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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일 5: 14 우리가 가진 담대함
4.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 5: 14 – 17 )
⑭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⑮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⑯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⑰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요일 5: 14 우리가 가진 담대함 -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성도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실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것은 성경의 어느 한 부분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 전체를 읽고 연구하고 배움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을 알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경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되지 않을 것이나, 그 말씀을 듣기 좋아하는 자의 기도는 응답을 받을 것이다.
잠언 28: 9는 '사람이 귀를 돌이키고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증하니라'고 말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라는 것이다. 우리가 죄를 범하면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버리면 기도의 응답을 받을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1: 15-16에서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케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업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라.'
이사야 59: 1-2에서도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계명들에 순종하면서 기도해야 하며, 그때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되는 것이다.
1]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여기서 '향하여'(프로스)는 '생동적인 교제 안에서 실현되는 관계'를 암시하는 전치사이다. 이는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생동적이고 영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음을 암시한다(Brooke).
'담대함'(파르레시아)는 본서에서 네 번 사용되었다. 즉 주의 재림과 심판날에 믿는 자들이 갖는 담대함이 있다.
* 요일 2: 28 –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요일 4: 17 - 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을 의미하는데 사용되었다.
* 요일 3: 21-22 – 21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22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본 절에서 믿는 자들이 기도할 때 갖는 담대함은 기도 응답의 확신에서 비롯된다.
2]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구하면'(아이토메다)는 중간태로서 간구하는 행위 자체가 주어인 간구자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기도자의 간구가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응답자이신 하나님의 계명 즉 그의 뜻에 부합되어야 한다(Marshall).
* 요 15: 7 -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이러한 기도는 단순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기도자의 생활과 뜻을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부합되게 하여 복종하겠다는 고백이다(Johnson). 그럴 때에 그 기도는 반드시 응답받게 된다.
3] 담대한 믿음의 중보 기도
요한일서 5장 13절은 요한 일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을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알게 하도록 쓰셨다는 말이다. 요한복음 20장 31절에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라. 또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라고 요한복음의 기록 목적을 증언하고 있다.
요한 사도는 그 말씀을 듣는 대상은 다르지만, 말씀을 기록한 목적은 같음을 우리에게 증언하였다. 특별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의지와 그 영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는 사실을 그는 선포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을 이기셨고, 세상을 이기셨던 그 이김이 바로 물과 피로 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이신줄로 믿습니다. 물은 세례를 의미한다.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거듭나며, 세례를 통하여 주님과 함께 옛사람은 죽고 주님과 함께 새롭게 거듭나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옛사람을 장사 지낸다는 것을 의미함이요, 우리가 그와 함께 새사람을 입어 천국의 소망, 곧 부활의 소망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예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는 성례전에 참여하는 성도의 행위는 곧 예수의 죽음에 동참한다는 신앙고백의 결단과 다름없는 헌신행위다.
14절은 우리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요한 사도의 권면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은 아시고, 우리의 구한 바를 응답하셔서 열매 맺게 하신다는 말이다. 그것은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라는 강력한 구함의 기도를 요구하셨던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말씀이다. 우리에게 얻게 하시고, 찾게 하시고, 그리고 열리게 하신다는 응답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한 말씀이다.
기도의 사람은 수없이 많은 응답을 받는다. 기도의 사람들은 기도할 때마다 응답받는 것을 보면서 감사했다. 의외로 사람들은 기도하면서도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의 확신을 갖지못하는 경우가 있다. 죠지물러는 권면했다. "당신이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몇 분이 지나서도 여전히 당신에게 확신이 남아있다면 그 기도는 응답될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하고 일어난 뒤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우리는 그 기도에 대하여 자신이 없는 거지요. 과연 기도한 일들이 응답 될 것인가?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할 것인가를 권면하고 있다. 특별히 독자들을 향해서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지은 사람을 위해 중보 기도할 것을 권한다.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라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도 있다는 말인데, 두려운 말씀이다. 그렇다고 하면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슨 말일까? 죄를 지어도 용서받을 죄가 있고,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
용서받지 못할 죄는 초대교회의 은혜 공동체에서 떠난 사람을 말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공동체에 일치를 깨뜨린 사람들이다. 여러분의 공동체를 깨뜨린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죄인가 하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공동체의 일치됨을, 하나 됨을 깨뜨린다는 것이 용서받기 어려운 죄로 사람을 죽인 것보다, 간통하고, 도둑질을 한 것보다 하나님은 더 큰 죄로 여기신다. 어떤 경우에나 여러분이 속한 공동체에 하나 됨을 깨뜨리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를 않기를 간절히 부탁합니다.
예수의 이름이나 핏값으로 세워진 교회 공동체, 거기에 많은 셀 그룹이 있다. 이들의 일치를 깨뜨리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가장 미워하는 죄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다’ 그들을 적그리스도라고 정의한다.
그럼 사망에 이르는 죄는 무엇입니까? 4장 2절에서 3절을 보면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요약하면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다. 육체로 오신 예수,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신 예수, 십자가에서 피 흘리신 예수, 우리를 위해서 그 고난을 받으신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과 같다.
