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년대 순천시 왕조동(Ⅱ)
순천실고는 남녀공학이었고 실고 뒤로 우리집을 행정구역상 품고 있는 본동네 운동이 자리했다.
아마도 지금 기억나는 것은 순천실고 울타리가 탱자나무였던 것같다.
순천실고 정문 앞에서는 형철이 작은 형님댁이 전빵을 봤었다.유동밭 옆에도 외딴 집이 있었고
그 집뒤에 지금은 동산여중이 있는 곳에는 작은 야산이 있었는데 그 곳에서 시제를 모시는
박씨 문중 산소가 있었고 가을에 시제를 모실 때면 애들이 바글바글 꼬였다.
제사가 끝나면 석작에 담아온 떡을 나눠주는데 그 인절미 한쪽을 땟국물 꼬질꼬질한 손으로
받아 들고 집으로 달려와 식구들과 나눠먹었던 기억이 난다.
배고픈 시절이었음에도 그 때는 가족과 나눠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했었다.
특히 누나들은 먹을 것이 있으면 본인은 안먹고 남동생들에게 챙겨다 주는
엄마 같은 행동을 많이 했던 것같다.
순천실고 정문과 마주한
길은 왼쪽으로 담을 따라
쭈욱 연결이 되는데
신대,왕지,현남을 거쳐
대동까지 연결됐다.
실고 뒤에도 방앗간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동창 이창규 아버지인 나의 당숙이 운영하셨다.
방앗간 옆에는 ‘스피카집’
이라 불리는 지금으로
말하면 유선방송 케이블 티브이 지점이 있었다.
60년대 순천여고생-미스코리아 진을 배출하여 '순천서 인물자랑 말라'는
말이 생겼다.
그 때는 라디오 있는 집도 드물어 집집마다 유선으로 연결된 스피커를 달아주고
그곳에서 라디오를 틀어주면 가가호호 그 방송을 들었다.당연히 채널 선택권은 없었다.
스피커집에서 일단 동네가 끝나고 길 양 옆으로는 밭이 있었는데 주로 목화나 콩,참깨밭이었다.
물론 그 사이사이로 여름 무우를 뿌려 열무로 시장에 내다 팔아 애들 학비를 충당했다.
전라도 말로 콩밭
무시와 미영밭 무시였는데 우리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콩밭 무시(무우)가 좀 더 매워서 값이 싸다고 했다.노르스름한 목화꽃은 예쁘기도 하지만 그 결실인 어린 다래를 따 발라 먹으면
아주 맛이 좋았다.우리가 맛있게 먹었던 그 알맹이는 크면 무명실을 뽑아내거나 따뜻하게
이불에 넣을 솜이 될 것인데 익기도 전에 우리가 따 먹어버리니 밭 주인은 환장할 노릇 아닌가.
목화밭 속에서 주인이 밭매고 있는 것을 모르고 습관적으로 다래를 따먹다가 혼쭐이 난 적도 있다.
한 참을 걸어가면 신대촌이라 불렀던 신대가 나온다.운동에서 신대를 가는 도로 서쪽편으로
꽤 떨어진 곳에 대밭과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 쌓인듯한 큰동네 신월이 있다.
실고 담장을 따라 난 샛길을 따라가면 밭 가운데 고인돌 군 사이로 들길이 나 있는데
그곳을 따라가도 신월 동네 뒤쪽으로 들어가게된다.
신월에는 나에게는 큰당숙 집이자 작은 할아버지댁이 있었고 그 곳에는 이정숙이라는 동창이자
나에게는 누나가 살았다.
신월은 박씨 집성촌이라 우리 동창들도 대개 박씨가 많다.모두 친척일게다.
박병기,박병수,박진근,박명숙등.그리고 주경돈,유중기.유영란인가도 있었고 키가 컷던
여자동창도 생각이 난다.신월 앞으로 수리조합 농수로가 나 있는데 그 농수로만 우리 집에 갈 수
있었다.
순천실고쪽으로 신월동네 끝이자 우리 할아버지댁과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순동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생목 사는 남자 신자는 그곳에 밤기도를 다닐 때면
벽돌공장 뒤쪽을 지날 때에는 공포를 이기느라 목청껏 찬송가를 불렀다고 한다.
보편화된 무료 노력 봉사 울력-공동 작업/새마을 운동의기초가 되었다.
"농자 천하지 대본 시절"의 풍속도-대통령도 모내기 봉사를 하였다.조선시대때 왕도 그랬다.우리 국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킨 '통일벼'-하지만 조국 근대화로 잘살게 되자 미질이 좋지않대서 통일벼는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박명숙의 아버지는우리 왕조동 살림을 맡아 하시는 동장님이셨다.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때라서 요즘처럼 국가에서 비싸게 보상해주는 것이 아니었고
나라에 또는 동네에 희사를 하는 식으로 도로 확장이나 개설에 필요한 땅을 확보했다.
기껏해야 땅 희사자를 현장에서 사진을 찍어 동네 게시판에 칭찬과 함께 게시를 해 준다거나
좀 많이 희사한 사람은 시장이나 군수 표창장을 주어 무마했다.
