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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5: 14 병든 자가 있느냐?
약 5: 14 병든 자가 있느냐?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
우리가 병에 걸리면 교회의 목사나 장로들을 청해야 한다.
본문의 '장로들'은 목사와 장로를 포함하는 말이다. 목사와 장로의 첫 번째 직무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들은 병에 걸린 자들을 심방하며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기름을 바르는 것은 초대 교회의 풍습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 6: 12-13에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기름은 당시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든지 아니면 단순히 성령의 은혜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의술과 약품을 하나님의 치료의 도구로 감사히 사용한다.
1]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병든 자'의 해석은 두 가지이다.
Ⓐ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연약한 자. 곧 연약한 믿음이나 양심을 소유한 자를 가리킨다. (Robertson, Blue, Manton).
* 롬 6: 19 -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 롬 14: 1-3 - 1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 고전 8: 9-12 - 9 그런즉 너희 자유 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를 가리킨다. (Davids, Martin, Burdick, Adamson).
두 견해 중 후자가 타당하다. 왜냐하면 신체적으로 질병에 걸린 자에게 기름을 붓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장로들'은 '감독'이나 '목사'와 동일한 명칭으로 교회의 대표를 의미한다(Calvin, Burdick, Mayor, Robertson).
* 행 15: 6, 22 - 6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22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 행 20: 17 -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 행 21: 18 - 그 이튿날 바울이 우리와 함께 야고보에게로 들어가니 장로들도 다 있더라.
* 빌 1: 1 -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 딛 1: 5, 7 -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 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 벧전 5: 1-4 -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병든 자들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청해서 같이 기도해야 하며, 교회 지도자들은 병든 자를 방문하여 위로하며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한다.
* 살전 5: 14 -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2]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기름을 바르며'(알레이프산테스)는 분사로서 문자적으로 '기름으로 문지르다'를 의미한다(Blue, Roertson, Burdick, Trench).
이렇게 병자에게 기름을 바르는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사회에서의 공통적인 풍습으로서 의식적인 수단이라기보다는 의술적인 수단에 가깝다(Mayor, Ropes, Hayden, Manton, Tasker, Burdick).
* 사 1: 5-6 -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더욱 더욱 패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 눅 10: 33-34 -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기도할지니라'(프로슈크사스도산)은 헬라어 본문에서 주동사에 해당되는 것으로 본문의 강조점이 '알레이프산테스'(기름을 바르다)보다는 '프로슈크사스도산'에 있음을 시사한다(Burdick).
교회의 지도자들은 병자를 방문하여 치유의 방편으로 의술을 사용함과 동시에 병자의 나음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Manton, Tasker).
성도들이 병들면 먼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청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장로들'은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치리 장로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목사는 설교와 치리의 책임을 겸한 자이고, 치리 장로는 치리의 책임만을 가진 자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목자요 감독자요 인도자이다.
* 행 20: 28 -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그들의 첫 번째 직무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든 이들은 목사와 장로들을 청해야 하며 그들은 병든 이들을 심방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사도 시대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 출 30: 30 -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기름을 발라 그들을 거룩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고
* 룻 3: 3 -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 삼하 12: 20 - 다윗이 땅에서 일어나 몸을 씻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갈아입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서 경배하고 왕궁으로 돌아와 명령하여 음식을 그 앞에 차리게 하고 먹은지라.
* 막 6: 12-13 - 12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기름은 아마 그 당시에 의약품으로 사용되었으며, 단순히 성령의 은혜와 능력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되 의술과 약품을 하나님의 치료의 도구로 인정하며 사용한다.
3] 그리스도인에게 병의 의미 : 김정남 목사
< 즐거울 때 찬송하십시오 >
예수님의 사역 중에 병든 자를 치유하는 사역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은 한번도 장례식을 치른 일이 없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사망의 장소를 부활의 장소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주님의 강한 생명력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에서는 치유 사역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먼저 세 부류의 교인들에 대해서 말합니다. 첫째, 고난당하는 자에 대해서는 기도하라고 말합니다(13절). 둘째, 즐거워하는 자에 대해서는 찬송하라고 말합니다(13절). 셋째, 병든 자에 대해서는 장로를 청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14절).
이 본문을 보면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당하는 것, 병든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즐거워하는 삶도 지혜롭게 잘 이끌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가장 기쁘고 즐거운 시간은 찬송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기쁠 때에 찬송을 하면 기쁨은 배가됩니다. 그런데 기쁠 때에 잘못하면 기쁨이 변하여 슬픔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실질적으로 고난당하는 사람 가운데 기도하는 사람 많습니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찬송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소중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기쁘고 형통할 때 잊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고 기억하는 일입니다.
