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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인생은 하나님의 자기표현 악보다>의 줄거리:
세종문화회관이나 카네기홀 같은 공연장의 연주용 메인 피아노를 생각해봅니다. 얼마나 많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의 경지에 오른 손가락들이 그 건반 위를 뛰 놀며 환상적인 곡들을 연주해 냈을까요? 그런데 생각을 좀 뒤집어 봅니다. 혹시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한 것이 아니라 그 피아노 자신이 피아니스트를 통해 자기를 표현한 것은 아닐까요? 신앙인은 내 인생의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은 하나님의 자기표현 악보다
(딛2:1~15)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내 인생은 하나님의 자기표현 악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이 말은 좀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너의 인생의 연주자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악보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을 위한 수단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종문화회관이나 카네기홀 같은 그런 아주 유명한 대 공연장에, 연주를 위한 메인 피아노가 있을 거 아닙니까? 뭐 한 번도 안 가봤으니까, 그걸 뭐 다른데서 빌려와서 그 무대 위에 피아노를 설치하지는 않을 거 아니겠어요? 그 정도 되면 큰 공연장 같은 데는 당연히 있을 것입니다.
카네기홀에 메인 피아노, 그 무슨 Steinway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피아노를 거쳐 간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 세종문화회관도 그렇지요.
외국에서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초청해서 연주를 했을 것이고 우리나라 출신은 말할 필요도 없을 거예요.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세종문화회관에 어느 한 쪽 구석에 잘 보관 돼 있을 그 피아노, 침묵 가운데 보전되어 있을 그 피아노를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좀 이상한 느낌 들지 않아요, 여러분?
생각이 완전히 바뀌어 집니다.
그 피아노를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그 피아노를 우선적으로 생각을 하다 보면, 그 유명한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이 피아노를 통해서, 자기의 피아노 솜씨를 뽐내는 것일까, 아니면 거꾸로 저 피아노가 그 피아니스트들을 고용하고 이용하고 통해서 자기를 표현해 낸 것일까?
마치 피아노가 이렇게 말하는 거 같아요.
‘내가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곡들을 담고 있는 줄 아느냐?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많은 무한한 가능성의 숫자로, 아름답고 환상적인 곡들을 내가 담고 있는데, 정작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그렇게 아름다운 내가 담고 있는 곡들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아주 피를 흘리면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고, 그것도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로서, 그런 고된 훈련을 과정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데, 우린 그 사람들이 피아노를 연주한다고 생각하지만, 거꾸로 보면 피아노가 자기가 나타낼 수 있는, 자기표현의 여러 가지 수없이 많은 방식 중에서, 그렇게 훈련된 자들을 통해서 자기를 표현해 내는 것이라고, 동화 속에서 모든 물체에 인격을 부여하면서 글이 써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생각을 해 볼 수 있다 이겁니다.
피아노가 인격이 있다면, 자기 안에 감추어진 그 많은 가능성들, 그 많은 아름다운 곡이 표현될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잘 훈련되고 고되게 훈련된 훌륭한 피아니스트들을 고용해 가지고 자기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게 신앙인에게 있어서는 동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가 되어선 안 된다는 거예요.
바로 우리의 현실이 돼야 된다는 겁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피아노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이다, 피아니스트를 통해서.
이게 우리의 현실이 돼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가 내 인생의 연주자로서 멋진 연주를 해내기 위한 것이거나, 그러기 위해 하나님까지도 연주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한다면, 내 인생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연주곡 2번이다, 그런 것처럼 사업이라는 곡을 통해서 내 인생을 표현하려고 할 때에 거기에 하나님까지도 연주합니다.
하나님, 내 사업을 잘되게 해 주세요, 이리이리 되게 해주세요, 이렇게 이렇게 인도해 주세요.
