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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가 대세다>의 줄거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이 교리를 모르는 기독교인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것으로 보이는 교인도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두가 이 교리를 아는 것으로 자기 자신이 구원을 얻었다고 확신하며 살고 있는 것이 실정입니다. 이신칭의가 이지칭의로 둔갑을 해버렸습니다. 이는 실로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 이단입니다. 이단이 대세인 셈이지요. 상황이 왜 이렇게 까지 되었습니까? 교회의 영지주의 분별의 기준이 미흡하기 때문입니다.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가 대세다
(요일2:18~29)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22.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
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가 대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현재 교회의 상태를 영적으로 들여다보면, 교묘하게 진화된 영지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목사님이고 교인들이고 할 것 없이 거의 대부분이 영지주의자들이 되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러한 얘기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도 있고 민감할 수 있는 얘기이기 때문에, 제 얘기부터 하면, 우리 농담으로 그런 얘기합니다.
‘천국에 가면 세 번 깜짝 놀란다.’
왜 처음에 깜짝 놀랍니까?
나 같은 죄인이, 나같이 추악한 죄인이 이 좋은 천국에 들어온 것에 대해서 놀란다고 그래요.
두 번째는, 반드시 천국 갈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놀란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저 사람은 죽어도 천국에 못 올거라고 생각했는데, 천국에 떡~하니 와 있는 거 보고 놀란다는 거예요.
제가 뭐 그렇게 오래지도 않아요.
만약 얼마 전쯤에 죽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제가 천국에 없는 걸 보고 아마 놀랐을 겁니다.
제가 언제부터 설교를 하고 언제부터 십자가복음에 대한 주장을 해 왔습니까?
근데 얼마 전에 제가 죽었다 그러면, 여러분이 저를 천국에서 못 찾았을 거예요.
아버지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이, 인내하시고 긍휼히 여겨주시는 그 아버지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아직도 죽게 하지 않은 바람에, 제가 이제 구원을 얻은 것을 확신을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 못 찾았을 거예요.
근데 제가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까, 그런 자리에 있다가 진짜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을 얻게 되고 나서, 눈뜨고 보니까 저 같은 오류에 빠져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여러분 지금 죽으면, 천국에서 여러분이 발견되지 않아서 깜짝 놀랄 사람이 많을 거예요.
뭐 그럴라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그랬는데, 난 믿고 있는데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는 거냐? 이렇게 생각하실지 몰라요.
여러분, 믿고 있는 거 아니에요.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고 있는 거 아니에요, 알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습니까? 알고 있는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게, 생명과도 같고 근본과도 같은 아주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렇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맞아요.
근데 아~무도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뭐하고 있느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교리를 알고 있음으로, 내가 믿는 줄로 알고 있고 구원을 받은 줄로 알고 있습니다.
이 차이가 엄청난 거예요.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까? 아니에요 여러분.
그럼 뭐냐?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알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내가 지금 믿고 있는 걸로 착각하고 구원을 받은 걸로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문제가 뭔지 아십니까?
내가 지금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인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믿고 있는 것인지를 구분해 낼 능력도 우리에게는 없어요.
교회에 없습니다, 지금 현재 교회에는 이 두 가지 사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비참하지요.
여러분 영지주의가 뭡니까?
말 그대로에요, 영적인 지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게 영지주의(靈知主義)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를 한자 사자성어로, 이신칭의(以信稱義)! 이 로써, 신 믿음, 칭의 의롭다고 칭해주신다, 그게 구원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너 내 마음에 든다’라고 인정해 주시는 게 그게 바로 구원인데, 영지주의를 이렇게 사자성어로 표현하자면 이지칭의(以知稱義)입니다.
영적인 지식을 갖고 있을 때 내가 의롭게 된다.
이게 바로 이단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사도요한이 이 영지주의 이단을 염두에 두고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것은 영지주의 이단들을 향해서 쓰는 게 아닙니다.
영지주의 이단들을 보고 너희들 나빠, 이렇게 쓰는 게 아니에요 지금.
바로 교인들을 향해서 쓰고 있는 편지에요, 영지주의 이단에 대해서.
