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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5월 21주일 메시지-구원이란 무엇인가(2)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docx
2017년 05월 21주일 메시지-구원이란 무엇인가(2)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pdf
주일 메시지
2017년 5월 21일 주일
제목: 구원이란 무엇인가?(2)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
요한복음 4:21~2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삭개오의 집에 임한 구원
지난 주부터 우리는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배우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난 삭개오가 받은 것, 또는 삭개오의 집에 임한 것이 구원입니다. 삭개오가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면서 그것에 매여 살다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이 구원입니다. 그것은 돈을 모아야 한다는 두려움을 던져버리고 사람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구원은 인간관계의 회복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것은 풍성한 삶이 됩니다. 그런 구원을 경험하려면 주님과 더불어 춤을 추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이런 것에 대해 배웠습니다.
사마리아의 수가라는 마을에 살던 여인
그러면 이제 사마리아 여인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요한복음 4장에는 예수께서 사마리아로 지나가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마리아 지방의 수가라는 마을을 지나시게 되었는데 예수님은 마을 어귀 우물가에 앉아계셨고 제자들은 음식을 구하러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돈을 주고 무언가를 사오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다가옵니다. 때는 낮 12시. 이 때는 아무도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오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친구가 없는 모양입니다. 우물에 혼자 오는 것을 보니.
그런데 돌연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물 좀 달라 하십니다. 그 사마리아 여인은 유대인의 행색을 한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 온다는 것이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건단 말입니까? 그 때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자신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대화 형식으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 여보시오. 물 좀 주시오.
여인: (흠칫 놀라며) 저는 사마리아 여인이고 당신은 유대인 남자인데, 어찌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어 오십니까?
예수님: 만일 네가 지금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군지 알았더라면 그분께 물을 달라 하였을 것이다.
여인: 당신은 물 길을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물을 길어 나에게 주겠다고 하십니까?
예수님: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인: 그런 물도 있습니까? 그러면 그 물을 제게 주셔서 제가 이처럼 물 길으러 나오는 힘든 일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예수님: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
여인: (당황하면서)저는 남편이 없어요.
예수님: 맞다. 너는 남편이 없다. 네가 다섯 남편이 있었으나, 다 헤어지고 지금 함께 사는 남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고 하는 네 말이 맞다.
여인: (더욱 놀라면서) 이제 보니 당신은 하나님의 예언자십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는데, 당신들 유대인들은 오직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하네요.
예수님: 여인아, 내 말을 믿으라.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이 산에서도 말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때가 온다. 지금이 그 때다.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것이다.
여인: 메시아라고 하는 그리스도께서 오시면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실 거에요.
예수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리스도다.
그 때 제자들이 점심식사를 사 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시는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을 했지만, 왜 그렇게 하시느냐고 물어보는 제자는 없었습니다. 모두들 잠잠했습니다. 그 때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구원이란 생수를 마시는 것
여기서 예수님의 대화를 주목해 봅시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가 받을 구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은 마치 생수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목 마르지 않는 생수처럼 우리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이 바로 구원의 선물임을 알려줍니다. 사람에게는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계속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집착하고 매달리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갈증이 채워지지 않음을 경험하기에 그 사람은 결국 더 많이 얻으려고 그것에 붙들리게 됩니다. 삭개오에게 그것은 바로 돈이었고, 사마리아 여인에게는 그것이 바로 남자였을 것입니다. 그녀에게 남자의 의미는 어쩌면 경제적 후원일 수도 있고, 보호막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계속 남자를 찾아 다섯 번 결혼을 했으나 다 실패하고 지금 사는 남자와는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구원은 그런 갈증을 해소해 주는 생수와 같은 것입니다. 다시 그것을 인하여 연연(戀戀, 사모함)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가장 목마른 부분을 아시고 “가서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우리의 숨겨진 갈증을 아십니다.
