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승지맥 (斗升枝脈)
영산기맥 장성갈재에서 올라 선 써래봉에서 북으로 변산지맥이 분기하여 소갈재로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선 옥녀봉(△349.6). 이 옥녀봉 직전의 전위봉격인 320봉에서 북동으로 또 하나의 산줄기를 갈라내는데, 이 산줄기는 계속 북진하면서 두승산을 지나 부안의 백산을 끝으로 고부천이 동진강을 만나는 부안동진강교 아래에서 산줄기를 마감한다. 서쪽으로 변산지맥과 함께 고부천의 물막이가 되고, 동쪽으로는 동진강을 흘려보낸다. 斗升山은 산경표(94頁)와 대동여지도에도 표기가 있고, 白山 역시 대동여지도에 표기된 족보있는 산이다.
소갈재~1.5km 분기봉~2.1~밤고개~4.8~비룡산~2.1~국사봉~2.1~와룡마을~2.0~태봉~3.2~덧고개~2.3~두승산~1.3~돌짐재~4.0~천태산~9.0~백산~고부천 / 32.9km
비룡산213.7 국사봉250 계동산132 태봉150 두승산443.5 천태산196.5 백산47.4
두승지맥 1구간
2014. 5. 14(수) 산길 : 분기봉~덧고개 사람 : 조진대 조은산 거리 : 16.3km
구간거리 분기봉~2.1~밤고개~4.8~비룡산~2.1~국사봉~2.1~와룡마을~2.0~태봉~3.2~덧고개 / 16.3km
Cartographic Length = 19.3km 07:35
손 없는 날을 골라 고문님과 목, 금 이틀간 두승지맥을 말아 먹기로 했다. ‘손 없는 날’의 사전풀이는 악귀나 귀신이 없는 날이다만 우리에게 손은 글자 그대로 손님, 즉 ‘찾는 이 없는 날’이 되겠다. 요일 구분없이 돌아가며 드물게 오는 이틀짜리 비번이고, 상임백수인 고문님은 일요일에 받아놓은 청첩장이 석장이나 된단다. 내게는 출근이 손이고 고문님은 청첩장이 손인 것이다.
고문님이사 평일에는 언제나 손이 없는 상태지만 해야 할 미답지맥의 공통분모가 거의 소진되었음이 한이라. 섬을 제외한 남도지방은 모두 마치고 강원도에 몇 개 남았다 하시는데 내가 강원도까지 혼자서 올라가는건 포기상태라 앞으로 고문님과 만날 일이 거의 없을지도 모르겠다.
내비에 정읍장례식장을 찍으니 294km에 3시간 10분이란다. 05시 20분 출발이니 8시 반이면 도착하겠다 했는데 좀 쌔게 밟았는지 백양사휴게소에 들러 싸온 김밥으로 아침 먹고 화장하고 커피까지 한잔 때리고 정읍IC 내려 덧고개 올라가니 8시 반이다. 고문님은 늘 그렇듯이 먼저와 계신다.
첫 구간 마칠 덧고개에서 만나 차 한 대 두고, 다른 차로 들머리 접근하는 방식. 지역경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현지에서는 우리가 ‘손’인 셈이다. 1박2일 동안 정읍에 보태준거라고는 첫날 저녁과 둘쨋날 점심밥값 3만원이 전부다. 그것도 이평면과 영원면에 절반씩 나눠 지불했으니 참 대단한 ‘손’이다.
성내면 학동저수지 옆길로 오르면 되는데 고문님의 내비는 신림면 왕림고개로 돌아간다. 변산지맥 마루금을 따라 돌아 올라가니 학동저수지에서 올라 온 길과 만나고, 옥녀봉 허리로 해서 소갈재로 가는 임도따라 들어갔다. 지난 달 변산지맥 하면서 봐둔 옥녀봉 최단 접근지점이다.
09:28 옥녀봉 임도 09:45 지맥분기봉 10:43 밤고개 11:43 은행정 2차선 도로 12:20 비룡산(△215.3m) 13:30 국사봉 (△250.8m) 14:23 와룡마을 15:15 태봉(△149.5m) 15:55 주동고개 16:44 △111.4m 17:06 덧고개
옥녀봉 임도
옥녀봉 임도(230m) 흩날리는 빗방울이지만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 비옷을 걸치고, 고문님은 우산을 꺼내 들었다. 변산지맥 능선에 올라서니 숲속이라 비는 무시해도 될듯하고 더위만 느껴 비옷을 벗었는데 이후 차차 개였고 오후에는 해가 나왔다.
