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3년 9월 9일
장소: 화순 보성일원
일정표
08:50 – 09:00 : 국립광주박물관 집합 및 출발
09:00 – 09:30 : 안중근 의사 동상 및 숭모비
09:30 – 10:40 : 서재필 기념공원 및 기념관
10:40 – 12:00 : 나철기념관
12:00 – 12:50 : 점심
12:50 – 13:40 : 보성여관(벌교)
13:40 – 14:40 : 김구선생 은거지
14:00 – 15:30 :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15:30 – 17:00 : 이한열, 정광호 생가터(능주)
17:00 – 18:00 : 광주 도착
보성여관 2층
백범 김구선생 은거 기념관- 민족의 큰스스이신 백범 선생께서 이곳을 찾으신 때는 1898년 5월(음) 이였다. 김두호라 칭한 23세의 젊은 선생은 김승묵(자-광언)댁에서 달포여를 머물며 동국역대(東國歷代)라는 국사책을 중심으로 시대상을 논하였다. 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인(日人)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치하포에서 일본인 쓰지다 중위를 죽이고 사형을 언도 받아 인천 감옥에서 복역 중 후일을 위해 탈옥을 감행하여 자신을 위해 삼남지방으로 내려오신 길이었다. 떠나실 때에야 '내가 일본 사람을 죽이고 피해 다닌다'는 말을 하고 동국역대 표지에 이별의 아쉬움을 '이별난'이라는 시를 남기고 '내가 죽지 않으면 연락을 하겠다'며 떠나셨다.
그후 40여성상을 생사도 알 수 없었던 터에 해방후 환국한 선생께서 1946년 가을 이곳을 찾으시어 옛날을 회상하시고 은혜에 감사하였고 가가호호에 대형 존영과 휘호 등을 하사하시어 지금껏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1990년에 주민들의 열화같은 호응과 보성군의 도움으로 은거비를 세웠으나 내용이 빈약했던 바 2006년에야 주민들의 숙원사업으로 은거기념관을 지을 것을건의하여 전라남도의 후원 및 서울백범선생기념사업회의 도움으로 기념관의 준공을 보게 되었다.
기념관내 백범 김구 선생 휘호
기념관내 백범 김구 선생 휘호
백범 김구 선생 은거가(隱居家)- 전남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쇠실마을
-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 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 꽃 한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기에 남겨두고 떠나네 이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 넷이 함께 놀이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 구나- 이별난 중에서
김구 선생이 사용했던 우물
화순 쌍봉사 대웅전-쌍봉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리산문(桐里山門)의 개산조 혜철(慧徹)이 839년(문성왕 1)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839년 이전에 쌍봉사가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855년에는 철감(澈鑒)선사가 이곳에서 선문을 개설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고 개산조가 되는데 이때 쌍봉사의 사세가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에는 혜조국사가 쌍봉사를 재건한 사실이 『쌍봉사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쌍봉사는 정유재란 때 대웅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불사가 소실되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1628년(인조 6)에 중건되었고, 1690년, 1724년에 중창이 있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웅전은 1984년에 신도의 부주의로 전소되어 보물 지정이 해제되었고, 1986년에 복원되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1984년에 소실된 후 1986년에 원형대로 복원한 건물이다. 비록 보물에서 해제되었지만 이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 탑파의 형식의 희귀한 건물로 목조 탑파 양식 연구에 있어 중요한 건축이다. 또한 내부는 불상을 모시고 불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 17세기 목탑의 내부공간의 활용과 그에 따른 구조의 변화를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