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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 14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 히 13: 16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히 13: 14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
우리의 현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고난의 생활일지라도, 장차 영광의 천국에 들어갈 것이므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1]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영문 밖에 나아가기 위해서 '능욕'을 기꺼이 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생활하는 이 세상이나 유대교 안에는 영구한 하늘의 도성은 없으며 단지 일시적인 도성만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장차 올 도성은 사라질 도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시고 경영하시는 터가 있는 도성(11: 10, 16) 곧 하늘의 도성이다.
* 계 22: 1-5 - 1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그들은 하늘에 기록된 천국 시민이기 때문에 오직 하늘의 도성을 바라보고 이 세상에서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며 나그네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앞장에서 새 예루살렘 성의 영광에 대해 증언한 사도 요한은 이제 그 성의 복됨에 대해 증언한다. 새 예루살렘 성은 어린 양의 신부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계시록 21: 9-10,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그렇다면 그 성은 문자적인 성이 아니고 어린 양의 신부 즉 신약 교회를 상징한 것이라고 본다. 그 성의 영광, 크기와 거주민들에 대한 앞장의 묘사나 그 성의 복됨에 대한 본 장의 묘사가 그러하다.
생명수의 강은 길 가운데로 흐르고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달마다 맺힐 것이다. 그것들은 천국 백성에게 다양하고 풍성하게 생명력을 북돋울 것이다.
또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에 생명력과 활기를 주는 데 사용될 것이다. 에스겔 47장의 이스라엘 회복의 환상에서도 비슷한 말씀이 있다. 12절, “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치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로 말미암아 나옴이라 그 실과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천국에는 생명의 쇠약함과 쇠잔함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는 병도 없고 병원도 없을 것이다. 천국은 항상 건강과 활기가 넘치는 곳일 것이다. 우리는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저주가 없다. 이 세상은 아담과 하와의 범죄 때문에 저주받은 세상이었다. 창세기 3: 17-18,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땅의 저주는 거두어졌다. 새 예루살렘 성에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성도들은 천국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섬기며 그에게 예배드리고 그의 얼굴을 뵈옵고 그와 교제할 것이다.
1) 그의 얼굴을 본다.
(1) 구원의 주관자를 직접 보게 된다.
* 마 5: 8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 요일 3: 2 -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2) 구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였다.
심지어 모세에게도 얼굴을 대면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 출 33: 20-23 - 20 또 이르시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 출 34: 30-35 -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매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령하고 33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령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렸더라.
신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되었으므로 그리스도를 대면한 것이 곧 하나님을 대면한 것이다.
* 요 10: 30 -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 요 14: 7, 9 – 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 요 17: 3 -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을 직접 대면하여 보게 된다. 새 예루살렘 성전에서 시작된 생명수의 물을 먹고, 12가지 열매를 따 먹고, 12 진주 문을 통과하여 성전 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과 어린 양을 뵙게 된다.
* 계 21: 22 -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그러므로 그 이마에는 새 이름이 기록되는데 하나님의 이름과 어린 양의 이름과 새 예루살렘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
* 계 3: 12 -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
거기에는 밤이나 어두움이 없고 등불이나 전깃불이나 햇빛이 쓸데없을 것이다. 주 하나님의 영광이 친히 온 땅과 모든 사람들에게 밝히 비췰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도들은 새 예루살렘 성에서 왕 같은 신분과 특권을 가질 것이다. 사도 베드로는 신약 성도들을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말했다. (벧전 2: 9).
천국은 신정(神政) 국가이지만, 또한 매우 민주적인 나라일 것이다. 천국은 모든 사람이 자발적으로, 자원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나라가 될 것이다.
사람은 다시는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죄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빛 -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2) 다시 밤이 없다.
본문은 계 21: 23-25의 반복이다.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밤이 존재하지 않는 낮이 계속된다.
* 계 21: 23-25 –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24 만국이 그 빛 가운데로 다니고 땅의 왕들이 자기 영광을 가지고 그리로 들어가리라. 25 낮에 성문들을 도무지 닫지 아니하리니 거기에는 밤이 없음이라.