방장산
두승지맥 분기봉
분기봉(320m) 고창군 성내면과 신림면, 정읍시 입암면이 갈라지는 삼면봉이 된다. 임도에서 720m 거리에 20분 걸렸다. 바로 건너편(서)에 옥녀봉이 있지만 가 본지 한 달도 안 되었고 고문님 역시 변산지맥을 완료 한 바라 곧바로 지맥 출발이다.
매봉(310m) 분기봉에서 살짝 내린 다음 올라선 봉우리. 아래에서도 큰 바위가 쳐다보이듯이 올라서면 역시나 조망조은 봉우리다.
매봉
방장산에서 내려오는 변산지맥, 두승지맥
흔들리지 않는 바위
흔들바위 생긴 모양은 흔들릴거 같지만 올라가서 굴려도 끄떡도 않는 바위다.
압곡재 우측 압곡마을, 왼쪽은 다리골로 내려가겠다. 듬직한 당산나무 앞에 벤치가 놓였고 이정표는 [옥녀봉1.0km 거담봉0.6km] 인데, 언뜻 보면 이정표 방향이 좌우가 뒤바뀐거 아닌가 싶은데 사실은 이 이정표는 바르게 설치된 것이고 옥녀봉과 거담봉 정상표시 말뚝이 서로 뒤바뀐 것이라. 즉, 옥녀봉(△349.6)에는 거담봉 말뚝이, 거담봉(280m)에는 옥녀봉 말뚝이 설치된 것이다. 이런 사항을 이미 눈치 챈 산꾼들이 매직으로 말뚝에다 X 표시를 해놓았더라.
내려가다 안부 직전에는 전주이공 묘. 고사리가 많이 보인다. 이미 많이 핀 상태지만 고문님은 그 중에 늦둥이들을 골라 딴다
압곡재
옥녀봉이 아니라 거담봉이다
280봉 [옥녀봉]이라 표시한 정상 말뚝이 있지만 여기가 거담봉이다. 옥녀봉은 지형도에 표기된 지명이고, 매봉이니 수리봉이니 하는거는 지형도 표기가 아니라 현지에서 부르는 이름인 모양이나 설치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하든가. 몇발 아래 묘터에서 방장산이 조망된다.
거담봉에서 방장산
거담봉에서 잠깐(1분) 내려선 지점 뚜렷한 조은길은 곧장 내려가나 그 길은 용교리 하산로이고, 지맥은 우측 덜 뚜렷한 숲길로 들어간다. 무심코 가다가 발길을 돌렸다. 짧은 행복인가 아쉬워했다만 지맥길도 그리 나쁘진 않다.
시눗대 숲을 만난다. 이런 시눗대 숲은 산중에 부분적으로 밀집해 있었는데 오늘 내일 산길 도중에 자주 만난다. 밤고개 직전에서 정면은 숲도 빽빽하고 도로는 절개지라 왼쪽으로 피해 내려갔다.
밤고개
밤고개(87m) 고창군 신림면에서 정읍으로 들어가는 708번 2차선도로다. [정읍시 입암면] 표지판이 있고 예상대로 고개정점은 높은 절개지라 내려설 수가 없다. 밤고개에서 고창군계는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니 이제 고창과는 이별인 셈이다.
왼쪽 아래 성묘철도 아닌데 말끔하게 벌초된 묘로 올라서니 더 안쪽으로 전봇대가 올라가는게 보여 그리 올라가니 묘터이고 KT기지국 옆으로 조은길이 나있다. 이어 송전철탑을 지나는데 철탑 공사용으로 낸 길인지 몰라도 이 철탑을 지나고도 한참동안 조은길로 가게 된다.
매봉산 북동으로 가다가 동쪽 이룡포마을로 방향이 꺾이고 곡부공공 묘가 있어 배낭 내리고 앉으니, 고문님이 영진지도에 매봉산이라며 삼각점이 표기되었다고 올라가 보시더니 아무것도 없단다. 곡부공씨(曲阜孔氏)는 공자의 후손이라는 우리나라 희성중 하나이며 곡부(曲阜)는 공자의 고향이다.
성내면계에서 벗어나 온전히 정읍땅으로 들어간다. [길을 걸으면 사람들 생각이 나고] 굵은 글자만 읽으면 ‘면사고’가 되는데 두승지맥을 종주한건지 오늘 계속 함께 간다.