당시에는 시장 군수 표창을 받는 것도 가문의 영광 쯤으로 생각했었다.
우리집은 광양가는 길에서 운동을 거쳐 현남 대동까지 연결된 도로가 갈라지는 지점이었기에
순천실고에서 나오는 차량의 시야를 가릴 수밖에 없어 대문에서 아랫채 몇미터를 헐어
도로로 편입시키자는 요청을 해 왔다.
도로변 순천 시의 땅값은 돈이 귀하던 당시에도 꽤나 비쌌다.그런 땅을 공짜로 희사할 수가 없었고 시야를 가리지않는다는 논리를 세워 도면까지 첨부한 민원을 넣었더니 동장님이 직접 나오셨다.
“참 똑똑한 아들을 두셨어요”하면서 자식을 둔 부모의 맘을 십분 활용하시더니
결국 아버지를 설득하시어 당신이 뜻하신 대로 밀어붙였다.
몇마디 얘기도 못하신 아버님은 답답하신듯 머리맘 긁으시다가 허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명숙이 아버님이신 박치근 동장님을 알게 됐다.우리나라를 ‘한강의 기적’이라고
세계인이 놀랄만큼 최단기간에 중진국 반열에 올려놓았던
새마을 운동을 추진하는 현장 지도자로서 동장님은 매우 열정적이셨고 능동적이셨다.
우리 논은 신월 앞을 지나 조례저수지 밑에 하나 있었고 또 하나는 복숭밭 아래에 하나 있었기에
신월은 우리 동네인 운동보다 더 자주 갔고 그래서 훤하다.
어떤 논에를 가던지 신월 앞 마을회관에서 냇가 쪽으로 가 빨래터인 그 시냇물을 건너야 했다.
우리 논 위에는 조례 살았고 우리 조례국민학교 수재로 평가 받았던 광만이네 논이 있었다.
그런데 난 논에서 광만이를 본 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항상 그곳에는 광만이 누나(한 때 조례학교에서 급사를 했었던 걸로 기억 함)와 부모님이 있었고
아주 가끔 남동생 도만이가 나와서 도왔다.
반면 난 시험을 내일 본다 해도 농번기에는 여지없이 끌려나가 일을 해야만 했다.
고등학교 다니는 형은 아무리 바빠도 공부를 핑계로 논에 나와 본 적이 없는데
난 항상 끌려 나가야 했다.사실 나도 공부한다고 뗑깡 부렸으면 안나가도 됐겠지만
당시 어린 맘으로도 맘이 약해서 고생하는 부모님을 도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느 집이고 부모님들은 큰아들 장남에게 모든 것을 바친 것같다.
도만이와 난 차남이라 동병상련 입장에서 차남의 서러움을 공감할 것같다.
광만이 어머니는 자그마한분이셨는데 무지 똑똑하고 야무져 보였고 광만이 아버지는 키도 좀
크시고 말씀이 별로 없으신 분이였다.광만이는 어머니를 도만이는 아버지를 닮았다는 생각이다.
농번기에는 고양이 손도 빌려야 했다.당시 농사는 온가족이 모두 붙어서 해야 했다.
새참 날르는 어머니
신대촌이라 불렸던 신대마을 초입에서 신월로 들어가는 차로가 나 있다.
삼거리인 것이다.차가 다니는 길이라기보다 구루마(수례)가 다니기 위해 넓혀놓은 길일 것이다.
그 삼거리에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고 자연석에 흰 페인트 칠을 하여 네잎 클로버 무늬에
4H 마크를 그려 넣은 입석이 있었다.당시엔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었고 대부분 농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가난한 시절이라 4H라는 조직이 활성화됐던 것같다.
덴마크의 농민 계몽가 달가스가 주창했던 운동이라 배운 것같다.
삼거리에서 신월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가면 신월 초입 좌측에는 6학년때 우리 담임이셨던
정관성 선생님의 포도밭이 있었다.깡마른 얼굴에 글쓰기를 좋아하셔서 문학가이기를 원했던
선생님은 목가적인 전원생활을 좋아했던 것같다.
그곳에 초막을 짓고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도 갖고 땀 흘려 농사도 짓고 우리네 봉급쟁이들의
공통된 말년의 꿈이 아니던가.
당시 부부교사셨던 선생님의 재정상태가 좋았던가 보다.그래서였는지 내가 인천에 근무할 때도
우리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자전거에서 내려 한참 동안 내 안부를 묻고 얘기를 나누셨다고 했다.
하지만 난 공군제복을 입고 인제동 댁을 찾아간 것을 끝으로 연락을 끊었었다.
신대 마을은 지대가 높아 집들이 불규칙하게 띄엄띄엄 있었던 기억이다.
박명숙 아버지가 동장이셨던 왕조동사무소가 있는 곳 옆에 우리 형하고 또래였던 장현종이라는
형님네가 산아래 제각처럼 생긴 곳에 있었고 동사무소 옆에는 당시 시내버스였던 밤색 합승의
종점이어서 꽤 넓은 광장이 있었다.
