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 왕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실천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사도13,22) 다윗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알려고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뜻이라면 무엇이든지 따를 것을 잊지 않았다. 그가 오로지 하느님께 바란 것은 하느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는 것뿐이었다. "당신의 뜻 다르도록 저를 가르치소서."(시편 143,10)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는 한 가지 수덕만 가지고도 성인이 되고 남는다. 자, 보자. 바오로 사도가 교회를 몹시 박해했는데, 마침내 하느님이 그의 눈을 뜨게 하셨다. 그렇게 하여 하느님의 제자가 된 그가 한 일이 무엇이었던가? 그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의 듯에 내맡기는 일밖에는 한 것이 없다. "주님, 당신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사도 9, 6;22,10 참조) 그리하여 그가 얻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주님은 그를 하느님의 뜻을 이루도록 선택하신 그릇이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시지 않았던가. "그는 다른 민족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 하느님게 자기의 의지를 드리는 사람은 가진 것 모두를 드리는 것이 된다. 가진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 하느님의 말씀을 증거하기 위하여 피를 흘리는 사람, 단식을 위하여 굶주림을 참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가진 것을 하느님께 바친다. 그러나 하느님게 자기의 의지를 바치는 사람은 자기 자신, 곧 자신의 존재 전부를 바친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면 "주님, 저는 비록 가난하지만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제가 제 의지를 당신께 드린다면 저에게 남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이 모든 것을 드리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일이다. "내 아들아, 너의 심장(마음)을 나에게 다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말헸다. "이 세상에서 다음과 같은 것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없다. 즉 하느님, 우리를 모두 가지십시오." 그렇다. 우리가 이보다 더 귀한 무엇을 하느님께 바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 저를 차지하십시오. 저는 저의 모든 의지를 당신께 바칩니다. 당신의 뜻을 일러 주시기만 하십시오. 제가 그 뜻을 받들어 행하겠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릴 생각이라면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우리의 뜻을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한발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만 가지고서는 부족하고 하느님이 섭리하시는 모든 일에 우리를 온전히 일치시켜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뜻에 맞춘다는 것과 하느님의 뜻에 합친다는 것과는 다르다. 맞춘다(Conformity)는 것은 우리의 듯을 하느님의 뜻에 붙인다는 뜻이고, 합친다(Uniformity)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뜻으로 만들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의 뜻이 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완덕의 가장 높은 정점이고, 우리는 이 정점을 향하여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한다. 이것이 우리 일의 목표가 되고 소망이 되고 묵상이며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늘 주보성인과 수호천사, 무엇보다도 우리의 성모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의 성모님은 모든 성인 중에서 가장 완전한 성인이시고 가장 완전하게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신 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