또 자식을 대하는 것은, 내 인생을 잘 아름답게 연주하기 위해서, 자식이라는 곡을 연주해야만 되는데, 그 자식이라는 곡을 연주하는 부분에서도 또 내가 연주가가 되고 하나님까지도 동시에 연주하려고 합니다.
협주를 하는 거예요, 협주.
자식이라는 곡을 표현해 내기 위해서, 마치 관현악단의 도움을 받아 협주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늘 관현악단으로 동원이 돼서 내가 연주를 하고 지휘를 해 나갑니다.
이거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연주하시고 내가 자식을 관계한다.
내 인생에서 자식과의 관계를 자식곡이라고 한다면, 모차르트 피아노소나타 21번 이렇게 얘기하는 것처럼, 자식곡은 내가 잘 연주해내서 훌륭하게 자식을 키우고 훌륭한 어머니가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연주해내려 하시는 곡이라 이거에요, 내가 연주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야기를 오늘 본문이 해 주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우리 인생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라, 피아노 되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신다고 하는 이 말을 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예수님께서 얼마든지 당신 자신의 삶을 훌륭하게 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완벽하게 사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조금의 흠집도 없이 사실 수 있는 분이시지마는, 예수님은 그렇게 자기 인생을 연주하신 분이 아니셨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셨지마는, 결국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서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과 내가 이루는 모든 것들을 다 행하고 계신다’고 말씀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서.
자! 이 이야기를 우리가 왜 합니까?
오늘 본문에 디모데에게, 그레데 섬에 있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자 아닙니까?
그 디도에게, 이제 사람들을 나이별로 분류해 가지고 그 사람들이 어떻게 되도록 그들을 가르치고 이끌라고 하는 권고를 지금 주고 계십니다.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신중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하며 온전하게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모함하지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아니하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이렇게 그리고 그 다음에 젊은 여자가 나오고, 그 다음에 또 젊은 남자들이 나옵니다.
근데 이걸 이렇게 읽다 보면, 마지막에 종들도 나오고 그리고 어저께 우리가 다룬 본문 중에서 언급을 많이 안 했습니다마는 장로와 감독에 대한 얘기도 또 나와요.
디모데전서 3장, 5장에서 감독과 장로들의 조건에 대해서 얘기하는 걸 듣지 않았습니까?
이걸 이렇게 읽다보면 어떤 느낌이 드나 하면, 600여 가지가 되는 아주 세분화된, 바리새인들과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지켰던 율법조항을 대하는 것 같은 그런 분위기에 휩싸여 버립니다.
이거 해라, 이거 해라, 이런 사람이 되게 하라, 이런 사람이 되게 하라, 되게 하라, 되게 하라, 되게 하라, 예를 들어서 신중 하라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신중 한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럼 경우를 나누어야 될 것 같아요.
자식 문제가 생겼을 때에 신중한 것, 사업 문제가 생겼을 때 신중한 것, 교회 문제의 신중한 거, 어떻게 신중한 것이냐? 또 세분화 돼야 될 것 같아요.
이러다 보면 600여 가지가 아니라, 800, 1000가지도 될 것 같아요.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꾸 얘기해요, 오늘날 교회가 도덕성을 회복해야 된다.
영성과 도덕성은 두 개의 기둥이다.
거룩함이라고 하는 아치가 그 위에 걸쳐 있는 두 개의 기둥이다.
거룩함이라는 건 영성과 도덕성이 두 개의 기둥 위에 아울러 굳건하게 서 있어야 가능하다.
‘제임스 페커’라는 분이 말한 거 아닙니까? 목사님들이 많이들 이용하시더군요.
그런데 이게 잘못 된 생각이라는 거예요.
영성과 도덕성은 분리될 수 있거나, 구분될 수 있는 두 개의 기둥이 아닙니다.
지금 도덕성이 문제가 되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되지요.
그러나 도덕성이 회복되는 길은, 도덕성을 영성과 구분함으로써 도덕성의 힘을 경주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예요.