그 부근에는 우리학교에서 엄마가 매점을 운영하셨던 우창규네 집이 있었다.
서순귀라는 착한 친구도 신대 살았는데 지금은 어디 사는지.당시는 어려서 잘 몰랐지만
지금 생각하면 사회생활을 잘 할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기억된다.
동사무소를 지나면 셋째 당숙이 막걸리 대리점을 했던 가게가 있고
길 아래쪽으로 탱자나무 울타리의 초가가 있었는데 그곳에서는 3대가 함께 살았는데
보기드문 펌프가 있어 저수지 밑의 논에서 일을 할 때면 그곳에서 물을 받아갔던 기억이 있다.
성씨는 모르지만 그 집 꼬마 이름이 창선이었다.
그 집을 좀 더 지나면 작은 들판이 나오고 조례저수지가 나온다.
저수지 가에는 집 한 채가 있었는데 소아마비로 다리를 절었던 나보다 몇 살 위의 형이
신문배달을 하며 살았다.철없던 시절이라 또래 애들이 그 형이 지나가면 한 손을 꼬고 다리를 끌면서 “동아일보 보요?”라면서 흉내를 내며 놀리던 생각이 난다.
조례저수지에서는 해마다 사람이 빠져 죽었다.
순천실고 교감(?)을 아버지로 둔 성기인이라는 인기좋은 여학생이 우리 동창이었다.
어느 해던가 성기인 삼촌 두 명이 조례저수지를 건너는 수영을 하다가 한 사람이 빠져 죽었고
그 시체를 찾기위해 제주도에서 해녀를 데려올 정도로 며칠을 찾으며 왕조동을 물론
순천시가 떠들썩했던 사건이 있었다.
예상과는 달리 얕은 쪽에서 일반인의 발에 걸려 시체를 찾아냈는데 부패하여 형체를 겨우 알아볼
정도였는데 찾기전에는 ‘시체에 큰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해녀가 그냥 올라왔다”는 등
괴소문이 퍼지기도 했던 사건이었다.
어린 내 눈에는 저수지가 아주 컷고 수문쪽에서 밥알을 낚시에 끼워 피라미를 낚았고
모래 밭에서 갱조개(재첩)를 잡기도 했다.난 낚시를 좋아했는데 어머니는 아주 싫어하셨다.
나중에 커서 어중잽이가 된다며 한 두 번 야단치신 게 아니다.
난 장줄낚시도 구비하여 슛대로 멀리 던져 방울 달린 종과 구두약 뚜껑으로 만든 봉을 달아두면
큰 고기가 물리는데 잉어는 뜰채가 없어 큰 고기를 몇 번 놓쳤으나 월척(30센티가 넘어야
월척이라 함) 붕어 한 마리를 잡아 어머니께 약재로 상납한 기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때로 기억된다.조례저수지에 물을 뺄 때면 도처에서 어른들이 몰려와 고기를 잡았는데 긴 봉으로 바닦을 긁어 뱀장어를 잡던 아저씨가 생각이 난다.
조례저수지는 당시 문화혜택을 전혀 받지 못했던 시골 사람들에게 밤을 빌어 영화를 상영해 주는
노천극장으로 방죽을 내 주기도 했다.영화 상영이 있는 날에는 인근 마을을 돌면서
‘문화공보부’라고 씌여진 미니버스가 스피커를 달고 사람을 모으러 다녔다.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왕조동민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로 시작되는 멘트인데
순만이 정근이가 학교에서 흉내를 냈던 생각이 난다.저수지 둑 중간에다 긴 장대를 양쪽에 밖고
흰 무명천을 펼쳐 묶으면 대형 스크린이 되고 스크린 양쪽에서 많은 사람들이 본다.
돈 없어 영화구경 못하는 남녀노소 가난한 농민들이 바글바글 하게 모인다.
그 때 봤던 영화가 박노식 주연의 “소장수”,당시 전 국민을 울렸던 윤복이의 실화인
“저하늘에도 슬픔이”등이었다.당시에는 모두들 순박하고 감정이 풍부하여 울기도 많이 울었고
정의가 이기면 너나 할 것없이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면서 응원을 했다.
조례저수지에서 영화를 하면 조례초등학교 다니는 동네 중 광양가는 길 윗쪽은 다 온다.
물론 아랫쪽 대석 사람들도 왔다.
조례저수지 둑방에서 저녁에 상영해 준 무료영화
당시 유행한 나이롱 극장---지금 유식한 말로 국극.창극.
그 때는 주로 '만병통치약'을 팔았다.
난 최근까지 “음곡”으로 알았던 운곡을 비롯.범암,비봉,현남,대동은 볼일이 없어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다만 낚시하러 대동 저수지에는 한 번 가 봤다.중학교 때,,
조례마을에는 한두번 가 봤지만 그 너머에 있는 두지마을도 가 본 적이 없다.
두지에 우리 동창이 가장 많이 살았었는데…다만 두지와 범암사이 들판에 우리 논이 하나 있어
아버지 따라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곳엔 우리 동창 이병오네 집이 있었고 우리 아버지는 지금도 병오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하신다.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