보세요, 야고보서에도 그랬고 히브리서에도 그랬고, 박해나 아니면 이단 사상에 의한 위협 앞에 있는 교회에 대해서 편지를 자꾸 하는데, 이단들을 향해서 직접 쓴 편지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내에서 이러한 영지주의 이단과 같은 잘못된 신앙사상에 경향을 띨 수 있는 자생적인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교회 안에.
그리고 이런 이단 사상에 대한 친화적인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자꾸 교회에 대해서 쓰고 있는 거예요.
근데 우리가 정말 교묘하게 진화된 영지주의에 의해서 완전히 먹혀 버렸습니다.
성경공부가 만연하고 있지 않습니까? 좋은 증거에요.
성경공부는 만연하는데 계명은 지키지 않습니다, 이게 좋은 증거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이렇게 얘기했어요.
자! 우리가 지금 왜 영지주의자인지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상태에서 벗어나야 되는 거예요.
진짜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야 되겠어요, 이제, 그게 만만한 게 아니니까.
자! 그러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말이 뭐지요?
예수는 인간 예수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것은, 하나님으로써 이 땅에 메시아로 오신 분을 말하는 겁니다, 구원자로서 오신 분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는 얘기는, 예수라는 그 나사렛 목수가 그 속에 신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겁니다.
여러 형태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영지주의 하나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예수라는 인간이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인간 예수에게 들어와서 활동을 하고 하늘에 관한 신령한 지식들을 가르쳐준 뒤에, 인간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그 예수의 몸을 십자가에 버려두고 그리스도의 영은 하늘로 떠나갔다.’
이렇게 얘기합니다.
영지주의에요.
자! 이렇게 얘기가 된 이후로, 영지주의 하면 우리는 그 이단성을 어떻게 가려내는가 하면,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이 함께 그 존재 안에서 통일적으로 조화롭게 공존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신성만 주장하거나, 아니면 영지주의가 지금 말하는 것과 반대로 예수님의 인성만을 주장하거나, 이렇게 어느 하나의 단성론자들을 가려내기 위한 기준을,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얻어낸 겁니다.
그 이후로도, 하여간 350년의 니케아회의에서부터 451년 칼케돈회의까지 반복되는 종교회의 속에서, 계~속해서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를 다루고 이 칼케돈회의에서 정확한 문구로 확정을 짓습니다.
자! 그 뒤로, 영지주의하면 으레 ‘신성과 인성에 관한 문제다, 거기에서 문제가 있는 잘못된 고백을 하고 있는 거다’ 이렇게만 생각을 한 거예요.
아무도 사도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제시하고 있는 영지주의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에 대해서 주목하지를 않았던 겁니다.
오늘 ‘예수께서 그리스도인 것을 부인하는 자가 거짓말하는 자다’ 여기서 영지주의는 분명히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거예요.
근데 이렇게 신성과 인성에 관한 얘기에 앞서서, 1장과 2장 앞부분에서 사도요한이 한 얘기가 뭡니까?
‘하나님을 안다 하는 자들이 어둠 속에 거하고 있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 하면서 형제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고 있다 그러면,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라는 얘기를 반복해서 합니다.
계속해서 어둠 속에 거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것을 또 얘기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게 뭡니까?
이 세상일에서 내 마음의 빈속을 채워가지고 기뻐하려는 의도를 갖지 않는 것이 참 믿음이다.
아직도 이 세상일에서 기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그러면, 이 세상일 때문에 슬프고 기쁘고가 좌우되고 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지주의를 가려내는 기준인데, 이 기준을 적용할 줄 모르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가 교회를 먹어버렸습니다.
교묘하게 진화됐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다 인정해 버려요, 다 인정해요.
그러니까 니케아부터 시작해서 칼케돈 종교회의에서 확정된 그 예수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교리를 완전히 다 받아들입니다.
그러고도 영지주의로 빠져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신성과 인성, 요 문제만 가지고 영지주의 이단을 가려낼 수 있었기 때문에, 이걸 인정해 버리고 나니까 그 다음엔 영지주의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모르고 교회 안에서 정통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인정해버리고 있다가, 온 교회가 가 이 교묘하게 진화된 영지주의에 다 먹혀버렸다는 거예요.