내장산, 갓바위
푸른색 송전철탑을 지나 우측으로 꺾어 내려가다, 정면 갑갑한 숲을 피해 왼쪽 묘터로 내려서니 정면 조망이 좋다. 입암산 갓바위가 보는 각도에 따라 모습이 다르다. 왼쪽 뒤로 울퉁불퉁한 능선은 내장산의 연지봉, 불출봉으로 보인다.
복분자밭 뒤로 가는 수렛길을 따라 넘어 내려가니, 무인석으로 호위병을 거느린 임란공신병조판서 고부이공묘에서는 방장산이 조망되고 내려가면 아스팔트 도로에 나가게 된다.
국사봉, 비룡산
2차선 도로 은행정 마을에서 입암중학교로 가는 아스팔트 도로가 마루금이다. 왼편으로는 비룡산과 국사봉이 보이고, 오른쪽 능선 너머로는 입암산 갓바위가 솟아있다.
지선마을 버스정류장을 지나며 왼쪽 집에 물이나 좀 얻었으면 싶은데 개가 너무 사납게 짖어대 포기했다. 언덕을 넘으니 우측에 넓게 황토밭을 개간하고 아낙네들 쪼그리고 앉아 뭔가 심고 있다. 정면 한가득 갓바위 그림이 들어온다.
입암산 갓바위
선동마을 지나 도로에서 벗어나 비룡산으로 오르면서 언덕 위에 외딴 집이 있어 물을 구할 기대를 했지만 역시 개만 묶어놓고 사람은 없다.
산길 초입 역시 길은 널널하고 무엇보다 복분자가 반긴다. 적당하게 익은 놈들로 골라 따먹으며 올라간다. 지독하게 산꾼을 괴롭히던 놈들 중에 하나 이다만 그것도 때를 잘 맞추니 도움이 되기도 하네.
비룡산
비룡산(215.3m △정읍25) 산 이름만 거창할 뿐 조망도 없지만 삼각점은 2등급이다. 자리깔고 점심을 먹었다. 마누라가 몸살을 앓아 김밥을 사왔는데 고문님 역시 김밥이다. 두 줄을 사서 오면서 차 안에서 아침으로 먹고 남은거로 점심인데, 고문님 역시 같은 처진지는 몰라도 김밥 씹는 맛에 동병상련(同病相憐)을 느낀다. (12:50 출발)
소성면계 비룡산을 지나고 길은 조금 험해지는 듯하다가 곡부공공(曲阜孔公) 묘에서 헤어진 성내면계를 다시 접한다. 돌탑에 빨간 깃대가 꽂혀 있는 국사봉과 높이가 비슷한(GPS 260m)봉을 지나니 시눗대 밀림을 만나고 길은 더 험해진다.
꼬드레산 분기봉 국사봉 직전의 220봉에 올라서니 이정표가 있다. 왼쪽으로 [꼬드레산, 대성], 오른쪽이 [국사봉]이다. 꼬드레산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고창쪽 중광리에서 등산로를 낸거 같은데 찾는 사람이 없는지 길은 더 묵어간다.
꼬드레산
국사봉 (國師峰 250.8 △정읍457) 제사를 올렸다면 國祀峰이라 해야지, 유래와 이름이 따로 논다. 산불감시 카메라가 있는 정상부는 숲이 밀림을 이루고 있고, 바위에 올라서니 두승산이 보인다. 여기서 우측(동)으로 입암면계가 갈라지고 정읍시 지역으로 들어가게되니 여기도 삼면봉이 되는 셈이다. 쉬었다가 [범적사] 방향으로 내려간다.
국사봉
국사봉에서 내려서면 왼편으로 조망이 열리면서 고부면 들판과 멀리 변산지맥의 산들이 보인다. 날씨가 더 맑다면 바닷물도 보일 장면이다만, 우측으로는 두승산도 모습을 보여준다. 5분 내려가면 갈림길인데 [범적사, 내동]으로 갈라지고 지맥은 범적사로 좌틀이다.
변산지맥
두승산
쪽동백이냐 때죽이냐...
때죽나무 : 1~3송이씩 무질서하게 핀다 쪽동백 : 10송이씩 두 줄로 맞춰 20송이 가지런히 핀다. 타원형 큰 나뭇잎 가장자리 톱니모양
왼쪽으로 [대동] 갈림길 이정표가 있다. 아까 내동갈림길에서 국사봉은 0.5km였는데, 여기는 0.8km라 했다. 한 1km 가량 온거 같은데 꼴랑 300m 왔다고라? 엉터리 표시다.
