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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대학 연극영화과 졸업, 경산시의회 3선의원ㆍ의장 역임, 평통경산시협의회 회장 역임, 영남문학 등단 및 영남문학작가회 회장 활동, (사)영남문학 예술인협회 상임부이사장으로 활동
영화계, 영농계, 지방자치, 문학계 다양한 방면에서 직접 체득한 인생 관록이 묻어나는 영남문학 상임부이사장님 모습
초등시절 6.25사변과 고교시절 4.19 의거와 대학시절 5.16 군사혁명을 거쳐 영화계 영화감독과 영농계 영농회장, 정치계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ㆍ 시의원ㆍ 시의회의장등을 거치면서, 지금은 문학계 영남문학 상임부이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카멜레온 같은 삶을 영위하고 계시는 정석현(77세) 영남문학 상임부이사장님을 인터뷰했다.
“인간 그것은 인생을 연출하지만 인생 또한 인간을 연출한다.”는 상임부이사장님의 자택 옆 정자나무 쉼터 뒷편으로 국내 최대 맥반석 매장된 동학산 경흥사 .
▶파란만장한 대한민국 근현대사 만큼이나 다양한 경력의 삶을 살아오신 상임 부이사장님께 유년시절 6.25사변을 겪은 아픈 시대상에 대하여 알고 싶습니다.
- 저는 1943년 경북 경산시 남천면 대명리에서 출생하여 남천 초등 3학년때 6.25사변이 일어나 냇가 돌멩이에 앉아서 공부를 하며 지냈습니다. 대구 수성구 방천뚝 밑에 셋방을 얻어 살기도 했습니다
한평생 사회에 공헌하시면서 청춘을 다 바친 상임부위원장 고향인 남천 대명리, 산전리일대에서 매년 10월경 맥반석 머루포도 축제를 개최하고 있다.
국군을 도우러 제2국민병이 줄지어서 걸어갈 땐 주먹밥을 소금에 담궈 농민들이 함께 나눠 주기도 했습니다. 다시 전선이 북쪽으로 올라가고 지금의 휴전선이 되어 있지만 동족의 전쟁은 많은 폐허 속에 수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이루 말할수 없는 참상을 겪었습니다.
다양한 경험 발걸음이 후배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길을 만드는 상임부위원장
▶ 성장기인 중ㆍ고교ㆍ대학시절 우리나라 사회상과 격동기를 보낸 내용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초등시절 6.25를 겪은 후에 대구 영남중학교에 입학하여 봉덕동 초가집에서 자취를 하였는데 땔감은 할아버지께서 구루마(수레)로 남천 대명동에서 봉덕동까지 장작을 실어서 갖다 주었는데 왕복 하루가 걸렸습니다.
1981년 6월 5일 제1기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남천면 위원으로 선출되어 계속 활동하면서 받은 공로패.
전기는 주인집 큰방 마루 위 전선에 밤에만 선을 이어 쓰기도 하고, 회충이 많아서 니코틴을 약 대신 쓰기도 했습니다.
1991년 3월 26일 실시한 1기 기초의원 선거에서 남천면 시의원으로 선출된 후에 받은 당선 기념패.
대구공고 합격하였으나 삼촌과 같이 학교를 다녀야 하므로 학비 때문에 포기하고 경산고등에 고물 자전거로 다니다가 다시 경북공고에 편입했습니다, 서울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합격(현 중앙대학교로 합교)하여 우리나라 예술계 유명 교수진과 만나면서 연예인축구대회 활동했습니다
1998년 6월 4일 제3기 지방선거에서 남천면 시의원으로 당선된후 받은 공로패.
졸업 후 1964년 논산훈련소 입소, 향도를 하고 있는 신충식(영화배우)을 만났으며, 진주 사천 육군 항공학교 학생대대 전입 서무계 복무하면서 30개월을 마치고 1966년 가을 하사로 제대하였습니다.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경산시협의회장(2001. 7. 1. -2003. 6. 30)재임 공로패
▶ 우리나라 초창기 영화계에서 영화감독 등 활동사항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군 제대 하고 가을 농사를 지은 후에 무작정 상경하여 삼양동에 세 얻어 살면서 연극영화과 임동원(탤런트) 동기 소개로 임권택 감독 최하 말단 연출부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처음 영화계에 뛰어 들었습니다.
