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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겨레
2011-12-30 11:46:00
한국을 세계화해서는 안되고 세계를 한국화해야 할 이유
http://cafe.daum.net/honam6224/MmBz/727
제 1 장
*1. 한국인들은 악(惡)을 믿지 않는다. 악(惡)은 사람과 생각 사이에 이원론과 대립이 존재함으로써 생겨난다. 한국인들은 악(惡)대신 사람들 사이에 관계(關係)를 만들어낸다. 이 관계(關係)는 워낙 긴밀하게 짜여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악(惡)과 같은 개념들이 존립할 수 있는 이중성이 생겨날 수 없다.
악(惡)이 생겨나려면 일종의 분리와 구분이 필요한데 한국인들은 그것을 너무나 두렵게 여기므로 악(惡)이 존재할 수 있도록 나둘 수 없는 것이다. 그 결과 한국인들은 악(惡)을 믿지 않게 된다. ( p. 24 )
*2. 한국은 아마 지구상에서 가장 종교적으로 다양화되어 있으면서도 민족적으로는 동질인 유일한 나라일 것이다.
대부분의 나라에서 종교적 다양성이 생기는 이유는 여러 민족이 각기 저마다의 다른 종교를 가지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대단히 동질적인 인구 내에 여러 종교가 퍼져있다. 인류학자들이 100%+100%문화라고 부르는 것을 연구하기에 최적의 나라가 아닐 수 없다. (서로 자신의 요소를 양보하면서 섞이는 문화와는 달리 자신의 요소를 순수하게 유지하면서 외래의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
한국 문화(100%+100%문화)에서는 새로운 믿음이 채택되어도 낡은 믿음을 대체하지 않는다. (무궤 주(註) - 습의(褶衣첩의), 자연- 원칙은 불변 항상 새로운 모습)
한국은 지금까지 역사상 다른 민족들이 거의 겪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고 있다. 산업화된 서구에서는 200년이나 걸린 근대화를 한국은 불과 30년 만에 달성했다. 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급속히 근대화되고있는 나라이다. 따라서 옛것과 새것이 상당기간 공존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p. 27 )
*3 한국인들이 악(惡)에 관해 이야기하는 태도는 종교 및 연령과는 그다지 상관없어 보인다.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조차도 악(惡)을 주제로 말할 때에는 그리스도교도라기 보다는 한국인의 자세를 취해서 사실상 불교도와 다를 바 없게된다. ( p. 32 )
한국인들이 악(惡)을 믿지 않는 이유는 악(惡)에 관한 어떤 합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 p. 34 )
한국인들은 악(惡)과 같이 세계를 둘로 나누는 이원론적 개념들에 관해서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인들은 마치 자신들의 문화가 이원론적 개념들이 피상적이고 그릇되고 해롭기 때문에 거부하기로 결정했다는 태도를 취한다. 이렇게 이원론(세계화)을 증오하는 한국인들의 태도는 사실 당연한 것이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튼튼한 울타리(무궤 주(註)- 조상들이 자손들을 위해 만든 풍습으로)를 쳐놓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 p. 35 )
*4. 나는 한국인의 악(惡)에 대한 불신이 기본적으로 언어적인 현상이라고 보지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인 현상이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조직된 결과이다. 언어 행동은 그 관계를 드러내고 반영한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은 아니다. ( p. 38)
~악(惡)이 그것을 말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규정될 수 없다는 데 있다. 관계가 모든 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관계를 말해주면 악(惡)이 뭔지 말해주겠다."는 말이 악(惡)에 대한 정의라면 진정한 악(惡)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惡), 이를테면 무관함, 절대적 소외와 비관련성에 대한 두려움, 순수한 고독, 절대적 차이 등일 것이다.
