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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제14장
마리아의 헌신 막14:1-5
이제 이틀 후면 유월절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계속해서 예수를 '잡아 죽이기'(1절) 위해 그의 뒤를 좇습니다. 유월절의 주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저들의 정치적 야망의 희생물로 삼으려는 것입니다. 반면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는 유월절 주인이신 주님을 위한 귀한 예식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로 예수님을 공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둘러싼 각 무리들의 입장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1. 대제사장과 서기관들
'예수를 궤계로 잡아 죽일 방책을 구하며'(1절) 여전히 악한 생각으로 가득 찬 사람들입니다.
1) 복음을 수용하지 않음
죄악으로 인하여 멸망 받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ㅏ님의 구원 계획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구체화되었습니다. 그의 메시야 사역은 복음 전파를 통해 일반 대중에 까지 미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권세있는 가르침을 듣고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고 그러한 사실을 알려야 할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고 배척했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종교적 열심과 위선적 신앙형태는 진리를 거부하고 빛을 가렸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주님을 발견하지 못한 영적 소경들이었습니다.
2) 불순한 목적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에 빠진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셔서 몸소 삶의 현장에서 실제적으로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목적과는 달리 당시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등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교권 수호와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이권 등을 목적으로 세력을 키워왔습니다. 이러한 그들이 예수님을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인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점차로 높아지자 한편으로는 부러워하고 한편으로는 질투하면서 그를 제거할 궁리에 바빴습니다. 목적은 행위를 유발합니다. 선한 목적은 선한 행위를, 악한 목적은 악한 행위를 낳습니다.
2. 무심한 군중들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행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5절) 마리아의 봉헌을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1) 주님보다 물질에 더 관심을 둠
이들을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 헌신을 세상의 경제적 셈으로 계산했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드리는 봉헌이 '허비'로 보입니다. 헌신은 '낭비'이며, 구제는 '소모'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모든 경건한 노력이 우습게만 보입니다. 극히 현실적인 사람들입니다.
2) 현실문제에 더 치중함
마리아의 '봉헌'을 이웃을 향한 '자선'보다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하나님께 대한 신앙적 헌신보다 이웃을 위한 물질적 자선이 더 귀하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에 대한 관심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관심보다 더 우선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웃에 대한 관심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관심 다음에 옵니다. 신앙은 현실과 이상의 적절한 조화인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모든 현실적 조건의 유보입니다. 성도는 현실을 무시해서는 안되지만 현실에 집착해서도 안됩니다. 마리아의 봉헌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들의 잘못은 '하나님'은 보지 못하고 '이웃'만을 보았다는 사실입니다.
3. 마리아의 헌신
예수님에게 최선의 신앙적 행위를 표현한 마리아의 헌신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였습니다.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절) 신앙의 최고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인식함
그때까지 예수님의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한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제자들까지도 그러한 사실을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기피하는 죄인인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확신하였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인류를 위해 대속적 죽음을 당하실 주님께 정성을 다하여 헌신했던 것입니다.
2) 예수님을 다른 무엇보다 사랑함
마리아는 자신의 전재산을 예수님을 위해 아낌없이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고는 그런 행위는 불가능합니다. 사랑에는 아까운 것이 없습니다. 전체를 주어도 모자란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한 사랑의 확증으로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많이 사랑하는 자는 많은 것을 바칩니다. 마리아는 그녀의 전 소유를 바칠 만큼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작은 선과 큰 보상 막14:6-9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를 위한 '잔치'(요12:2)가 벌어졌을 때, 예수께서 무덤에서 소생시킨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가 비싼 나드 향유를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 가룟 유다를 비롯한 제자들 사이에서 '버히'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의견이 대두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마리아의 행동을 오히려 칭찬하시고 나아가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이면 어디서든지 마리아의 행한 일을 기념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게서 그렇게 말쓰하신 근거가 어디에 있는지 본문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선행의 우선순위
1) 대상의 우선순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때라도 원하는 대로 도울 수 있거니와 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7절) 예수께서는 여기서 '가난한 자들'과 '나'를 대비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주변에 있지만 주님은 이제 곧 그들 주변에 계시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여인의 선행을 보는 제자들의 시각과 예수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달랐습니다. 제자들이 여인의 행동을 '허비'하는 것으로 본 것은 주로 가룟 유다에 의하여 제기된 견해였는데,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실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그 판 돈을 훔쳐가기 위해서였다고 사도 요한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12:4-6) 무릇 선행 뿐 아니라 모든 일에는 그 처리에 있어서 선후가 있고 완급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보다 이제 곧 그를 주변에서 떠나실 주님을 위하여 봉사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2) 기회의 우선순위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아무때라도','나는 너희와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기회의 우선 순위에 대한 뜻이 들어 있습니다. 항상 있는 기회보다 오직 한번밖에 없는 기회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은 마리아의 선한 행동을 당신의 생애 최후에 있어서 가장 값진 환대로 생각하신 것입니다. (8절) 인간에게 최우선 순위로 정해야 할 두가지 기회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회개'해야 할 기회이며, 하나님을 위해서는 '지금 이 때'가 언제나 최우선적인 기회입니다.
2. 선행의 기준
1) 최고의 가치
마리아가 예수에게 부은 나드 향유가 값으로 치면 삼백 데나리온이 넘는다고 했습니다. (5절) 당시 한 데나리온은 장정 하루의 품값이므로 마리아의 향유는 장정 10개월분의 품값에 해당했습니다. 마리아는 그 오라비를 무덤에서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하여 이 고가의 향유를 주님의 머리에 부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가 힘을 다하여'(8절),'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6절)는 칭찬은 주님께서 그녀의 정성을 열납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예수께서는 과부의 연보 두 렙돈에 대하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비록 적은 액수였지만 그녀의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막12:42-44) 액수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액수 속에 들어있는 진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2) 최선의 태도
마리아가 주님에게 향유를 붓는 장면을 요한은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주님의 머리와(막14:3) 발에 붓고 자기의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었습니다. 마리아의 이러한 태도는 주님께 대한 최대의 경의와 최고의 사랑과 최고의 헌신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ㄴ은 절대적인 존재이시므로 최고와 최선의 것을 요구하시고 인간들이 그 뜻에 순종했을 때 기뻐하시고 축복하십니다.
3. 선행의 의미
1) 선행의 비의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8절). 마리아가 주님께 향유를 부은 것은 어디까지나 그녀의 도덕적 차원에서의 봉사였으나 주님은 마리아의 봉사를 종교적의미로 수용하셨습니다. 인간은 선을 행하면서도 그 선의 참 가치와 의미를 모릅니다. 그것은 '선'이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시119:68;눅18:19;요삼11) 모든 사람의 선행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선행의 비의입니다.
2) 작은 선과 큰 보상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9절). 인간의 선행에 대한 놀라운 하나님의 보상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 마리아의 선한 봉사가 기념될 것이라는 이 보상에 비하면 그녀의 선행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작은 선은 영원한 큰 보상을 결실케 하는 생명의 나무입니다.
