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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요나 님의 몽골기행문을 나눕니다. 소중한 나눔을 해주신 요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아름다운 초원들의 고향
-몽골을 다녀와서
이상훈(요나)
풍요로운 사막
사막이 풍요로울 리 없다는 것은 사막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라는 생각을 일깨워주는 곳이었다. 모래언덕이 부근에 초원을 거느리고 그 가운데 맑은 물이 정겹게 흐르고 있는 풍경이라면 어떨까? 첫날 새벽 잠시 들러서 쉬고 아침, 점심을 먹었던 게르촌의 이름이 바얀고비(BAYAN GOBI)다.
7월 24일 밤 8시에 인천공항을 출발, 11시가 넘어서야 울란바트로 공항에 도착했다. 수속을 밟고 차에 짐을 옮기고 일행이 버스를 타고 출발이 가능하게 된 시간은 밤 1시였다. 버스에 몸을 싣고 곤한 잠에 빠져서 네 시간쯤 달린 후 도착한 곳이 바얀고비(BAYAN GOBI)다. 새우잠을 자던 버스에서 내려 끼리끼리 배당된 게르에서 드디어 허리를 펴고 다시 눈을 붙인다.
아침에 일어나서 처음으로 만난 풍경은 풍요로움을 느끼기에 충분할 만큼 다양한 모습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 모래언덕이 보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까마득하게 펼쳐진 초원, 그 사이로 천천히 흐르는 물, 평화롭게 풀을 뜯는 소와 말떼들, 게다가 멀지 않은 곳에 나지막한 산이 자리 잡고 앉아 황량함을 달래주는 모습은 사막의 풍요로움을 넉넉하게 보여준다.
식사 후 첫 일정에서 만난 낙타는 드디어 이곳이 사막임을 느끼게 한다. 그림책에서만 보던 낙타에게 내 몸을 맡긴다는 것은 선뜻 내키지 않는 일일 수도 있다. 몇몇 사람들이 낙타 타기를 거부했다. 키가 큰 낙타는 비행기처럼 탈 때와 내릴 때가 무섭다. 기우뚱 하면서 앞발을 일으키면 내 몸이 뒤로 이 만큼 쏠렸다가 다시 뒷발을 불쑥 일으키면 잠시 넘어질 듯 앞으로 몸이 쏠린다. 마침 쌍봉낙타여서 뒤에 있는 혹에 몸을 의지하고 앞에 있는 혹을 잡으면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뒷다리를 쭉 펴고 일어서면 두세 길 위로 불쑥 내 몸이 올라가는 것을 느끼며 낙타 등에 어느 덧 내가 앉아 있다. 그 위에 높다랗게 앉아서 보는 풍광이 참 괜찮다.
낙타체험은 들풀을 밟고 가다가 모래언덕을 넘어 30분쯤 낙타를 타고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이다. 색다른 체험이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낙타체험 후 고비사막의 자그마한 물길을 따라 함께 초원을 걸어서 다시 우리가 간밤에 묵었던 게르로 왔다. 오는 길에 말도 만나고 소도 만나고 양도 만났다. 유유히 풀을 뜯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삶을 누리는 듯 평화로웠다.
점심식사를 하고 하르호린으로 출발, 가는 길에 박물관을 들러 칭기스칸 시대의 유물을 관람했다. 목이 달아나고 팔이 떨어져 나간 돌부처의 모습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마치 일본이 경주 남산 부처들의 목을 잘라 놓은 것처럼 중국의 횡포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인다.
‘거북이 바위’ 앞에서 칭기스칸의 냄새가 배어 있는 유물들을 팔고 있다. 깨어진 막새기와에 새겨진 귀면와의 문양이 정교하다. 20달러를 주고 하나를 샀다. 박물관에서는 두 마리의 말이 역동적으로 달리는 그림을 하나 샀다.
다시 달리는 차창으로 보이는 유채꽃밭, 강, 그리고 초원은 너무 너르고 까마득하여 생소하다. 어마어마한 초원과 그 초원의 치마폭에 쌓인 듯 평화로운 산들을 무수히 만났다가 헤어짐을 반복하다가 드디어 체체를릭에 도착하였다. 초원만 감상하던 눈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이 오히려 낯설게 다가온다. 아직은 어설픈 호텔에서 샤워를 하고 나니 어제 제대로 자지 못한 피곤이 밀려온다.