이것이 한국인들의 악(惡)에 대한 정의라면 정의이다. 한국인들은 어떻게든 악(惡)을 부정하는 방향으로 문화생활을 해가면서도 결과적으로 악(惡)을 그렇게 규정하는 것이다. (무궤 주(註) - 한국인들의 신(神)에 대한 정의)
한국인들은 서구인들처럼 말로써 자신의 두려움을 표현하지 않는다. 내 주장은 그들의 침묵으로부터 이끌어낸 결론이다. 악에 대한 부정(否定)은 세계 안에 악(惡)모양의 구멍,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그 내용은 절대적 타자성과 (절대적) 차이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것은 서구에서 학문적으로 말해지는 타자(他者)의 두려움이 아니다. 한국적 두려움은 스스로에게 타자(他者)가 된다는 두려움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는 이 책의 결론으로 왜 한국인들이 세계화를 그토록 겁내는지를 다루었다. 세계화는 한국인들이 더 이상 자신을 식별할 수 없는 세계, 한국인들이 스스로에게 타자(他者)가 되는 세계(지옥-무궤 주(註))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악(惡)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한국인들의 세계화 경험을(이원론에 대한 인식-무궤 주(註))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들은 세계화를 자아에 대한 심각한 위험, 즉 스스로에게 타자(他者)와 이방인(異邦人)이 되는 위험으로 경험한다. 한국인들이 세계화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실상 세계화를 멀리하려는 전략이다.
제 2 장
*1. 한국인은 집단적 자아(무궤 주(註)-관계적 자아=가족적 자아=우리 자아)를 갖고 있다. 그들은 나를 행위의 중심으로 삼지 않고 우리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집단 속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가를 고민한다.(100%개인주의+100%집단주의 문화) ( p. 63 )
비록 유교에 일반적으로 연관된 공동의 가치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류학자 빈센트 브랜트(1971)는 한국문화에 자기과시를 향한 보상적 경향이 뿌리깊게 박혀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문화는 공동주의적 관점만이 아니라 대립하는 가치들의 갈등,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긴장이라는 관점에서 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공격적인 기업가 정신과 정부와 재계의 긴밀한 관계가 결합되어 이룩한 독특한 한국의 경제발전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도 바로 그러한 갈등이다. 6장에서 나는 이 갈등 때문에 한국인들은 세계화를 향한 다음 행보, 즉 서구경제에서 시장질서라고 부르는 것을 도입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점을 다룰 것이다. 시장질서는 경제개혁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적인 것의 핵심이라고 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간의 균형(무궤 주(註)-가족주의=관계주의)를 무너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p. 67 )
한국인들은 놀랄 만큼 개인주의적이고 경쟁심이 강한 듯 하다. 내가 있는 주립대학의 경우 한국인 학생들은 미국학생들보다 그런 성향이 훨씬 강하다. 또한 한국인들은 개인적 노력과 보상간의 연관을 중시하지 않는다. 그들은 흔히 " 얼마를 아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아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하는데 이 말은 집단적 자아의 모토처럼 들리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무궤 주(註)-개체주의, 전체주의보다 더 개인주의적이고 집단주의적일 수 있는 유기체주의가 바로 한국철학) ( p. 68 )
*2. 한국인들은 분리된 개인이 아니므로 한국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경쟁은 실상 개인간의 경쟁이 아니라 가족들간의 경쟁이다. 개인은 늘 자기 자신 그 이상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입시를 치르는 학생들의 뒤에는 거의 예외 없이 가족들이 따라온다. 이러한 현상의 배후에 경제적인 토대(? 무궤 주(註)- 정(情)의 토대)가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최근까지도 가족중 한 명이 여유 있는 중산층에 편입되면 나머지 가족들도 함께 편입될 수 있었다. 브루스 커밍스는 그 것을 '비도덕적 가족주의'라고 부른다. 부도덕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의 차이를 강조하기 위하여 그런 말을 쓴 것이다. 원래 경제적 측면(레세페르-자유방임주의)에서 출발한 자유주의는 곧 도덕적 철학적 측면도 지니게 되었다. 즉 개인(個人)은 도덕적 가치의 중심이자 진리의 중심이 된 것이다. 경험주의는 바로 자유주의의 원칙이다. 비도덕적 가족주의에서는 가족이 중심이다. 서구의 경우에는 비도덕적 가족주의가 2천년간 이상이나 유지되면서 그 와중에 악(惡)의 개념이 탄생했다. (무궤 주(註)-한국적 가족주의=우주적 가족주의에서는 악(惡)의 개념 자체가 없다.) 한국의 사정은 더 복잡할 것이다. ( p. 69 )