* 슥 14: 7 -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왜냐하면 그곳은 등불이나 햇빛에 의해서 빛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주 하나님 자신이 그곳의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원한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영원한 영과의 빛이 비취심을 시사한다.
(1) 영원한 하루.
(2) 낮
빛과 동행의 삶(하나 됨)을 말한다.
3)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다.
성안에서의 상태이다. 성 밖은 여전히 햇빛이 필요하다. 밤이 없으며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하나님이 빛이 되신다. 다시 말하면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밤이 존재하지 않고 항상 낮이 계속된다. (슥 14: 7).
거기에는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고 오직 주 하나님 자신이 그곳의 빛이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니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영원한 임재(臨在)를 통한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영원한 빛(영)이 비취는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이다.
(1) 등불
사람의 지혜에 의하여 어두움을 밝히는 과학을 상징하고 있다.
(2) 햇빛
창조주에 의하여 세상을 밝히는 자연 과학을 의미한다.
4) 하나님이 직접 비춰주심.
(1) 하나님은 근본이시므로
(2) 하나님은 모든 자연을 창조하신 분이심으로
(3) 인간은 하나님의 지혜를 전수 받은 자(형상을 닮음)이므로
* 슥 14: 7 - 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5) 왕 노릇.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궁극적인 축복이다. 이것은 계 3: 21에서 이미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신 약속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온전한 자유와 권위를 갖게 될 것을 시사한다.
* 계 3: 21 -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같이 하리라.
* 마 20: 25-27 – 25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1) 저희가
구원 성도를 의미한다.
특별히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성도를 지칭한다.
(2) 세세토록
영원한.
① "세세토록, 영원토록"의 의미
아마 가장 쉽게 오해할 수 있는 지옥에 관한 표현은, "세세토록"(forever and ever)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기록한 사도 요한의 표현일 것이다.
* 계 20: 10 - 또 그들을 미혹하는 마귀가 불과 유황 못에 던져지니 거기는 그 짐승과 거짓 선지자도 있어 세세토록 밤낮 괴로움을 받으리라.
사실상, 성경에 나타난 이런 성경 구절들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해석한다면, 혼란에 빠지기 쉽다. 그러나 성경에서 이러한 표현들이 어떠한 의미로 사용되었는지를 살펴보면, 그 진정한 의미를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신, 구약 성경 전체를 조사해보면, "영원, 또는 세세토록"이란 말이 57번이나 나오는데, 이 말이 언제나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② 몇 가지 예를 들어 보도록 하자.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노예에 관한 법에는, 노예가 평생토록 주인을 섬기도록 규정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러한 법을 이야기하면서, "송곳으로 귀를 뚫고 그가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 출 21: 6 -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것이요, 또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으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을 것이라.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
그러나 노예가 영원토록 주인을 섬길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노예가 그의 주인을 섬길 수 있는가? 물론, 죽을 때까지 밖에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서 "영영히"(forever)란 말은 끝이 없이 계속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노예의 생명이 마쳐질 때까지 주인을 섬기라는 뜻이다.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한나는 그녀의 아들인 사무엘을 하나님의 전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영영히 있게" 하였다.
* 삼상 1: 22 – 오직 한나는 올라가지 아니하고 그의 남편에게 이르되, 아이를 젖 떼거든 내가 그를 데리고 가서 여호와 앞에 뵙게 하고, 거기에 영원히 있게 하리이다. 하니.
그러나 이어지는 28절에서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린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고 있다.
* 삼상 1: 28 -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물론, "영원" 이란 용어의 일반적인 의미는 무한정한 시간을 뜻한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어떤 사건이 완전히 마쳐질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할 수 있다. 그래서 고래 배속에 한동안 머물렀던 요나 조차도 자신이 머물렀던 기간을 "오래도록" 즉, 영어로는 "forever" (영원토록)으로 묘사하였다.
