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只今卽其時也)
요한복음 4:23
홍제원교회
1932. 4. 24.
時間之貴重, 聖書累言之. 不必再提. 保羅曰惜光陰, 主曰我忍爾幾時, 皆惜光陰之意也. 所羅門曰爾年少時記憶造物主亦此意也. 聖經必言從主之時, 巳時或申時者, 亦言時間之貴重也. 吾等當惜時不作無用之事. 聖經亦言時惡, 時惡者今世爲惡之時多, 爲善之時少也. 花發之時必有風雨, 月明之夜必有星雲. 欲放心而行路則必有障碍, 故欲善者必先去惡, 欲壽者必先去病可也. 物無全善, 人無全善者. 時惡故也. 主曰勿慮來日, 必務當日之事云者, 言今日云者共貴重故也. 過去及未來不必憂慮, 所愛者現在已耳. 我不能爲聖人在今日, 我可爲英雄亦在今日也. 巨富在今日, 極貧亦在今日也. 萬事決於今日, 故今日云者不可避也. 救援之道亦然, 當在今日也. 或人云援在前日甚非也. 救援若在往昔則今日徒遊手而可享樂矣. 朝鮮人有此思想, 故徒恃先祖之白骨, 或徒恃先代山所之吉地, 及家宅之吉地云, 甚爲愚昧也. 或云在他日云者, 亦恃往昔無異也. 臥果樹之下而願落來入口之人有何分別也? 養子者必冀他日之依賴, 依父者必冀他日父沒則財産相續, 此等愚想不可盡言矣. 人貴獨立, 獨立在自我. 亦在今日, 今日怠而未見來日獨立者, 故人當奮鬪于現在, 奴隸于現在, 他日之總結果, 都在今日之如何也. 故主曰救援卽在今日也. 猶人於聖京, 只爲不知之神, 徒作無益之事, 來日必顚覆矣. 今日眞則明日眞矣. 今日假則明日亦假矣. 救援之時何也? 復活之時也. 永生之時也, 重生之時也, 昇天之時也, 主曰今卽其時者, 復活亦在今日也. 重生亦在今日也. 審判亦在今日也. 保羅曰熱心事之, 無熱則死. 忠熱則可以事國, 孝熱則可以事親, 農熱則可以得熟穀, 商熱則可以得財, 汽熱則可以進車, 身體之內有熱血, 故血流圓滑健康增進, 身血冷則手足麻木不仁, 生命危險矣. 故熱昇日日增進之意也, 向上之意也. 無熱則墮, 無熱則降矣. 欲增進欲向上則捨熱何爲哉? 故向主之心冷却之時, 其危險如幼兒之去父母墮崖墮牀, 有不可救矣. 故佳仁此時殺弟, 亞當此時摘果, 魔鬼瞰此而肆惡, 使人失墜矣 故耑誠. 主曰恒在我道, 又曰日日負十架皆此意也. 主又曰醒不醒則魔誘必來. 大禹惜寸陰, 孔子時習, 文王待早, 舜鷄鳴而起, 明日明日云者, 無可成之事, 明日來無盡矣. 今日今日云者, 有可成之事, 今日不再來矣. 故救援卽在今日矣. 救援不在往昔, 不在來日, 在今日而已也. 今主在女人之目前, 而猶爲不知故主云在目前, 夏甲不知生水在目前, 徒呼泣而已, 乃聞主之言, 而往覓生水矣. 故救援不在遠, 不在後, 不在左, 不在右也. 皆在目前, 不必憂慮往探而已也. 今日吾人之情勢, 憂愁而已, 落心而已, 然所可知者, 救援在目前也.
시간이 귀중하다는 것은 <성경>이 여러 번 언급하였으니 다시 끌어낼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세월을 아끼라’고 하였고, 주님은 이르기를 ‘나는 인내하며 그 날을 기다린다’고 하셨는데, 이는 다 시간을 아끼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이 ‘청년의 때에 조물주를 기억하라’고 한 것도 역시 이 뜻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시간을 아껴서 쓸 데 없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시간이 나쁜 것[時惡시악]을 말하였는데 시간이 나쁘다는 것은 ‘오늘날 세상에 악한 일을 하는 때는 많고, 선한 일을 하는 때는 적다’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려고 할 때에 반드시 나쁜 비바람이 몰아치게 되고, 달이 밝은 밤에 반드시 별들과 구름이 밝음을 가리기 때문에 선한 일을 하려는 자는 반드시 먼저 악한 장애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는 오래 살려고 하는 자가 반드시 먼저 병을 제거하여야 되는 것과 같습니다.
완전히 좋은 물건은 없고, 완전히 선한 사람이 없는 것은 때가 나쁘기[時惡] 때문입니다. 주께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고, 그 날에 일어나는 일에 힘쓰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오늘’이라고 이른 것은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나 미래는 염려할 필요가 없고 사랑해야 될 것은 현재뿐입니다.