능선 왼편으로 넓게 나무를 잘라내고 묘를 썼다. 지름 20cm 넘는 소나무가 싸그리 잘려 나간채 밑둥만 남아있어 보기가 영 거석한데 봉분 위로 보이는 조망은 좋다
지도에 없는 임도에 내려선다. 길을 낸지 얼마 안되는 듯 푸석푸석한 황토가 다져지지 않았다. 우측에 그럴듯한 묘비가 있어 가봤더니, 증예조참의 조양임공이시다. 그런데,
증 예조참의 조양임공 봉명 지묘 배 증 숙부인 남양홍씨 배 증 숙부인 여산송씨
贈 또는 追贈은 사후에 관직을 하사받거나 죽은 후에 아들이 승진하면 아들과 동급, 손자의 경우는 한 단계아래품을 하사받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부인에게도 贈이 되나. 이건 처음 듣는(?) 소리다. 贈은 본인들이 알아서 붙이는 직함이 아니라 나라로 부터 교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또 있다. 언뜻 보면 이 양반은 부인이 둘이구나 하고 넘어갈 일이다만 더 짚어 볼 일이 있다.
요즘의 우리 시각으로는 부인 둘을 비석에 나란히 적는게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겠지만, 본인들의 살았던 시대의 상황으로는 가당치도 않은 語不成說이다. 조선시대에 부인을 둘 아니라 셋 이상도 둘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정실(본부인)은 하나다. 정실 외에 소실 첩 등은 공식적으로 부인이 아닌 것이라. 그리고 그들은 평민이거나 상인(상놈), 종(노비) 등이다. 정부인 앞에서는 감히 숨소리도 죽여야 할 지경이고 하물며 묘를 함께 쓰거나 비석에 나란히 적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죽어도 초상을 못 치렀다. 서얼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유자광이 생모(노비 출신)의 초상을 치르기 위해 장자인 형을 속이고 협박한 이야기도 전한다. 명문가의 규수가 세컨드로 들어앉은 이야기는 없다. 물론 정실부인이 죽은 경우는 가능하지만 그렇더라도 정실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이지 동시에 부인이 둘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라. 이건 본인이 판단해 그렇게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라, 국법으로 정해진 일이다.
고로 이 비석은 정작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후손들의 시각과 입맛에 따라 제작된 것이라. 정작 무덤속의 정실부인은 이를 갈며 원통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설사 정실부인이 죽은 후 재혼한 부인이라 하더라도 당시(조선시대)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합묘는 있을 수 없는 이야기다.
조상님의 묘소를 치장하는 그 자체를 탓할 수는 없는 일이다. 뿌리를 숭상하고 보존하는 것은 우리고유의 문화이다. 조상을 숭배하는 순수한 전통문화가 정작 돌아가신 조상님을 위함 보다 현세대의 자기과시용으로 변질되어 가는 사태가 안타까울 따름이라.
임도는 새로 낸 길인데 이 묘 때문에 낸 임도는 아닌거 같고 또 어딘가 조상미화작업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아래로 내려가니 삼거리다. 지맥은 앞봉우리 올랐다가 외룡마을로 떨어지지만 우리는 범적사에 들러보러 임도따라 내려간다.
계동산 임도삼거리에서 앞봉에 올라서면 우측(동)으로 갈라진 능선에 계동산(鷄動山 129.6m)이 있다. 대동여지도에 기록된 桂東山이 한자가 바뀐채 표기되어 있다.
절에 가면 당연히 물이 있을 것이나, 임도따라 내려가니 이미 절을 지나친 입구다. 저 위에 보이는 절까지 올라가기도 그렇고 그대로 내려가다가 왼쪽 집에 들러보나 사람이 없는 빈집이라 또 허탕이다. 범적사 입구 큰길까지 나와 와룡마을로 들어간다.
와룡마을
와룡마을 정읍시 소성면 주천리 와룡마을. [와룡]버스정류장과 [범적사]를 알리는 입간판이 있다. 고추밭 건너 언덕에 멋스런 정자가 마루금이겠는데 물통 채우러 마을로 들어가다가 와룡경로회관 마당에 수도를 발견하고 틀었더니 물이 콸콸 쏟아진다.