영성이 잘못됐기 때문에 도덕성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도덕성은 참된 영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므로 도덕성이 잘못된 것을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왜곡된 영성으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영성을 추구해야 된다는 거예요.
그 이야기를 오늘 본문 11절 이하에 해주는 겁니다.
앞에, 마치 율법조항을 늘어놓고 그 본문에서 얘기된 것을 근간으로 해서 600, 700, 800개의 조항까지도 만들어내야 될 것 같은, 그런 분위기의 말씀들을 써 놓으시고는, 11절부터 14절까지, 그러나 오해하지 말라, 내가 지금 이렇게 율법조항을 나열하는 것 같은, 율법조항을 발전시켜야 될 것 같은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그 주된 의미와 내용이 뭐냐 하면, 11절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라 이겁니다.
갑자기 그렇게 명령법을 계속 사용해서, 이거 해라, 이거 해라, 이거 해라, 하시더니 11절에 갑자기 툭 튀어나온 말씀이,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이렇게 얘기합니다.
은혜라는 말과 명령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의 단어 아닙니까?
근데, 명령법의 단어를 계~속 사용하다가 은혜라는 말로 다 감싸버립니다.
그러고선, 은혜가 나타나서 그런 일들을 하게 할 수 있다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은혜가 나를 밀어붙여서 위에서 명령법으로 얘기한 그 모든 것들을 다 이루게 해 나갈 거다, 내가 도덕성을 회복하고 내가 성화돼 가지고 그런 걸 이루는 게 아니라, 은혜가 나를 밀어붙여서 그런 일을 행하게 하게 할 것이다, 라는 얘기입니다.
그 내용을 좀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은혜가 우리를 양육한다는 거예요,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한다’
근데 어떻게 양육하나 하면,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버리도록 양육한다는 얘기입니다.
이 말이 참 재미있는 말이에요.
‘양육한다’라고 하는 이 말이 ‘훈련시킨다’ 이런 뜻도 되는 거거든요, 헬라어에서.
근데, 이 훈련시킨다, 양육한다, 라는 것을 우린 그대로 받아가지고 제자훈련이다 이런 식으로 해서 그 단어가 편만해졌습니다.
여기에 심각한 오해가 들어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양육한다는 말은 훈련한다는 말이 들어 있거든요? 그런데도 의미가 달라요.
보세요! 경건하지 않은 것을 버린다, 이 세상의 정욕을 버린다.
경건하지 않은 것, 경건이 뭡니까?
지금 육체를 입고 살아 있는 동안에, 육체를 통해서 만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마음이,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나님과 먼저 연결되는 상태가 경건입니다.
그 먼저 연결된 상태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든지 간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이 대치하고 있고 골리앗이 나와 있는, 정말 공포로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서도, 만군의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기억하고 그 하나님과 연결되는 거, 이게 경건이라는 겁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나갈 때, 용감한 게 아니라 경건했던 거예요.
예수님께서 풍랑만난 배 위에서 잠을 주무시지 않습니까?
그 잠자는 게 경건입니다.
거룩하게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이 경건이 아니라, 왜 잠잡니까?
제자들은 육체로 만나는 풍랑에 마음이 연결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보이지 않으시는 영이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마음이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이 풍랑 속에 계신 게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품에 안겨계십니다.
풍랑 속에서 잠을 주무시는데, 이 잠자는 게 경건이라는 겁니다, 어떨 때는.
경건이 어떨 때는 용감한 장수처럼 나타나고, 경건의 모습이 어떨 때는 꼭 기도해야 될 것 같은 위기 속에서 잠자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거예요.
그럼 이건 뭘 이야기하는 걸까요?
보세요, 양육하는 게 훈련하는 거라고 그랬잖아요? 어떻게 다른가 한 번 봐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스승들이 제자를 양육한다, 제자를 기른다.
목적이 뭡니까? 제자를 양육하는 목적이.
