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5일 (목요일) 흐리고 오후에 비 사우스 햄톤(South hampton NS) 산지와 농가를 주변에 두고 왼편으로 황토 빛 물 빛의 대서양 해안을 끼고 인적이 드문 시골길이 이어졌다. 간만의 차이가 전 세계에서 제일 심한 곳이라는 길옆의 안내문이 눈길을 끌었다. 지난밤 잠을 설친 탓인지 몸의 피로가 풀리질 않았다. 또 한 가지 출발하기 전에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을 겪게 되면서 피로가 가중되었다. 도로의 배수를 위해 설계된 노견의 경사로 인해 몸의 중심이 오른쪽으로 쏠리면서 오른쪽 다리에 무리를 가져오게 했다. 특히 오른쪽 옆 발바닥부분의 고통이 심해졌다. 오후가 되자 비바람이 몰아쳤다. 당황한 나는 지도에서 지름길을 찾아 그 길을 따라 나아갔다. 하지만 그 길도 반쯤 전진했을 때 비포장 진흙 길로 변했다. 출발 후 처음 겪는 악전 고투의 여정이었다. 찬비를 맞아 몸이 춥고 떨리려 감기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마침 도착한 길옆 모텔에 일찍 여정을 풀었다. 밤이 되었으나 발바닥이 무엇에 맞은 것처럼 열이 나며 아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일은 횡단 첫 번째 주인 노바스코샤주를 벗어나게 된다. 6월6일 금요일 흐리고 비 색 빌(Sackville NB) 할리팍스를 떠난 지 닷새 째 날로 한국에선 오늘(서울은 이곳보다 13시간 앞서가니까 이 시간 그곳은 밤이지만)이 현충일이다. 모텔을 떠날 때부터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 비는 기분을 우울하게 했다. 정오 무렵 엘름허스트(Elmhurst)라는 도시 입구에 도착할 즈음 경찰 순찰차가 다가와 길을 안내했다. 로버트(Robert)라는 젊은 경찰이 우리의 앞에서 차선 하나를 차지한 채 도시로 들어서자 지나가던 차량들이 손을 흔들고 경적(응원 또는 축하하는 의미)을 울려 우리를 환영하여 주었다. 그들의 환영을 받으며 나는 자신이 약간 흥분해 있음을 알아 차렸고 사람들에게 환영받기 위해 걷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이내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도시를 벗어나 2번 대륙횡단 고속도로에 진입하자 뉴브런스윅 주로 바뀌면서 이제까지 금방 나를 위해 포장한 것 같은 넓은 도로가 펼쳐졌다. 뉴브런스윅 주는 고속도로 옆 통행을 미리 허가 받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걸을 수 있었다. 탁 트인 새로 포장한 고속도로, 너무나 좋은 기분에 오랜만에 마음껏 걸었다. 대륙 횡단을 시작한지 처음으로 하루에 70km를 걸었다. 그러나 이날의 무리한 도전이 그후 약 열흘간 나를 고통의 늪으로 빠져들게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오전에 투루로 신문사(Truro Daily)의 수잔(Susan)이라는 기자와 암헐스트(Amherst)지의 도일(Doyle)이라는 기자가 우리의 모금횡단에 대하여 취재를 했다. 하이웨이에서 우리들에게 손을 흔들거나 경적을 울리며 지나가는 차량이 눈에 띄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손바닥이 빨간 고무로 된 한국산 작업용 면장갑을 낀 손을 열심히 그들을 향해 흔들며 걸었다. 우리의 행진에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기대 하면서. 빨간 색 장갑은 사랑과 통일을 의미하는 우리 캠페인의 마스코트다. 저녁에 몽톤(Moncton)에서 태권도 사범이며 주 한인회장인 정원갑씨가 우리의 도착 환영행사를 준비하고 있다며 일정에 대한 문의전화를 해 왔다. 해가 질 무렵 몽톤에 도착한 우리는 변두리의 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6월7일 토요일 맑음 몽톤(Monction NB) 정오쯤 되어서 모텔로 정원갑씨가 우리를 찾아왔다. 뉴브런스윅주의 전 교민 20가구 중 대부분이 오랜만에 공원에 모여 야유회 겸 우리를 휘한 환영 식을 벌일 계획이라고 했다. 우리가 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센 존(St John)에서 오기로 한 태권도 사범을 제외하고 모두 도착해 있었다. 6월 초였지만 날씨는 아직도 불어오는 바람에 냉기를 느낄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현지의 개업의사인 Dr. 