유다의 어리석은 약속 막14:10,11
'약속'은 어떤 목적을 위한 다짐이기에 구속력을 갖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결코 파기해서는 안된다는 결연한 조건이 따르는 것입니다. 때문에 '약속'은 신중하게 해야 합니다. 결코 지키기 못할 약속을 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 보면 가장 선하고 지혜로우신 스승 예수의 제자 중에 그 많은 가르침을 받고서도 인류 역사에 있어서 최대의 비극적인 약속, 곧 가장 어리석은 약속을 한 유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째서 그것은 어리석은 약속이었습니까? 오늘 우리도 어리석은 약속을 할 수 있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이 말씀을 의미있게 살펴보고 교훈을 얻고자 하는 것입니다.
1. 가증스런 배신의 약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말기에 유대인들의 최고 종교 기관인 산헤드린이 고심하고 있는 것은 어떤 방법으로 민중을 자극하지 않고 에수를 체포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악의 세력이 우는 사자처럼 입을 벌리고 삼킬자를 찾는 그 순간 가롯유다는 제발로 악의 소굴로 찾아가 스승 예수를 팔아 넘기는 언약을 합니다.
1) 제자가 스승을 팔았습니다.
본문 10절에 보면 가룟유다가 산헤드린의 대제사장을 찾아간 뚜렷한 목적이 나타나 있습니다. 곧 '가룟 유다가 예수를 넘겨 주려고'라고 하였습니다. 제자가 스승을 팔고자 간 것입니다. 제자가 스승을 파는 약속을 맺기 위해 찾아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자식이 부모를 팔 수 있겠습니까? 스승은 제자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주는 부모와 같은 분입니다. 유다는 스승 예수께 '열 둘 중에 하나'인 존귀한 제자로 택함을 받아 삼년동안 동거하며 사랑을 받고 제자 훈련도 받으면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섬길 수 있도록 양육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스승을 원수들에게 팔고자 약속했다는 것은 가증스런 배신의 행위입니다. 배신은 비인간적인 행위입니다.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행위입니다.
2) 예수님의 급박한 처지를 악용했습니다.
이제 예수님 주변에는 점점 위기감이 고조되어 갑니다.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체포할 기회만을 찾고 있습니다. 그 위기가 고조된 순간을 가롯유다는 돈을 받고 스승을 넘겨 줄 최대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주님에게 닥친 위기를 가증스런 배신의 기회로 악용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타인의 위기, 타인의 불행, 타인의 허점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배신의 기회로 악용하지는 않습니까?
3) 예수님에 대한 지식을 악용했습니다.
본문 11절에 보면 '유다가 예수를 어떻게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고 하였습니다. 유다는 막14:43이하에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대제사장들이 보낸 하속들과 나타나서 군호를 짠대로 예수께 입맞추어 그들이 주님을 체포하기 용이하도록 도와줍니다. 가룟 유다는 삼년 동안 주님과 동거하며 그분이 어느 때, 어디에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곧 정보를 사용하며 예수님을 체포하게 도왔습니다. 그는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정보를 제공하여 배신하는 가증스런 제자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아는 지식을 팔아 나의 필요를 채우는 가증스런 정보의 제공자 같은 길을 걷고 있지는 않습니까? 타인의 사정을 악용함으로 자기의 배를 불려서는 안됩니다.
2. 인간의 탐욕을 좇은 약속이었습니다.
스승을 대제사장들에게 넘겨 주고자 하여 그드르이 소굴로 발걸음을 옮기는 유다에게는 분명히 예수님에 대한 잘못된 감정이나 오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유다는 스승에게 무엇을 기대했다가 실망한 것이었을까요? 주님은 아버지께서 계획하신 길에서 추호도 어긋남이 없는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행동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뜻을 따른 메시아의 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까? 유다는 예수님께 자기 중심적인 기대와 세속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기대를 예수님은 채워주지 않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이들은 이 함정을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기대, 세속적인 욕망으로 주님을 의지하고 따를 때는 제2의 가룟유다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직 주님으로만 만족하십시요.
3. 대가를 바라고 맺을 약속이었습니다.
비록 유다가 처음에 돈에 대한 필요로 스승을 넘겨주고자 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는 돈을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주기로 약속하니 그는 더욱 주님을 넘겨줄 계획을 치밀하게 계산했는지 모릅니다. 세속적인 욕망으로 허전한 마음은 돈의 노예가 되기 쉽습니다. 돈은 구속력을 가지고 인간을 파멸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유다는 돈을 주고받는 일에 약속을 했습니다. 이젠 스승을 돈을 받고 파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결국은 비참한 죽음입니다. (마27:5) 유다는 자기의 파멸의 어리석은 약속을 했습니다. 함정을 파는 자는 그곳에 자신이 빠집니다. (잠26:27)
마지막 유월절 막 14:12-16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잡아 죽일 궤계가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마지막 유월절 날이 밝아왔습니다. 예수께서는 전날 베다니에서 조용히 쉬시면서 '최후의 밤'을 준비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드디어 유월절 날이 되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어디에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시기를 준비할 것인가 여쭈었습니다. 유월절을 반드시 예루살렘 성내에서 지켜야 했으므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눅22:8)을 보내어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시는 과정에 있어서도 예수의 신적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습니다. 상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1. 마지막 유월절
1) 땅에서의 마지막 유월절
'무교절의 첫날 곧 유월절 양 잡는 날에'(12절). 이 해의 유월절은 예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수난을 예고해 오시던 주님의 일정 속에는 이 유월절이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지키는 유월절(막14:25)이었습니다. 그것은 동시에 구약의 율법 아래에서의 마지막 유월절이기도 했습니다. 애굽에서의 해방과 자유를 기념하는 이 유월절을 이제 당신 자신의 몸으로 유월절 양을 대신하고 그 흘리는 피로써 모든 인류의 속죄와 자유를 약속하는 영원한 절기로 승화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 마지막 유월절은 예수께서 구속사역을 완성하실 '나의 때(마26:18)'속에 들어 있던 마지막 일정 중의 하나였습니다.
2) 성만찬으로 승화된 유월절
양을 잡아 지키는 유월절은 이제 구약의 모든 제사와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의 완성, 승화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25절). 유월절은 이 말씀으로써 성만찬으로 승화되고 유월절에 먹던 떡과 포도주, 그리고 양의 고기 등은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제물로 바쳐지는 예수의 몸과 그 흘리신 피로서 승화되고 그것은 예수께서 유월절 음식을 잡수신 다음에 '성만찬'을 새롭게 제정하심으로써 상징화 되었습니다.
2. 유월절의 준비
1) 준비한 사람들
'예수께서 제자 중에 둘을 보내시며 가라사대 성내로 들어가라 그리하면 물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리니 그를 따라가서 어디든지 그의 들어가는 그 집 주인에게 이르되'(13,14절) 이 말지막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예수께서 동원하신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과 그리고 예루살렘 성내의 다락방 주인인 마가(행12:12)였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가장 아끼시는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예견적 지시를 믿음을 갖고 수행할 적임자들이며 마가는 예루살렘 성내에 큰 저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는 이미 주님으로부터 선택되어 그의 집에서 주님의 유월절을 준비하는 영광을 얻은 자이며, 나중에 바울과 베드로의 동역자로서 복음 사역에 기여했습니다. (행12:25;벧전5:13) 이들은 모두 이 역사적인 마지막 유월절을 준비하기 위하여 예정된 사람들이었습니다.