자! 교묘하게 진화된 영지주의는 뭡니까 여러분?
‘영적인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라고 하는 자들입니다.
영지주의가 그런 거예요.
그런데 영적인 지식에 의해서 구원을 얻는다고는 말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교묘한 거고 그리고 비겁한 거예요.
근데 제가 그런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은 하고 있었지마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 못하고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과 이것의 차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교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구원을 받았다고 믿는 것인지를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 뭡니까? 그게 바로 예수님의 동선이에요.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살펴보면, 내가 지금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에 빠져 있는 건지, 아니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있는 건지 알 수 있는 겁니다.
자! 여러분 믿음이 뭐지요?
마음을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겁니다.
근데 하나님께 마음을 우리가 마음대로 드릴 수 있습니까? 우리 마음이 얼마나 더렵혀졌는데. 그래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유일한 길이 제시됐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면 어떻게 됩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연합한 다음에는, 부활하시고 이 세상을 돌아보지도 않고 승천하신 그 예수님과 또 함께 연합해서, 지금 보좌 옆에 계시는 그 예수님 안에 우리 마음이 들어가 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게 믿음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우리 마음을 드린 거예요.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 도달한 이 마음속에, 비어 있는 마음이 예수님과 하나님이 서로 교제를 하시는데, 성령을 통해 교제하시잖아요? 그런 것처럼,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 마음도, 성령님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속으로 느껴지게 해주시면서, 하나님이 마음속으로 들어오시게 해주시면서, 우리 마음에 완전한 충족감과 만족감과 평강이 주어지고, 여기까지가 구원의 상태입니다.
십자가서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동선을 따라 올라간 마음이,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는 상태,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는 상태, 이게 구원이에요.
근데 여기까지 일어나는 구원은 행위를 통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마음을 십자가에 드리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한테 보이지를 않아요.
그래서 구원이 완성돼요, 그러니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거지요.
우리 마음이 완전히 하늘로 온전한 충족과 평강을 누리게 되는 거예요.
그것이 잠깐 다운 됐다가도 또 다시 회복되고, 이 과정은 반복이 돼요.
그러니까 매일 죽는다 그러는 거죠, 매일 이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가는 거에요, 매일같이 순간순간 매일 정도가 아니라 순간순간.
근데 여기까지는 보이지 않는 부분이고, 나 혼자만의 믿음의 역사에요.
근데 이 구원, 믿음으로 얻는 이 구원, 마음이 하나님과 연합하게 되는 이 마지막 단계까지의 구원이 이루어지고 나면 반드시 나타나는 게 공생애의 단계입니다.
예수님의 동선과는 거꾸로 우리는 십자가부터 시작해서 공생애가 마지막 부분으로 오는 거죠.
그 공생애 특징은 뭡니까?
계명을 지키는 것이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게 뭐에요? 내가 이 땅에서 지금 이 몸으로 존재하고 살고 있는 이유가 뭐냐 하면, 형제 사랑을 위해서에요.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으로부터 내가 그 사람에게서 필요한 것을 얻겠다는 생각으로 사는 게 아닙니다.
오직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 마음은 이미 완전히 충족되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았으니까 구원받음의 특징은 이 세상에 이유 없는 기쁨을 갖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좌우되지 않는 평강을 갖는 겁니다.
그런 상태에서 형제를 만나니까, 그의 문제만이 중요하게 되고 그에게 사랑을 하게 되고, 그리고 이제부터 하나님이 안에 들어와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든 주신 계명이 다 지켜지게 됩니다.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들어오셔 구원을 제대로 받아가지고, 하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게 확실하다 그러면, 계명이 다 지켜지게 돼 있다는 거예요.
근데 형제 사랑도 아니고,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에게서 내가 뭘 좀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모든 하나님의 계명들이 다 지켜지는 상태가 아니에요.
이게 물론 단계적으로 성화과정을 거치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 현재 교회의 문제는 뭐냐 하면, 성화과정으로 가는 게 아니에요.