스승이 없어도 혼자 설 수 있는 사람으로까지 변화시키기 위해 훈련시키고 양육하는 겁니다.
우리가 자식을 양육한다 그럴 때도, 마지막 지점이 뭡니까?
우리가 다 죽고 세상을 떠난 뒤에도 스스로 혼자서 자기의 삶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는 사람으로, 독립적인 인간으로 양육하는 겁니다.
근데 이 은혜가 임해가지고 우리를 하나님께서 은혜로 양육하실 때 그 양육의 마지막 지점은, 이렇게 독자적인 스스로 설 수 있는 인간으로 양육하는 게 아니라, 세상 모든 제자들은 양육이 되고 나면 스승을 떠나고, 모든 자식들은 양육이 되고 나면 부모를 떠나지만, 하나님의 은혜 위에서 양육 받은 모든 자들은 점점 더 의존적이 되고 점점 더 떠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양육 받는 초기에 가장 독립적이 인간으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으로부터 가장 독립적인 인간으로.
양육을 받으면 받을수록, 양육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스스로 설 수 있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커지는 게 아니라, 점점 더 양육이 깊어질수록 의존적인 인간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경건이 뭡니까?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과 연결되고, 하나님께 의존하는 게 경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괜히 제자훈련, 제자훈련, 하는 게 잘못 사용하면 큰일 나는 거예요.
예수님도 제자라고 얘기하셨고, 제자라는 말이 성경에 있지만, 이 제자라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그룹들을, 사회적으로 그들을 부를 수 있는 아이디를 정해 줘야 되잖아요, 그 아이디를 가말리엘 선생 밑에 있는 사람들을 가말리엘의 제자라고 하는 것처럼, 어떤 랍비 밑에 있는 생도들을 제자라고 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무리들에게 사회적인 아이디를 붙여주기 위해서 제자라는 말을 쓰고 예수님도 그렇게 썼지만, 내용적으로 보면 세상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전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자훈련이 만약에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수련한다는 의미에서, 나의 변화를 추구하는 의미에서의 제자훈련이라 그러면, 완전히 착각입니다.
그러면 나는 훈련돼서 뭐하는 겁니까?
경건, 이 세상 정욕을 버린다.
세상 정욕을 버린다는 거는 경건이라는 말을 뒤집어 놓은 말이에요.
하나님과 연결되는 게 경건이라면, 마음이 육체로 만나게 되는 이 세상의 일, 아니면 이 세상의 가치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 다 세상 정욕입니다.
세상에서 연결된다는 것은, 그걸 좋아한다는 거거든요, 그걸 우선시 한다는 거거든요.
버리라는 얘기는, 우린 꼭 정욕이라 그러면 무슨 뭐 살인, 간음, 거짓말, 탐하는 것, 이런 것과만 연관 시키는데 아니에요.
나라를 사랑하는 것도 정욕입니다.
정욕이 뭐에요? 정, 마음으로 욕, 좋아한다는 거예요.
나라를 좋아하는 것, 애국도 정욕입니다.
애국도 나라를 위한 일도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경건하게 해야 돼요, 나라보다 먼저 하나님께로 간 다음에,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나라를 위해 일하라 그러면 그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기표현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우린 성화를 오해하고 있어요.
위에서 쭉~ 명령법을 열거해 놓고, 이런 사람이 돼야 된다, 라고 말한 것 때문에 우린 성화를 어떻게 생각하나 하면, 스승 밑에서 도 닦고 훈련하는 제자처럼 생각해서, 내가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인 것처럼 돼야 된다,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돼야 된다고 생각하고, 그걸 성화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는, 내가 변하는 게 아니에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화는, 얼마나 하나님께 의존적이 되느냐, 그럼으로써 결국, 얼마나 하나님이 방해받지 않고 당신 자신을 표현해 내느냐, 이게 바로 기독교 성화의 내용입니다.
