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행 금욕에 대하여
지도사제 18.07.06 00:24
< 영광을 낳는 금욕 >
"금욕은 영광을 낳는다.
모든 기쁨의 샘을 찾아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한다."
지도사제 18.07.05 01:14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 하내영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신앙인에 있어서 금욕(禁慾)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금욕은 영광을 낳는다.
모든 기쁨의 샘을 찾아내기를 원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멀리한다.">
사랑하는 하덧사 여러분!
여러분께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느님의 영광을 낳아드리기 위하여 어떻게 ★ 금욕 ★ 을 하시는지요,
무척 궁금합니다!?
아버지의 완전한 사랑을 위하여
한 번 말씀해 주시면 참 감사하겠습니다!
* * *
<댓글>
지도사제 18.07.06 00:28
<다음사전>
금욕[禁慾] ; 육체 및 정신의 욕구나 욕망을 억누르거나 참음.
금욕?
欲求(욕구) : 무엇을 얻고자 하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하는 바람(다음사전)
왜 欲求(욕구) 를 금(禁)해야 하나요?
욕구는 누구의 욕구입니까?
누구로부터 나왔습니까?
욕구는 나로부터 나온
나의 <바람>, 나의 <원의>, 나의 <뜻>, 곧 <내 뜻>이 아닐까요?
왜?
나의 욕구, 내 뜻을 禁(금)해야 할까요?
무조건 내 뜻, 내 욕구를 금(禁)해야 하나요?
하느님께서는 < 무조건 >
내 뜻, 내 욕구를 억누르거나 참기를 바라시나요?
그것이 < 하느님의 뜻 >이고
하느님이 나(人間)에게 주신 < 자유 의지 = 내 뜻 >인가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 곧 <하느님의 뜻>은,
무조건 우리(人間)의 뜻, 내 뜻(나의 욕구)을
억누르거나 참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나의 욕구(내 뜻)이 더욱 거룩히 사용되기를 원하시며,
그렇게 사용되도록 이끌어 주시는 것이 곧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렇다면 왜?
< "금욕은 영광을 낳는다. >고 하셨습니까?
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 금욕(禁慾) >은
★ 하느님의 뜻을 벗어나는 욕구 ★
그것들을 행하지 말라(禁)는 것이라 믿습니다!
<인간의 생각>에 스스로 아무리 거룩한 행위라 여겨도,
<하느님의 생각>과 다른 행위는 행하지 않는 것(금욕禁欲)이 곧,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씀으로 알아듣기 때문입니다!
지도사제 18.07.05. 01:14
모르시는 분들이 계셔서 말씀드리자면,
과거에 제가 그래도 10년 이상 <M.E 지도신부>했었잖아요? !
그러나 제 질문의 더 깊은 뜻은 ★ 禁慾(금욕) ★
특히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 하내영에게 있어서 뿐만 아니라,
<신앙인에 있어서 금욕(禁慾)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말씀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 * *
지도사제 14.02.27. 15:32
<인간의 性>은 <하느님의 거룩한 선물이요, 거룩함의 도구>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성을 잘못 사용하는 것을 죄악시 해야지
인간의 성 그 자체를 죄악시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각자의 성을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려야 할 것이며,
무엇보다 하느님이 맺어주신 모든 부부는 성실한 부부관계를 통해,
부부애를 완성해 나가는데 최선을 다해야 하겠습니다.
┗ 무량 18.07.05. 08:51
[ 신성한 결혼 ]
우리는 개인에게 세례를 주듯이 결혼에도 세례를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여
기꺼이 상대를 섬기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고 십자가를 지겠다고
다짐해야 한다.
하느님은 부부가 함께 사는 삶 속에서 당신을 알게 해주시겠다고,
혼배성사를 통해, 약속하신다.
다른 어떤 종교가 이처럼 담대한 말을 하는지 나는 모르겠다.
그것은 매우 육체적이고 토속적이며 감성적인 말이다.
교회가 혼인을 성사(sacrament)로 삼은 데 대하여
나는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관계는,
진실로 굴복하는 삶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만남이다.
그것이 결혼의 영적 바탕이다.
당신들은 그리스도를 만나려고 멀리 수도원에 가지 않아도 된다.