박의 집으로 자리를 옮겨 풍성한 저녁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대한민국 크기의 주에 흩어져 사는 그들이었지만 서로의 정만큼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 보였다. 이곳에서 내가 사는 토론토까지의 거리는 1500km,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 인줄 알았는데 식사 후 대화에서 토론토에 사는 그분들의 친지 또는 친구들과 나 또한 구면임을 알고 세상이 얼마나 좁은지 내심 놀라고 말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우리는 정원갑씨 댁으로 돌아왔다. 프랑스계 백인인 그의 아내는 두 아들과 함께 친정 집 방문중이었다. 오랜만에 보내는 즐거운 하루였다. 6월8일 일요일 맑음 힐스보로(Hillsborough) 출발 후 처음 맞는 일요일 아침 9시30분, 나와 박완씨는 Dr. 박이 나가는 현지 백인교회에 가기 위해 정 사범 집을 나섰다. 교회에 도착하여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유색 인종이라곤 우리뿐, 영국계 신자들 뿐 이었다. 전에 S. Africa에서 사역하시다 오신 목사님이 갈라디아서 5장22-26절 말씀을 가지고 설교하셨다. 예배 후 몽톤 연방결찰(Moncton RCMP)건물 앞에서 시가 행진을 시작하였다. 몽톤은 할리팍스를 지나 처음 도착하는 인구 20만 이상 되는 대도시였다. 연방경찰 차량 두 대가 앞뒤에 서고 나와 30여명정도 되는 정사범의 태권도 문하생들, 그리고 교민들이 도심을 행진하며 길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모금에 동참 할 것을 호소하였다. 현지 언론(Atlantic TV 등)에서는 우리의 캠페인과 시가 행진에 대하여 보도를 하였다. 알렉스(Alex Vass)라는 인디안 혈통의 기자는 북한사정에 대한 나의 설명과 횡단계획에 대하여 들은 후 장시간 동안 아주 자세하게 취재를 하였다. 카메라를 들이대고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라 여간 긴장이 되지를 않았다. 알렉스의 얼굴이 우리와 닮아서 인지 생소한 느낌은 들지는 않았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우리의 목적과 이 운동의 취지를 가능한 한 명확하고 간결하게 영어로 전달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일요일 오후 거리의 인파를 지나 우리는 십여km 행진하여 몽톤 시내를 벗어났다. 함께 행진하던 그들은 가고 나와 박완씨는 다음 도시에서의 모금 캠페인을 위해 고속도로를 향하여 길을 재촉했다. 연방경찰의 크루져(Cruiser) 두 대는 우리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 길게 사이렌을 울리며 그제서야 우리와 작별을 하고 돌아갔다. 부디 횡단에 성공하라는 격려이겠지. 나는 꼭 성공하리라. 이제까지 캐나다 역사상 아무도 해낸 적이 없는 도보 대륙횡단을 꼭 이루리라 다시 한번 결심을 하였다. 고속도로에서는 지나가는 차량들 특히 대형 트레일러들이 경적을 울리며 우리를 응원하였다. 이후로 나는 고속도로를 지나는 대형 트레일러들의 뱃고동 소리와도 같은 경적소리의 응원을 수없이 듣게 되며 특히 적막한 들판이나 산중을 지날 때 그들의 경적소리는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처음에는 옆을 지나가며 갑자기 울리는 경적소리에 놀라 넋을 잃을 뻔했지만 차츰 익숙해지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조우하는 그들과 자연 친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자의 차량에 무전 통신장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의 행진에 대해 쉽게 이해하게 된 것 같았다. 