고위 세금공무원이던 삭개오에게 그것은 돈이었고, 주님을 만난 후에 그는 이 문제에서 놓여났습니다. 그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는 자신의 돈을 갈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삭개오는 비로소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부유한 삶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돈으로 얻으려 했던 인정과 삶의 만족을 예수님을 만나 비로소 얻게 되었습니다. 그 때 삭개오는 구원 받았고, 새로운 삶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에 살고 있던 스티브 맥베이 목사라는 분은 목회에서의 성공하고 싶은 깊은 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서 찾으려고 했습니까? 오직 더 큰 교회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교회성장을 바라는 자신의 갈망과는 달리 자꾸 수가 줄어가는 교인들을 보면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 때 비로소 주님을 만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주님께 내려 놓았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교회성장이라는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과 사귀는 삶을 즐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고 세계인들과 소통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로 살면서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맥베이 목사는 예수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셨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와서 “제발 저에게 생수를 주세요”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간청은 사실 자신의 갈망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께 와서 기도할 때 우리의 갈망을 간절히 외칩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바르게 알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예수님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요, 기쁨이요, 생수시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안도합니다. ‘예수님 외에 더할 것은 없구나’ 하는 고백을 합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하늘 위에 주님 밖에 나의 사모할 자 아무도 없네.” 이런 노래는 생수 되시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들은 지금 자신들 속에서 솟아나는 생수를 마시면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예수님을 만나 목마름을 해결해주는 생수를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구원이란 참된 예배를 드리는 삶이다
둘째, 구원은 예배 드리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여인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예배이야기를 요한은 소개합니다. 여인은 예배의 장소에 대하여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는 현실을 지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예배에서 중요한 점은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드리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는 점에서 유대인들과 다르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들에게서 구원이 나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온다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사마리아인들의 삶에는 구원이 없고, 참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곳에 구원이 있음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합니다.
구원이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이 있습니다. 그러면 예배가 무엇이기에 구원과 관련이 있습니까?
예배(禮拜)라는 말은 ‘경의를 표하면서 절을 하는 것’이라는 한자의 의미가 있습니다. 영어(worship)로는 가치(worth) 있는 것을 바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부모님과 스승들에게는 존경의 마음을 드립니다. 그러나 참되신 하나님께는 우리의 경의를 표하면서 그 앞에 절을 합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던 사마리아인들의 예배는 아무 유익이 없는 행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곳에는 구원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가치 없는 것을 예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큰 바위나 나무를 섬기는 행위는 잘 알지 못하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런 행위를 가리켜 미신(迷信)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미(迷)라는 말은 ‘희미하다’ 또는 ‘미혹하다’는 말입니다. 이것 역시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헛된 것을 예배합니다. 하나님은 헛된 것을 우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헛된 것들에게로 향하지 말며 너희를 위하여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4)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헛된 것에게로 향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대하여 바울 사도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로새서 3:5)
참되신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리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탐심이 자리잡습니다. 그리고 헛된 것을 예배하게 합니다. 그것은 허탄한 것에 자신의 최고의 가치를 바칩니다.
잘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우상숭배나 미신 또는 이단이나 사이비 신앙이 문제가 되는 경우는 그것이 건강하지 않는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청년이 일확천금을 바라고 다단계나 사이비종교에 빠지면 그의 청춘은 망가집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대인관계를 망가트리고 마땅히 미래를 준비할 시간에 헛된 꿈을 꾸게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몸에 병이 생겼을 때, 자녀에게나 가족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고 부적이나 굿으로 그 문제를 피해보려는 선택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손실을 입거나 병을 고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리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미신이 위험합니다. 미신에 사로잡히면 가정과 국가도 망하고 말 것입니다. 금년에 탄핵으로 임기를 마치지 못하고 재판을 받는 박근혜 대통령도 사이비 목사 흉내를 내고 다니던 최태민과 그의 딸 최순실이라는 사람의 속임수에 빠져 우주의 기운이 돕는다는 등의 사이비적인 발언을 하면서 국정을 농단(壟斷)하는 일을 돕다가 결국 측근들과 함께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또한 이단이나 사이비 종교가 위험한 까닭은 그것이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식은 두려움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종교를 이용한 두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은 종말입니다. 이제 세상의 끝이 다가오고 있으며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가 가까이 왔다고 사람들에게 위협을 한 다음에, 재림 때에 구원을 받으려면 누구를 믿어야 한다든지, 또는 어디로 와야 한다든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이단종파에 빠지면 모든 생각이 종말과 그 집단에 붙들리게 됩니다. 그러면 자녀도, 인생의 꿈도, 미래도 사라지고 맙니다.
