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래실아침농원에서
(순우 이경구
존재한다는 건 어떤 거지요?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요?
너무 심오한 질문인가요? 여기에서 지금 내가 숨 쉬며 살아있다는 게 바로 내가 존재하는 것이자 내가 영위하는 삶이 아닌가요? 여기 이 공간과 지금의 이 시간이 곧 내 실존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여기에서의 지금이 그 어느 누구에게나 가장 각별하고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편 다른 그 어느 사람도 자신이 향유하는 공간과 시간을 똑같이 공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그 자신 혼자에게만 주어진 특권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특권과 축복의 공간은 어디인가요. 그곳은『나래실아침농원』이라는 곳입니다. 강원도 영월군 서북쪽에 자리한 나래실이라는 작은 산촌 마을의 한 귀퉁이입니다. 나의 아내와 함께 하는 삶의 터전이자 일상의 공간입니다. 지난해 허름한 이곳의 산방(山房)을 리모델링 한 뒤 도시에서의 삶을 청산하고 여기로 이사한 건 이미 이야기 드렸지요. 그 집에『南萊軒』(나래헌)이라는 당호의 문패를 단 것도요. 사실 20여 년 전에 이곳에 내 노후의 거처라는 생각을 가지고 그 터를 마련하면서 나는 이곳의 이름을『나래실아침농원』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저 평범하기만 한 시골구석의 한 공간인데 이름까지 짓고 너무 유별난 게 아닐까요?
농원에서 내다본 여름 아침 노을이 진 풍경
자고로 모든 것은 자신의 이름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입니다. 지금은 초등학교 6학년인 쌍둥이 손녀를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돌봐주기 시작할 즈음 나는 손녀들에게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고자 했습니다. “들어봐. 여러 사람이 거리에 있는데, 각자의 이름이 없이 ‘사람아’ 하고 부르면 모든 사람이 다 쳐다볼 거 아냐? ‘한비’ 또는 ‘한율’ 이렇게 이름을 불러줘야 그 사람만이 뒤를 돌아보겠지.” 이후 손녀들은 모든 것에게 이름을 붙여주고는 했습니다. 새로운 인형마다 이름을 지어주다 보니 각자가 20개도 모든 인형이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손녀들은 손가락 열 개에도 각각의 이름을 붙여서 그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지내는 동화를 짓기도 했습니다.
『나래실아침농원』이란 이름은 먼저 ‘나래실’이라는 마을의 이름을 빌려왔습니다. 한편 동편을 향하고 있는 마을의 계곡, 그리고 동남쪽을 향하고 있는 산방 ‘나래헌’에서 맞이하는 매일매일의 아침이 더없이 새롭고 아름답게 느껴지기에 ‘아침’이라는 말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농원이라고 이름한 것은 이곳이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장임은 물론 이곳을 나의 취향을 살리는 정원으로도 가꾸고 싶은 욕심을 반영한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곳에 영어 이름을 짓기도 했습니다. 『Naraesil Morning Farm』. 내 마음에 맞는 세상에서 가장 독특하고 소중한 공간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지난해 귀촌 직후부터 배우기 시작한 서각(書刻) 솜씨를 발휘해서 서툴기는 하지만 그 이름을 새겼습니다. 농원 입구의 대문에 이 현판을 곧 내다 걸을 참입니다.
자작나무 판에 새긴 나래실아침농원 현판
한편 이곳 나래실아침농원의 공간에서 보내는 이 시간이 바로 내 존재의 실체이자 내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간을 보낸다는 건 그 시간에 무엇인가를 한다는 말이고요. 그리고 무엇을 하건 그것은 내가 존재하는 공간이 어디냐에 따라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나 역시 이곳 나래실로 내 삶의 터전과 일상의 공간을 옮기고 난 뒤 거의 모든 것이 크게 바뀌었습니다.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 모두가 말이지요.