처음에는 대형차량을 몰고 나의 옆을 100km이상의 속도로 달리는 그들이 무섭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들이 나의 행진목적을 알고부터는 우리의 옆을 지나갈 때 가급적 옆 차선을 이용하여 지나가려고 노력하는 것을 보고 그들이 무섭다기 보다는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캐나다의 동부도시는 대부분 인심이 좋다는 인상을 주었다. 해질 무렵 도로 옆 싸구려 모텔 (Motel Sussex)에 여장을 풀었다. 아직도 밤에는 춥고 바람이 불어 텐트를 치고 자기에는 이른 느낌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도 뉴브런스윅주를 지날 때 트루로(Trulo) 근처 농가 앞뜰에서 텐트치고 자던 기억이 악몽처럼 되살아나 텐트칠 용기가 나질 않았다. 6월9일 월요일 맑음 아침 8시경 모텔을 나왔다. 지난 밤 늦게까지 모텔 옆 자동차 경주장에서 나는 붕붕대는 소리와 오른쪽 발의 고통 때문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탓인지 몸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도로가 왕복 2차선으로 바뀌면서 노견 또한 비포장으로 변하였다. 흙 길을 걷는 것은 아스팔트보다 훨씬 힘이 많이 들고 속도도 나지 않는다. 더욱이 그 좁은 길에 대형차량이 지나갈 때면 바람에 밀려 도로 밖으로 밀려나곤 했다. 흙 길을 피해 도로 옆으로 20-30cm쯤 나와 있는 포장된 노변을 이용했는데 경사로 인해 몸의 무게가 오른 발 쪽으로 쏠리면서 오른발바닥 옆 부분이 다시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경사진 노견으로 인해 오른쪽 다리가 몸무게 지탱을 위해 굵어지고 약간 길어지는 기현상을 나타냈다. 오후가 되면 아침나절과 달리 피로로 인해 타박거리면서 걷게 되는데 그 충격으로 인해 밤이면 두발이 화상이라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아파 잠을 못 이루게 되고 그 후유증은 다음날로 이어져 피로는 가중되어만 갔다. 오전 중에는 아름다운 강과 산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뉴브런스윅의 경치를 보면서 고통을 이겨 나갈 수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강과 무성한 숲은 몇 년 전 보았던 스위스의 농촌풍경과 너무나 흡사했다. 시간이 허락된다면 며칠동안 텐트치고 천렵하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 그냥 지나가기에 너무 아까운 곳이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 말할 힘도 없이 지쳐 머리의 무게마저도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고개를 떨군 채 길바닥을 보면서 걸어야 했다. 저녁 8시경 도로 옆 소나무 숲 속에 있는 모텔(Pine corn Motel)에 도착하였다. 주인은 나를 보자 어제저녁 TV에서 보았는데 베트남 돕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자신 있게 물었다. 어이가 없었다. 그들의 관심사는 굶어 죽어 가는 북한 주민이 아니고 나의 대륙횡단이 아닌가 싶었다. 이렇게 관심 밖에서 죽어가고 있는 불쌍한 북한 동포들, 천인 공노할 파라오의 죄 값을 대신 치루는 속죄양이 아닌가! 그들을 한 명이라도 구해 보고자 무작정 나섰지만 어디에 가나 답답한 마음뿐이다. 오늘도 숙박비를 깍기 위한 노력이 계속됐고 TV덕분에 반값에 투숙할 수가 있었다. 저녁식사 후 10시경 자리에 누었으나 오른발이 아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밤새 발에 화상 입은 것처럼 화끈거려 이불밖에 내놓고 자다가 무언가에 스치면 아픔으로 놀라 깨곤 하였다. 6월 10일 화요일 무더운 날씨 어제 몽톤 시가 행진 때문에 걷지 못한 것을 보충하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하여 오후 1시경에는 벌써 40Km를 지나왔다. 고속도로 옆에 주차하고 점심을 먹고 있을 때 출발 전 사고로 인해 차량을 전부 잃은 후 그대 책을 위해 힘써오던 토론토의 서병수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우리가 사고 후 잠자리와 식사 문제로 고생한다는 신문보도를 접한 한 교민이 그의 81년형 FORD캠퍼(Camper-캠핑용으로 개조하여 침실 및 주방시설이 되어있는 차량)를 빌려주겠다는 제의를 해 왔다는 것이다. 