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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인목사/믿음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미가 7:7-13)
미가서 7장 7절에서 13절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은 믿음이어야 합니다"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사랑은 하나다.'라는 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워낙 사랑이 크신 분이시기 까닭에 사랑이라고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을 뒤집어 놓으면 '사랑은 곧 하나님이다.'라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바꿔 말하면 큰 변이 납니다. 사랑은 하나님이 될 수 없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는 반드시 질투가 따릅니다. 질투 없는 사랑은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출근을 하면서 볼품없는 절구통에 치마를 둘러놓고 "여보 나 오늘 다녀올께요."라고 깎듯이 인사를 하고 나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 절구통은 어디에 있는지 행방이 묘연해질 겁니다. 아내에게만 "여보."라고 해야 하는데 절구통에게 "여보,"라고 한다면 아무 것도 아닌 절구통이지만 아내가 질투를 느껴 반드시 치워버립니다. 아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반드시 질투를 합니다. 질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해도 좋을 겁니다. 그런데 뒤집어 놓고 '질투는 사랑이다.'라고 하면 안됩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사랑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은 믿음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서 우리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지 상고해 보겠습니다.
기다리는 믿음 (7) 아브라함이 일흔 다섯 살 때 하나님께서 그를 불러 '너는 고향을 떠나라. 그리하면 내가 네 자손으로 하늘의 별같이, 바닷가에 모래같이 번성케 하리라, 또 네 자손으로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아들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그 언약을 믿고 고향을 떠납니다. 보통 모험이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인도함을 받은 아브라함이 10년을 기다리고, 15년을 기다리고 기다려도 아들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의 나이가 87세가 되었습니다. 너무 너무 급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나에게 공갈을 친 것이 아닌가? 혹은 하나님께 속은 것은 아닌가?'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 아내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아무래도 나를 통해서 아들을 주시지 않을 것 같으니 나를 돕고 있는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십시오. 누구에게 아들을 보든지 간에 그것은 아브라함의 씨가 틀림이 없지 않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아내가 생각이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하나님의 말씀 해석을 잘못한 겁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엄청난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아브라함 역시 "무슨 소리냐? 하나님의 언약을 철석같이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끝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 아니요?"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되는데 이때 아브라함은 못 이기는 척 했습니다. 손해 볼 것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끝까지 견디지를 못하고 조급히 서두르다가 여종 하갈과 더불어 그 사이에서 '이스마엘'이라고 하는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스마엘이 열네 살쯤 되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살이 되었습니다. 사라는 단산이 되었을 그때 생각 밖의 사라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이 아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으로 낳은 아들입니다. 인간의 방법으로 잉태나 해산을 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단산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하에 나이 백살이 되어서 얻은 아들이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과 여종에게서 낳은 이스마엘은 평생 원수가 됩니다. 그 자손들도 계속해서 오늘날까지도 원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철석같이 믿고 끝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히 서두르다가 이스마엘을 낳으므로 영원한 화근을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즉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때는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지 못하는 믿음은 어떤 면에서는 믿음이 아닙니다.