2)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순종
베드로와 요한은 주님의 예견적 지시를 그대로 믿고 실천하기에 가장 알맞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며칠 전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타고 가실 나귀를 마련하는 일에서도 예수의 예견 능력을 경험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며(막11:1,2), 그들은 원래 '나를 따라 오너라'(막1:16-20)고 하시는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직장과 가정을 버리고 순종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하나님의 예정과 거기에 부르심을 받고 순종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2. 예비된 유월절 다락방
'그리하면 자리를 베풀고 예비된 큰 다락방을 보이리니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에비하라'(15절). 유월절 음식을 잡수실 장소는 이미 주님께서 예배해 주셨습니다. 마가의 집 '큰 다락방'은 적어도 120여명 이상의 사람이 앉아서 기도할 만큼 넓은 장소였으며(행1:12-15), 주님께서 이 장소를 예비하신 것은 단순히 이번 유월절에만 사용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이 다락방에 대하여 더 깊은 생각을 가지시고 선택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이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후 제자들이 모여 기도하는 장소가 되었고 주님의 피로 세우신 첫 교회가 바로 이 다락방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유월절 음식이 성만찬으로 바뀌고 최초의 성령 세례가 시행된 것이며(행1:5;2:1-4) 최초의 선교 본부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영원한 요람이 된 이 다락방은 주님에 의하여 선택되어 복음사역에 크게 이바지 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입니다.
배반자 유다 막14:17-21
다윗이 절규하며 호소하던 기도문인 시41:9은 가룟유다의 배신을 의미한 예언적 시로서 예수께서 인용하신 말씀입니다.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13:18) 오늘 본문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 주님의 열두제자중에서 왜 이런 배반자가 나와야 했습니까? 우리는 배반자 유다를 단순히 정죄만 하기에 앞서 배반자 유다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배반자에 대한 사랑의 호소
예수님은 산헤드린 공회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가 구체화되고 있으며, 죽음의 시각이 임박하여 오고 있음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막10:33)메시야의 길은 대속물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길입니다. (막10:45) 그런데 슬프게도 주님을 희생시키는 일에 제자 유다가 가담했습니다.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유다가 거기에 가담하지 않아도 주님은 성경대로(사53장) 그의 사역을 이루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를 보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인내하시며 깨우치려 하셨습니다.
1) 자신이 인류의 메시야이심을 다시 깨우쳐 주셨습니다.
주님은 최후로 가룟 유다에게 자신이 메시야임을 믿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당신으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않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석에서 일부러 유다가 듣도록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 곧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팔리라'(18절). 이것은 청천 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주님을 팔 자가 있다니! 믿을 수 없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스승을 산헤드린 공회의 대제사장들에게 팔기로 한 사람이 제자들 중에 있다니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이러한 주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고쳐야 했습니다. '어떻게 주님이 나의 배반을 아셨을까?' 유다는 이러한 생각이라도 깊게 했더라면 그분이 메시야요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행한 사람의 중심을 아시는 이가 하나님 외에 누가 계십니까? 예수님은 유다에게 최후의 순간에서까지라도 주님이 메시야인 것을 믿고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하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깊은 주님의 사랑입니까?
2) 유다가 돌이키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다의 속마음을 제자들 앞에서 공개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다른 제자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유다의 생각을 드러내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유다가 최후의 순간에서라도 회개하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돌이키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주님은 유다의 행위를 강제로 중단시키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스스로 돌이키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사를 존중하시며 무슨 일에나 자원하는 심정으로 결단하기를 기뻐하십니다. 또한 배반자가 가룟유다임을 알고 계시면서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으신 것은 다른 제자들과 유다의 관계를 생각해서였습니다. 유다가 배신자라는 것을 알면 불같은 성격의 제자들의 행도은 막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유다는 이러한 주님의 사랑의 호소를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시고 있는 주님의 간절한 사랑의 호소를 들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호소는 오늘도 현대인들의 귓전을 맴돕니다.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돌이켜야 합니다. 구원의 음성이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들려지는 것은 아닙니다.
2. 배반자 유다를 통한 교훈
배반자 유다의 행위는 신실한 다른 열한재자들에 못지 않게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큽니다.
1) 성도들에게 자기 성찰의 기회를 부여해 줍니다.
주님께서 제자들 중에서 자신을 팔 자가 있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모두 놀라며 '내니이까?'하며 근심스런 반문을 합니다. 이런 반응은 비록 그것이 순간적일 수 있으나 자신들의 믿음의 행위를 되돌아보게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분명코 그들 중의 하나로부터 일어난다는 사실은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때문에 우리는 첫째로 자신의 믿음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섰다고 할 때 넘어질까 조심해야 합니다. (고전10:12) 둘째로 때때로 자신이 주님을 배신하는 길을 걷고 있지 않은지 깊이 묵상하는 기회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세째로 내 안에도 주님을 배반할 위험한 요소가 있음을 겸허히 인정하며 성령님을 의지하는 영적 생활을 게을리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2) 위로와 함께 경각심도 일깨워줍니다.
유다의 배반은 때때로 교회를 이탈한 양떼로 인해 괴로워하는 목자들에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유다라는 사람을 통해서 만세대에 걸친 자기 백성들로 하여금 권속 가운데 배반자가 들어있는 것을 보고 넘어지거나 충격을 받아 당황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체험하신 것은 그분의 지체된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의 양식이 되시는 그리스도 막 14:22-25
유월절이 시작되는 명절의 저녁 식탁은 구운 어린 양고기를 떡과 함께 먹으면서 절정에 이릅니다. 수난의 때가 곧 닥쳐올 것을 아시는 주님은 제자들에게 무교병과 포도주를 나눠주시고 '내 몸과 피를 받으라'고 하시면서 드디어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물로 찢기실 자신의 몸을 인생의 영생 양식으로 삼을 것을 교훈하고 계십니다. 성찬을 대할 때마다 인생의 먹이로 오사 의에 주리고 목마른 우리의 영혼을 채워주신 주님의 은총에 감사함으로 그 몸과 피를 받아야 하겠습니다.
1. 내 몸을 받으라
주님은 떡과 포도주를 나눠 주시기 전에 하나님 아버지께 사례하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자신의 수난으로 인해 유월절 잔치가 영원한 하나님의 구속의 잔치로 완성되어짐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킨 것입니다.
1) 먹는 것은 인생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인생은 모태로부터 무덤까지 먹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부친의 몸을 받고 모친의 태를 먹고 태어나서, 부모의 사랑과 형제의 관심과 친구의 우정과 배우자의 애정을 먹고 삽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의 보존을 위해 끊임없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음식은 우리의 건강을 유지시켜 주고 경건한 생명을 허락하여 줍니다. 음식이 우리의 육체를 지탱시켜주는 중요한 요인이라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을 살려주는 음식입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2) 주님은 인생의 영원한 양식으로 오셨습니다.