사고 후 차량의 보험 처리가 되지 않아 자금 문제로 다시 차량을 구입할 수 없어 고심하던 우리에게는 정말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 요즈음에는 하루 일정을 잡기가 무척 어려운 상황이었다. 날씨로 인해 도로 옆에 텐트를 칠 수도 없고 어쩌다 있는 모텔까지 찾아 가야하니 무리가 따르게 마련이고 그로 인해 다리의 아픔은 점점 심해 가기만 했다. 오후에는 많은 전화가 왔다. 다음에 도착할 뉴브런스윅의 주도 후레드릭톤(Fredrickton)에 있는 국영방송(CBC)의 리챠드(Richard)기자로부터 취재전화, 마니토바주의 위니펙에 있는 우리의 유일한 후원기관인 카나다 곡물은행의 연락 담당자 트리쉬 조단(Trish Jordan)의 우리의 일정에 관한 질문 그 외 몇몇 안부 전화 등으로 인하여 걷다 멈추는 상황이 계속 되어 오늘의 목적지까지 갈 수 있을까 염려되었다. 나의 사정이야 어쨌든 내일 오후 1시까지 주도의 시청에 도착하여 그곳의 유일한 교민인 김승래씨와 신문기자 그리고 시청관계자와 만나기로 되어 있다. 벌써 오후3시, 이 곳에서 오늘 목적지까지는 아직도20Km나 남았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1948년 퀘백주에 천주교 사제로 오셔서 지금은 은퇴하셨다는 캐나다 이민 1호쯤 되시는 할아버지께서 몽톤으로 부터 우리 일이 궁금하다며 찾아 와 우리를 발견하시고 10불을 기증하시며 눈물을 글썽이셨다. 이곳에 혈육이 없다는 그는 우리가 잘 가고 있음을확인하고 성금으로 10불을 내고는 마음이 놓이는지 부디 성공을 빈다며 쓸쓸히 돌아갔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고 다시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조국은 그를 잊었는지 모르지만 캐나다에 온 후 한시도 한국을 잊어보지 못했다는 그의 말에서 조국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과 민족통일에의 깊은 염원을 읽을 수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 셔휠드( Shefield)에 도착, 강가에 있는 식당을 겸한 그곳의 유일한 모텔(Motel Sunset)의 사무실을 찿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몇 명의 작업복 차림의 사내들이 나의 희한한 옷차림(하얀 모시적삼을 연상케 하는 자외선 차단복)에 시선을 모았다. 나는 손을 흔들며 먼저 그들에게 하이! 가이스(Hi! guys)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중의 하나가 도로공사 현장을 지나가는 나를 보았다며 구면인 듯, 왜 걷느냐고 물었다. 나의 설명에 그는 차를 타고도 뱅쿠버까지 가보지 못했는데 걸어서 그곳까지 간다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부정적인 눈으로 나를 보았다. 옆의 카운터에는 군복 윗도리에 계급장 달린 모자를 쓰고있어 한눈에 제대 군인임을 짐작케 하는 웨인(Wayne)이라는 주인이 나에게 방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는 나의 대답에 오늘은 방이 없으니 좀 더 가보라고 하였다. 날이 저물고 지쳐있어 더 갈 수 없다고 하자 그는 치우지 않은 구석방이 하나 있다며 그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도로공사 일을 하던 사람들이 묵었던 곳인지 지저분했지만 샤워와 두 개의 침대가 있었다. 우리가 묵어가기에는 텐트속보다 훨씬 나은 편이었다. 더구나 우리가 원한다면 방 값은 후리(Free,안 받겠다는 뜻)라며 시골 인심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숙박비를 절약하게되어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주인에게 보답하는 뜻으로 오랜만에 외식을 하기로 결정했다. 저녁노을 지는 강촌의 주막에서 주인 웨인이 손수 만든 스파게티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무료숙박까지 하며 모처럼 즐겁게 쉴 수 있었다. 6월 11일 수요일 맑음 강물 위에 떠있는 안개가 찬란한 아침 햇살을 받으며 공중을 향해 피어오르는 셔휠드(Sheffield)를 8시경 출발하여 후레드릭톤(Fredriction)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길옆 이정표에는 그곳까지의 거리가 15km남아 있음을 가리키고 있었다. 