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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읽는 수원화성의 역사 , 이재익
* 수원 화성에 담겨있는 역사를 4편의 시로써 압축하여 표현하였다.
-수원화성 1_팔달산에 오르며 ; 수원화성 시설의 대강을 언급하고, 수원화성을 돌아 보는 역사적 감회를 표현한다.
-수원화성 2_ 임오화변, 정조의 효성 ;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임오화변 비극의 그림자를 보고, 아버지 능을 화성 인근에 천장하고 능행하는 정조의 효성을 본다.
-수원화성 3_ 정조와 홍국영 ; 정조 세손시에 보호했던 홍국영 개인의 현우흥망을 본다.
-수원화성 4_정조와 정약용 ; 실학자 정약용의 화성축조 기여와 고난을 본다.
이재익 ; 시인, 전부산남일고 역사교사
[역사시]
수원화성 1
-팔달산에 오르며
이 재 익
팔달산에 오르면 효원(孝原)의 종(鐘)
하나에 효도, 둘에 화목, 셋에 소망을 비네.
팔달문은 장중하고,
서장대는 일망무제라
방화수류정은 아름답고 경쾌하구나.
가교일주에 완연한 그 자취
노여움, 원망, 지성(至誠)도 서렸어라
옹성의 실사구시는
세월에 바래지 않으리.
성문은 천년회포를 품었건만,
무심한 돌에는 이끼만 끼네
회억의 발길 멈춘 이 그 몇몇이었던가
원로의 지학인(志學人)도 옷깃을 여미네.
[도움글] ; 수원화성 시설의 대강과 역사유적 둘러보는 감회
• 수원화성은 사적 제3호, 1997년 한국 5번째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 서쪽 팔달산 공원은 화성의 서장대가 있는 곳이다. 두 곳 큰 지휘소가 서장대와 동장대이다. 오늘날 팔달산 공원에는 수원시에서 정조가 부 사도세자에게 효심을 보였던 것을 기념하여 효원의 종을 만들어 달았다. 누구나 세 번 칠 수 있다. 효도, 화목, 소망을 빌면서....
• 수원화성은 채제공, 조심태 등이 1794~1796년에 약 3년간 축성하였다. 4대문과 수많은
유적이 잘 남아 있다.
• 정약용도 수원성 축조에 적극 기여하였다. 성설이라는 설계지침을 만들고 활차와 거중기를 만들어서 공사에 사용하였다. 화포 공용화기 방어구조 등 동서양의 과학을 통합한 건축물이다.
• 전통적인 우리 성 + 중국의 성 + 일본의 성 + 서양의 성곽까지 참고하여 새로운 개념의
성을 설계하였다.
• 여기에는 영조와 사도세자 부자간의 깊은 불신으로 영조의 노여움과 사도세자의 한(恨), 정조의 부(父) 사도세장에 대한 지극한 효성(至誠)이 서렸다.
수원화성 2
-임오화변, 정조의 효성
이 재 익
붉게 타는 철쭉은 천년 한을 태우듯
자효의 상실, 그 부자의 심연을
의절(義絶)한 후 사도(思悼) 라니 허망도 하구나 .
임오 삼복에 탔던 목,
물 듬뿍 차려 제사지내 위로하네.
배봉도 명당이어널 화산으로 옮겼던 님
주교(舟橋)를 건너며 마음 먼저 달려가고
능역의 송충이도 꾸짖고 씹었네.
뒤돌아보고 또 본 지지대 어디런가
중흥의 큰 뜻 두고 몸이 먼저 갔구나.
[도움글] ; 비극의 임오화변 (1762) , 정조의 효심과 능행
• 사도세자는 영조의 제2자로 이복형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보았다.
• 김한구, 홍계희, 윤급 등이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추어 상변하였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사도세자와도 의절한 후 뒤주 속에 넣어 죽였다.
