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당선작 - 이다희 ‘백색소음’
조용히 눈을 떠요. 눈을 뜰 때에는 조용히 뜹니다. 눈꺼풀이 하는 일은 소란스럽지 않아요. 물건들이 어렴풋한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눈길로 오래 더듬으면 덩어리에 날이 생기죠. 나는 물건들과의 이러한 친교에 순응하는 편입니다.
벽에 붙은 선반에 대하여,
나에게 선반은 평평하지만 선반 입장에서는
필사의 직립(直立)이 아니겠습니까?
옆집에서는 담을 높이는 공사가 한창입니다. 점점 높아지는 담에 대하여, 시멘트가 채 마르기 전에 누군가 적어 놓는 이름에 대하여. 며칠째, 습한 날씨가 계속되고 투명한 문신 같은 이름이 피부에 내려앉습니다.
피부가 세상에 가장 먼저 나가는 마중이라면
나는 이 마중에 실패하는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 습기에 순응합니다.
하지만 만약 손에 닿지도 않은 컵이 미끄러진다면
컵을 믿겠습니까? 미끄러짐을 믿겠습니까?
유일한 목격자로서
이 비밀을 어떻게 옮겨 놓을 수 있을까요.
도대체 이 습기는 누구의 이름입니까.
눈꺼풀을 닫아도 닫아지지 않는 눈이
내가 사라지고도 내 곁을 지키는 잠이
오래 나를 지켜봅니다.
[2017 경향 신춘문예]시부문 심사평 - ‘나’와 사물의 의미 탐구하는 자세 믿음직
이시영·최정례 | 시인
전체 응모자 1025명 중 예심을 통과해 본심의 대상이 된 열한 분의 작품들은 대체로 기존의 시적 관습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 그 이상으로 말을 정확하게 운용하고자 하는 노력은 부족한 듯했다. 예심 통과작 중에서 몇 편은 구체적 정황을 나타내는 단어의 앞뒤에 모호한 관념어나 철학적 냄새를 풍기는 용어를 결합하여 그 정황을 애매하게 뭉개버리는 시들이 있었다. 또는 이제는 사라져 버려 우리의 현재 생활과는 동떨어진 시골 전경이나 자연을 낭만적으로 그리며 이상화하여 사실감을 뭉개버리는 시들도 있었다. 박다래의 ‘토끼의 밤’과 김나래의 ‘넙치’는 생생한 말로 시작했으나 시의 마무리 부분까지 그 생기를 끌고 가지 못하고 긴장을 풀어버리는 허약함을 보였다. 주민현의 시들은 구문과 구문 혹은 연과 연을 긴밀하게 조직하는 힘이 부족해 보였다.
이들 중에서 돌올하게 신선하고, 침착한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보며 생각을 펼쳐내고 있는 작품이 이다희의 ‘백색소음’이었다. 심사위원 둘이 서로 다른 감식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마음으로 단번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으며 흔쾌하게 이 작품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결정하기로 하였다. 이 작품에 함께 호감을 표한 이유는 아마도 시적 화자인 ‘나’와 대상과의 관계, 즉 우리가 담겨있는 이 세계 속에서 ‘나’와 사물의 의미를 진지하게 탐구하는 자세가 믿음직스럽고, 말의 꼬리를 붙잡고 조근조근 할 말을 밟아나가는 말의 운용 방식 또한 재미있기 때문이었다. 당선작과 함께 응모한 나머지 작품들도 당선작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차분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끈기있게 밀고 나가는 자세에서 저력이 느껴졌다. 시는 원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어서, 앞으로 시 쓰다 어려운 고비를 만나더라도 오늘의 기쁨을 원천으로 삼아 지치지 말고 정진하기를 바라며, 2017년 신춘의 새 시인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