‘나’라는 인격이 독자적으로 변해 가지고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저런 연주를 할 수 있는 연주가, 피아니스트가 되는 게 아니고.
왜 절제가 필요합니까?
하나님이 당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내가 표현되면 안 되기 때문에 절제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성화라는 건 하나님이 많이 나타나는 게 성화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서 자기를 많~이 표현해 내시는 것이 성화이지, 내가 훌륭한 일을 해 낼 수 있는 게 성화가 아니라는 거예요,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해서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을 산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 요거 참 기가 막힌 표현들이에요.
신중함이 뭐에요? 충동적이지 않는다는 얘기에요, 즉각적이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이건 무슨 얘기입니까?
내 몸으로 이 세상을 살다 보면, 예를 들어, 최 권사님이 오셔 가지고 “글쎄, 이 집사가 막~ 자기 욕을 하더라고!”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욕을 해요?” “아니 글쎄, 여전도 회비를 애 학용품 사는데 줬다고 그러던데?”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책상을 손으로 막~ 치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이게 바로 충동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거든요?
그러면 신중함이라는 건 뭐냐 하면,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 거예요.
어떻게 신중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 붙잡고 딱 죽어버리는 거예요.
그 얘기하고 있는 최 권사님 앞에서 내가 죽은 자라고 생각해버리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의로움이라는 건 뭐냐 하면, 그런 충동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이 죽은 상태에서, 의로움!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게 의로움이라 그랬잖아요?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셔서, 이 집사가 최 권사님을 앞에 두고 나를 욕하고 모함하는 그 장면을 분명히 보고 계시고 알고 계셨을 텐데, 내려다보고 계셨을 텐데 왜 그걸 허락하고 계셨을까? 무엇을 원해서.
이게 의로움이라는 거예요.
그 순간에 하나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것,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마음이 추구하는 거예요.
최 권사님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반응이 어떤가 하며.
근데 아니 영 반응이 없거든요?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데 그동안에 나는 그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왜 그러셨을까?’ 그리고 경건함으로 이어집니다.
경건함이 뭡니까?
마음이 최 권사님과 이어져 있고, 최 권사님이 말하는 이 집사님과 이어져 있으면 화가 나요.
근데 그 순간에 십자가로 최 권사님을 끊고 이 집사님을 끊어 버리고, 내 마음을 하나님께 보냅니다.
마치, 사울 왕이 골리앗에 마음이 연결돼 있고 블레셋 군대에 연결되었을 때 벌벌 떨었듯이.
이게 충동적이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거거든요.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합니까?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버립니다.
하나님을 딱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봤더니,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분인 줄만 알았거든요?
근데 싸움판에, 전쟁판에서 하나님과 연결된 경건함을 회복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봤더니, 아! 하나님이 창조만 하신 분이 아니라, 만군의 주시더라 이거에요.
싸움판의 대장이 하나님이셨더라 이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천지만 창조하시고 교회에만 계신 줄 알았더니, 내가 사업장에 나가서 하나님을 연결하고 봤더니, 사업하는 게 뭐에요? 물건을 만드는 게 사업 아닙니까?
근데 조물주이시더라 이거에요.
자식을 만나는 현장에서, 내가 경건해요.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게 무엇일까를 찾다가, 하나님을 마음으로 가져버렸더니, 하나님께서 내 자식의 진짜 아버지더라 이겁니다.
그래 가지고, 사업장에 갔을 때 나를 통해서 연주하시려는 곡이 있었어요.
자식을 만나요, 내가 자식을 만날 때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연주하시려는 악보가 태초에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가 학교를 가든 교회를 가든 사업장에 가든 무엇을 하든, 내가 내 몸의 건강에 대해서 관계할 때도 심지어는, 하나님께서 내 건강이라는 곡을 연주하시기 위해서 준비한 악보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 곡이 연주되게 되면 되는 거예요, 연주 되게끔 되는 통로가 되면 되는 거예요.