한국의 기독교는 이런 점에서 종말론과 천국지옥이라는 두려움으로 사람들을 너무 잘못 가르쳐왔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 나라를 가져다 주시기 위함이었는데 우리나라 교회는 그 동안 사람들을 천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예수님이 오셨다고 잘못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주기도문만 잘 봐도 이 사실은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예수께서는 기도를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에게 오는 나라입니다. 삭개오의 집에도 구원이 임하였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누가복음 17:20~21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은 장소가 아니라 주님을 진실되게 믿는 우리 안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사람에게는 위기를 극복하는 능력과 지혜가 있습니다. 젊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배운 사람은 그의 청춘이 꿈과 희망으로 가득합니다. 그는 비록 어려움을 겪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가운데 역경을 이기고 나갈 수 있는 인내와 지혜를 공급 받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청년들이 시골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목사님들의 지도를 잘 받은 후에 상경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수 많은 가정은 여러 가지 이유로 깨어지고 망가집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그런 사람이 빠지는 죄에 대하여 바울 사도께서 진술합니다. 아마 그는 이런 사람들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상숭배, 동성애, 불의, 추악, 비방, 살인, 부모 거역 등의 수많은 죄들입니다. 이런 죄가 오늘날 우리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할 줄 모르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는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심판이요 형벌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의 목적이며, 구원을 통해 우리가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사마리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목마름을 해갈하는 생수를 주시는 주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참된 예배자가 구원을 받은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만나신 예수님이 바로 그 구원자이심을 알게 됩니다. 그가 이런 확신을 하게 된 까닭은, 자신의 가장 은밀한 비밀을 예수님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 여인으로 하여금 예수님이 메시아 되심을 확증할 수 있는 조건이었습니다.
사람 곧 남자를 의지하며 살아오다 보니 어느덧 외톨이가 되어버린 자신의 비밀을 아시고 자신에게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참 하나님을 알고 예배하는 삶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순간 평생토록 갈망하던 목마름이 일시에 해결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가장 외롭고 가장 낮고 이제 끝이라는 생각으로 절망 가운데 있는 자신에게 하나님의 구원자가 찾아오셨다는 사실은 그녀를 감동하게 했을 것입니다. 내가 뭐라고 사람들을 피해 사는 나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는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인생의 궁금증이 풀리고 삶의 확신이라는 느낌표를 가지고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면 새로운 삶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그 여인에게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 사마리아의 여인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자신이 만난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네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예수님은 그 마을에 이틀을 머무르시면서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 동네 사람들은 진리에 대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39.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하므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40. 사마리아인들이 예수께 와서 자기들과 함께 유하시기를 청하니 거기서 이틀을 유하시매
41.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42.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39~42
사마리아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동네 사람들은 여인의 말을 듣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틀 동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들으면서 그들은 진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 곧 세상의 구주께서 오셨음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에게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당신의 말을 듣고 예수님이 메시아시구나 라고 생각을 했소. 그러나 이제 그분의 말씀을 들어 보니 이제는 분명히 알 수 있겠소. 우리도 알겠소. 이분은 정말 메시아시요, 세상을 구원하실 구주심에 틀림없소!”
이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개로 교회당에 옵니다. 우리를 소개한 사람은 꼭 교회에 가보자고 권면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권면한 이유는 예수님을 믿으면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여자친구 때문에 교회에 오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에 다니면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배웁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아닌 것을 섬기고 자신을 왕으로 여기면서 살아왔는지를 배웁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구원자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확실한 믿음에 설 수 있게 됩니다.
믿음에 분명히 선 사람은 조금씩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합니다. 기도를 배웁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진리를 깨달아갑니다. 지난 주에 이런 삶을 춤을 배우는 것과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특별히 신앙이라는 춤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는 과정입니다. 세계관이 바뀌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인생이 새로워지는 과정입니다. 몇 가지 스텝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근본 정신을 새롭게 하는 과정입니다. 그것은 인격 대 인격의 만남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군중과 제자는 분명히 다르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관해 말씀하실 때는 군중에게 너희에게 구원이 임했다고 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가진 개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원은 개인이 받습니다. 그것은 개인의 은밀한 삶이 드러나고 생각이 바뀌며 하나님 아닌 것을 예배하던 삶에서 돌이켜 참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그렇게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구원이 이 집에 임하였다!” 또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의 삶에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지만 구원의 기적을 경험하기 어려운 이유는 군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군중 가운데서는 구원을 받고 가치관의 변화를 경험하기 어렵습니다.