•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뒤에 장헌(莊獻)(정조)→ 장조(莊祖) (고종)로 추존 되었다.
• 오늘날 그 문제의 뒤주가 외가쪽으로 전해내려 오고 삼복더위에 목이타서 죽었음을 감안하여 큰 그릇에 물은 덤북 담아서 제사를 지내주고 있다한다.
• 사도세자 능은 원래 양주 배봉산에 있었다. 정조가 사도세자 능을 수원화성으로 천장한 것은 부의 한을 위로하려는 효심에서였다.
• 정조의 화성 축조 의도는 정치적 군사적 기능도 부여하고, 상공인을 유치하여 경제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천도도 고려했다.
• 정조의 화성 행차시 한강에 주교(배를 연결한 다리)를 놓아 건넜고, 일반 백성과 접촉, 정치에 반영하기도 했다.
• 정조의 효심은 부왕의 능역에 송충이도 잡아 씹었고, 돌아갈 때 뒤돌아보며 행차가 늦어진 고개에 지지대비(遲遲臺碑)가 있다.
수원화성 3
-정조와 홍국영
이 재 익
시강원 홍설서는
순간적 재치로 세손을 곤경에서 구하고
세손 보호하기를 불씨 보존하듯 하였다.
영명한 군주의 탄생이
한 신하의 재치와 헌신에 있었고,
거병범궐 아니거든 용서하마 언약하니
군신간에 이보다 아름다운 사연 또 있었을까?
군주가 고갱지신을 잊은 개자추 고사도 있고,
신하가 군주 은덕을 망각한 예도 있나니,
홍도승지 사적은 후자로다
도승지, 숙위소 대장을 한 몸으로 겸직하고
고상에 앉아 턱으로 세도하다
스스로 파멸의 길을 걸어갔으니.....
현명하였거든 어리석지나 말든지
현우미추(賢愚美醜)를 분출함이
바람의 전설 같았다.
[도움글] ; 홍국영의 공헌, 세도와 몰락
• 사도세자는 영조의 제2자로 이복형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고, 15세에 대리기무를 보았다.
• 김한구, 홍계희, 윤급 등이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추어 상변하였다. 영조는 나경언을 처형하고, 사도세자와도 의절한 후 뒤주 속에 넣어 죽였다.
•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뒤에 장헌(莊獻)(정조)→ 장조(莊祖) (고종)로 추존 되었다.
• 고갱지신 ; 춘추시대 진문공이 곤궁할 때 자기 허벅지살을 베어 먹인 충신 개자추 고사.
• 설서 ; 도서관리원, 홍설서는 세손을 보호한 홍국영.
• 정조가 세손 시에 조부 영조에게 문안 인사를 갔다. 읽고 있는 책에 관을 하문을 받았다. 영조는 어머니의 천한 신분 출신에 대하여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에 관한 것이었다. 세손은 얼떨결에 ‘그 대목을 가려두고 보지 않습니다’. 라고 거짓말을 했다.
• 영조는 사람을 시켜 책을 가져오게 하여 확인하려 하였고, 도서 관리 직책을 맡은 홍국영이 그 책의 해당 부분을 가려서 보낸 기지로 세손(뒤의 정조)은 위기를 모면했다.
• 세손은 홍국영을 신임하였고, 홍국영은 전심전력으로 정조의 신변을 보호했다.
• 정조 즉위 후 홍국영은 도승지와 숙위소 대장을 겸하며 큰 세도를 부렸다. 총명이 차츰 흐려져서 마침내 씻을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화병에 결려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는 현우미추(賢愚美醜)를 모두 분출시킨 혜성같이 나타나서 바람같이 사라진 인물이었다.
수원화성 4
-정조와 정약용
이 재 익
정조와 다산은 이이 학설을 매개로
사상과 배포가 서로 맞았으니,
위대한 군주와 학자의 만남이로다.
다산은 수원화성을 축조하면서
새로운 개념의 성을 설계하였고.