서로가 섭취하기를 원하여 아귀다툼을 벌이는 이 아수라장의 세상에 주님은 영생의 떡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양식으로 영접하고 믿음으로 섭취하는 사람은 끝없는 탐욕의 굶주림이 그치게 되고 영혼의 포만감을 얻어 남에게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사람으로 변화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인생의 떡으로 오신 것을 증거합니다. 주님은 (1) 떡집이라는 이름의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2) 주님의 탄생을 알리는 천사들이 증거하기를 말구유에 누운 아기가 바로 구세주라고 했는데 말구유는 말먹이 그릇이요, 갓난아기가 그 안에 담겨 있으니, '그릇에 담긴 음식'으로 구세주가 오셨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3) 주님 자신도 자기를 가리켜 하늘의 만나요, 하늘에서 내려 준 '생명의 떡'이라고 증거하셨습니다.
3) 주님은 우리에게 희생주의적 인생관을 가르치셨습니다.
세상의 이기주의와는 달리 주님은 온전히 희생주의적 인생관과 삶의 내용을 가지셨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마20:28)고 하시며, 자기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 남을 섬기는 희생적인 삶을 살라고 교훈해 주셨습니다.
2. 언약의 피를 마시라
떡을 주신 후 주님은 또 포도주를 제자들에게 주신 후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24절)고 하셨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가 성찬 예식을 할 때 별도로 나눠 받지만, 몸과 피가 하나인 것처럼, 이 두가지 모두 주님의 희생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희생의 몸이 있어야 피가 있게 되고, 또한 피흘림이 있어야 희생의 몸이 되기 때문입니다. 첫언약은 구약 시대 때 동물의 피와 몸을 가지고 유한한 인간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림으로 죄사함, 곧 구속을 얻었지만 지금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자신의 몸과 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새 언약의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히9:10-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주님의 속죄의 피흘림만이 하나님 앞에서 나의 죄를 사하는 유일한 수단임을 인정하고 주님의 구속언약을 신뢰하며 곧 그것이 새 언약의 피를 마시는 것이 됩니다.
3. 천국에서 마실 것을 기대하라
주님은 내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25절)고 하시며 성찬식을 마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은 성도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귀한 말씀입니다.
1) 자신의 죽음을 교훈하십니다.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제 땅에서의 시간은 거의 지나가고 수난과 죽음이 곧 온다는 뜻입니다. 성도들은 성찬을 대할때마다 주님까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충성할 것을 다짐해야 합니다.
2) 자신의 부활을 암시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마시는 날'. 즉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여 승리하신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주님께서 몸과 피를 주시고 사신 보물 같은 존재들입니다. 승리하신 주께서 세상 끝날까지 동행하사 영육간에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 잔치하는 날까지 괴롭고 슬프더라도 하늘 양식이 되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먹고 소망으로 마시며 사랑으로 나눠주는 생활을 합시다.
비극과 영광의 예고 막 14:26-28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가룟 유다의 배반을 마음 아프게 예고하신 예수님께서는 감람산으로 나가실 때 다시 제자들 전체가 그를 버리고 도망갈 것임을 예고하십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은 정확하게 현실화되고 맙니다.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하셨다면 그의 뒤를 따르는 그리스도인 또한 버림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극 뒤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주님은 그가 다시 사실 것과 갈릴에서의 재회를 예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것처럼 고난의 길을 걷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고난의 필연성과 그에 따른 영광의 날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는 깊은 깨달음을 얻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1. 인간에게 버림을 당하시는 예수
의를 위하여 사신 예수! 제자들을 사랑하며 양육하신 예수! 가난한 자와 아픈 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도우셨던 예수! 그 예수님이 그렇게도 사랑하셨던 인간들에 의해 이젠 버림을 당하시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삼년간 양육했던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말입니다. 사람들은 왜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까?
1) 믿음의 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넘어지는 자 곧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버리는 자는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날 때라고 하였습니다. (막4:17) 믿음이 식어지면, 믿음이 뿌리 내리지 못하면, 누구든지 환난이나 핍박 앞에서 예수님을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2) 교만한 생각 때문입니다.
전도 여행을 하시던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까지 이르셨습니다. 거기도 주님의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막6:3)하였습니다. 교만한 마음은 항상 예수르 배척하여 버리고 맙니다.
3) 실족함 때문입니다.
실족함이란 죄를 범하고 넘어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두가지 경우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하나는 타인에 의해서 실족케 되는 일입니다. (막9:42) 마음에 상처를 받고 예수님을 버리게 되는 비극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범죄로 인해 실족케 되는 일입니다. (막9:43-48) 죄를 범하고 아담처럼 하나님의 눈을 피해 숨게 되는 행위입니다. (창3:10) 죄를 범하면 양심의 가책과 사탄의 충동으로 예수님을 스스로 멀리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님을 버리게 되고 맙니다.
2. 흩어짐을 당하는 양떼의 비극
오늘 본문 27절 하반절에 보면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주님은 지금 제자들의 실족함이 성경을 응하게 하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슥13:7) 목자를 잃은 양 떼는 흩어지고 맙니다. 왜 그렇습니까?
1) 목자는 양떼를 지켜 주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목자의 경험이 풍부했던 다윗은 사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건져내었고'(삼상 17:34,35)라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목자의 생활이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의 위험(삼상17:37)을 무릅쓰고 양떼를 지키는 일임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자를 쳐서 죽게 하면 양떼가 제 스스로 어찌 위험한 데서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양떼에게는 언제나 성실한 목자가 언제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2) 목자는 인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목자의 경험을 통해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23:1,2) 양은 체질상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냄새를 예민하게 맞지 못합니다. 때문에 목자의 인도가 필요합니다. 다윗은 목자의 직능이 인도자인 것을 경험을 통해 깊이 깨닫고 있었습니다. 인도자가 없는 양떼는 갈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흩어지고야 맙니다. 때문에 양떼에겐 목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3. 부활과 저희의 영광
예수님이 버림을 당하시고 또 제자들이 흩어져 버리게 되는 환란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 닥쳐온 환란은 그것이 결코 환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환란은 승리하지 못합니다. 비극은 이기지 못합니다. 그것은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 28절에 보면 '내가 살아난 후에'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환난의 비극, 죽음의 심연을 뚫고 다시 사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믿는 자가 함께 누릴 부활의 영광입니다. (고전15:20) 때문에 버려짐을 다하는 비극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승리의 영광은 그리스도 편에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막 14:29-31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십니다. 이떼 베드로는 자신 만만하게 '다른 사람은 부인해도 나는 결코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고 무려 3번이나 부인합니다.
1. 베드로의 실수를 미리 알고 계시는 주님
예수께서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게 아니하겠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베드로에게 오늘밤 세번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대로 이루어집니다.(막14:71)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판단에는 맞지 않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은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까지도 알고 계시는 전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감정적인 열정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의 신실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충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충정을 옳게 봐 준다 할지라도 그것이 자만심의 발로라 한다면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베드로의 충정은 빗나간 열정이었습니다. 용기와 열정은 절제가 함께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열정은 감정은 감정적 열정이 아니라 신앙적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세번이나 부인했다는 것은 그가 참용기를 가지지 못했다는 증거요, 신앙적 열정이 아닌 감정적 열정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
베드로의 고백은 그가 어떤 제자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사랑은 가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행동이어야 합니다. 말과 혀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행함이 참사랑인 것입니다. 훗날 베드로는 부활하신 주님의 사랑 문답을 통해서 진정한 사랑을 회복하고 평생 그 사랑을 소유한 채 그의 사명을 감당하였습니다.
