딛 3: 9 어리석은 변론 - 딛 3: 11 스스로 정죄한 자
딛 3: 9 어리석은 변론 -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
1] 그러나
본 절에서 바울은 앞 절과는 달리 금지 명령을 하고 있다. 본 절에서 바울이 디도에게 금지시킨 명령들은 에베소 교회의 디모데에게도 동일하게 주어졌다.
* 딤전 1: 3-7 -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 도다.
2]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이는 삶 속에서 실제적인 의미를 줄 수 없는 논쟁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1)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것.
(2)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 것.
(3) 구원 문제와 신자의 삶에 중요성이 없는 것 등이 포함된다.
족보 이야기는 어리석은 변론 중의 하나이다(Calvin, Lenski, Guthrie). 유대인들은 '족보'를 중시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제사장들의 가상적 족보를 만들어 이것을 구원의 조건과 선민적 우월성을 주장하는 방편으로 내세웠다.
이런 유대인들의 자랑과 변론은 초대 교회에 많은 혼란과 분열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으므로 바울은 이런 형식적이고 생명력이 없는 행위들을 어리석고 허탄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 딤전 1: 4 -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3]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율법에 대한 다툼'은 1 장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1: 10-16) 그레데에 살던 유대인들의 거짓교훈을 암시한다(Hanson).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준수, 할례, 정결례 등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으로 서로 다투었고 그 결과 '분쟁'을 초래하였다. 그들은 이런 표면적인 문제를 통해 입으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인 것처럼 가장하나 실상은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신의 이익과 권력, 명예만을 추구하였으며 결국 그레데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피하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리이스타소'(*)는 문자적으로 '돌아서다', '따로 서다'는 뜻이다. 이것은 같이 어울릴 필요가 없음을 시사한다.
디도는 교역자로서 유대인의 의미 없는 논쟁에 빠져들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말씀의 사역을 잘 감당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권면해야 했다.
* 마 28: 20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 딤전 4: 11 -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4]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확신 있게 말해야 할 말이 있는 반면, 말하는 것을 피해야 할 주제도 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등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은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고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된 것들이다.
물론, 논쟁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필요한 논쟁도 있다. 바른 교리를 규명하고 확증하는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선한 논쟁이다.
오늘날처럼 자유주의 신학과 연합운동과 신복음주의와 은사주의가 교회들 안에 많이 들어와 있는 때에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타협주의와 싸우고 은사주의에 대한 경계를 주장하는 것은 필요한 싸움이다.
딛 3: 10 이단에 속한 사람 -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
1] 이단에 속한 사람을
'이단'(*, 하이레티콘)은 본래 '견해', '학파', '종파'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단자들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함으로써 '분파'나 '당파'를 만드는 사람으로 전락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구별하는 사람'(a divisiveperson, NIV), '당파 싸움을 좋아하는 사람'(a man who is factious, RSV)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본 절에서는 당시 그레데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가리킨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에 관한 논쟁과 족보 이야기등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1: 14)를 주장함으로써 교회의 교훈과 전승에 대립하였다.
이단에 속한이라는 원어(하이레티코스)는 ‘당파적인, 이단적인’이라는 뜻이다. 실상 교회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진리도 하나이다. 그러나 오류들이 교회에 침입해 들어왔다.
잘못된 생각들이 교회 안에서 지지자들을 얻었고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며 사람들의 무지와 연약이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고 잘못된 사상을 가진 무리와 당파가 생겼다.
2]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단에 속한 자'에 대한 교회의 치리 방법은 두 가지이다.
첫째, 한두 번 훈계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구속 사역과 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도록 권면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래서 훈계를 받아들인 자는 사랑으로 용서하고 용납해야 한다.
둘째, 훈계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교회에서 내보내야 한다.
* 벧후 2: 17-22 -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 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왜냐하면 그들이 교회에 존속(存續)하면서 교인들 유혹하고 잘못된 길로 가게 하여 교회를 혼란에 빠지게 하기 때문이다.
한두 번 훈계한 후라는 말은 이단과 당파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때 거기에 빠진 자가 돌이키면 문제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실수와 부족이 있을 수 있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잘못과 부족을 깨달을 때 거기서 돌이키는 자는 깨끗함을 받는다. 한두 번 훈계한 후에도 돌이키지 않는 이단자와 당파적 인물은 성도가 멀리해야 할 자이다.
멀리하다는 원어(파라이테오마이)는 ‘받아들이지 않다, 거절하다, 피하다’라는 뜻이다. 이단과 오류를 버리지 않는 자들과 계속 교제하는 것은 그 악을 인정하는 것이든지 그 악에 물드는 일이다.
이런 경우에는 성도 개인과 교회 회중의 순결을 위해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멀리하는 것은 소극주의가 아니다. 이단자들이나 오류에 빠진 자들과 멀리하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른 방법이다.
딛 3: 11 스스로 정죄한 자 -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
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본 절은 이단에 속한 자들의 상태에 대한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심하게 왜곡되고 비틀어져서 진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훈계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부패하여'에 해당하는 '여세스트랖타이'(*)는 완료 시상으로 가미 그들이 완전히 타락 상태에 있음을 의미한다.
네가 아는 바와 같이라는 원어는 ‘이러한 사람이 ...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라’라고 번역해야 한다(NIV).
부패하다는 원어(에크스트레포)는 ‘심히 비뚤어지다’라는 뜻이다.
2]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죄를 짓느니라'로 번역된 헬라어 '하마르타네이'(*)는 현재 시상으로 현재 의도적으로 바른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음을 시사한다.
이미 마음이 왜곡된 그들은 현재 훈계를 거부하고 자신들의 악한 주장만을 고집함으로써 그들 스스로가 정죄하는 입장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정죄한 자라는 원어(온 아우토카타크리토스)는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자책하면서도’라는 뜻이다. 한두 번 훈계해도 고치지 않는 이단자들은 심히 비뚤어져서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들이다.
그들은 강퍅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무지해서, 실수로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고,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완악한 심령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다.
민수기 15: 30는 이런 자를 ‘짐짓 악을 행하는’ 자로 묘사하였고, 히브리서 10: 25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으로 묘사했다.
요한일서 5: 16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다고 본다.
바로 이단들은 이와 같이 성경 진리와 교훈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고의적으로, 심히 완악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멀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