적그리스도의 대표적인 모습을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이런 자들을 요한 사도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그들에 대해서는 구하라. 기도하라고 권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우리는 모든 사람의 삶에 대해서 중보 기도가 가능하다. 우리의 연약한 성도, 우리의 연약한 이웃을 위해서 우리는 중보의 기도가 필요하다. 요한 사도는 이런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중보 기도를 하라고 권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왜? 이 죄는 사망에 이르는 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시고, 새로운 구원의 희망을 주시지만, 그러나 분명한 신앙고백이 전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오셨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피가 우리를 대속케 했다고 하는 고백이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우리의 고백을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리지 못한다면 주님 앞에 자녀로서의 삶을 살 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떤 성도간의 관계에 있어서 잘못된 것을 권면하고, 책망하여 바로 잡기를 원하지만, 그 사역이 쉬운 일은 아니다. 디도는 3장 10절에서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고 하면서 이러한 자들은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는다고 말한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곳곳에 교회를 세우고 주의 복음의 말씀을 증언하여 교회가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교황제도는 정치와 종교를 통합하여 권력을 독점하게 되었고, 이는 교회의 부패로 이어져 성직을 매매하고 말씀보다는 인간의 전통과 관습을 중시하기에 이르러 초대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되자, 결국 가톨릭의 사제이며 교수였던 마틴 루터는 "오직 예수, 오직 말씀"을 외치며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카톨릭은 성도들이 잘못된 삶을 살았을 때 신부를 찾아와 고백하게 되어 있다. 그것을 고해성사라고 한다. 그러면 신부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선언한다. 스스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에 항상 중보자를 통하게 되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인류의 죄를 위해 피흘리시던 날, 예루살렘 성전의 휘장은 갈라졌고, 그 이후로 대제사장을 통해서만 드려졌던 우리의 기도는 비로소 직고할 수 있는 은혜를 입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스스로 죄의 문제를 목사에게 가져올 이유가 없다. 여러분 스스로 하나님 앞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능력을 힘입어 믿음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할렐루야!
이렇게 놀라운 성경적인 특권을 누리게 되었지만, 회개하는 삶의 훈련이 약해졌다. 왜냐하면 성도들 스스로가 회개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데 신실하고 성실한 자세로 회개하지 못하고 얼렁뚱땅 넘어가는 경우가 생겼다. 회개를 바로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회개의 기능이 약화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건강하여 성장하는 교회일수록 십자가의 도를 강조하는 교회다. 하지만 일부 교회는 아직도 십자가의 도가 온전히 선포되지 못하고 윤리적, 정치적 이야기들이 중심이 되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다. 아무리 설교를 들어도 십자가라는 말 한마디 없이, 회개와 성결된 성도의 삶을 촉구하는 말 한마디 없이 그저 좋은 아침, 좋은 세상임을 의미 없이 외치는 경우가 있어 부끄럽다. 광주민주화운동이 극심하던 어느 주일 아침에 수 많은 생명이 억울하게 희생되던 날에도 ‘할렐루야! 좋은 아침입니다’라며 설교를 시작한 몰지각한 목사가 있었음을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과 보혈의 선포 없이,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할 회개의 철저한 검증이 없이 그냥 좋게 좋게 지나가는 경우가 많아지게 된 배경에는 성도들의 책임도 크겠지만, 아울러 교회 지도자들의 목회 철학 속에 회개에 대한 철저한 삶의 고백을 촉구하는 사역의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거기에는 역사의식도 없고, 거기에는 회개에 대한 철저한 자기 반성도 없기에 십자가의 능력도 따라올 수가 없다.
요한 서신의 가장 중요한 어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표현이다.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노라고 이 글의 쓴 목적을 밝히면서, 동시에 이 글을 받아야 할 대상까지 정해 주고 있다. 이 글을 받아야 할 대상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은 신자에게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알려준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난 자이다. 나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왔는가 하는 고백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고백은 나의 근원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개념은 현재 실현된 특권을 선포하는 일이다. 과거가 아니라 지금이다. 요한 사도는 "지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 그렇다. 오늘 이 시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 이 특징은 존재론적인 실재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자로써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에게 속하지 아니하는 자니 곧 적그리스도, 곧 사탄의 자녀라는 것이다. 이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제적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냐, 아니면 내가 사탄의 자녀냐 하는 실재적인 고백이 자녀의 개념 속에 들어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자녀라는 개념은 사귐의 특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 사귈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이제는 종이 아니라 자녀이기에 자녀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 저와 여러분은 이 자녀의 특권을 가진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수직적 신앙의 관계가 원만해졌다면 이제는 수평적 관계가 요청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들과의 사귐이다. 하나님과의 사귐이 온전한 사람은 자녀와의 사귐도 온전해야 한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이 문제가 있다. 예를 하나 들어보면, "ㅇㅇ집사님은 기도 생활은 잘하는데 성도들과 너무 자주 다툰다"라고 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를 좋은 신앙의 사람 곧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귐을 온전히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아니다. 사귐의 특권은 하나님과의 사귐뿐 아니라 이웃과의 사귐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에서도 함께 동반되어야 할 부분이다. 하나님의 자녀됨, 이것은 분명 특권이요 하나님의 선물이다.
요한 사도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강조한다. "기도하라" 이러한 이들을 위해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기도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웃들이, 우리의 중보 기도가 필요한 형제자매들이 우리의 중보 기도를 통하여 온전해지며 더불어 그리스도의 공동체로서 부족함이 없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