보자기 화장실
아침 식사 후 체체를릭 숙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청 앞 광장으로 갔다. 공산주의는 광장문화라고 했던가? 공산주의가 오랫동안 이어졌던 몽골에서는 거기서 온갖 기쁜 일, 슬픈 일들이 다 일어난다. 어려운 인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는 행복한 곳이 되었다가 문득 비판과 처형의 장소로 바뀌기도 하기 때문이다. 거기서 5분가량 걸으면 돌궐 시조 비석이 서 있는 박물관이 있고 그 안에는 몽골을 빛낸 인물이나 유물, 사진이나 설명이 오롯이 저장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보관 상황은 생각보다 어설퍼 보였다.
버스를 타고 타이하르출르로 출발, 가는 길에 보이는 초원과, 목장, 소, 양, 말들의 무리가 장관을 이룬다. 비슷한 광경들이 연속되어 나타나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다. 초원의 푸른 색 위에 양떼들이 풀을 뜯고 그 위를 변화무쌍한 구름이 흘러가고 물감을 칠해놓은 듯 새파란 하늘은 보아도 보아도 눈이 시리지 않다.
가는 길에 그 너른 평원 가운데 유독 우뚝 솟은 커다란 바위 하나를 만났다. 그곳은 몽골을 상징하는 인물들의 필적이 남아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잠시 내려서 산책을 하다가 우람하지만 무뚝뚝해 보이는 야크의 체격을 만났다. 육중한 몸에 기다란 털이 추운 곳에서도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역시 가장 해발이 높은 곳에 방목하고 있다고 했다.
가는 길에 가끔 낙엽송 밭이 나오기도 하지만 오로지 들꽃만으로 펼쳐진 초원에는 몸을 숨길 곳이 없다. 민가도 거의 없다. 급할 경우, 할 수 없이 자연 가운데서 볼일을 볼 수밖에 없는데, 보자기를 준비하도록 한 준비물 목록의 의도를 거기서 찾을 수가 있었다. 두어 사람이 보자기를 들어주고 그 너머에서 볼일을 보도록 하는 것이다. 보자기를 드는 순간 그곳은 바로 간이화장실이 되었다.
까다로운 자매님들은 기어코 참았다가 화장실이 있는 곳을 찾았지만 화장실이라고 해야 별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초라한 시설이 대부분이다. 오히려 보자기 화장실을 받아들이는 순간, 자연과 한결 가까워지며 인간미를 풍기게 되는 게 참 신기했다. 보자기 화장실은 몽골의 초원이 주는 또 하나의 쾌활한 혜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을 가다가 거짓말처럼 만난 초데트 협곡, 끝없이 펼쳐진 초원 가운데 그런 협곡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깊고 좁은 계곡 사이로 맑은 물이 노래를 하며 흐르고 있었다. 이 너른 초원 어디론가 흐르고 흘러 마치 엄마의 젖줄처럼 마른 초원의 목을 촉촉이 적셔주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나타난 인가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운 다음, 여섯 대의 봉고차에 나누어 타고 화산분화구로 출발했다. 초원에서 보기 힘든 검은 흙과 검은 돌-화산재와 화산석-이 보이기 시작하면 화산분화구가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길 없는 길을 달려 드디어 도착, 300년 전까지만 해도 시뻘겋게 불을 내뿜었던 화산 분화구까지 걸어 올라갔다. 정상에 서는 순간 갑자기 낭떠러지처럼 아찔하게 패인 분화구는 참으로 거대한 자연의 힘을 느끼게 한다.
일행보다 빨리 오른 내 눈에 분화구 안에까지 들어갔다 나오는 몇몇 사람들이 쏘옥 들어와 앉았다. 나도 분화구 안으로 기꺼이 몸을 들이밀었다. 확장된 개미지옥의 개미처럼 화산재가 많은 곳은 미끄러지기도 하고 화산석이 있는 곳은 돌을 밟으며 홀린 듯 내려갔다.
드디어 가장 중심, 거기서 엄청난 열기가 뿜어 나오며 마치 초원을 모조리 삼킬 듯, 세상을 다 덮을 듯 포효하였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온몸이 떨려왔다. 여지없이 그 곳에도 나무 등걸 몇 개가 걸쳐져 있고 파란 끈들이 매여 있다. 두려움을 이기고 싶은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이 그 깊은 화산분화구 속에도 살고 있었다.
하산하여 ‘차강노르’ 호수로 향했다. 엄청난 규모의 호숫가에 게르가 즐비했고 우리는 제일 끝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게르촌에 몸을 내렸다.