정오 경 그곳 시청 앞에서 신문 기자들과 인터뷰 약속이 있었다. 앞으로 그곳까지는 4시간,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15km를 왔다고 생각한 지점은 도시의 입구에 불과했다. 남은 시간은 30여분, 이정표가 가리키는 곳이 도시의 입구이며 시청은 8km를 더가야 한다는 사실을 안 나는 약속시간을 지키기 위해 그때부터 뛰기 시작했다. 그때 경찰차량이 나타나서 시청 앞까지 안내해주어 약속시간 보다 30분 늦게 시청 앞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주 정부에 근무하는 그곳의 유일한 교민 김성래씨를 만날 수 있었다. 그의 주선으로 그곳에서도 2대의 연방 경찰 차량의 안내를 받으며 시가 행진을 했다. 백인들만의 도시에서 동양사람이 상대적인 희소가치를 부여받으면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가행진 후 도시를 벗어나 우리의 진행방향으로 십여 킬로 떨어진 김성래씨의 집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화창한 6월의 긴 햇살을 받으며 커다란 뒤 뜰 잔디밭에 저녁식탁을 차린 그는 불에 구운 햄버거를 내 왔다. 한국에서 온 여행객 일가족도 우리의 식사에 초대되어 그들로부터 오랜만에 직접 고국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식사 후 우리는 걱정거리인 빨래와 목욕 문제까지 시원하게 해결하고 밤늦도록 낮선 땅에서 고국의 이야기를 하다 자정이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6월 12일(목요일)맑은 후 비 우드스탁(Wood Stock) 어제 거리 계산의 착오로 8km정도를 뛰어서인지 아침부터 온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특히 그 동안 나를 괴롭혀 오던 오른쪽 발의 고통이 더욱 심했다. 마치 발바닥에 바늘이라도 들어가 있는 것처럼 걸을 때면 찌르는 듯이 아팠다. 걷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어제 무리하여 뛴 것을 후회했다. 비로소 먼 길을 가는데 또 하나 주의 사항을 알게 되었다. 무리는 절대 금물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무리는 내일의 고통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정상 오후부터는 내리는 비를 맞으며 또 무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날저녁 강가의 모텔에 도착하였을 즈음에 나는 다시 때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그 동안 나의 수 많은 치료 노력에도 낫지 않던 오른쪽 발의 아픔이 극에 달했다. 이제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심해졌다. 아니 온몸의 어느 곳을 만져도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겨우 12일을 걸었을 뿐인데. 교통사고 이후 다시 나의 계획이 중대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내일 아침에도 오늘 같은 고통이 계속된다면 할 수 없이 행진을 중단하고 토론토에 돌아가 치료를 해야겠다고 결정했으나 돌아온 나를 보고 실망할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이 계획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 고통을 낫게 해달라고. 6월 13일 금요일 비온 후 맑음 비치우드(Beechwood)모텔 창 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에 새벽잠을 깬 나는 우선 침대에서 일어나 방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발의 아픈 정도를 시험하기 위해서 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심하던 발의 고통이 얼마간 좋아져 있었다. 기도로 병을 고쳤다더니 이런 것이 아닌가 반신반의하며 아침식사 후 길을 떠났다. 