3. 베드로의 과오
1)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함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자신있게 말합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자신의 신앙을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불신앙을 표현하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그러한 고백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전지하신 예수님을 부인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그러한 말을 하기 전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이는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들이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27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후에 3번이나 주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들어가고 맙니다. 베드로는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것에 대한 유일한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도우심은 염두에 두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의 자신감이 아이 성 전투의 실패를 가져왔습니다. 우리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재능이 신앙의 거침돌이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데 방해가 되어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나 행동이 말씀보다 앞서서는 안될 것입니다.
2) 교만함
베드로의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나이다'라는 말에서 그의 교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와 제자들을 비교해서 자신이 제자들보다 더 용감하고 주님을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최고라는 생각이 항상 그를 사로잡았고, 또 항상 그렇게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는 주님의 수제자였고, 제자들 중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했던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현 위치를 가지고 교만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며(잠21:4), 하나님을 대적하는 행위로서 결국은 멸망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3) 자기 신뢰
베드로의 또 하나의 오류는 자기 자신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를 앞세울 때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육체를 신뢰해서는 안됩니다. 내 방법, 내 지혜, 내 건강이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능력이라 할지라도 사람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것입니다. 현대는 개인주의가 팽배하여 자아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게 능력을 주신다면 할 수 있습니다. (빌4:13) 이러한 자아를 신뢰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고백이 진정한 성도의 고백입니다.
햐있어야 합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막14:32-36
인생의 모든 일들이 그러하듯,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자신과의 싸움은 가장 힘든 일일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겟세마네 동산은 인성을 입으신 주님께는 자신과의 투쟁의 장소요, 우리를 위해 피땀을 흘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세 제자처럼 겟세마네까지 동행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1. 주님과 항상 함께 해야 하는 이유
1) 신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곧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어거스틴은 이에 대해 '하나님은 하나님을 통해 일하시며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앙이란 목자와 양떼처럼, 아버지와 자녀처럼, 씨앗과 밭처럼, 줄기와 열매처럼, 성도가 하나님과 늘 함께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야 말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며, 우리에게는 진정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
2) 진실한 신앙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늘 한가지로 동행하는 것이 진실된 신앙입니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괴로울 때를 막론하고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주님은 어두운 곳이나 밝은 곳이나 어디든지 계시기 때문에, 에녹처럼, 요셉처럼, 항상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3)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가 '나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에도 어찌하든지 참여하려한다'(빌3:10)고 고백했듯, 성숙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뱃세다 들판의 보리떡 잔치와 같은 축복의 장소 뿐만 아니라 겟세마네 동산의 암울하고 피곤한 환경까지라도 주님과 함께 동행해야만 지혜롭고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고후1:3-5)
2.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
요한과 야고보와 베드로 이들은 중요한 사건마다 주님께 특별히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마17:1;막5:37;13:3) 우리도 이들처럼 주님께서 신임하시되, 고민을 털어놓으시며,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마26:38)는 부탁을 들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1) 적극적인 신앙을 소유했습니다.
세베대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은 비록 세속적인 관점과 수단을 가지고 주님과 가까와지려고, 모친까지 동원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심히 주님과 그 나라를 사모했으며, 베드로도 주님을 위해서는 물불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적극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막14:27-29) 따라서 우리도 주신 은사를 열심히 활용하여 주의 사역을 힘써 행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2) 주님의 영광된 모습을 체험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변화 산상에서 주님의 신적권위와 영광을 똑똑히 체험했기에 겟세마네의 처절한 현장에도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동행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허락지 않는 분입니다. (고전10:13) 동산 언저리에 우리를 두심도, 또 동산 안의 탄식 소리를 듣게 하심도, 모두 우리들의 신앙을 위해서 행하시는 것임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3. 우리가 해야 할 일
주께서 이들에게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34절)고 하신 말씀은 '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1) 예수님의 고민에 함께 참여합시다.
예수님의 고민은 인류의 대속자로서의 사명을 위한 개인의 몸부림이었습니다. 이러한 고민도 주님의 완전하시고 순수한 인성을 여실히 보여 줍니다. 이것은 비겁함도 아니며, 약함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온전하신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목수 요셉과 마리아를 아버지 어머지로 모신 인성을 가지신 인간이셨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인성을 가지시고 험악한 대속의 사명을 감당하셨기에 더욱 거룩하신 분이요, 우리 인생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히4:14-16) 우리 또한 그리스도와 동일한 고민과 슬픔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기도를 생각하고 우리의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2) 기도로 함께 참여합시다.
예수님과 동행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란 하나님의 영혼과 인격과 삶이 오직 하나님의 뜻 안에 붙잡혀 있기를 바라는 태도요, 성도의 신앙적 결단이기 때문에 기도하지 않는 성도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을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해 주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성도가 기도를 게을리 하거나 혹은 내 뜻만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정욕적인 기도를 할 때, 베드로처럼 자신에게 지고 사람에게도 지고, 세상에게도 패배하여 주님을 부인하고 타락하는 자리까지 도달해 갈 것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 현장 막 14:37-42
겟세마네의 기도 현장에서 주님께서는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시는데 정작 기도해야 할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으니 안타깝습니다.
1. 제자들의 영적 침체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는데, 제자들은 잠을 못 이기고 졸고 있습니다. 단순히 제자들이 피곤했기에 잠을 잤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고민이 되어 제자들에게 깨어ㅓ 기도하라고 주의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34절) 그러므로 제자들의 잠은 영적인 잠으로 보아야 합니다. 정말 기도해야 할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오늘도 깨어서 기도해야 할 사람들은 바로 주님의 제자들인 우리들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의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바로 겟세마네 기도 현장에서 졸고 있던 제자들과 다를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영적 침체의 자리에서 깨어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기도해야 하는 이유
1)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피곤한 몸을 핑계삼아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명하십니다. '깨어 있는 것'과 '기도하는 것'의 두 가지가 함께 병행할 때 모든 시험은 비켜 갈 것입니다. 깨어 있을 때 우리는 기도의 제목을 찾을 수 있으며, 기도할 때 승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를 말해줍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깨어 있음으로 마귀의 책략을 알아내야 하며, 또한 그의 공격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할 수 잇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받는 통로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망을 빛 가운데로 드러내어 실현되기를 원하는 기원과 갈망의 표현입니다. 기도는 연약한 자를 강한 자로 변화시킵니다. 기도는 낙심 가운데 있는 자를 소망스런 삶으로 인고하여 자신감을 회복시켜 줍니다. 그리고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악한 세력과 벌이는 전면 투쟁이며 기도는 기도하는 자의 영혼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한 자유를 만끽하는 향연인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그리고 시험의 자리에 들지 않기 위해서 우리 모두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육신이 약하기 때문에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의지와 바램은 강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의 모든 바램은 다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스스로 의지와 바램을 끝까지 실현하지 못합니다. 인생은 연약합니다. 그러나 연약함이 죄의 결과이기는 하나, 연약함 자체가 죄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도 자신의 연약함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가 됩니다. 사실 연약함 때문에 성도는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육체적 연약함을 기도로 극복하고 영적으로 강건했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였습니다. 인간의 부족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우리는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권하고 그것들로 인하여 더욱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여 더욱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갈 수 있고 그의 은혜안에 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모범기도
1)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네에서 하신 기도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키는 기도였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기도의 내용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우리들의 기도는 우리의 이기적 소원을 구하는 기도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기도의 정신은 내 생각과 내 소원을 하나님께 맞추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마6:33)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2) 낙망치 않고 기도했습니다.