갑자기 비가 내린다. 우산을 꺼내들고 식당을 오가면서 저녁을 먹었다. 비가 흔하지 않은 몽골에서는 비를 데리고 오는 손님들을 반긴다고 했다. 복을 가지고 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비를 몰고 온 반가운 손님이었지만 긴팔 옷을 입지 않으면 팔에 소름이 돋을 만큼 추웠다. 호숫가의 낮은 기온에다 비까지 내려 여름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하는 날씨 탓이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는 무엇일까?’하는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우리의 삶이 공허하고 허탈한 이유를 찾아들어가는 내적인 성찰에 이르기까지 깊이 있는 내용으로 이어진 수녀님 강의는 여행 중에 있는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삶의 의미는 관계 속에서 피어나며 관계 안에서 의미를 풀어가야 한다. 사랑의 기억으로 살아가는 우리 몸은 마치 악기가 조율이 필요하듯이 정서적인 조율이 필요하며 그를 통하여 치유력, 회복력을 키워가야 한다는 말씀을 듣는 부분에서 다시 한 번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어서 모둠별로 모여 실제로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신앙이 가운데 있지만 제대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 않다. 한 꺼풀씩 두꺼운 옷을 입고 나누는 대화는 늘 그 자리에서 맴돌기 마련이다. 웬만하면 내 이야기를 하면 나오는 실마리도 꼬여버린 듯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앉아 있다.
추운 밤을 게르에서 보내는 일이 만만치 않다. 게르는, 특히 호숫가에 있는 게르는 추워서 나무를 피워야 하는데 한 번 피워서는 추워서 안 된다. 서너 번을 피워야 겨우 추위를 면할 수 있다. 초저녁, 밤 12시, 새벽 6시에 피워주기로 약속을 한 모양이다. 서너 번 자다가 일어나 게르에서 바라보는 달의 빛깔이 곱다.
자다가 일어나서 게르 사이로 보이는 달을 만나는 것도 무척 낭만적이다. 보자기가 없어도 괜찮은 자연 화장실을 자유롭게 이용하면서 금방 따뜻해졌다가 금방 식어버리는 게르 안을 들락날락하다보면 날이 샌다. 저녁에는 10시가 넘어서야 어두워지고 아침에 해가 뜨는 시간은 같아서 우리나라보다 밤이 짧다. 백야현상 때문이다.
아침 식사 후 각자 호숫가를 산책하는 자유명상 시간을 가졌다. 어제 비가 온 탓으로 바람이 아직 싸늘하다. 긴 팔 옷으로 무장을 하고 혼자서 산책하는 침묵명상은 자연 속에 나를 비추어보는 좋은 시간이 되어 마음속으로 촉촉이 젖어들었다.
꽤 멀리 보이는 산의 평평한 위용이 빙긋이 나를 유혹했다. 올라가면서 만난 숱한 들꽃, 이름 모를 풀, 드문드문 앉아 있는 바위들의 모습이 엄마의 자궁처럼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그들과 나누는 소리 없는 대화는 참으로 아기자기한 맛으로 가슴을 울려온다. 시간의 흐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자연과 하나가 되었던 시간이다. 자연은 참으로 하느님이 주신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다.
다함께 모여 승합차로 호숫가를 한 바퀴 돌자고 했다.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울퉁불퉁해진 길을 오르기가 쉽지 않다. 차를 내려서 들꽃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오히려 그게 좋았다.
돌아와서 식사를 하는데 끊임없이 나오는 고기, 고기, 고기······. 역시 목장의 나라다운 식단이 매끼 이어지고 있었다. 소와 돼지, 양고기가 번갈아가면서 다양한 요리가 되어 나왔다. 채식이 중심이던 내게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 식단이었다. 적절하게 조절을 하면서 먹었다.
들까불 체험
버스를 만나기 전까지는 다시 여섯 대의 승합차에 나누어 타고 행렬을 이루어 갔다. 버스를 갈아타기 전까지 차창을 통하여 만나는 풍광은 한여름 풍덩 뛰어들고 싶은 바다처럼 시원하고 풍요로워 카메라 셔트를 계속해서 눌러도 아름다운 장면들을 놓치는 듯하여 아쉬움이 남았다. 몽골의 하늘과 구름, 그리고 초원의 그 평화로운 풍경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하느님의 가장 멋진 예술품이었다.
버스를 타고 체체를릭까지 돌아와 다시 승합차를 갈아타고 칭히러 온천까지 가는 길은 그야말로 힘든 여정이었다. 민둥산 하나 정도가 장애물이었을 뿐이지만 길이 제대로 나 있는 곳이 아니어서 마치 개척 시대처럼 길을 만들면서 달리는 승합차들이 대단해 보였다. 간밤에 내린 비가 이미 나 있는 길들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놓은 상태여서 더 어려운 행렬이 될 수밖에 없었다.