그 성화과정의 노상에 서 있지를 않는다는 게 문제에요.
그리고 다 구원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래 어디서 문제가 생긴 걸까요? 어디서.
십자가에서 주님께서 내 죄를 위해서 죽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마음이 연합되는 게 아니라,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을 아는 것으로 끝내고 마음이 그 동선을 따라가지를 않는 겁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가지신 분이다, 인성을 참 인간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다, 아는 것으로 끝나는 거예요.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로부터의 삶을 전혀 쫓아가지 않고, 우리 마음은 하나님을 마음 안으로 담기 위해서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내가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날 의롭다고 인정한다고 스스로 믿어버리고, 스스로 고집을 하면서 하나님은 그러지도 않고 계시는데 고집을 하면서, 마음이 이 세상을 향해 나가버렸습니다.
목사님들은 교회 예배당 크게 짓는 게 목적이에요.
교인 100명이면 200명 되는 게 목적이에요.
내 이름 내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스타목사라는 말이 생겨버렸어요.
교인들도 다 이 세상으로 나가버려요,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리고 마음이 떠난 게 아니라,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으로 어쨌든지 기쁨과 만족을 해결하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로써 기쁨과 만족을 해결하려고 그러면서, 동선에서 이탈해 버렸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세상을 벗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거라고 야고보서 4장 4절에 말했잖아요?
그리고 오늘 이 사도요한도 어제 본문 마지막 부분에서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는 얘기를 하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지 않는다 그랬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 쪽으로 향해 나가 있는데 마음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영지주의가 아니고 뭡니까?
구원받았다는 근거가 뭡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신성과 인성이 조화롭게 있는 분이라는 걸 아는 것,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걸 아는 것, 그분의 십자가는 인류의 죄를 위해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걸 아는 것, 그분이 나를 위해서 죽었다는 걸 아는 것, 어떤 예수님의 동선의 단계에도 연합하려는 마음은 갖지 않으면서, 예수님에 대한 모든 지식은 다 알고 있고, 나를 위해 죽은 것도 알고 있고…
나를 위해 죽었으면 내가 그 죽음과 연합해야 되는 거지요.
근데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음은 세상을 향해가 있고 세상을 사랑하면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믿는 겁니다.
그러니까 영적인 지식을 알고 있음으로써 나는 구원받았다고 믿는 거니까, 이렇게 비겁하고 교묘하고 악랄한 영지주의가 어디 있습니까?
그게 바로 저였다는 거예요, 제가 그랬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가장~ 많이 강조하는 사람 중에 하나이면서, 그 십자가가 지식으로 있었지 구원받은 자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계명이 지켜지는 그런 삶이 살아지지 않고 있었다는 겁니다.
영지주의였어요, 영지주의자.
근데 모두의 오류입니다, 지금 이게 교계에 거의 모든 사람의 오류인 거예요.
심각한 문제이지요.
자! 오늘 본문에,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다 이렇게 얘기했어요.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한다.
우리가 이거 부인하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어요.
근데 예수라는 인간이 그리스도라고 하는 걸 부인한다고 하는 것을, 영지주의자들은 행동으로도 말로도 부인했습니다.
근데 우리는, 말로는 인정하고 행동으로는 부인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게, 교묘히 진화된 더 악랄한 영지주의자들이 됐다는 거예요.
행동으로 부인한다는 게 뭡니까? 그리스도임을 인정한다는 게 뭐에요, 예수라는 인간이 그리스도임을 인정한다는 게 어떤 겁니까?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가는 거예요.
우린 착각해요, 예수 제자훈련이다 그래 갖고, 뭘 제자훈련이라고 해서 시키느냐 하면, 이 땅에서 고난 받고 이런 거, 예수님의 공생애 때의 삶의 흔적을 따라 하려고 그러고, 모방 하려고 그럽니다.
이건 기독교를 아예 모르는 거예요, 죄송한 얘지만 기독교를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예수를 따라갈 수가 없어요, 그렇게 예수를.