와룡경로회관
세수하고 물통에 가득 채우고, 마을길 따라 능선으로 붙으려 여기저기 들락거려보지만 산으로 오르는 길이 없다. 마을 바깥쪽 능선을 따라 올라가니 조양임공 묘소이고, 뒤로 넘어 반월마을로 내려갔다. 마을회관에 갈린 태극기와 새마을 깃발이 절반은 닳아 없어져 고문님이 마을 노인께 “깃발 좀 갈아 다시지요” 했더니 돈이 없단다.
“그래도 시골에 먹을건 있어. 따라 와, 음료수 한잔 하고 가” 고맙다 인사하고 사양을 했는데, 가면서도 얻어먹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막심해 진다.
논을 가로질러 마루금에 붙는데 지도에 소성면 경계선이 쭈굴쭈굴 뒤틀어져 있는 희한한 그림이다. 무슨 이런 경계가 나오는지, 지적도에도 이런 식인가. 어쨌든 태봉 오름길은 널찍하니 좋다.
반월마을... 두승산
오디는 아직 멀었다
양식 복분자
자연산 찔레꽃
태봉
태봉(149.5m △정읍460) 잡초 무성하게 덮힌 묘 하나 있고 구석에는 녹 쓴 의자가 하나 있다. 별시리 볼 것도 없어 왼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는데 고문님은 여기저기 탐색을 하시더니 삼각점을 찾아낸다. 한쪽 귀퉁이에 잡풀로 덮혔으니 눈에 뛰질 않는다. 아마도 묘를 쓰면서 한쪽으로 치운게 아닌가 짐작한다.
고문님은 삼각점을 임의로 건드렸을까, 하시지만 아~, 나 라도 내산에 조상님 묫자리 쓸 참인데 뭔가 박혀 있으면 뽑아내지 그걸 그냥 두겠나. 저 멀리로 던져버리지 않은게 그나마 다행인가.
자연산 복분자
왼쪽으로 들어서자 말자 복분자를 넝쿨째 만난다. 잘 익은 놈은 입안에서 그대로 녹는다. 고문님은 최근에 스마트폰으로 바꾼지라, 친구들 카톡에 올린다며 폰으로 사진을 찍어댄다. 스마트폰이 또 한 분의 라이프스타일을 바꿨구만.
숲속에 우측으로 갈림길이 나오고 그쪽으로는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로 줄을 쳐놓았다. 지도를 보면 약사암으로 가는 길이다. 주천리 안부로 내려서면서 한차례 길 없는 덤불을 헤집고 나가고 약 100m 쯤 되는 다음봉에 오르니 한가운데 묘가 차지하고 주위로는 군용 참호가 있다. [진지강화 재편성] 입간판을 보니 예비군 훈련장인가.
참호 있는 봉. 국방부 말뚝
노란색 국방부 말뚝을 따라 내려가는 길은 좋다. 산행하다보니 국방부의 협조를 받는 경우도 생긴다. 국방부 말뚝을 따라 내려가니 마루금과 벌어지면서 주동마을로 떨어진다. 사실 주동마을을 관통하는 마루금은 집들로 인해 고수할 수가 없다. 저 앞으로 22번 국도 주동고개가 보이고, 앞 봉우리 우측으로 돌아가는 길따라 눈이 가고 발길도 자연스레 길따라 돈다.
주동고개 (신호등 벨을 눌러야 파란불 들어온다)
주동고개 흥덕에서 정읍으로 들어가는 4차선의 22번국도에 신호등 있는 횡단보도로 연결이 된다. 버스정류장이 [주동마을]이라 주동고개라 해본다. 한참을 기다려도 파란불이 들어오지 않아 후다닥 뛰어 건너고, 신호등 기둥에 붙은 벨을 눌러보니 비로소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작동한다. 촌놈이 뭘 알아야지.
영주이씨 시조비
국도 건너편 마루금에는 瀛州李氏시조비가 있는데, 영주이씨는 처음 들어보거니와 한자도 어렵다 瀛 바다 영 (바다, 늪, 신선이 사는 섬) ?(삼수변)에 19획 글자다. 영주이씨(瀛州李氏)는 고부이씨(古阜李氏)와 동일하다. 영주(瀛州)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의 옛 이름이다.