이곳에서의 시간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그 첫 번째 미션은 농사를 짓는 일입니다. 얼마간의 텃밭과 땅을 경작하는 것이지요. 25년 전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기 전부터 도시에서도 몇 해 동안 집 인근의 분양 텃밭을 가꾸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는 경사진 밭 자락에 네 댓의 작은 텃밭을 만들어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실로 다종다양한 것을 내가 먹을 만큼 조금씩 가꿉니다. 또 텃밭보다는 좀 더 넓은 곳에는 감자, 옥수수, 콩, 고추, 들깨, 김장 채소 따위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농사입니다. 봄부터 가을걷이하는 늦가을까지는 제법 분주합니다. 농부라는 새로운 직업을 가진 셈입니다. 이 지역 농업협동조합 조합원이 되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의 미션은 정원을 가꾸고 돌보는 일입니다. 정원 가꾸기 역시 이곳에 터전을 마련하고부터 내내 해 온 일입니다. 집 주위의 뜨락과 농원 안길에 우리 토종의 자생식물 위주로 풀과 나무를 심어 가꾸고 있습니다. 집을 수리하면서는 집 주위의 공간을 이들 풀과 나무를 심어 가꾸기에 알맞도록 신경을 썼습니다. 그리고 뜨락 각각의 공간과 농원 안길에 하나씩 새로운 것들을 뿌리고 심어서 가꾸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내 마음에 드는 모습으로 모든 공간을 가꾸려면 수년이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세 번째 미션은 이곳의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물과 가축을 돌보고 기르는 것입니다. 고양이와 개를 기르는 일은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인데 이런저런 연유로 한 마리의 새끼 고양이와 다른 한 마리의 강아지를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는 우리 토종의 들고양이인 ‘쇼트 헤어(Short Hair)’라는 종이고, 강아지는 진돗개의 일종입니다. 모두 이웃집에서 입양한 것인데 고양이를 기르기 시작한 건 1년쯤, 강아지는 3개월이 되었습니다. 고양이에게는 ‘바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강아지에게는 고양이 바다에 맞춰 ‘산’이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바다는 쥐를 잡는 일을 하고 산이는 산짐승을 쫓는 일을 하기도 하지만 이 두 녀석은 모두 우리의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찾아서 살피는 것이 이 녀석들입니다.
아기 고양이 바다의 모습
4개월이 된 진돗개 강아지 산이의 모습
가축의 경우에는 널찍한 닭장을 짓고 모두 13마리의 가금을 기르고 있습니다. 로즈컴(Rosecom)이라는 품종의 희귀종 6마리와 청계 6마리, 그리고 한 마리의 집기러기를 기릅니다. 암수 한 쌍의 집 기러기를 길렀는데, 몇 달 전에 암컷이 뜻밖에 죽고 나서 지금은 수컷만이 외롭게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해 가을에 두 마리의 로즈컴 닭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올해 모두 13마리의 식구가 더 늘었습니다. 좀 더 넓은 울타리를 만들고 염소 두세 마리를 길렀으면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는데 아직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일은 땅을 경작한다는 일이지요. 농사일이나 정원일 모두가 흙을 일궈서 무엇인가를 길러내는 일입니다. 농부가 하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농부(農夫)를 별을 노래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기도 하던데요. 농사를 짓고 정원을 가꾸는 일이야말로 가장 즐거운 직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미국 국부의 한 사람이기도 하고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한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은퇴 후 몬티첼로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정원을 가꾸다 여생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땅을 경작하는 일 만큼 즐거운 직업은 없다(No occupation is so delightful to me as the culture of the earth)”라는 말을 남겼지요. 나도 그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이자 최고위 관직을 가졌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은 『정원에 관하여(Of Gardens)』라는 그의 수필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지전능한 신은 처음으로 정원을 가꿨다. 정원을 가꾸는 일은 참으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즐거움 중의 가장 순수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을 새롭게 하는데 가장 좋은 것이다(God Almighty first planted a garden, And indeed it is the purest of human pleasures. It is the great refreshment to the spirits of man)." 나는 그의 이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정원에 풀과 나무를 가꾸면서 그들이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을 진정 즐기며 좋아합니다. 아미도 죽을 때까지 내가 지루해하지 않을 새로운 직업을 여기 이곳에서 찾은 듯합니다. (2024.10.12.) |
첫댓글 우와아ᆢ 존경합니다. 제가 글을 쓰려고 마음을 먹게한 분은 '나래실 농장주' 덕분이었습니다. 처음으로 순우님 책자를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에 저도 '내 고향 진례 그리고 삶'이란 졸저를 썼습니다.그것이 있어서ᆢ오늘의 제가 있습니다. 항상 순우님은 제글의 스승입니다.
낙원이 따로 있습니까? 그대 사는 곳이 진정한 사람의 낙원입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모습 정말 아름답습니다. 꿈 속에 사는 삶 같습니다. 좋은 나날 되시고 부럽습니다. 꼭 방문하여 그 모습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ᆢ좋은 하루 되세요ᆢ 미송 올림
월몽24.10.14 11:14 새글
첫댓글 조용한 아침의 농원의 평화롭고 여유있는 느낌...
그 자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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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사랑24.10.14 21:50 새글
순우의 행복과 삶의 보람들이 넘처
흐릅니다.
정원은 인간의 정신에 활력을 제공하
는 가장 좋은 장소라는것에 공감합니
다.
순우의 알찬 내용에 감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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