신약에서 사가랴라고 하는 제사장은 엘리사벳이라고 하는 처녀와 결혼했습니다. 처음엔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머리가 하얗게 되고 아기를 낳을 가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사가랴는 포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은 본래 수태하지 못하는 여자였습니다. 사가랴는 '하나님 나는 다른 여자를 통해서 아기를 얻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 여자를 통하여 아들을 주십시오.'라고 오래도록 기도했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하며 기다렸는지 하나님께서 사가랴에게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 아들이 세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유명한 세례요한입니다. 끝까지 기도하고 기다려 얻은 아들 세례요한과 기다리지 못하고 성급하게 서둘다가 얻은 아들 이스마엘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됩니다. 즉 하늘과 땅 만큼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랄 때 중도에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선을 행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면 안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때와 도우심을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7절을 보면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미가서는 미가라고 하는 선지자가 쓴 성경입니다. 미가는 남쪽 나라 즉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기 얼마 전에 활동한 선지자입니다. 그때 당시 상황은 사회적으로 각 분야가 전부 곪아서 터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불법이 판을 치고 부패하여 정직하게 그리고 믿음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온갖 핍박을 다 받던 때입니다. 종교 적으로는 회색적 신앙상태였습니다.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방황하며 양다리를 걸칩니다. 그네들의 신앙상태가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이웃 앗수르와 바벨론은 기세 등등하게 호시탐탐 이스라엘을 노리고 유다를 압박하고 있을 때입니다. 얼마나 그 사람들이 조롱을 하며 못살게 굴고 압력을 가해 오는지 모릅니다. 이때 미가 선지자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도 없다."고 말한 끝에 본문에서 "나는 오직 하나님만을 우러러보며 하나님만을 바라보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우러러보고 바라본다.'는 말은 구약성경에 히브리어로 '야할'이라고 합니다. 야할이라고 하는 말은 '바라보다'라는 말보다도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자기 나라의 꼴이 엉망이요, 열강들이 호시탐탐 유다나라를 노리고 백성들은 하나같이 타락하여 정직하게 살고 믿음으로 살려는 미가를 못살게 핍박하고 괴롭히고 있지만 하나님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만을 보고 기다렸습니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이 나를 들으시리라,'고 확신하였습니다. 나를 듣는다는 의미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뜻입니다. 즉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 것이 아니라 기도하며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린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도우시기까지 기다리는 미가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믿음대로 되어 하나님의 응답으로 역사에 남을 만큼 엄청난 도움이 있었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신 후에는 반드시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십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남포에 예배당이 한 곳도 없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이 평양에 와서 교회를 세우고 선교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평양에는 교회가 한 두곳 있었습니다.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서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던 한 부인이 남포로 이사를 했습니다. 남포에는 교회가 없어서 주일날이면 평양으로 예배드리러 갑니다. 그것도 주일날 가는 것이 아니라 토요일에 미리 가는데 소달구지를 타고 갑니다. 소달구지는 사람의 걸음보다도 느립니다. 그렇게 토요일날 올라가 잠을 자고,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저녁 예배까지 드린 후에 또 그 밤을 지내고 월요일에 다시 남포로 돌아옵니다. 옛날 우리들의 조상들은 주일 하루를 지키기 위해서 이 정도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부인의 평생 소원은 남포에 예배당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의 힘, 나의 재산을 가지고는 예배당을 지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예배당을 하나 세워주십시오.'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1년이 가고, 3년이 가고, 5년이 가도 아무런 징조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날도 평양으로 예배를 드리러 가는데 아들 형제를 데리고 갑니다. 교대로 소를 몰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들이 빨리 가느라고 채찍을 휘두르며 소를 몰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소가 빨리 가기 때문입니다. 그때만 해도 길이 신작로일지라도 넓지는 않았습니다. 옆으로는 말이 지나가는 있었는데 소를 몰던 아들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소에게 채찍을 휘두르면서 치다가 말을 때리고 말았습니다. 말이 깜짝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말을 타고 지나가던 나이가 제법 지긋한 사람이 떨어져 중상을 입었습니다. 경찰서로 갔지만 화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검찰로 넘어가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재판에서 두 아들 중에서 도대체 누가 채찍질을 잘못해서 남의 말을 때려 떨어지게 하여 중상을 입혔는지가 문제였습니다. 둘이 한꺼번에 했을 리는 없고 진짜 범인을 잡아서 벌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때 형제 중에 형이 "제가했습니다. 저를 벌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동생이 나서더니 "아닙니다. 