데, 제 눈에서 얼마나 눈물이 나오는지 손수건으로 닦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눈물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차를 들면서 대화를 하다가, 저는 정말 귀한 한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가정의 성도님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정확히 옮길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보니까요, 멍청한 사람들이 영주권을 얻는 것 같습디다.” 제가 그 분을 쳐다보니까 계속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를 한 번 보세요. 머리 굴리는 사람들이 영주권을 얻는 것이 아니라, 멍청한 듯 인내하는 사람들이 영주권을 얻지 않습니까?” 저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말 맞는 말씀입니다. 지금 하신 말씀이 저에게 영감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지금 하신 말씀 제가 써먹겠습니다.“
저는 그 분이 하신 말씀을 하나님께서 저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령께서 저에게, 크라이스트처치순복음교회 담임목사인 조상호목사에게 ‘멍청한 듯 인내하며 목회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잔머리 굴리지 말고 멍청한 듯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인내하면 된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멍청한 것이 능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잔머리 굴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데, 멍청한 듯 인내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않습니까?
사람들도 주위에서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싫어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는 오죽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싫어하시지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잔머리 굴리는 사람을 멀리하시는데 반해, 믿음의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는 잔머리를 굴리며 살았다 할지라도, 이제부터라도 잔머리 굴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으면 잔머리 굴리는 ’JQ(Janmuri Quotient)‘를 낮추시기 바랍니다.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신뢰하는 'SQ(Spiritual Quotient)'를 높여 하나님의 크신 역사를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