'다시 나아가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고'(39절). 예수께서는 똑같은 말씀으로 세번이나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도는 기도하다가 낙망치 말고 계속적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눅18:1)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항상 즉시로 들어주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인내와 순종은 매우 중요한 것이므로 그것을 훈련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정욕을 위해서 구할 때 응답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시는 시간을 제한하지 말고, 다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를 기다리며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시40:1)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그들이 기도할 시간에 잠을 자다가 기도의 시간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어둠의 길과 빛의 길 막14:43-50
예수께서 체포당하시던 겟세마네 동산의 새벽은 역사상 하나님을 거역한 가장 어두운 순간과 구원을 완성하시려는 가장 선한 빛이 교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여기엔 죄된 인간들이 걸어가는 어둠의 길과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의연히 나아가시는 예수님의 빛의 길이 보여집니다. 우리는 이러한 두 가지의 길을 살펴보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어둠의 길
어둠의 길은 따라가서는 안될 길입니다. 본받아서도 안 될 길입니다. 그러나 어둠의 길을 상고할 때 행여라도 그 길을 걷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 배신의 길을 걸은 유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아직도 '말씀하실 때에','열 둘 중의 하나인 유다'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막으며 겟세마네 동산의 정적을 깨뜨리는 무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유다는 이 어둠의 길을 걷는 무리의 맨 앞에 서 있었습니다. 유다의 영혼은 이미 어두운 심연에 빠져 있었습니다. 자신이 입맞추는 자가 예수이니 그를 단단히 잡아 끌고 가라는 군호를 짜고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입맞춤을 예수께 행했습니다. 유다의 배신의 입맞춤에 대해 주님은 묵과하지 않으셨습니다. 마26:50에는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고 하셨고 눅22:48에는 '유다야 네가 입맞춤으로 인자를 파느냐'고 하셨습니다. 유다는 주님의 경고에 몹시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이제 유다의 영원한 죄악은 스스로 책임져야만 하게 되었습니다.
2) 교만의 길을 걸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과 장로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직분을 맡은 자들이 로마 정부와 손잡고 메시야를 체포하도록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주님이 보여주신 메시야의 증거들을 분명히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어둠의 세력에 의해 눈이 가리워지고 마음이 교만으로 가득 차 강퍅한 그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죽이려고 했습니다. 직분이 높은 사람들, 스스로 존귀한 자라고 여기는 사람일수록 주님을 섭섭하게 하기 쉽습니다. 교만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악입니다.
2) 타락한 무리들의 길
유대교 지도자들이 고용한 무리들은 '검과 몽치를 가지고'(48절) 마치 강도를 잡듯이 예수를 체포하려고 했습니다. 타락한 인간의 행위는 악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하수인으로 무자비하고 가혹합니다. 인간이 타락하면 흉폭해지고 잔인해집니다. 폭력은 사탄의 속성입니다.
4) 비겁한 제자들의 길
본문 50절에는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인간은 스스로의 장담조차도 지킬 수 없는 약한 존재들입니다. 자신과의 약속도 이행치 못하는 인간이 타인과의 약속이나 의무를 이행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제자들은 먼저 자신과의 싸움에서 졌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육체의 꾀임을 거절치 못하고 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그들은 결국 예수님께서 잡혀가시는 날 밤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을 치고 말았던 것입니다.
2. 빛의 길
사랑하는 제자 유다의 배신과 검과 몽치를 든 무리들이 마치 강도를 체포하듯 요란스럽고 삼엄한 경비태세로 몰려왔지만 오히려 예수는 평온하셨고 의연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범상한 모습에서 진실로 인류를 구원키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확인케 됩니다.
1) 헌신의 길을 걸으심
간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몸부림치시던 주님, 또 이전에 원수들의 위협에 빠져 나오시거나 피하시던 주님과 지금은 완전히 다릅니다. 주님은 저항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요18:11) 지금은 스스로 붙잡혀 주십니다. 그의 이 행위는 자기 헌신의 행위입니다. 그가 예언하셨던 말씀(막10:45)처럼 '아버지께서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는 심정입니다.
2) 죄인의 길을 대신해서 걸으심
죄 없으신 주님이 범죄자의 한 사람으로 취급당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야할 죄인의 자리에 주님이 이미 대신 서 주신 것입니다.
3) 죽음을 위해 걸으심
사53:7의 예언의 말씀처럼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잠잠히 죽음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셨습니다. 그가 걸어가신 죽음의 길은 곧 생명의 길이 되었으며, 그가 걸어가신 고난의 길은 영광의 길이 되었습니다.
마가의 삶이 주는 교훈 막 14:51,52
드디어 수난의 소용돌이가 시작되었습니다. 파렴치한 유다의 입맞춤으로 시작된 그리스도의 수난은 호언장담하던 베드로와 제자들을 엄청난 폭력적 분위기에 눌리게 하여 자랑하던 믿음과 함께 그들의 발길을 예수에게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그 와중에서 어떤 벌거벗은 청년이 발에 채인 개처럼 황급히 어둠 속으로 도망합니다. 그가 바로 본서를 기록한 마가입니다. 그는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그 절대 절박한 순간에 자신이 다른 제자들과 함께 도망친 사실을 그대로 숨김없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1. 마가의 인물됨
1)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부유한 사람들의 옷감인 '홑베이불'을 두르고 있었던 것과 유월절 만찬을 베푼 마리아가 모친이었던 점을 미루어 보아 그는 부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마가의 집(다락방)이 예루살렘 교회의 예배처소로 사용된 점(행12:12)등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2) 예민한 감정과 관찰력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주님의 희로애락의 감정묘사가 아주 예민하게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막3:5,8:12) 마가라는 이름의 뜻이 '철퇴같이 의젓하다'라는 뜻임에 반해 예민한 성품 때문에 급격한 환경의 변화에는 잘 적응치 못하고, 자극을 쉽게 받기도 하였습니다.
3) 열정은 있었으나 인내심은 부족하였습니다.
청년 시기 때의 마가의 신앙 행적을 살펴볼 때, 유복한 가정 출신의 청소년들에게서 간혹 찾아볼 수 있듯, 호기심을 많으나 역경을 극복하는 모험심과 지구력이 부족한 듯 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1) 예수님께 대한 호기심으로 모친 몰래 침실을 빠져나와 겟세마네까지 왔으나, 위기가 닥치자 증거물이 될 수 있는 이불을 남기고 혼비백산 도주한 것과 (2) 그 강한 호기심은 훗날, 숙부 바나바 사도와 바울 사도의 1차 세계 선교여행에 꿈많은 동참으로 이어졌으나 중도에서 갑자기 포기함으로 이방 선교 계획에 막대한 차질을 초래했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일로 인해서 교회의 두 기둥이었던 바울과 바나바, 두 사도의 대립이 심화되어 결국은 결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므로(행15:36-41), 초대교회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입니다. 호기심은 신앙의 불을 일으키는 좋은 촉매 역할은 할 수 있으나, 인내와 순종의 기름이 없이는 곧 꺼져 버리게 됩니다.