고갯마루에 자리잡은 당산나무 역할을 했을만한 큰 느티나무가 있는 집은 예전에 필시 주막이었을 것이다. 지맥 마루금인 그 나무에 사나운 개가 묶여있어 접근이 어렵고 왼편 애당저수지 옆길인 [백호자동화사격장] 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 계곡으로 쳐오르자 했는데, (지형도에는 酒洞저수지이나 현지 입간판에는 애당저수지(艾堂)로 되어 있다)
마루금 지킴이
애당저수지
백호사격장
사격장 앞으로 지나가니 많은 군인들이 보인다. 이 때만 해도 단순히 훈련중인가 했는데, 옆 계곡으로 파고 들어가 능선으로 오르는 중에 총소리가 요란하게 터진다. “따다다다다다다....”, " 피유웅~"
"수구리~!!" 이거 혹시 이쪽으로 날아오는거 아닌가. 목이 갑자기 자라목이 되고 허리가 팍 수그려진다. 길이야 있건 없건 총알이 날아올 만한 능선 뒤쪽으로 바짝 숙여 오르면서도 조마조마하다. 본의 아니게 오늘 최난이도의 빨치산 산행이 되고, 겨우 안전권이다 싶은 송전철탑 아래에서 퍼져 앉았다. 철탑 아래쪽에서 고부면계를 만나 우측으로 꺾고, 다시 덧고개 방향인 우측으로 꺾으려는데 고문님이 삼각점 보러 가잔다.
111.4m (△정읍456) 여기도 태봉과 마찬가지로 묘가 있고 삼각점은 한켠으로 밀려있다. 삼각점 찍고, 되돌아 나와 빽빽한 나무 밀쳐내며 내려가다보니 숲속에 트럭 한 대 쳐박혀 있다. 누가 버린 모양인데 번호판까지 그대로 달려있다. 전북7거6055. 누가 버린건지 묵은 수렛길 끝까지 차를 올려놓고는 가버린 모양이다. 수사의뢰를 해야 하나, 그까지 신경 쓸 오지랖은 아니라 그대로 임도따라 내려가니 서산유공 묘를 지나 만수저수지를 지나 온 길과 만난다. 두승산이 바로 길 건너편에 와 있다.
△111.4m
산에 버려진 트럭
내일 오를 두승산
덧고개 (50m) 정읍에서 부안으로 가는 29번 국도다. 만수농원 앞으로 나와 광장같은 4차선 도로 교차로를 건넜다. 아침에 대놓은 내차는 먼지를 얼마나 덮어 썼는지 뽀얗게 변했다.
덧고개
일단 옥녀봉에 대놓은 고문님 차를 회수하고, 동학농민운동기념관으로 갔다. 넓은 주차장 화장실 옆에 잠자리를 물색해 놓고 이평면소재지로 가 저녁을 사먹었다. 식당은 서너개 보인다만 장사를 하는 집이 하나라 선택의 여지가 없다. 막장전골을 겻들인 백반. 칠순이 넘은 듯한 할머니는 주방장이고 할아버지가 써빙을 한다.
쓰리봉에 대해 여쭈었다. 혹시 써래를 전라도 말로 쓰리라 하는가. 제삼제사 확인하며 여쭈었지만, 써래는 전라도에서도 써래이고 쓰리란 말은 못들어 봤단다. 도데체 그놈의 쓰리봉은 어디서 온건지...
동학농민운동 기념관
동학농민운동 기념관에서 하룻밤은 쾌적했다. 화장실이 바로 옆에 있어 씻고 싸는데 편리하며 넓은 황토현 전적지 한켠이라 조용하다. 그 옛날 황토현 전투의 한가운데서 그날의 피터지는 그 외침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창 밖에 비치는 보름달을 쳐다보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전봉준(全琫準) :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1855(哲宗6)~1895(高宗32) 고창읍 당촌리(高敞邑 堂村里)에서 출생. 본관(本貫)은 천안, 자(字)는 명숙(明淑), 별호(別號)는 녹두(綠豆), 창혁(彰赫, 亨鎬)의 아들로 부조(父祖)를 따라 전주 구미리, 태인 감산면 계봉리, 산외면 동곡리, 고부 양간다리, 조소리(鳥巢里)로 옮겨 살았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 조병갑의 거듭되는 악행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ㆍ무장(茂長)ㆍ금구(金溝)ㆍ정읍(井邑)ㆍ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ㆍ진멸권귀(盡滅權貴)ㆍ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정읍·고창·무장 등에 이어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봉기 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전봉준은 순창(淳昌)에 피신, 동지 손화중(孫化仲)·김덕명(金德明)·최경선(崔慶善) 등과 재거(再擧)를 모의하던 중 지방민에게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어 동지들과 함께 1895년 3월 사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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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조은산 원문보기 글쓴이: 조은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