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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 6: 6-10 선행에 대한 권고 ( 2 )
갈 6: 9 때가 이르면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
본 구절은 마지막 추수의 때가 지연된다는 것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Ridderbos).
임박한 종말을 눈앞에 두고는 누구든지 긴장하게 마련이다.
간사한 인간은 이 '지연'으로 인하여 스스로 피곤해하며 넘어지게 된다.
1]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는 살후 3: 13의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본 절과 살후 3: 13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 절'(*, 토 칼론 포이운테스 메 엥카코멘),
'살후 3: 13'(*, 메 엥카케세테 칼로포이운테스).
살후 3: 13에서는 '메'(*)와 연결된 부정 과거 가정법 '엥카케세테'(*)에 의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금지 명령형'을 뚜렷하게 설명하였다.
본 절에서는 현재 가정법 '엥카코멘'(*)과 '메'(*)의 구문이 앞에 있는 '포이운테스'(*, '행함')와 함께 사용되어 '계속적이고 반복적인 행함'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선행은 사람이 마땅히 실행할 자기 책임만 행함이 아니다. 남들을 도와줌이다. 남들을 돕는 일은 용이한 것이 아니다.
도움을 받고도 감사한 줄 모르는 사람도 많고, 도와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도 많다. 또한 돕는 일을 직접 방해하는 장애물도 많다. 그러므로 남들을 도와주는 자는 낙심하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한다.
'선을 행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구원의 열매이다. 그것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딛 2: 14은 말씀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본문은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사람이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기 쉬움을 보인다.
아마도 남이 그를 몰라줄 때, 또는 남이 오히려 그를 비난할 때, 또는 좋은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 않을 때, 선을 행하는 자는 낙심하기 쉬울 것이다.
2]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나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는,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 거둘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에는 때가 있다. 무엇을 거두는 것인가? 영생을 거둔다. 영광의 천국이 다가오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다가오고 있다. 영생의 세계가 다가오고 있다.
죽음의 현세는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소망은 이 세상, 곧 100년의 삶의 세상, 늙고 병들고 죽는 이 세상에 있지 않고, 저 세상,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있다.
요한계시록 21장은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을 보여 준다. 옛 하늘과 옛 땅은 지나갔다.
* 벧후 3: 10 -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멸절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 시 102: 26 -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 같이 낡으리니 의복 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
완전히 새롭게 되었다는 뜻이다.
* 사 65: 17-25 -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 사 66: 22 - 내가 지을 새 하늘과 새 땅이 내 앞에 항상 있는 것 같이 너희 자손과 너희 이름이 항상 있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 벧후 3: 10, 12-13. - 10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12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13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이제는 하나님이 사람과 함께 계시게 된다.
* 고전 15: 24-28 -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25 그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에 둘 때까지 반드시 왕 노릇 하시리니 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27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에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그의 아래에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28 만물을 그에게 복종하게 하실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신 이에게 복종하게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
이는 아담의 저주가 제거되고
* 창 3: 17-19 - 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18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19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사단과 악인은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 믿지 아니하는 자들, 흉악한 자들, 살인자들, 행음자들, 술객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하는 자들은 둘째 사망에 참여한다.
에스겔이 높은 산 위에서성전의 이상을 보았던 것처럼(겔 40-43 장), 요한도 크고 높은 산 위에서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았다.
성곽의 기초석에 어린 양의 12사도의 이름이 있고
* 계 21: 14 - 그 성의 성곽에는 열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 양의 열두 사도의 열두 이름이 있더라.
각색 보석으로 꾸몄다.
* 계 21: 19-20 - 19 그 성의 성곽의 기초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요 둘째는 남보석이요 셋째는 옥수요 넷째는 녹보석이요 20 다섯째는 홍마노요 여섯째는 홍보석이요 일곱째는 황옥이요 여덟째는 녹옥이요 아홉째는 담황옥이요 열째는 비취옥이요 열한째는 청옥이요 열두째는 자수정이라.
새 예루살렘의 크기가 길이, 너비, 높이가 2,400Km(일만 이천 스다디온. 계 21: 16-17)나 되는 정육면체이다.
천년왕국에 대한 모습을 상세하게 설명함으로써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자들이 누리는 축복을 바라보게(소망 삼게) 한다.
확실한 사실은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이 들어간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이루어지는 영광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요, 지상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늘 보좌 앞에 이루어지는 역사이다.
창세기가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시작하는 역사였다면 새 하늘과 새 땅은 모든 것을 마치는 역사다.
* 계 21: 4 -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영광의 그 나라는 우리가 들어가 영원히 살아야 될 최후의 종착지이다. 그 나라를 바라보는 영계가 되자.
(1) 여러 견해
① 신 창조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완전 소멸하고 완전하게 새로운 신천신지를 창조하신다는 견해이다. 마태복음 24장 29절과 베드로후서 3장 12절을 근거로 한다.
바클레이[W. Barclay] :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나 세계를 이대로 버려두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죄와 슬픔이 전적으로 사람의 잘못 이지만 반드시 새 천지를 창조하실 것을 확신한다. [바클레이, 성서주석 계시록, p.332]
② 갱신설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세계가 사단으로 인하여 부패하였지만 처음 하늘과 땅을 질적으로새롭게 변화시켜 주실 것이다.
후크마[A. A. Hoekema] : 새 하늘과 새 땅이 새롭게 질적으로 변화되는 우주 갱신설로 본다.
