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항일 루트3 : 단죄, 중국 하얼빈
용기 있게 뚜벅뚜벅 걸어 군대가 늘어서 있는 뒤편에 이르러 러시아 관리들이 호위하고 오는 사람 중에 맨 앞에 누런 얼굴에 흰 수염을 한 조그만한 늙은이가 있었다. 저자가 필시 이토일 것이다. 생각하고 바로 단총을 뽑아 그를 향해 4발을 쏜 다음, 생각해보니 그자가 이토인지 의심이 났다. 나는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무리 가운데 가장 의젓해 보이며 앞서 가는 자를 향해 다시 3발을 이어 쏘았다. 그 때가 1909년 10월26일 상오 9시 반쯤이었다. (옥중 자서전 ‘안응칠 역사’ 중에서)
하얼빈은 또 다른 중국이다. 헤이룽장 성의 성도로 중국의 대도시가 그렇듯 인구가 1100만 명에 달한다. 아파트 숲, 초고층 빌딩, 시속 300km 고속철도는 비상하는 중국 대도시와 다르지 않다.
하얼빈은 하지만, 동방의 파리라 불린다. 러시아 풍 근대건축물에 음악도시 상징 조형물이 즐비하다. 한여름에는 맥주축제가 열린다. 1900년, 중국에서 처음 생산된 하얼빈 맥주는 순한 목 넘김이 그만이다. 중앙대가 좌우 골목에 진을 친 포차에서 들이키는 이 도시의 맥주는 하얼빈을 정말 사랑하게 만든다.
새침하나 도도하지 않은 하얼빈 아가씨의 매력은 또 어떠한가. 중국 CCTV 아나운서의 80%가 이 도시 출신이라고 자랑한다. 겨울에는 세계적인 얼음축제, 빙등제가 도시를 확 바꾼다.
하얼빈은 항일의 도시다. 살아 있는 인간을 세균무기 실험도구로 사용한 731부대가 바로 이 도시에 있었다. 3000여 명의 중국, 한국, 몽골인들이 마루타로 사용됐다. 이름이 확인된 한인은 6~7명. 일제가 도주하며 부대시설을 폭파, 인류사 범죄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해마다 8월이면 ‘일군침화 제731부대 죄증진열관’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 과거를 기억하자!!
이 도시는 또 영화 ‘암살’의 실제인물 남자현 열사가 순국한 땅이다. 1933년 만 61세 때 일제 관동군 사령관을 격살하려다 실패, 체포됐다. 남 열사는 안중근이 취조를 당했던 그 일본 영사관 지하실에서 무려 6개월 동안 고문과 폭행을 견뎌야 했다. 거의 산송장이 되어 병보석으로 나왔다. 그녀는 하얼빈 차디찬 여관방에서 유언을 남겼다. “나라를 찾는 날 독립축하금으로 나의 재산 245원80전 중에서 200원을 바쳐라” 그 돈은 남 열사가 약 한첩 쓰지 않고 모은 돈이었다.
그는 60세 때 무명지를 잘라 ‘大韓獨立 願'(대한독립 원) 혈서를 써 하얼빈에 온 국제연맹 조사단에 전달하기도 했다. 남자현은 ‘여자 안중근’이었다.
광주, 화순출신인 중국 100대 영웅, 항일음악전사 정율성의 기념관도 여기에 있다. 조선민족예술관 1층 안중근 기념관의 바로 위층이다. 하얼빈에는 이렇듯 맥주와 얼음축제, 중앙대가, 송화강 뿐 아니다. 항일의 질긴 역사도 장대하다.
1909년 10월22일 오후 9시15분,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안중근, 우덕순은 하얼빈에 도착했다. 도중에 국경도시 포그라니치나야에서 유경집(본명 유승렬)의 아들 유동하가 합류했다. 17살 어린 나이지만,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유경집은 단순한 약방 주인이 아니었다. 공립협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 멤버이자, 거사 7인동맹의 맹원이었다. 러시아에 능통한 아들을 통역 및 연락요원으로 대신 보냈다.
안중근 일행은 하얼빈의 밤공기를 가르며 길을 다그쳤다. 마차가 도착한 곳은 네스나가야 28호(현 지단가 40호) 김성백 집이었다. 그는 동청철도 건설업자였지만, 실은 국민회(공립협회 후신) 하얼빈 만주지방총회장이었다. 소소하게는 김성백의 막내 동생 김성기와 유동하의 두 살 아래 여동생 유안나가 부부 사이였다. 김과 유는 사돈지간이며, 유경집과는 공립협회 동지였다. 안 일행이 그를 찾아간 것도, 유동하의 동행도 모두 치밀한 거사 작전이었다.
23일 안 일행은 이발소에서 머리를 단장하고, 하얼빈 공원(현 자오린공원)으로 향했다. 의거 계획을 확인하고, 체포에 대비 입을 맞췄다. 안중근은 공원에서 단란한 가족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날은 중양절 다음날 주말이라 가을을 즐기러 온 행락객이 넘쳤을 테다. 일상의 행복과 가족, 단란함, 그런 게 스쳐가지 않았을까. 안중근이 가족을 그렸을 그 자리에 ‘청초당’ 유묵비가 서 있다.