*3. 한국의 자아가 지닌 집단주의(무궤 주(註)-유기적 가족주의)는 그들의 언어습관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한국인들은 '나'를 자주 사용하지 않으며 주로 '내 잘못'이나 '내 책임'이라는 말처럼 책임을 지는 것을 뜻할 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무궤 주(註)- 책화(責禍)) 반면 그들은 '우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한국인들은 심지어 '내 아내'를 말할 때에도 '우리 아내'라는 말을 쓴다. ( p. 70 )
한국사회에서 '우리'라는 말이 많이 사용된다는 사실은 '우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주지만 왜 중요한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무궤 주(註)-유기체 자아인 우리는 천심(天心)=인심(人心)=민심(民心)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창조한 우주이기 때문에 중요) 그 이유는 아마 '우리'의 대립물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인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다.( p. 75 )
한국인들은 개인주의적이면서도 집단주의적이다. 한국의 문화, 모든 한국인의 심리의 중심에는 바로 개인주의적 자아와 집단주의적 자아간의 대립(?)이 있다. ( p. 75 )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집단적 자아를 가졌다고 규정하면서 지구상에서 가장 유교화(儒敎化)한 나라로 자처한다. 그와 동시에 한국인들은 강렬한 개성을 주장하면서 거기에 자부심을 느끼고 그 점에서 특히 일본인과의 차별성을 강조한다. (무궤 註-일본 집단주의의 전형/ 『국화와 칼』-일본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 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사실 여기에는 논리적 모순이 없다. 문제는 그 대립을 이러저러한 목적, 이러저러한 연속선으로 해소하려는 게 아니라 계속 유지하는데 있다.(p.77 ) *4. 개인주의-집단주의 연속선은 불가해한 것을 매력적인 경험적 발견으로 만들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개인주의의 수많은 척도를 대단히 중시하는 한국인들은 집단주의의 수많은 척도로 역시 대단히 중요시한다. (무궤 註-개인주의 서구와 집단주의 동양 쌍방으로부터 공격당하는 한국민족정신)
철학자들만이 아니라 일반적 한국인들도 연속선이 모호해질 정도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를 뒤섞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 모호한 연속선은 자동으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한쪽을 다른 쪽보다 중시함으로써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간의 심리적 갈등과 사회적 갈등도 제거해준다. 그 결과 흥미로운 일탈은 거의 사라지게된다. ( p. 94 )
중요한 것은 개인주의와 집단주의, 나아가 더 이상의 것들을 동시에 포괄하는 더 섬세하고 세련된 한국인들의 자아관(自我觀)이다. (무궤 주(註)- 한국을 세계화해서는 안되고 세계를 한국화해야할 이유 / 홍익인간(弘益人間)=홍도익중(弘道益衆)=재세이화(在世理化)=광명이세(光明理世) )
< 한국인의 심리에 관한 보고서-c.프레드.엘퍼드 지음/남경태 옮김 /도서출판 그린비->
우리 배달桓檀민족의 종교는 생활 풍습, 문화속에 그대로 녹아 있어
그것이 종교의식인지 알고 행하는 한국인들이 거의 없습니다.
외래 종교들이 오히려 우리 민족의 풍습을 종교행위라고 깨우쳐 주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한(단=배달)민족의 종교가 오쳔년의 역사를 이어올 수 이었던 것은 참으로 지혜로운
先人들의 이 결단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민족의 문화들이 섞여있는 미국의 잡탕문화와
기독교( 자신의 요소를 양보하면서 섞이는 짬뽕문화와 짬뽕종교) 가 배달민족의
풍속과 문화와 언어를 거의 다 바꾸어 가고 있는 한민족의 존폐가 달린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유교나 불교나 도교라는 겉옷褶衣만을 걸쳐입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때와는 달리 우리 마음과 두뇌까지를 바꾸지 않고서는 적응할 수 없는
문화와 종교가 우리 땅을 점령해 가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가 알지 못한채 좋아서 갖다 바치고 있기에 더욱 위험하다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현대판 유대인들)이 믿는 神은 역사상의 예수(基督 기름 부음을 받은 자,
구세주라는 뜻으로, ‘예수’를 이르는 말, ‘그리스도’의 음역어 )가 아니라
여호와(예수)의 이름을 도용盜用, 홍수로 노아 가족외에 전 인류를 말살(심판)한
神이요, 유황불(핵폭탄?)로 두 도시( 소돔 고모라)의 모든 사람을 불태워 죽이는
포악하고 음란한 독재자입니다.
기독교로 대변되는 서구문명에 동화(세계화)된 이들이 자신들이 섬기는 神을 창조주로,
인간을 그의 작품인 피조물이라 믿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기독(그리스도) 예수는 인간을 자신의 형제라 했거늘~.