그땐 형님이 자고 있었고 내가 소를 몰고 있었으니 내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또 형은 아니라고 자기가 했다고 합니다. 또 동생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도대체 누구가 잘못을 했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어머니가 "나는 그때 너무 피곤해서 졸고 있었기 까닭에 어느 아들이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기어이 벌을 주어야 한다면 작은아들을 벌주어 감옥에 보내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검사가 이상하다 생각되어 "왜 그렇습니까?"고 물었습니다. "큰아들은 전처 소생이요. 작은아들은 제가 이 집에 와서 낳은 친아들입니다. 그러니까 전처 소생은 가만히 놔두시고 내가 낳은 친아들을 벌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검사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날의 재판이 끝난 후에 "당신 소원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나는 이렇게 평양으로 예배 드리러 가지 않게 남포에 예배당을 하나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검사들이 괜찮을 때입니다. 자기 사재를 털어 예배당을 하나 세워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방법은 묘하십니다. 1년, 3년, 5년, 1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그렇게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렸는데 도움은 고사하고 왜 예배드리러 가는 길에 그런 사고가 납니까? 하나님이 계시면 이럴 수 있느냐고, 다시는 예배당에 안 간다고, 그따위 하나님은 믿지 않는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전화위복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복되게 하사 이런 방법으로 예배당을 지어 주셨다는 말입니다. 기도하고 하나님의 때가 되기까지 기다렸습니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 믿고 충성하는데 왜 이런 일이 있나?'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그 기회가 전화위복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보다도 하나님의 도움이 절실할 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그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이 우리의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소망하는 믿음 (8-9) 잠언 24장 16절을 보면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인하여 엎드러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일곱 번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난다.'는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칠전팔기'라고 합니다. 한번 넘어졌는데 다시 일어나는 일전일기도 힘드는데 계속 넘어지고 또 계속 일어나고 일곱번 넘어졌으나 또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악인은 넘어지면 일어나지 못하는데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반드시 일어난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 이유를 시편 37편 23절과 24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을 기뻐하시나니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의 길은 하나일지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길은 모두 다를 수 있습니다. 저는 평생 목사의 길을 걸어갑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길은 모두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걸음과 길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그 길을 열심히 살아가시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믿음으로 그 길을 살아가면 넘어지더라고 하나님께서 손으로 붙들어 주시기 까닭에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성경입니다. 일곱 번까지 넘어지면 이웃 사람들이 '저 사람은 이제 끝났다. 볼장 다 봤다.'라며 쉽게 말합니다. 그럼에도 믿는 사람들은 끝에 가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일어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붙들어 주는 사람에게는 낙심이나 절망이나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 줄 믿는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는다면, 하나님이 붙들어 일으켜 주시기 까닭에 항상 소망 중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이 끝났다며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내버려두시기 때문입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소망이 있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에서 9절을 보면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데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내가 여호와께 범죄하였으니 주께서 나를 위하여 심판하사 신원하시기까지는 그의 노를 당하려니와 주께서 나를 인도하사 광명에 이르게 하시리니 내가 그의 의를 보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미가 개인을 두고 '네 인생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다.'라고 말합니다. 또 열방들이 이스라엘은 풍전등화라고 조롱합니다. "도대체 너희를 돕는다고 하는 하나님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며 비아냥거립니다. 그러나 미가는 대적들에게 "기뻐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엎드러질지라도 나는 다시 일어나고 어두운 가운데 앉을 지라도 하나님이 빛이 되어 주신다."고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즉 난감한 일을 당했을 때 하나님의 도움으로 재기한다는 뜻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가운데 빛이 들어오면 그 이상의 도움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엎드러지다.', '어두운 가운데 앉다.'는 말은 같은 뜻인데 히브리 사람들은 비슷한말을 거듭하여 강조하는 표현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어두운 가운데 앉다.', 혹은 '엎드러지다.'는 말은 '함정에 빠지다.'라는 뜻입니다. 함정에 빠지면 살아날 재간이 있습니까? 함정가운데 빠지면 살아 나오지를 못하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미가는 살아 나온다고 합니다.