안중근 일행은 상념을 떨쳐내고 남문으로 나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오후에는 동흥학교를 찾았다. 이강의 편지를 대동공보 하얼빈 지국장 겸 동흥학교 교사인 김형재에게 건넸다. 김 선생은 동흥학교 이사장인 김성옥 집에 머물던 조도선을 소개해 주었다. 조도선도 국민회 블라디보스토크 지회원이었다. 마침내, 4인 결사대가 모두 모였다.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우덕순과 안중근은 이날 밤 이강 앞으로 편지를 보냈다. 거사 보고였다. 안중근은 아우 안응칠이라 표기했다. 1909년 12월 일본 군부가 작성한 하얼빈 의거 문건을 보면 “이번 사건은 대동공보사의 이강, 유진율… 등의 교사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됨”이라고 적혀 있다. 일제는 안중근의 배후, 교사범으로 이강을 지목했다. 박환 수원대교수는 논문 ‘러시아지역 한인언론과 유진률’에서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의 사무실에서 유진률, 정재관, 이강, 윤일병, 정순만 등이 모인 가운데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위한 조직이 이루어졌다”고 밝혔다.
24일 유동하를 뺀 일행은 하얼빈 바로 앞인 채가구에 내렸다. 그곳에 우덕순, 조도선이 남고, 안중근은 오후 2시 다시 하얼빈으로 향했다. 이토의 특별열차가 어디에 설지 다소 애매했기에 결사대를 나눴다. 25일 하루가 지나고, 마침내 결사의 날이 왔다.
이토 히로부미는 왜 먼 나라 남의 땅 하얼빈에 왔을까. 하얼빈은 청나라 영토였지만, 러시아가 동청철도 부설권을 따면서 식민지인 조차지였다. 1904~5년 러일 전쟁 승리로 한반도에서 러시아 영향력을 배제한 일제는 1907년 제1차 러일 협약을 체결한다. 만주, 대한제국, 몽고에 관한 일체의 분쟁 또는 오해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이었다. 비밀 협약내용은 △그리니치 동경 122도 교차점을 중심으로 만주를 남북으로 분리, 지배권을 인정한다. △러시아는 일제의 대한제국 지배권을 인정한다. △일본은 러시아의 외몽고 지배권을 인정한다 등이었다.
근데,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일본이 1909년 9월4일 청과 간도협약을 선언했다. 일제는 영토 다툼이 있지만 조선 땅인 간도를 내주고 대신, 남만주철도 부설권과 푸순탄광 채굴권을 얻었다. 동시에 간도 지역에 영사관을 설치, 북간도 항일운동도 감시 제압할 수 있었다. 남만주 철도는 만주 침탈의 교두보였다. 철길과 주재민 보호를 명분으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었다.
일제가 만주 침탈에 나서자 미국과 러시아가 발끈했다. 중국도 간도 땅을 얻었지만, 우려가 팽배했다. 미 대통령 태프트는 금주-아이훈(현 헤이룽장성 헤이허 시)간 금애철도 부설을 서두르고, 청에 문호개방과 기회균등을 요구했다. 러 외상 이즈볼스키는 주러 일본대사 모토노 이치로에게 “일본의 최근 대청 외교가 러시아에 대항할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윽박질렀다. 여기에 일본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친다면 무방비 상태라는 우려도 제기됐다.
일본은 열강의 만주 접근을 차단하면서, 한반도와 남만주의 지배력을 굳혀야 하는 과제가 대두했다. 그러려면 러시아와 관계개선이 필요했다. 이토는 “현재 중국에서 강국들의 상호 이익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극동문제와 관련, 양국 간 긴밀한 연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러시아와 한반도, 만주를 적당히 나눠먹자는 제안이었다.
때마침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에게 극동정세의 파악과 블라디보스토크의 방위태세 점검, 북만주와 몽고의 처리방안을 수립하기 위한 극동 순방을 지시했다.
10월24일 일본이 고대했던 러시아와 양자회담이 26일 하얼빈으로 잡혔다. 의제는 단 두 가지였다. 남만주 철도와 동청철도의 상호 화물협정과 교역확대, 포괄적 양국 관계 개선이었다. 한마디로 만주의 분할 점령, 일제의 한반도의 지배 완결이었다.
전 세계는 양자 회담을 주목했다. 청국은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고 다음으로 청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방법을 러시아와 논의하는 것으로 보았다. 반면에 대다수 한인들은 양자 회담의 악마적 계산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날 9시30분, 세계를 뒤흔든 총성이 울렸다. ‘이토 공작 암살’ ,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은 하얼빈 급전을 호외로 뿌렸다. 안중근이 쏜 탄환은 이토를 절명시켰다. 3발은 한반도, 만주, 몽고 약소민족의 분노였다. 아니, 침탈과 억압이 아닌 동아시아 평화의 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