거중기 신기구를 만들어서
직접 사용한 위대한 실학의 구현자.
임이 알아줄 땐 돌덩이에 혼을 심던 이
임 가시고 초색도 병들자
다산 초당 영어 18년
그 오롯한 그리움을
치마폭에 매조화(梅鳥畵)로 달랬다.
-내 저술 알아주거든 부모처럼 대하라! 하였으니,
역사 속에 한 선각자의 고난은
민족에는 축복이 된 전화위복,
화성과 여유당전서 문화유산이 이렇게 탄생하였다.
[도움글] ; 정약용의 영광과 고난
• 정조와 다산의 만남 ; 정조가 성균관 학생들에게 중용에 관한 문제를 냈는데, 다른 유생들은 이황적 학설 경향인데, 다산 정약용만이 율곡 이이의 이론적 경향으로 답을 해서 정조와 학문적으로 상통했다.
• 수원화성 축조에 공학 기술적으로 기여한 정약용은 조선 후기 실학의 최고봉이었다. 정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정조 사후에는 바람막이가 없어지자 천주교 신앙문제로 18년간 강진 등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적 ; 다산초당)
• 부인이 비단치마를 보내서 위로했다. 정약용은 그 치마폭에 그림을 그려서 집으로 보내어 가족을 위로했다. 그때의 매조도(梅鳥圖)에는 유배지의 곤궁함, 자식 사랑과 그리움이 절절하다.
• 유배지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심서 등을 포함한 방대한 저술을 남겼으니, 그의 저술 일체를 여유당전서라고 한다. 저술에 대한 자부심으로 아들에게 일렀다. “내 저술을 알아주면 부모로 섬기고, 원수라도 형제와 같이 정의를 나누라”고. 이런 정약용의 영광과 고난이 수원화성에 다 어려있다.
수원화성 역사탐방
수원 화성 일주도
수원화성 4대문
팔달산 서장대와 효원의 종, 화양루 기타
화성의 화홍문과 방화수류정의 아름다움
화성의 동장대, 성문 통로
화성의 포루, 공심돈 등 각종 방어시설
화성의 각종 암문(작은 통행문)들
화성의 치성, 적대, 봉화를 올리는 봉돈
화성 행궁 ; 정조 능행 후 임시 숙소, 보존된 거중기 모형도
사도세자능인 융릉과 정조릉인 건릉 일원, 용주사, 지지대비
◈ 탕평책 (蕩平策) , 탕평비 :
영조가 성균관 입구에 세움
`탕평이란 말 : 서경 홍범조(書經 洪範條)의 다음 구절에서 따옴,
“毋偏毋黨 王道蕩蕩
毋黨毋偏 王道平平”
ㅇ 정조-침실을 탕탕평평실
` 성균관 입구에 탕평비 비문내용 : 논어 위정편 인용
"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
*寔(=식)
[뜻]
두루미치고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적인 마음가짐이고 한쪽으로만 치우치고 두루 미치지 못함은 진실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 가짐이다.
정약용 유배시 가족에게 보낸 작품
첫댓글 역사 선생님의 저력이 나오네요...다시한번 더 복습하니 재미있습니다. 수원은 유년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곳이라 애틋한 마음이 더합니다 서장대 봉화대 등등 뛰어 놀던 곳이 눈에 선합니다 고향의 모습을 다시 보니 넘 좋고 감사드립니다
선생님의 고향이 수원이셨나요? 그렇다면 정말 정회가 남다르겠습니다.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을 올리는 이는 독자의 반응이 어떠한가 궁금하가든요.
3년전 경기도갔다 여유시간 방화수류정과 화홍문만 보고왔습니다 비가내려 역사의 깊은뜻 모르고 ....똑같은 곳을 가도 선생님처럼 가득 담아오시는 분들로 인해 겸손을 배웁니다 또한 역사를 알변서 가슴이 숙연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