그런 함정에서 살아 나온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믿음 생활 잘 한다고 모함하던 간신들이 왕의 허락을 받고 깊은 함정 속에 사자들을 굶겨 가두어 놓고는 거기에 사자의 밥으로 다니엘을 던져 주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누가 살아 나온다고 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미리 천사를 보내어 사자의 입을 봉하므로 다니엘을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다음날 왕이 친히 찾아와서 다니엘을 끄집어냈습니다. 다니엘이 살아 나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니엘은 끝났다고 말했고 그를 함정에 넣었던 대적들은 그 날밤 잔치를 열었지만 그 날밤에 역사는 바뀌었습니다. 다니엘이 살아 나왔기 때문입니다. 대적들을 전부 붙잡아 그 자리에 던져지므로 사자 밥이 되었습니다. 이 얘기가 다니엘서 6장에 나옵니다. 오늘날 우리도 살아가다 보면 이런 함정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저 가정은 끝났다, 또 저 사람은 끝났다.' 할 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까닭에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절대로 좌절하거나 실망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하나님을 믿기 까닭에 하나님이 붙들어 주시고, 다시 끄집어내어 주시고, 세워주실 줄로 믿고 소망 중에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믿음은 어떤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갖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확신하는 믿음 (10-13) 확신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런 믿음이 진짜 믿음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10절에서 13절을 보면 '나의 대적이 이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리니 그는 전에 내게 말하기를 네 하나님 여호와가 어디 있느냐 하던 자라 그가 거리의 진흙같이 밟히리니 그것을 내가 목도하리로다 네 성벽을 건축하는 날 곧 그 날에는 지경이 넓혀질 것이라 그 날에는 앗수르에서 애굽 성읍들에까지, 애굽에서 하수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의 사람들이 다 네게로 돌아올 것이나 그 땅은 그 거민의 행위의 열매로 인하여 황무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미가가 확신을 가지고 신앙을 고백한 내용입니다. "나를 조롱하고 이스라엘을 깔보는 이 대적들아, 너희는 나의 인생 또는 이스라엘의 운명이 끝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주시는 것을 보고 너희들은 부끄럽고 챙피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요, 또 진흙같이 밟혀지리라. 내가 이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것이다."라고 미가는 확신하였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회복되는데 그 지경이 점점 넓어져서 저 앗수르에서 애굽에까지, 애굽에서 유브라데 강까지, 이 바다에서 저 바다까지, 이 산에서 저 산까지 모든 나라가 와서 이스라엘에게 종속될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믿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지금까지 대적하던 저 무리들은 전부 살던 집과 살던 땅이 황폐해 질 것이라는 것도 확언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자식을 징계한 후에 반드시 채찍을 꺾어버리듯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잠시 징계한 후에 대적들을 반드시 꺾어 버리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확신을 가졌던 미가의 믿음이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적중되었다고 역사는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믿음생활한다고 하면서도 실족할 수도 있고, 시련과 고난에 빠질 수도 있으나 하나님이 건져내시는 날 우리에게 승리가 있다고 확신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확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에게 오는 사람마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곤 하였습니다. 크게 믿으니까 크게 받는 것입니다. 안 믿으니까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많이 믿으니까 많이 받고 적게 믿으니까 적게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 까닭에 확신하는 믿음이 귀한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사진을 보면서 그렇게 보고 싶었던 것이 나이아가라 폭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볼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 폭포의 한 쪽은 미국이요, 한 쪽은 캐나다입니다. 얼마나 많은 물이 폭포로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 있는 폭포와는 비교도 안됩니다. 나이아가라폭포에 떨어지는 물에서 천둥소리가 납니다. 떨어지는 물에서 튀는 물보라가 구름같이 일어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쪽과 저 쪽에 외줄을 매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외줄을 타고 이쪽과 저쪽을 얼마나 쉽게 왔다 갔다 건너다니는지 모릅니다. 그걸 보던 모든 사람들이 환호를 지르면서 박수를 칩니다. 그때 그 사람이 박수 치는 한사람을 가리켜 "형제여! 내가 저기를 건너갔다 왔다는 사실을 믿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사람은 "믿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또 "내가 한 사람을 업고 갔다 올수 있다는 실력도 믿습니까?" 그러자 그 사람은 "당신 실력 같으면 그럴 줄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나한테 업히시오"라고 하자 그 사람은 사람을 죽이려 한다고 하며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자기 아내가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아들을 보고 "업자."라고 하니까 업힙니다. 그 아들을 업고서 쉽게 건너갔다 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말로는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업자."고 하니까 도망을 갑니다. 그건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믿습니다."를 반복하던 말은 전부 거짓이 아닙니까? 아들은 자기의 아버지를 하나님처럼 믿었습니다. 그러기까닭에 아버지 등에 업혀서 갔다 올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확신을 가지는 믿음의 모습입니다. 이런 확신이 있는 믿음이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크게 받고 이런 믿음이 많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처럼 확신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믿음은 기다리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의 응답도 하나님의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하고 응답 즉 하나님의 도우심을 끝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소망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었다면 모르지만 살아 계시기 까닭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한, 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는 한 우리에게는 실망과 좌절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소망하는 믿음, 즉 좌절할 줄 모르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확신하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믿음은 말이 아닙니다. 행동으로 믿고, 몸으로 믿고, 생활로 믿는 확신하는 믿음이 큰 믿음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이 이런 믿음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