원안에 임권택 감독님 밑에 정석현 광능에서 청사초롱 촬영
당시 청사초롱, 망향천리, 요화 장희빈, 풍운의 검객 등을 밤을 새워가며 촬영했습니다. 문희, 남정임, 최은희, 윤정희, 박노식, 장동휘 등 유명 연기자들이 열연했습니다 저는 영화 극본인 연출부 기록, 조감독을 맡기도 하면서 서울 변두리에서 가난하고 힘들게 살았습니다
정석현 감독작 청춘고고 촬영장면 1973년도 제3한강교 중간에 빨간모자 정석현
마지막엔 영화 감독을 맡아 ‘청춘 고고’를 반쯤 촬영하다 자금난으로 도중 하차하였습니다 .한양갈 땐 큰 희망과 꿈을 안고 갔다가 빈손으로 씁슬한 마음으로 고향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감독 임권택 밑에 조감독시절 영화 촬영 장면: 청사초롱, 망향천리, 장희빈 등(1967-1970)
▶ 영화계에서 실패한후 경산 남천에 귀향하여 영농생활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고향에 돌아와서 부인 팔찌 등 패물을 팔아 종자돈으로 돼지를 사서 농사를 시작하여 점점 불어나서 100평 돈사에 돼지가 200마리 가득하고, 그 당시 농촌에 처음으로 경운기가 보급되어 자동탈곡으로 인기가 좋아 세를 받아 매상을 대면서 아침에 나가면 밤12시까지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밭 2,000평에 사과농사를 지으면서 점점 재산이 불어 경산군 양돈협회를 결성하여 경산군지부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감독 임권택 밑에 조감독시절 영화 촬영 장면: 청사초롱, 망향천리, 장희빈 등(1967-1970)
▶ 영화계에서 실패한후 경산 남천에 귀향하여 영농생활에 대하여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고향에 돌아와서 부인 팔찌 등 패물을 팔아 종자돈으로 돼지를 사서 농사를 시작하여 점점 불어나서 100평 돈사에 돼지가 200마리 가득하고, 그 당시 농촌에 처음으로 경운기가 보급되어 자동탈곡으로 인기가 좋아 세를 받아 매상을 대면서 아침에 나가면 밤12시까지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밭 2,000평에 사과농사를 지으면서 점점 재산이 불어 경산군 양돈협회를 결성하여 경산군지부 부회장으로 활동했습니다,
1988년 KBS 1TV 잘살아보세 촬영장면
열심히 농사를 짓다 보니 나중에는 사과 3,000평에, 소 100마리까지 거느린 생산농장 대표로 1981년 농수산장관(고건)대담하고, KBS 2TV 제3회 한국 농어민 대상, JC농어민 기술대상을 받고, 1988년 잘살아보세, 앞서가는 농어촌, 아침마당, 김동건 아나운서 사회 11시에 만납시다, 성공사례 발표, 9시 뉴스 등에 출연하고, 대구경북 새농민회 회장ㆍ이사, 4H후원회 사무국장ㆍ 회장, 경북 농업사과 작목반장으로 우리과수원 견학생들에게 영농교육을 시켜주고, 새마을 청소년 훈련 농장을 하면서 새마을 포장을 수상하였습니다.
11시에 만납시다(땀과 노력으로 일군 부농의꿈). 김동건 아나운서 진행 출연
1988년 한국농협중앙회에서 새농민종합상 석탑산업훈장까지 받았습니다. 이외에도 , 경산시 농민후계자 고문, 경산농업 산학협동 심의워원회 부회장, 농협 총대, 병충해 민간예찰 요원, 대명리 축산 기술지도자, 영농회 방재 단장, 한국농업 진흥관 추진위원, 경산축협이사, 경북 4-H훈련 농장주 협의회장, 경산시 농업인 학습단체 육성기금 운영위원, 농촌명예 지도자, 농촌정보 조사자 등으로 영농 관련 각 분야에서 다양하게 활동하였습니다.
1988년 한국농협중앙회에서 새농민종합상 석탑산업훈장 수상 언론 기사
▶ 지방자치 발전에도 활동한 경력에 대하여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 주위 면민들의 권유로 대통령 선거인단으로 금곡 석종식님과 같이 당선되어 평화통일자문위원 경산시협의회 간사를 맡아 정계에 처음 입문하였습니다.
1998년 7월 8일 부터 2002년 6월 3일까지 제3기 경산시의회 위원장 재직시 모습
그 후 1991년 지방자치제도가 시행될때 군의원으로 당선되어 2002년까지 경산시의회 의원총무ㆍ경산시 의회 의장(1998-2002)으로 활동하고, 경산시 교통대책 심의위원, 경산농업 산학협동 심의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하면서 평화통일자문회의 의장인 대통령 5분으로부터 공로장을 받았습니다,
제3기 경산시의회 위원장 재직시 의회 진행 모습
체육부장관으로부터 88올림픽 기장, 전두환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 포장, 노태우대통령으로 부터 석탑산업훈장, 김영삼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훈장 석류장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