배달민족의 조상들은 하늘을 神으로 섬겼습니다.
우리 민족의 신은 삼신할매 칠성할배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을 神의 피조물이 아니라 하늘의 자손 곧 손자요 손녀로 본 것입니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손자 사랑을 어느 부모의 사랑에 비기겠습니까?
하늘이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손자 손녀들이 바로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참고; http://blog.daum.net/mugue/18320368 여호와와 예수
여호와는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신이지 진정한 신은 아닌거 같아요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구약성서의 여호와(스스로 있는자라는 의미)와 신약성서의 예수(구세주라는 의미)는 동일한 분입니다.
여호와(자존자自存者)는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신이라 생각은 글쓴님만의 독특한 주장이 아닙니다.
성서학자들은 물론 진리를 찾아 구약성경을 자세히 읽어본 사람들중에는 님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으니까요.
여호와라는 신을 유대민족에게 소개한 이는 모세입니다.
예수(여호와)에 대한 모세의 이해(신앙)가 바로 율법서(모세오경)요
여호와 하나님(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지자들의 시각이 바로 예언서들이라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친아버지라고 소개한 박명호씨에 의해 예수(여호와)가 얼마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지는 글쓴님께서 저보다 훨씬 더 뼈져리게 체험하셨으라 생각합니다.
미성년자에게 오랄섹스를 강요하는 예수가 바로 박명호씨가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예수입니다.
창기십자가라는 모략으로 자기를 섬기는 여신도들과 간음하는 신이 바로 박명호씨가
만났다고 하는 여호와입니다.
얼마나 억울하셨으면 여호와께서 친히 예수라는 인간 육체를 입으시고
모세나 선지자들이 증거는 했지만 온전하게 깨닫지는 못한 진정한 당신 자신의 모습(품성)을
온 우주에, 영원한 세대에게 스스로 나타내시기로 작정을 하셨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지성소에 계신 여호와 즉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신 참 하나님은 천사들도 모세도 선지자들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신,
기꺼히 자신의 몸을 약한 자들(자식들)을 위해 죽음에 내어주시는 신이셨던 것입니다.
악인들과 악마들을 저주하고 복수하는 대신 그들 손에 죽임을 당하신 신이 여호와입니다.
바보(?)같이 당하기만 하고 온갖 누명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도 묵묵히 참고 견디는 착하기 짝이 없는
그런 못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신 즉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으신 하나님을 만나보시기를 ... ... .
글쓴이대단!! 2009-10-04 15:02:59
저와 같은 생각이군요~!!여호와.. 예수.. 어찌보면 같은듯 전혀다른 두신입니다. 중간에서 신을 소개하는 중보자(중매)를 통해서가 아닌 여호와(예수)를 님께서 직접 만나보신다면 여호와와 예수가 같은 분임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는 예수를 인정하지 않죠.예수혼자서만 여호와를 자기 아버지라 외쳤습니다. 신약성경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으셨나 보군요? 여호와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모세의 제자라 자칭하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기를거부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 여호와는 어떤신이셨습니까?그는 아직도 이스라엘만의 사막신입니다.피와 전쟁과 살인을 좋아하고 각종 짐승을 제물로 먹기 좋아하고,인간을 시도때도 없이 구속하고 자기만을 섬기라는 악질신이죠. 유대교가 지금끼지 오해하고 가르친 여호와에 대해 이야기하고 계신 것 같군요. 그런데 왜 이슬람신은 무시당하고 지탄을 받고 있는데,이스라엘신은 경배를 하고 있는지... 회교도들이 자살테러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은 알라(여호와란 이름의 아랍어 표현)에 대한 그릇된 신앙때문입니다. 십사억이 넘는 아랍인들에게 절대적인 숭배를 받고 있는 점에서는 결코 마호멧의 신이 모세의 신에 뒤지지 않는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제가볼땐 도낀개낀,피와 전쟁과 복수살인을 좋아하는건 똑같습니다. 