튀어 올랐다가 떨어지고 오른쪽으로 기울었다가 다시 왼쪽으로 흔들리는 들까불 체험이 이어지면서 차를 타고 있는 것인지 말을 타고 있는 것인지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흔들리면서 달렸다. 결국 우리 모둠이 타고 가던 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우리 모둠원들은 다른 차에 뿔뿔이 흩어져서 갈 수밖에 없었다. ‘재남합기도장’을 함께 싣고 가기가 힘겨웠던 탓일까? 우리나라에서 수입된 중고차에 글씨를 그대로 달고 다니는 차가 심심찮게 보이는데 바로 우리 모둠원들이 탔던 차가 재남합기도장에서 사용하던 차였던 모양이다.
가는 길에 잠시 쉬면서 만났던 에델바이스 군락은 그 들까불 체험으로 얻은 즐거움이었다. 그 너른 초원에 온통 에델바이스가 하얗게 끝도 없이 피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만나기 쉽지 않은 에델바이스를, 그것도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에 까마득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생 끝에 도착한 온천의 자그마한 규모가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달걀을 삶아 먹을 수 있을 만큼 뜨거운 98°의 온천수가 아무런 장치 없이 땅에서 솟아오르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야말로 야외 온천은 대만족이었다. 물에 몸을 담그자마자 매끄럽게 다가오는 온천수의 감촉,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고향의 봄’을 불렀다.
아침은 매끼 먹는 고기로 부담스러워진 속을 죽으로 달랬다. 돌아가는 길은 어제 왔던 길과는 다른 길이었지만 초원 위를 그냥 내달리는 들까불 체험은 변함이 없다. 앞차가 풀밭을 밟고 지나가면 열어 놓은 창으로 가득 들어오는 허브향내가 진하다. 덜컥거림도 잊어버리게 하는 향내를 맡으며 우리는 초원을 이야기하고 풀내음을 이야기하고 들꽃들의 수줍음을 이야기했다. 그저께 비가 내린 탓으로 불어난 물을 걱정하던 냇물도 탈 없이 건넜다. 오히려 하늘만 더욱 눈부시게 푸르렀다.
울란바타르, 그리고 살레시오
장장 여덟 시간을 달려서 도착한 울란바타르는 우리나라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었다.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전체 300만 인구 가운데 절반이 여기서 살고 있다니 그럴 만도 하다. 몽골 주교좌 성당으로 갔다.
지하 소성당에서 베트남 신부님의 집전으로 미사를 드리고 몽골인 첫 사제가 될 바타르 엥흐 요셉 부제님도 만났다. 한국 대전가톨릭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며, 올해 8월 28일에 신품성사를 받는다고 했다. 몽골의 가톨릭에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사람이었다.
호텔에서 쉰 후 아침 식사 후 울란바타르 외곽지로 나가 승마체험을 했다. 혹시 사고가 날까봐 노심초사하는 수녀님의 걱정과는 달리 기분 좋은 승마를 마치고 인근 게르촌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주위 경관이 참으로 아름답다. 식사로 나온 양고기가 지금까지 먹었던 고기들과는 달리 연한 것이 구미를 당긴다.
식사 후 모둠별 장기자랑을 하는데 모둠별로 준비한 것들이 사람들을 참으로 즐겁게 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 알뜰히 준비한 수녀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정성스러운 시간이기도 했다. 고희(古稀)도 축하하고 회갑(回甲)도 축하하며 생일까지도 알뜰히 챙기는 마음이 참으로 향기로운 시간이었다.
다시 울란바타르 시내로 나와 순수한 몽골의 음악과 춤으로 구성된 공연을 관람하였다. 몽골의 문화를 제대로 만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초원을 만났을 뿐, 그 초원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향기를 맡을 시간을 제대로 가지지 못하여 허전했던 가슴이 오롯이 채워지는 시간이었다.
이튿날 드디어 살레시오수녀회 교육선교센터 개원식에 참석하였다. 이미 살레시오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유치원, 초등 아이들을 위한 학교가 굴러가고 있었고 이어서 4층으로 된 선교센터가 오늘 개원을 하는 것이다. 주교님의 집전으로 시작된 개원미사는 영어로 진행이 되었고 한국어와 몽골어로 번역이 되었다.
“몽골에서 이런 하느님의 터전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힘이 모여서 이렇게 아름다운 하느님의 터전을 마련한 것입니다.”
한국, 인도, 일본 등 각국에서 모인 살레시오 수녀님들이 손수 마련한 점심 식사를 함께 나누며 더욱더 확장되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를 실감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타고 오는 저녁 시간 내내 개원식을 위해 준비한 유치원 아이들의 몸짓과 공연 도중 주교님께 건네주던 ‘파란수건’이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그건 어쩌면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하느님께 드리는 소중한 선물이었을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