2. 마가의 자기 고백
1) 복음서의 역사적 사실을 입증했습니다.
당시 네로의 박해와 영지주의 등의 이단과 베드로 및 바울 등 사도들의 순교로 인해서 이방에 세워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흔들리고, 교회의 메시지는 허구적 신화로 의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가는 '성도들이여, 그 때 수난의 현장에 내가 있었노라 주님의 숨결과 한숨과 눈물의 기도들과 당하신 일들은 틀림없는 사실임을 믿으라'(벧후1:16)라고 고백하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이 역사적인 사건이었음을 증명코자 했던 것입니다.
2) 인생읭 연약함을 교훈키 위해서였습니다.
마가는 당시의 불법적이며 살기가 등등한 공포의 분위기를 묘사하면서 그런 중에도 주님의 의연하심과 초지 일관의 사명적 자세를 증거한 후(막14:36;눅20:50-51), 곧 제자듫과 자신의 도주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1) 불의의 세력 앞에서 주님을 보호하기는 커녕, 자신의 홑ㅇ불도 감당 못하는 한 연약한 인간임을 고백하고, (2) 칼과 망치로 중무장한 폭력과 거기에 반해 맨몸뚱이의 자신을 대비함으로, 사탄의 폭력 앞에 무력한 인생임을 고백했으며, (3) 같은 몸을 가지고 주님은 대속의 사업을 위해서 자진해서 죽음앞으로 걸어가셨으나, 자신과 제자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해 죽음 앞에서 비굴하게 도주함으로, 인생의 보편적 연약함과 이기심을 통렬히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함은 주께서 이러한 제자들과 마가를 용서학\시고, 30여년동안 진리 안에서 거듭나게 하시고 양육하심으로 복음을 위해서는 이전의 모습과는 달리 자신의 불이익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떳떳하게 고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신 은혜를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3. 마가의 삶이 주는 교훈
베드로 사도와 동행하며, 헬라어 통역 설교와 서신 대필의 일을 함으로 복음 전파의 큰 공헌을 하였으며, 베드로 사도에게는 '나의 아들'(벧전5:13)이라고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와 화해하고 그로 인하여 교회의 신망을 얻었으며(골4:10), 목숨을 걸고 로마 감옥에서 끝까지 바울 사도를 보살피고(몬1:24), 바울의 순교 현장에 있던 몇 안되는 증인으로 있었습니다. (딤후4:11) 마가의 고백은 우리의 성도들 모두의 고백입니다. 천국은 완전한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하므로 회개하고, 용서받은 사람이 거하는 곳입니다.
산헤드린의 불법 재판 막 14:53-59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의 손에 팔려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불법적인 재판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재판받으신 주님
무리들은 이제 예수님을 끌고 대제사장에게로 갔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잡아 죽이고자 벼르고 있던 종교지도자들은 이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붙들러 온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은 가야바였는데 그는 야비하고 교활한 모사꾼으로서 의로움과는 거리가 먼 파렴치한 사람이었습니다.(마26:3,4) 그는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탐욕과 욕망과 아집으로 가득 찬 오늘날의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늘날도 잘못된 많은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재차 십자가에 못박히고 계십니다.
1. 베드로의 유약함
1)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게 않겠나이다'(29절)라고 호언 장담했지만 막상 예수께서 저들에게 붙잡혀 가는 형편이 되자 그때까지의 호기는 집어 던지고 멀찌기 떨어져 예수님을 좇아가야 한다는 의리와 신변에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을 말해줍ㅈ니다. 그는 처음에 어느 정도 용기를 가지고 좇아갔으나 주위의 분위기에 그만 기가 꺽이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인간의 연약함을 보여줍니다.
2) 지나친 자신감은 실패를 불러들입니다.
또 하나 베드로의 유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주제넘은 자신감은 오래 지속하지 못할 신앙의 징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신앙이라 한다면 자신을 믿는 것은 자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능력을 인정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의뢰해야 합니다.
3) 용기와 열정 마능로 믿음을 지킬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의 유약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용기와 열정이 기독교인의 신앙의 위치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열정이 신앙의 위치를 지켜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단순한 열정이 신앙의 시험을 이기게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유혹을 이기고 굳건한 믿음에 설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할 때만이 가능합니다. 담대하고도 용기있는 사도 베드로는 시험이 닥치자 모래 위에 세운 집처럼 쓰러졌습니다. 자신을 의지한 결과입니다. 후에 베드로는 이것을 철저히 회개한 후에 비로소 자기의 이름처럼 반석같은 신앙을 소유하게 됩니다.
3. 불법 재판에 회부되신 예수님
이제 산헤드린은 예수님을 사형으로 몰고 갈 심판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재판은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면에서 불법적인 재판이었습니다. (1) 유대인들의 소송 중 중요한 소송은 야간 재판이 금지되었었는데 이들은 야간에 서둘러서 재판을 진행하여 다른 사람들 모르게 자신들의 계획을 일사천리 마무리짓기 원했습니다. (2) 산헤드린 공회는 마땅히 공회당에서 열려야 하는데 이들은 가야바의 뜰에서 재판을 하였습니다. (3) 중요한 소송 사건은 이틀 동안 재판해야 한다는 미쉬나의 규정을 무시한 채 하루만에 판결을 하였습니다. (4) 예수님에게는 재판의 필수 요소중의 하나인 변호인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따르면 사형을 언도하려면 두명의 증인이 있어야만 했는데(심17:6)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요소들이 그 재판이 불법적인 재판이었음을 입증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당하고 있는 상황이 이처럼 불법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한마디의 불평이나 반대의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스스로 침묵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이 가야바의 법정은 인간의 악날한 교활성과 예수님의 무한한 사랑이 교차하는 장소인 것입니다.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께서 실패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의 모든 예언을 성취하시고 승리하신 왕입니다. (사53:1-3) 가야바의 법정은 침묵의 승리자 예수를 우리로 하여금 바라보게 합니다.