박명호씨가 복수하는 하나님, 보복하는 하나님 ,저주하는 하나님이라 소개하는 내용이 십계명(율법)을 절대시하는 율법주의 종교인 이 유태교와 이슬람교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는 지혼자의 힘으로 부족하여 여호와에 묻어가려는 아류작이죠.성경을 맹신하지만, 사실 구약과 신약은 첨예하게 대립되고 적대시합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신을 열쇠로 구약의 모든 말씀과 사건들을 다시 해석해 보십시요 님의 마음의 눈이 열리면 구약(십계명)과 신약(십자가)가 결코 대립되는 관계에 있지아니함을 깨달으시게 될 것입니다. 구약의 사건 중 잔인하게 보복하는 여호와의 이미지를 가장 강하게 보여주는 사건들, 노아 홍수와 소돔 고모라에 내린 유황불 심판, 애급에 내린 열가지 재앙, 예루살렘 멸망, 욥의 환란 등은 모두 사단 악마의 잔인한 심판들로 자기가 저지른 그 대학살극을 여호와께 뒤집어 씌운 사건들이라고 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600만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학살한 히틀러나 크메르인 삼분의 일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크메르 루주의 폴 포트, 인종 청소를 자행한 밀로셰비치 배후에 있는 신이 여호와 하나님일까요? 모세나 선지자들이 ,비록 의인들이지만, 이러한 사건들을 하나님이 내린 천벌이라 백성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결과적으로 여호와(예수)께 누명을 씌운 셈이 되었다고 저는 감히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욥기를 편견없이 읽어보시면 하나님의 사람인 욥이 자기에게 임한 환란들이 여호와께서 내린 것이라 철석같이 믿고 있음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욥기를 기록한 저자의 눈에는 하늘에서 욥을 참소한 사단이 이 재앙들을 가한 장본인임이 확실히 보였는 데도 말입니다. 박명호씨가 자기가 가르친 친아버지 이름으로 행한 그 음행들이 예수께서 행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 인정받은 이들이 저지른 범죄들을 여호와께서 사주한 것일까요? 태양계에 일어나는 모든 이변 재앙들도 여호와께서 내리는 천벌이 아닙니다. 지진 해일 가뭄 홍수들은 이 세상 신인 사단 악마가 하늘의 이름을 빙자하여 일으키는 재앙들입니다. 지구와 그 부속 별들(해와 달과 열두 별)에 대한 합법적(?)인 소유권이 루스벨에게 넘어갔음을 상기하십시요.인류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뱀의 간계에 말려들어 우리의 집 지구를 그에게 통째로 갔다 바쳤으니까요. 인간들이 일으키는 전쟁 역시 그 배후에는 마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걸 좋다고 믿는 인간들 보면 ㅉㅉㅉㅉㅉㅉ 님께서는 박명호씨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처럼 말씀하고 계시는군요. 진리에도 전혀 관심이 없으신 것 같구요. 만일 님이 박명호씨가 소개한 신 친아버지 하나님에게 크게 데인 적이 있는 분이라면결코 진리를 찾아 헤메는 이들을 이토록 매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다시 말하지만 신은 인간사에 전혀 관심이 없죠. 댓글단 님이 숨쉬고 있는 공기는 누가 거져 주는데요? 우리가 매일 마시고 있는 물은 어떤 신의 선물인데요? 식물이나 동물의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햇빛은 어디에서 오는데요? 우리가 개미들 사에 간섭하지 않고, 순리대로 살게 내버려두듯... 우주는 우리의 몸처럼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라 했습니다. 님의 말하는 순리가 바로 자연의 법칙 즉 하늘과 사람의 도리 아니겠습니까? |
이천 구년 시월 육일 mugue의 생각을 적어 보았습니다. >
褶衣(습의,첩의)란 겉옷을 말합니다.
배달민족의 종교가 유교 불교 도교의 겉옷을 입고서도 그 본래의 핵심이 변질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유불선에도 기독교의 절대자神의 개념 조차 없었던 까닭입니다.
하늘과 사람을 절대자와 피조물의 관계라 가르치는 유대교와 기독교의
이원론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조상제사를 우상숭배의식이라며 폐기해
버렸습니다.
기독교를 겉옷으로 입은 자들이 결국 골수까지 선악의 이원론에 물들어
스스로에게 타자他者가 되는, 한국의 조상先人들이 가장 경계하고 우려했던
자아상실疎外한 신의 노예(곡두=傀儡=robot=cyborg)가 되어 버립니다.
한국의 기독교가 사이비 교주偶像와 광신도의 기묘한 결합 집단이 된 점은
북한의 체재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원론 #소외 #한단 #습의 #첩의 #곡두 #악의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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