우리가 예수를 따라가는 거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한 행동을 따라가면서 따라갈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따라가야 되는데, 따라가야 그리스도이지 따라가지 않으면 그리스도일 수 있습니까? 그럼 뭘 따라간다는 거냐.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다음에, 세상을 향해 나오셔서 왕도 되시고 사장도 되시고 그룹총수도 되셨으면 얼마나 좋을 뻔했습니까? 그러면 따라가기가 너무 좋았겠죠.
근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이 세상을 마치 졸로 보듯이 그 좋은 것 다 놔두고, 그 좋은 것 조금도 갖고 싶지 않으시다는 듯이 곧바로 올라가 버리셨습니다. 그렇게 올라가신 거 자체가 예수님의 속마음을 드러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수님 따라가려면 세상을 떠나야 되는 거예요, 세상을 떠나야 돼.
근데 아직도 세상에서 훌륭한 예배당 갖고 싶어 하잖아요, 큰~ 교인이 많이 모이는 교회 목회하고 싶잖아요.
예수 따르는 게 아니에요, 세상을 떠나야 돼요.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 가는 겁니다.
이게 예수 따라가는 거예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이 공생애 때 하신 일을 흉내 내는 게 아니라, 그렇게 예수님 따라서 아버지께 마음이 가면, 세상을 완전히 떠나서 가서, 이 따라감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님을 부인하는 겁니다, 그리스도 되심을 부인하는 거예요.
그렇게 가고 나면, 그 다음에 예수님이 공생애 때 사셨던 것은, 예수님이 사신 게 아니라 그랬잖습니까?
‘내 안에 아버지가 계셔서 행하시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았어요?
사도바울이 뭐라 그래요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으니까 이제는 내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라고 얘기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내가 그리스도를 따라간다고 그리스도가 공생애 때 한 행동을 흉내 낸다는 것, 이게 제자훈련이고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것, 이게 난센스에요, 난센스.
예수님 따라가는 거는 십자가에서 죽어서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 보좌 앞으로 간 그 길을 따라가는 거예요.
마음이 그 길을 따라가면, 하나님께서 나의 몸을 장갑삼아서, 하나님이 공생애를 사시기 때문에, 그 공생애적인 삶이 내게서 일어날 때 그것은 내가 사는 게 아닙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사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내가 나로서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 구간은, 십자가서부터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그 자리까지 따라가는 거예요.
이걸 실제로 따라가지 않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거는, 이 모든 지식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구원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묘하게 발전된 영지주의라는 것이지요.
이 영지주의로부터 우리가 벗어나야 되겠습니다.
그래 지금 사도요한이, 오늘 신성과 인성에 관한 얘기에 앞서서, 자~꾸 이상하게 어둠 속에 거한다 빛 속에 거한다, 너희의 행동을 통하여 계명이 지켜지는지 안 지켜지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야고보에서도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다, 자~꾸 이런 얘기를 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계명이 지켜지지 않고,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생각이 내 속에 들어서 살지 않으면, 영지주의에 빠진 거예요.
어떻게 영지주의로부터 벗어납니까? 삶의 모~든 순간에, 어떤 대상을 만나던 어떤 사건을 만나든 예수님의 동선을 따라가는 겁니다.
십자가를 기억해내고, 직장에서고 가정에서 어디서든지 십자가를 기억해 내고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언제 어디서든지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겁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내가 하는 말과 행동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이 아니고, 반드시 세상을 사랑해서 세상으로부터 나오는 말과 행동일 것이고, 우리는 구원 받았다고 착각하는 참으로 교묘하게 진화된 영지주의자들로서 삶을 마치게 될 것이에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생활화함으로써 예수님의 동선을 날마다 순간마다 반복해서 따라감으로써, 교묘히 진화된 영지주의자로서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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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그 누구도 영지주의에서 자유한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어둠속에서 방황하고 있었을 때 어느 날 십자가복음이 청천벽력 같이 들려왔고 비로소 순간마다 나를 십자가에 넘기므로 그리스도가 사시는 복된 인생되게 하심을 감사찬양을 드립니다. 이 복음을 전하며 살겠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