* 욘 2: 6 -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늘에 간 의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는 말씀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렇다면 하늘에 간 의인들의 생명도 한계가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 "영원토록" 이라는 동일한 표현이 의인과 악인에게 모두 사용되었다. 그러나 두부류가 처해 있는 상황 사이에는 한 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의인들은 불멸의 생명을 선물로 받았다. 그들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처럼 영원한 것이다. 왜냐하면 불멸은 "죽음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이란 말이 의인들에게 적용되었을 경우에는 불멸의 존재로서 영원토록 생명을 누리는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것이 불멸의 생명을 받지 못한 악인들에 적용되었을 때는, 그것은 형벌의 불 가운데서 타서 없어질 그들의 육체와 생명이 살아 있는 동안(기간)만을 의미한다.
결코, 의인과 악인 사이에 존재하는 분명한 차이점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3) 왕 노릇 하리로다. - 왕권 성도로써의 삶
* 단 7: 18 -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고 영원하리라.
히 13: 15-16 - ⑮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⑯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 15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 사함은 우리의 찬송과 기쁨의 이유이다.
찬송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이다.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창조하신 목적이다
* 사 43: 21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또 우리를 죄와 멸망에서 구원하신 목적이다.
또 찬송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히 13: 15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
1] 그(이)러므로 우리는(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예수로 말미암아'(디 아우투)는 문자적으로 '그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찬미의 제사가 옛 언약의 제사장들에 의해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드려지는 것임을 의미한다.
Ⓑ 그리스도인들이 드리는 제사는 더 이상 옛 언약의 제사장들이 드렸던 동물 희생 제사가 아님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에 의해 온전한 희생제사가 단번에 드려졌으므로 더 이상 속죄를 위한 동물 희생 제사를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이 드려야 할 제사는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찬미하는 제사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찬미의 제사를 드린다는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희생 제사가 하나님께 온전하게 열납 되었음을 의미한다(Hewitt).
'항상'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드려지는 찬미의 제사가 지속적이어야 함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끊이지 않고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하심을 계속적으로 경험할 때 가능하며 하나님의 약속의 불변성을 확신할 때 이루어진다(Lane).
2] 이는 그 이름을 증언(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본문은 호 14: 2(LXX)의 인용으로 '찬미의 제사'에 대한 설명이다.
* 호 14: 2 -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거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입술의 열매를 주께 드리리이다.
'입술의 열매'는 감사제와 감사 찬송시 사용하는 '말'에 대한 셈어적인 표현이다.
* 잠 10: 31 - 의인의 입은 지혜를 내어도 패역한 혀는 베임을 당할 것이니라.
* 잠 12: 14 -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느니라.
* 잠 13: 2 -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 잠 18: 20 -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말미암아 배부르게 되나니 곧 그의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말미암아 만족하게 되느니라.
하나님께서 간절히 원하시는 제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증거하고 드러내는 찬양이다.(LXX)
* 시 71: 23 - 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와 선함에 대한 응답이며 하나님과의 계약을 진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이다(Lane, Morris, Bruce).
히 13: 16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
1]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저자는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찬미의 제사'뿐 아니라 사랑의 행위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역설한다.
'선을 행함'(유포이이아스)는 타인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든 친절한 행위를 가리키며, '서로 나눠 주기'(코이노니아스)는 돈이나 물건은 물론 타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나누는 관용(寬容)을 가리킨다(Morris, Lane, J. Y. Campbell).
타인을 사랑하는 실제적인 행위가 없는 찬미의 제사는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랑의 행위가 동반되어야 한다(Thuren).
'서로 나눠주기'(코이노니아)는 ‘교제, 구제, 구제 헌금’이라는 뜻이다. 선행과 구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힘써야 할 내용이다.
2]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본문은 그리스도인들이 사랑의 행위를 동반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이유이다.
친절과 관용 그리고 찬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새 언약 하에 있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요구하시는 예배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응답으로 '말'로는 물론 '행함'으로 제사를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이러한 제사를 통해서 성취되며, 하나님은 이러한 제사를 기쁜 마음으로 열납 하신다(Lane).
또 우리는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고 힘써야 한다.
* 사 58: 6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런 제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요지는 첫째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둘째로 서로 사랑하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선행은 구원받은 성도의 삶의 열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