얼마 전에 인공지능을 가진 알파고라는 기계와 한국의 바둑기사 이세돌 구단의 대결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세기의 대결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동구 우리 지역에 이세돌 씨가 방문하여 바둑의 진수를 가르쳐 준다고 합시다. 예를 들어 “왕초보 바둑반”을 개설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모두 수용할 자리를 소개받아 성동구청 대강당을 빌립니다. 그리고 강의를 시작합니다. 바둑의 기초부터 가르칩니다. 그런데 강의를 마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합시다: “여러분 중에 바둑을 제대로 배우기를 원하는 분이 계시면 이 시간 후에 저에게 신청을 해 주시기 바랍니다. 일주일에 한 시간 정도 바둑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오늘날 교회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가 더 많은 사람을 모으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군중을 모으려는 것에 관심을 기울인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사람들이 군중 속에 자신을 숨기려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삶을 노출하지 않고 조용히 신앙생활을 하기를 원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삭개오가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서 예수님을 바라보기를 원하지만, 막상 예수님이 나무 아래서 그를 불러 내가 너의 집에 머물러도 되겠느냐 라고 부르실 때, 삭개오가 나뭇잎 사이로 자신의 몸을 더욱 숨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중 속에 머물러 있으면 진리를 제대로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 열 둘을 불러 모으시고 그들에게 3년 동안 모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삼 년 후에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20
주님은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군중을 모으라고 하지 않으시고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자를 삼는다는 말은 어떤 일에 정통한 전문가가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 그 일을 이어서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복음의 장인”이라고 부릅니다. 이세돌 씨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돌보고 지도해준 스승 같은 아버지와 형의 헌신적인 협조가 있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법
이세돌과 같은 바둑계의 기사가 한 사람 나오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 초등학교에서 훈장교사를 하시다가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의 비금도라는 곳으로 이사를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자녀들에게 바둑을 집중적으로 가르칩니다. 오직 그 일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이세돌이라는 바둑기사가 자라났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에 나오고 입으로 나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면 구원을 받은 줄로 압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인용합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로마서 10:9~10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태복음 7:13~14
구원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바둑 기사로 출세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으로 인도하는 구원의 문도 좁은 문이라 좁고 협착합니다. 쉬운 길이 아닙니다. 이것이 오늘날 예수님이 주시는 구원의 삶을 누리는 사람이 적은 이유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정말 주기를 원하시는 삶을 누리는 사람을 많지 않습니다. 다들 그런 삶을 바라지만 그런 삶을 얻으려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꺼립니다. 그냥 그대로 지내기를 원합니다.
구원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 속에 있는 기쁨과 생명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합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사이비 이단에 빠진 사람들은 아예 잘못 배워 열심으로 사람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열심이 자신을 망칩니다. 하나님께 진정과 신령의 예배를 드리려면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일에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우리는 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얻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한복음 17:3
우리 교회는 영생을 경험하고 영생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복음을 가르칠 수 있는 일군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복음을 배우고 익히는데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짐을 믿고 그 방법과 전략을 배우고 익힙니다. 그것을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구원이 천국에 들어가는 티켓이라면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구원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참 하나님을 예배하고 허탄한 데서 벗어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불의한 일을 떠나 정의로운 일을 하면서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평생 배우는 일에 헌신하는 사람을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며, 그런 사람은 점차 다른 사람도 그렇게 세워가는 일군이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함께 하라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함께 성숙해 가는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그런 건강한 공동체로 성장해 가고 있습니다. 이 공동체에서 잘 배운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건강한 생태계의 회복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세상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새소망교회가 꿈꾸는 새로운 나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주 그런 세상을 꿈꾸면서 노래합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내리라. 주님이 다스리는 그 나라가 되면 사막이 낙원 되리라!” 이 일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 위해 주님이 지금도 그리고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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