4. 거짓 증언
예수님에 대한 여러 증언이 서로 부합하지 못하자 어떤 자가 일어나 거짓 증언하기를 '우리가 그의 말을 들으니 손으로 지은 이 성전을 내가 헐고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사흘에 지으리라'(58절)하더라고 예수님을 고소합니다. 예수께서 성전을 비유로 들어 자신의 부활을 예언하신 것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책잡아 고소하는 것입니다. 간혹 우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면서도 그 말씀의 충분한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오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내 생각과 뜻대로, 그리고 주관적 사고에 의존해서 성경을 해석할 때 잘못된 생각과 뜻대로, 그리고 주관적 사고에 의존해서 성경을 해석할 때 잘못된 행석을 내려 진리를 왜곡되게 하는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침묵할 때와 말할 때 막14:60-65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전도서의 지혜자는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다'(전3:7)고 가르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침묵이 언제나 금이 되고 웅변이 언제나 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침묵할 때에 침묵해야 하며, 말할 때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말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이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1. 침묵할 때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 최고의 의결기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산헤드린 공회는 사형을 부과할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로마 총독인 빌라도 재판을 받게 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 불법 재판 앞에서 침묵하심
산헤드린은 유대의 최고 재판소의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에 관한 재판에 있어서 스스로의 규례를 깨뜨리는 모순을 나타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는 산헤드린의 공식적 집회장소는 성전 뜰 가운데 있는 돌을 깍아 만든 방입니다. 그러므로 이 방 외의 장소에서 행한 집회는 무효입니다. 따라서 가야바의 법정에서 행한 재판은 불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법정은 야간에는 열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점도 어겼습니다. 세째는 산헤드린의 회원 전원이 최연소자로부터 시작하여 최장년자에 이르기까지 개별적으로 의견을 진술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도 깨뜨렸습니다. 네째는 사형에 해당되는 판결이라면 그것을 집행할 때는 하룻 밤을 지내야 합니다. 이 점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런 불법의 재판장에서 예수는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고의적으로 불법을 자행하는 법정에서 침묵하신 것입니다. 악한 꾀를 이루는 자와 다툴 필요가 없습니다. (시37:7) 여호와만을 바라보고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 좋습니다. (에3:26) 이때는 그리스도가 침묵하신 것처럼 우리도 침묵할 때입니다.
2) 거짓 증거 앞에서 침묵하심
예수님을 유죄로 고발하려는 산헤드린 공회가 세운 증인들은 거짓 증언을 함으로써 스스로 그 재판이 불법인 것을 드러냈습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그 자신이 성전을 직접 헐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58절) 이것은 명백한 위증입니다. 마가는 그들의 증언이 서로 맞지 않는다고 기록했습니다. '오히려 그 증거도 서로 합하지 않더라'(59절) 둘째는 예수께서 '(인간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다른 성전을 대비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위증인 것은 예수의 말씀 속에서는 이러한 수식어가 발견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째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께서 성전을 모독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위증인 것은 그는 오히려 성전을 정결케 하시고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외치셨기 때문입니다. (막11:17) 그러나 주님은 위증자들과 다투어 말씀하시거나, 위증자를 내세운 불의한 재판관들과 다투어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의도적인 거짓 증인들 앞에서 주님은 침묵으로 일관할 뿐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의 침묵은 그의 삶을 하나님께만 위탁하는 침묵이었습니다. (사53:7)
2. 말할 때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꼭 말씀하셔야 할 때가 왔습니다.
1)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심
대제사장은 침묵하시는 예수께 율법적으로 금하고 있는 질문까지를 시도하여 고소할 죄목을 찾고자 했습니다. 즉 '네가 찬송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는 질문입니다. 놀랍게도 이제까지 침묵하시던 주님은 '내가 그니라'(62절)고 담대히 입을 열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어디서나 예수가 메시야인 것을 공적으로 시인할 때가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인 것을 시인하고 증거해야 합니다.
2) 진실을 말하심
진실을 묻는 질문 앞에서 우리는 침묵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신앙적인 자리라 한다면 더욱 그리해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와 자신의 사명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3) 진리를 전해주기 위함
본문 62절에서 주님은 유대 지도자들이 묻지 않는 말씀까지 스스로 첨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너희가 보리라'. 이는 장차 있을 부활과 승천, 그리고 재림의 진리를 선언하신 것입니다. 반드시 깨우쳐져야 할 진리에 대해서는 침묵치 않으셨습니다. 이때야말로 말할 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막 14:66-72
예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셔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관저에 끌려간 것은 한밤중이었습니다. 가야바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동안 베드로는 대제사장 관저의 아래 뜰에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비자에게 두번, 그리고 모여있는 자들에게 한 번, 모두 세번을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날 밤 초저녁 유월절 만찬석상에서 '오늘 이 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고 예수께서 말씀하셨을 때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라고 베드로는 힘주어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과 같이 그가 세번 주님을 부인하자 두번째 닭 울음 소리가 들렸고, 그 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밖에 나가서 (눅22:62) 심히 통곡했습니다.
1. 예수를 부인하는 베드로
1) 베드로의 도덕적 의지
'닭이 곧 두번째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울었더라'(72절) 여기에서 베드로가 '기억'했다는 것은 그날 밤 초저녁에 만찬석상에서 예수께서 '오늘 이 밤 닭이 두번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막14:30)고 하신 말씀과 이에 대하여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31)라고 대답한 자기의 말을 기억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베드로는 밖에 나가 생각하며 통곡했습니다. 그가 주님에게 자신 있게 드린 말과 비자인 여자 앞에서도 예수를 부인한 현재의 비겁한 자신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자싲ㄴ에 대한 깊은 환멸을 느꼈을 것입니다. 인간의 도덕적 의지가 어떤 위기 앞에서 ㅇ러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우리는 여기서 깨닫게 됩니다. 그의 예수에 대한 도덕적 충정은 한갓 자만으로 끝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에게는 도덕적 의지만 있었지 성령의 충만에서 오는 신앙적 능력은 아직 없었던 것이며,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예수를 증거하게 된 것은 오순절 나르이 성령 충만을 체험하고부터 였습니다.
2) 인간교육의 한계
베드로와 그밖의 제자들은 에수로부터 3년 반 동안 말씀과 기사와 이적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의 삶 자체를 통해서 인격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오늘날의 학교 교육과 같이 집에서 통학하면서 배운 것이 아니라 하루 24시간 예수와 함께 침식과 생활을 같이 하면서 배운 것입니다. 그렇게 3년 반을 배운 교육의 효과가 이렇게 나타났다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의 '교육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결과를 아무도 보장할 수 없다는 데에 그 한계성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교육 만능'의 사고방식은 많은 위험과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독재자, 독직자, 부정부패자들의 거의가 최고 학부를 나온 사람들이란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의 교육효과는 그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행1:8;2:1-4)
2. 통곡하는 베드로
1) 통곡하는 베드로
두번째 닭이 울었을 때 베드로는 자기를 돌아보시는 주님의 시선과 마주쳤습니다. 닭 울음 소리와 주님의 뜨거운 시선이 베드로로 하여금 밖에 나가서 통곡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눅22:60-62) 평소에 실수를 잘하던 베드로였지만 이번의 실수는 어쩌면 '실수'를 넘어서는 심각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그가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는 이미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라고 신앙고백을 한 바 있으며그날 저녁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막14:31)라고 진심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나 신변의 위험이 닥쳤을 때에 그는 그들 앞에서 그의 신앙을 고백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신앙은 그처럼 연약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 저녁에서 주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그의 신앙은 자기 혼자 설 수 있는 신앙의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적에게 잡혀가자 그 연약한 본색을 드러내 놓게 된 것입니다. 그의 통곡에는 이 연약성에 대한 자기 연민이 들어 있었습니다.
2)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는 베드로의 경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위험한 상황에 처해졌을 때 자신의 양심과 도덕적 의지에 의존하여 넘어지지 않으려는 무모한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평소에 핍박하는 자들 앞에서 내가 어떻게 무엇으로 대답하며 말할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고 그것은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눅12:11,12) 필박과 환난 속에서 그리스도를 고백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 양심이나 도덕적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오로지 주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에 의존해야 합니다. 말씀이 계시는 곳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행1:8)
출처: 복있는 그리스도인 원문보기 글쓴이: 예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