열왕기상 7장을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성전을 생각한 것은 백향목 궁전에 앉아서 즐거움을 누릴 때였습니다. 다윗이 궁전을 크게 새로 지어서 입당을 하고 들어가 앉아보니 너무 좋고 행복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법궤가 아직도 천막(성막) 속에 있음을 기억합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큰 복을 내리신 이유는 인생의 가장 즐거운 시간에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고난당할 때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도제목이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자녀 입시를 앞두고 새벽에 열심히 나와 기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일도 없고 무사하고 평안할 때에 열심히 기도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형통할 때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하는 신앙은 더욱 소중한 신앙입니다. 그런 모습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성령 충만한 사람 >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가장 오해하는 것 중의 하나가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 충만한 사람을신비하고 신령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매일 환상 가운데 살고, 수시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잠자리도 하지 않고, 엘리야처럼 기적이 나타나고 모세처럼 홍해를 갈라지게 해야 성령 충만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가장 정상적이고 삶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이란 본문 13절 말씀처럼 고난이 있을 때 기도하고, 즐거움이 있을 때 찬송하는 것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즉 말씀과 기도를 앞세워 살면서 감사와 찬송으로 사는 사람이 진짜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성령님께서 주님이 내 안에 오심으로 죽어야 할 나를 살리신 은혜를 생각나게 하시면 이제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 남편에 대해서도 감사가 넘칩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와도 불평보다는 “남편이 집에 일찍 와서 뭐해?”하고 마음이 변합니다. 부인이 바가지를 긁는다고 옛날에는 실망했지만 성령 충만하면 그때 애정이 생깁니다. '저 바가지 소리에는 분명 무슨 뜻이 있어!‘하고 이해가 되고, 정이 생길 것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내 삶의 현장이 어디라 할지라도 성령님이 함께 하면 천국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많은 사람 가운데 그리스도인을 가려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쁨이 넘치는 표정 때문입니다.
성도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넘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수만 명이 있어도 성도를 찾아낼 수 있는 것은 그 얼굴이 은혜롭기 때문입니다. 은혜롭고 즐거운 얼굴은 가장 훌륭한 추천장이라고 베이커는 말했습니다. 어디에 소개해도 내어놓을 수 있는 최고의 좋은 사람은 은혜로운 표정의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얼굴에 은혜가 없어 보세요. 누구도 쓰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넘치는 사람은 어디에 가도 사랑 받고 하나님 영광 드러낼 것입니다.
성도는 삶이 은혜로워야 되고, 됩니다. 마음이 은혜로워야 되고, 말도 은혜로워야 됩니다. 항상 “하나님 앞에 큰 은혜 받았는데 이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까?”하고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으로 늘 울어도 눈물로써 갚을 수 없는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런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삶이 바로 성령 충만한 삶입니다.
< 병이 든 순간을 선용하십시오 >
오늘 본문에서 특별히 병든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에게 병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죄의 대가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큰 의미에서 병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실상 병은 하나님의 효과적인 말씀으로 그 속에는 깊은 뜻이 있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병중에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들리게 됩니다. 병원에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은혜롭게 들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때로는 선한 역사를 위하여 우리에게 병도 은혜로 주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병 낫는 것도 은혜요 병드는 것도 은혜입니다. 가끔 병이 들면 저주요, 병이 나으면 은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단순한 공식을 내세우는 것은 잘못된 신앙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병이 들어도 감사하고, 나으면 더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죽게 되어도 “감사합니다!”라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죽을 때 “저에게 쉼을 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며 편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을 줄 아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어차피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기 전에는 다 가는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병은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의 효과적인 도구 중 하나입니다. 말도 해도 못 알아듣고 감동을 주어도 못 알아듣고, 가까이 있는 사건을 통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경우에는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부득이 몸에 손을 대게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그런 의미에서 때로 하나님의 뜻이 병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빠서 교회에 못나가겠다 하는 사람이 병든 자리에 눕고 보니 바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병상에 누우면 다 포기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일은 한 마디로 우리의 삶의 이차적인 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야 할 일차적인 일은 바로 기도하는 일, 예배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더라도 기도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위해서 조금 덜 자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에게 급한 일이 많을수록 더욱 우리는 기도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사실을 잘 깨닫게 해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육신의 병입니다.병이란 사람들을 모든 일에서 중단하게 하고 그들의 가치관을 바꾸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남편이 아내를 늘 때릴 정도로 주사가 아주 심했습니다. 매일 부인을 괴롭히고 걸핏하면 자기 부인에게 나가죽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의 부인이 병이 나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병원에 와서 하는 말합니다. “여보! 죽으면 안돼! 큰일 난다.” 부인이 심한 병에 걸리니까 그 때에서야 부인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처럼 병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얼마나 선한 일들이 이루어지는지 모릅니다.
이 말은 병 자체가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병 안에 내포된 하나님의 음성이 우리에게 소중한 음성이고, 병을 통로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가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과 병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병이 든다면 그 병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오묘한 뜻을 생각하고 그 병든 기간을 잠시 하나님 앞에 멈춰서는 기간으로 삼고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 기간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신앙을 통해서 더욱 견고한 믿음을 내려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