⒜ 우주의 참신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는 창조 세계의 소망을 이룬다.
* 롬 8: 20-21 -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 죽었던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하므로 동일한 새 하늘과 새 땅이 필요 하다.
* 고전 15: 51-54 -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53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ㄷ)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 고후 5: 4 -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 살전 4: 16-17 -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④ 사단이 부패시킨 이 세상을 갱신하지 못하고 소멸한다면 사단의 영원한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크마, 개혁주의 종말론, pp.375-377 요약]
(2) 저자의 견해
옛 것의 완전 소멸이나 새로운 창조가 아니다. 질적으로 새롭게 변화된 에덴동산의 회복을 상징한다.
① 본서의 내증으로 입증된다.
계시록은 동일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17장에서 음녀의 정체를 밝힌 후에 18장에서 음녀의 종말에 대하여 자세하게 확대 해석하고 있다. 천년왕국의 내용도 20장에서 성격을 설명하고 21장에서 확대 해석하고 있다.
② 원어적으로 입증된다.
새 것을 나타내는 말에 두 가지가 있다.
⒜ 카이노스[καινος]: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
⒝ 네오스[νεος]: 시간의 새로움. 젊음. 어린[young]. 새 하늘과 새 땅에 사용된 단어는 카이노스이다.
③ 구속사적인 의미로 입증된다.
본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주권과 위엄을 상징하는 보좌에 앉으신 이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에서만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며 직접 선포를 하셨다. 이것은 이사야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 사 65: 17 -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롬 8: 18-23 - 18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19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20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21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23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갈 6: 10 믿음의 가정들에게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
1]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1) 그러므로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라 운'(*)은 앞에 기술된 사실들을 결론적으로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고자 할 때 자주 사용되었다.
구약을 인용하고 나서 부연 설명을 시작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본 절에서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2) 기회 있는 대로
이것은 남들을 도와주기에 적합한 시기(時期)를 말한다. 농부는 씨를 뿌리며 밭가는 때도 있고 추수하는 때도 있다. 그와 같이 성도는 남들을 도와주어야 할 때가 있다.
만일 그 때에 남을 돕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아픈 후회를 남기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주님 앞에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자는 '있는'의 헬라어 '에코멘'(*)을 가정법적인 의미로 이해하여 '기회가 있으면'으로 번역한다(Westcott, Hort).
그러나 바울은 일반적으로 가정법 문장을 사용할 때 언제나 '안'(*, if)을 썼다. 본 절에서는 '안'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에코멘'을 '기회가 있는 동안', 또는 '기회 있는 대로' 등의 뜻으로 번역하는 것이 타당하다(Lenski, Ridderbos, Huxtable).
본문은 한 개인의 생애 가운데 제한되어 있는 기회의 제한성을 나타낸다.
(3) 착한 일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가돈'(*)은 9절의 '칼론'(*, '선') 대신에 쓰였다. '칼론'이 '윤리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라면, 본 절의 '아가돈'은 철저하게 '이웃과의 관계'속에서 이해되는 단어이다.
6절에서는 '아가돈'이 아니라 복수 형태인 '아가도이스'(*, '좋은 것들')가 사용되었으나 본 절에서는 단수로 사용되었다.
비록 단수로 쓰이긴 했어도 '아가돈'은 선한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집합적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아가돈'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베푸는 자비와 동정심을 가리킨다.
6절에서의 '아가도이스'는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모든 것을 함께 나누는 것에 역점을 두고 있다. 본 절의 '아가돈'은 일방적으로 베푸는 선행에 역점을 두고 있다.
2]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더욱'에 해당하는 헬라어 '말리스타'(*)는 '무엇보다도', '최고로', '특히'등의 뜻을 가진 '말라'(*)의 최상급이다.
선행의 대상에는 구별이 없다.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 선한 일을 해야 한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을 전달하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선한 일을 해야 한다.
초기의 예루살렘 교회는 이 점에 있어서 좋은 모범이 되었다.사도행전 2: 44-45은 증거하기를,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하였다.
또 사도행전 4: 32은 증거하기를,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고 하였다.
바울이 이처럼 믿는 자들에게 특별히 잘해주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 속에 있는 거짓 교사들과 유대주의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시사한다.
'가정들'로 번역된 헬라어 '오이케이우스'(*)는 신약에서 바울 서신에만 나타난다. 바울이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 무리들은 신앙 공동체와 불가분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함이다.
이처럼 바울이 성도들을 하나의 대가족 단위로 파악한 것은 성도들을 '이웃'보다 긴밀(緊密)한 '형제'(*, 아델포스)로 보았기 때문이다.
* 엡 2: 19 -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 딤전 5: 8 -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바울 당시에는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때문에 이웃의 배척과 사회의 핍박을 받았고 이로 인하여 많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믿는 자들은 다른 동료 신자들 이외에는 달리 도움을 받을 데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믿는 자들은 우선적으로 동료 신자들에게 도움을 베풀 필요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6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선행에 대해 강조한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최상의 것을 드리는 정신으로 해야 할 것이다. 또 우리는 낙심치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선을 행하되 특히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 이것은 이 세상의 삶에서도 진리이다.
이것은 특히 영원 세계에도 적용된다. 믿음으로 바로 산 자, 성령의 감동 속에서 선을 행한 자는 확실히 영생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믿음 안에서 선을 행하기를 힘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