내가 성인(聖人)이 될 수 없는 것도 오늘에 있고, 내가 영웅이 될 수 있는 것도 역시 오늘에 있습니다. 아주 큰 부자도 오늘에 있고, 극빈자도 오늘에 있습니다. 만사는 오늘 결정이 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이라고 하는 것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구원의 방법도 그러하여 마땅히 오늘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구원이 전날에 있었다고 하나 아주 잘못 된 말입니다. 조선 사람이 이런 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그냥 선조의 백골만 믿고 있습니다. 혹은 선대의 산소가 명산 길지에 있고, 집터가 명당 길지인 것만 믿는다고 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혹, 다른 날에 보자고 하는 것은 지난 날의 일을 믿는 것과 다를 게 없습니다. 이는 과일나무 밑에 누워서 입 안에 과일이 떨어져 들어오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자식을 기르는 것은 반드시 뒷날 의지하기를 바라서입니다. 아버지를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뒷날 아버지가 죽은 뒤에 재산을 상속받기를 바라서입니다. 이런 어리석은 생각들은 말로써 다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독립하는 것이 귀중합니다. 독립은 내게 있으며, 또한 오늘에 있습니다. 오늘 게으르면서, 내일 독립하는 자를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땅히 현재에 분투하고 현재에 노예가 되어야 합니다, 뒷날의 모든 결과는 다 오늘의 어떠함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구원은 바로 오늘에 있다’고 하셨습니다. 유대인은 예루살렘[聖京]에서 알지도 못하는 신을 위하여 무익한 일을 하였으므로 내일에는 반드시 전복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이 참되면 내일도 참되고 오늘이 거짓이면 내일도 거짓입니다.
구원의 때는 언제입니까? 부활의 때입니다. 영생(永生)의 때입니다. 중생(重生)의 때입니다. 승천(昇天)의 때입니다. 주께서 이르기를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라고 한 것은 부활도 오늘에 있고, 중생도 오늘에있으며, 심판도 오늘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르기를 ‘열심으로 일하라’하였는데, 열이 없으면 죽습니다. 충성을 열심으로 하며 나라를 섬기고, 효도를 열심히 하며 어버이를 섬기고, 농사를 열심히 하면 잘 익은 곡식을 얻고, 장사를 열심히 하면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수증기가 열을 얻으면 차를 움직이고, 신체 안에 뜨거운 피가 있으면 피가 원활히 돌아서 건강이 증진 됩니다.
몸에 피가 냉하면 수족이 마비되고 움직이지 못하여 생명이 위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이 오른다는 것은 날마다 증진한다는 뜻이고 향상한다는 뜻이다. 열이 없으면 떨어지고 내려갑니다. 증진하고 향상하려면 열을 버려두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에게 향하는 마음이 냉각될 때 그 위험은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를 떠나 침상이나 낭떠러지에 떨어져도 구원할 수 없는 것과 같음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가인은 이 때에 아우를 죽였고, 아담[亞當]은 이 때 과일을 땄습니다. 마귀는 이런 것을 엿보고 있다가 악한 일을 자행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성의를 다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르시기를 ‘늘 나의 도에 있어라’ 하셨고, 또 ‘날마다 십자가를 져라’고 한 것은 다 이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깨어 있어라, 깨어 있지 않으면 마귀의 유혹이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중국 고대 하왕조(夏王朝)의 개국왕 대우(大禹)는 ‘짧은 시간[寸陰]도 아끼라’고 하였고, ‘배운 것을 때때로 익히라’고 하였으며, 주(周) 왕조의 창업주 문왕(文王)은 아침을 기다렸고, 성군의 대명사인 순(舜) 임금은 새벽닭이 울면 잠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합니다. 내일이 있으니 내일이 오면 하겠다고 말하는 자에게는 성공하는 일이 없습니다. 내일은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할 일은 오늘 행하는 자들이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은 다시 오지 않으므로 오늘 끝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바로 오늘에 있습니다. 구원은 지난날의 일도 아니고 내일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늘 있을 뿐입니다.
지금 주께서 바로 여인의 눈 앞에 있는데도 주를 알지 못하였으므로 주님은 ‘눈 앞에 있느니라’ 하셨습니다. 하갈은 생수가 눈 앞에 있는 것을 모르고 그냥 부르짖으며 통곡했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말을 듣고 가서 생수를 찾았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먼데 있지도 않고, 뒤에 있지도 않고, 왼쪽에 있지도 않고, 오른 편에 있지도 않으며, 모두 눈앞에 있습니다. 가서 찾아야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형편은 근심 걱정과 낙심뿐입니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구원이 목전에 있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