늘 그런 것처럼 출발 후 온몸이 다시 아파 왔으나 한 시간쯤 지나 웜업(Warm up)이 되고 나서부터는 발의 고통이 사라져 갔다. 오후가 되자 말할 수 없던 오른발의 고통이 흔적도 없이 사라 졌다. 마치 밤사이에 누가 나의 발 속에 있던 그 바늘을 빼버린 것처럼. 난생 처음 하나님의 치유를 경험한 나는 감사한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길을 재촉했다. 이제까지 아픔으로 늦어졌던 일정을 다시 맞춰야 하기 때문이다. 점심때가 지나자 비가 개이면서 이제까지 입고 오던 우비를 벗을 수 있었다. 비오는 날은 화창한 날에 비해 훨씬 걷기가 어렵다. 왜냐하면 비가 오면 우비를 입어야 하는데 걷다보면 우비 속은 완전 찜통으로 변해 땀으로 범벅이 되고 그 땀으로 인해 온몸이 쓰리고 아프기 때문이다. 하틀랜드(Heartland)에 있는 고속도로 옆 휴게실에 도착하여 가판대 옆 신문을 보니 한 면에 우리의 기사와 사진이 실려 있었다. 기사를 보며 적지 않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곳은 세계에서 제일 긴 지붕 달린 다리가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가게 주인은 자랑을 하더니 나를 보며 시간 있으면 꼭 지나가 보도록 당부를 했다. 신문에 난 기사 덕분으로 고속도로를 오고가는 차량의 반응이 참으로 좋았다. 그러나 해질 무렵에는 여전히 숙소를 구하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우리가 원하는 곳에 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토론토에서 준비중인 캠퍼가 빨리 도착해야 형편이 나아지겠다. 오늘은 주위의 경치가 좋았고 발의 고통이 사라져 즐거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칠 수 있었다. 나의 고통에 찬 모습을 지켜보던 박완씨의 고통 또한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다. 나의 밝은 표정을 보는 그의 모습도 한층 가벼워져 있었다. 퀘백주가 가까워지면서 점점 불어를 쓰는 사람이 많아져 의사소통이 걱정되었다. 6월14일(토요일)맑음. 뉴브런스윅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을 가지고 있다. 깊은 강과 높은 산이 잘 어우러져 가는 곳곳마다 그림 같은 풍경이 펼쳐지곤 했다. 고속도로의 다리들이 높게 설치되어 있어 밑의 강물을 쳐다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푸른 숲과 강물이 자연 그대로 잘 보존이 되어 있었다.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좀 여유를 갖고 길을 걸을 수 있게 된 나는 좀더 효과적으로 걷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연구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50km를 간다면 대륙 횡단에 140일, 거의 5개월간을 도로상에서 보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록키를 지날 10월 말 경에는 겨울 날씨가 되어버려 도보로 갈 수가 없게 된다. 어쨌든 속도를 더 내어 10월 이전에 횡단을 끝마쳐야 했다. 나름대로 걷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속도를 내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문제 해결이 필수적이었다. 첫째 몸무게를 어떻게 분산할 것인가? 두 번째 발에 무리를 덜 주는 방법은 무엇인가? 세 번째, 걷는 속도는 얼마가 가장 적당할 것인가? 문제 해결을 위해 여러 방법을 동원하며 때로는 우스꽝스런 모습으로 하루종일 실습을 하였다. 오후에는 토론토로부터 캠퍼의 수리가 완료되어, 이틀후인 월요일에 우리에게 인도된다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이제야 숙식 걱정 없이 본격적으로 횡단을 하게 될 것 같다. 그랜 훨(Grand Fall)을 지날 때에는 모처럼 길옆에 차를 세우고 잠시 폭포의 물줄기를 바라보며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아! 즐거운 하루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