금욕생활을 할 것도 없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구체적 사랑 안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당신들이 서로 만나는 순간,
벌거숭이 몸과 벌거숭이 마음으로 서로를 나누는 순간이,
하느님 앞에 벌거숭이로 서는 순간,
그분께 기도드리고 그분이 주시는 자유를 맛보는 순간이어야 한다.
서로 친밀하게 만나는 그 순간에 당신들은 위대한 신비 속으로,
당신들을 위해 존재하는 하느님이
당신들에게 바라시는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 from The Spiritual Family and the Natural Family,
리처드 로어의 `급진 은총` )
[ 몸의 영성 ]
인간이 되신 하느님, 하느님의 육화가
육체에 대한 힐데가르트의 사상을 결정적으로 규정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와 달리 힐데가르트는
하느님의 육화를 인간 원죄의 결과로 보지 않고
영원으로부터 결정된 것이라고 본다.
'이미 영원으로부터
그는 자신이 두르리라 생각한 살(육체)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이를 뜨겁게 사랑하였다.'(LDO 183)
인간이 되신 분이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였듯이
인간의 영혼 또한 자신의 육체를 그렇게 사랑하며 그린다.
창조의 세계 모든 것에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 있어
하느님의 모습을 비추어 주듯이 육체는 영혼을 비추어 준다.
'그러므로 창조는 지혜(곧 하느님)의 겉옷이고 ...
육체는 ... 영혼의 겉옷이다.'(LDO 278)
중세에 빈번히 인용되던 성 아오스딩의 위계적인 이분법.
곧 '육체-지상(현세)적인 원리'와 '영적-천상의 원리'를 구분하고
후자를 우위에 두면서
현대엔 입증할 수 없는 근거로 이를 성에까지 적용해서
남성을 여성의 우위에 두었던 내용:
'태초에 하느님의 뜻이 모든 피조물을 지배하시고
영적인 창조물을 육적인 창조물보다,
이성적인 것을 비이성적인 것보다,
천상의 것을 지상의 것보다,
남성을 여성보다,
부유한 이들을 필요한 이들보다 우위에 두셨다'
힐데가르트도 이 흐름에 따라 영혼을 우위에 두기는 하였지만
힐데가르트에게선 몸과 영혼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영혼은 수분이 온 나무에 젖어 흐르듯이 온 몸에 젖어 흐른다.
수액(樹液)이 나무를 푸르게 하고 꽃피우게 하고 열매맺게 하듯이...'(Sci. 133)
'영혼은 육체를 생기있게 하지만 육체는 영혼을 생기있게 하므로
영혼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또한 육체를 필요로 한다. ...
전반적으로
영혼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육체를 사랑하여 품어 안는다'(LDO 168)
그리고 힐데가르트는 최후의 심판 때에 육신이 부활한다는 것에서도
육신의 귀함을 인정하는 표현을 본다.
영혼이 육신을 그리워한다는 표현으로.
'영혼이 자기가 사랑했던 옷, 육신의 옷을 벗기웠기 때문이다.'
이 결합에 상응해서
질서 지워진 생활의 지침하에서도 육신이 멍에를 지지 않는다.
영혼과 조화있는 관계이다.
'영혼과 육신이 진정 서로 일치하여 지내면
그들은 단결된 기쁨 안에서 최고의 삯을 받는다.'(LDO 80)
영혼과 육신이 하나라는 힐데가르트의 강조는
실제로 자신이 이전에 겪은 심리적 신체질환에서 새겨져서 더 나아가
근대적인 그리스도교의 틀 안에서
육체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도록 하는 연결점으로서 기여한다.
인간의 육체에는 성(性)도 포함된다.
생식행위를 통해 원죄가 이어진다는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이 힐데가르트에게 부담이 되었지만
힐데가르트에게선
하느님께서 이성의 숨을 불어넣으셨다는
생기를 불어넣으셨다는 것이
몸 전체에도 관련이 된다.
'성기에서도 이성의 선물이 꽃핌으로써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은 성행위에서 기쁨도 느낄 수 있다.'(LDO 63)
전체 우주는 생명을 주는 '녹색 생명력'으로 맥이 뛴다.
힐데가르트는 이로부터 유추해서
'생식행위에 있어서의 녹색 생명력' 또한 알았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과 소명은 몸에서 읽을 수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면에서 포괄적인 인간의 위대함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몸을 잘 관찰하여야 한다. ( 힐데가르트의 생애 중 "몸의 영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