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국
진국은 군물이 섞이지 않은 진한 국물을 뜻한다. 또 거짓이 없이 참되거나 그런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진국은 후자에 해당한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진국을 만나기가 어렵다. 허나 관심법이 부족하여 진국을 알아채지 못하거나, 진국을 만나고도 좋은 인연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하겠다. 진주는 보석가게 진열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모래 속의 진주도 있듯이, 진국도 내로라하는 사람 중에도 있지만 평범하게 사는 숨어있는 진국도 더러 있다. 나는 이제까지 장삼이사로 살아오면서 어렵게 진국을 만나면, 그 사람을 내 인생의 동반자로 삼기 위해 먼저 다가가 꽃이 되려고 백방의 노력을 해 왔다. 우리는 외모에 끌리기 쉽다. 요즘 마음은 안 가꾸고 복장·화장·성형으로 외모를 가꾸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사람을 잘못 읽기가 쉽다. 젊은 시절 나도 미남미녀에 혹하여 오판한 경우가 많았기에, “아름다움은 얼굴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는 한 빛이다.”라는 칼린 지브란의 말을 명심하고 있다. 내 친구 L형은 언뜻 보면 심술궂은 놀부같이 생겼지만, 장미아파트에 사는 그에게 가까이 가면 은은한 향기가 흘러나와 내가 장미선생이라고 호칭했다. 장미선생은 부부금실이 좋고, 아들 손자에 대한 자애가 지극한바 수신제가의 표본이어서 내가 좋아한다. 일반적으로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 중에 진국이 많다. 요즘 수신제가도 못하고서 치국하려고 설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교수열전(狡獸列傳)이란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교수 중에서 교활한 짐승 같은 처신을 하는 사람을 열거한 소설인데, 생각보다 이런 선생이 더러 있다. 동학 L교수는 진국이다. 솔선수범하고 아버지 같은 스승이었으며, 무엇보다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제자를 길러내기 위해 야멸차게 교육하는 것을 보고 항상 나 자신의 부족함을 반성했었다. 2월 말에 퇴직한다고 하니 그동안 연구·교육·봉사의 질곡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를 권해 본다. 시인하면 박목월, 법문하면 법정 스님, 창의적 사고하면 이어령 교수, 생활수필하면 안병욱 교수가 떠오른다. 허나 한국문인협회에 등재되는 작가 수는 나날이 늘어만 가는데, 왜 유행가 가사보다 나은 시를 읽기 힘들고, 실화보다 더 진실된 허구의 소설을 읽기 힘들며, 아마추어들의 생활단문보다 더 감동적인 수필을 읽기 힘든 줄 모르겠다. 정기적으로 문예 월간지와 계간지를 읽으면서 진국 문인을 만나기가 너무 어렵다. 경산 구룡산 아래에 있는 반룡사에 가면 혜해(慧海)스님이 계신다. 스님은 이판승도 아니고 사판승도 아니며 사역승이다. 주지실에 진득하게 앉아 계신 적이 없고, 축대를 같이 쌓고 신자들과 채마밭에서 잡초를 뽑고 계셔 참선도 노동을 하면서 하시는 것 같다.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계셔 신자들은 그저 해해스님이라고 부른다. 신자 알기를 우습게 알거나, 외제차를 타고 거들먹거리고 다니거나, 시주에만 골몰하거나, 불교의 계율을 무시하거나, 종권 다툼에 혈안이 되어 있는 스님을 볼 때마다 우바새로서 마음이 불편했었는데 혜해스님을 볼 때마다 민초들과 무애춤을 같이 추시면서 중생교화하셨던 원효스님의 환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더러 하였다. 고희의 나이에 진국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진국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양광모는 “만남은 인연이고, 관계는 노력이다.”라고 말했는데, 우리는 좋은 인연을 만났을 때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걸까? 진정한 친구가 되기 위해 우리는 200시간 이상을 투자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그냥 지음이 되는 것이 아니다.내가 진국이 되려고 노력하는 방법은 다음 네 가지이다. 첫째, 믿음을 준다. 누군가 “우산을 잃는 것보다 지갑을, 지갑을 잃는 것보다 사랑을, 사랑을 잃는 것보다 신뢰를 잃는 것이 개인에게 가장 참혹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신만사지본(信萬事之本)란 말도 있다. 신뢰란 한마디로 언행이 일치하고 솔선수범하는 삶이리라, 둘째, 소중한 사람에게 돈을 아끼지 않는다. 늙어서 “친구가 최고야.”라고 말만 하면서 땡전 한 푼 안 쓰는 사람이 많다. 친구에게 돈을 쓴들 얼마나 쓸 것인가. 때때로 친구에게 국밥 한 그릇, 소주 한 병, 커피 한 잔 사고, 그리고 간단한 선물 정도는 하면서 살자. 셋째, 60을 주고 40을 바란다.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우리는 기브 앤 테이크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받기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그런 사람을 누가 좋아할까. 50:50으로는 관계가 발전이 되지 않는다. 60을 주고 40만 바라도록 하자. 그리고 즐겁게 신세를 지고 즐겁게 신세를 갚으며 살아야지, 신세를 안 지려고만 하면 좀 더 돈독한 유대관계가 형성되지 않는다. 넷째, 똑똑함보다는 다정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젊은 시절 치열한 경쟁관계 속에서 살려면 남보다 뛰어난 창의적 사고와 언변력이 필요하다. 허나 은퇴하고 나면 도긴개긴이다. 이제는 잘난 척하기보다는 다정·사랑·자상·관용·배려·용서 등의 따뜻함으로 상대를 바라보아야 한다. 이상 4가지를 실천하여 우리 주변에 진국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장미 선생, 원봉(圓峰) 거사, 김형석 교수님, 해혜 스님-나는 당신이 있어서 너무너무 행복합니다. (2021. 1. 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