그렇게 연주되게 될 때에, 앞에서 얘기한 신중하라, 절제하라, 잘 가르치라, 선한 일을 행하라… 이런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자기표현으로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내가 지금 너희들에게 이거 해라, 이거 해라, 이런 사람이 되라, 이런 사람이 되라고 가르쳐라, 이렇게 해라 한다고 해서 너희가 하겠다고 나서는 게 아니다’
‘성화라고 하는 게, 내가 변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 의존도가 커지는 것이고,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양이 많아지는 것이다’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재림에 대한 소망을 얘기하십니다, 재림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거예요, 양육함으로써.
자꾸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서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자꾸 마음에 돈을 넣고 돈을 조금씩 조금씩 벌어 가지고 써 보니까, 아! 이거 좋거든요 돈이, 돈이 최고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소망을 갖습니까? 돈을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습니다.
마찬가지에요, 십자가로 날마다 세상에 대해 죽어서, 경건함을 회복해 가지고 하나님을 조금씩 조금씩 만나다보니까 하나님이 점점 좋아지거든요.
하나님이 좋아지는 건 이상한 건데, 돈이 없어도 좋아지고, 실패해도 좋아지고, 성공해도 상관없이 좋아지고, 성공이 기쁨을 더하지도 못할 정도로 좋은 거예요, 하나님 자체가 좋아서.
그러다 보니까 어떤 소망을 갖게 되냐면, 돈 많~이 벌겠다는 소망과 마찬가지로, 아예 하나님을 통째로 가지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빨리 주님이 오셔 가지고, 저 하늘나라로 갔으면 좋겠다, 이 소망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근데 이 소망이 어떤 기능을 수행하시는 줄 아십니까?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 이제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잘했으면 좋겠다가 아니고, 이 세상 안에서 ‘돈을 많이 벌었으면, 건강하게 오래 살았으면’이 아니라, 이 세상이 끝나는 지점에 오시게 될 그 예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이렇게 세상 바깥에 두게 됩니다.
빨리 세상이 끝나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 이 소망이 왜 필요합니까?
세상 안쪽으로 소망을 두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소망이 표현되는 게 방해를 받습니다.
사업을 할 때 내 소망은, 돈 많이 버는 거였어요, 근데 사업장에서 하나님의 소망은, 나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겁니다, 충돌이 일어나요.
그러니까 사업장에서 소망이 없어지는 거예요, 내 소망을 세상 끝에 놔두게 하십니다.
자식을 기를 때도, 내 소망은 자식이 서울대 들어가는 건데, 하나님은 내 자식이 작은 일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걸 원하십니다, 소망이 부딪쳐요.
그러니까 내 소망을 세상 바깥으로 밀어 내십니다.
그래 갖고 하나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려는 당신의 소망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해서, 우리 마음의 소망을 세상 바깥에 둬버리게 하는 겁니다.
아~! 참~ 기가 막힌 거 아닙니까, 여러분?
나는 피아니스트가 아니에요, 내 인생의 피아니스트가 아닙니다.
피아노가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서 피아니스트를 통하는 것처럼, 나는 하나님이 당신이 이루고 싶은 소망을 이루어 가시도록, 하나님이 자기를 표현하실 수, 당신의 생각을 표현하실 수 있기 위한 수단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양육하신다는 얘기는, 나를 그렇게 당신을 표현해야만 하는 하나님께 적합한 통로로 만들어 가신다는 얘기이고, 그런 통로가 될 때에 오늘 1절부터 10절까지 언급한 그 모~든 어려워 보이는 모든 일들이, 저절로 우리에게서 열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게 아니라, 피아노가 피아니스트를 통해 자기표현을 한다는 말처럼, 우리가 내 인생과 하나님의 능력까지도 연주하는 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표현의 수단들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든 곡들이, 아름답게 연주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