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신앙의 계단(信仰의 階段)
요한복음 14:1
정동교회
1932. 10. 23.
信仰有各種, 弟子從主時, 有各個信仰, 古代亦然, 有生理的信仰, 아브라함이願生子求神是也. 得이삭後信話情草, 故神以獻子懲之. 나하만(나아만)이有癩病, 得엘이아(엘리사)之治懇而得救, 新約多此等之信也. 此皆生理的信仰也. 其次有經濟的信仰, 貧時願得財, 財與信仰互相不關, 多財而信者甚稀. 如有多財而信者, 則此至貴之人也. 余見敎友中多信主後得財者, 稱以多忙而不禮拜, 此皆經濟的信仰也. 其次職業的信仰也. 某欲得農業而信, 至農庄, 擇勸作人禮拜後遞任, 禮拜之人星散無一人信者矣. 某欲圖職業而信, 至受洗禮遞職後不信, 以職業榮神者古之牧者是也. 其次奇迹的信仰, 某夫人病中見天使指路曰, 此路卽地獄也, 此路天堂也云, 夫人死之復甦, 甚奇之往禮拜堂, 又以此說勸人信之, 後有某種憾情而背信, 屢覓魔俗而葬. 其次有榮譽的信仰, 擧例歐美爲國中榮, 非受洗人不能爲國會議員, 此時人以受洗爲榮而非有信也. 야곱이亦然, 以其兩子坐主之左右云. 此皆榮譽的信仰也. 此皆普通信仰也. 此時得救不得救之時也. 或有大惑如빌입, 徐在德氏亦然. 雖有疑惑, 欲不捨求之, 終乃豁然貫通, 又此時憂喜之關也. 故有大愛而後有大喜也. 如債金多之寡婦祈禱得油而償債, 나인城之寡婦獨子死, 야이로之女死, 皆有大悲主活之, 癩病者之復潔, 此時死生之地, 死卽生之門也. 王臣之子, 百夫長之僕, 皆其例也. 誰不欲死中求生也? 不知生之門故皆死亡. 兵法陷之死地而後生云亦其例也. 普通以上之堦段何也? 更上一層樓, 層一層有奇觀, 如變化山上, 山上榮光燦烟, 門徒不覺心醉, 而山下怨謗嫉妬紛爭疾病彌滿也. 故欲塵累而得新空氣者, 上堦段可也. 上金剛毘盧之上, 萬物相之上, 其奇觀不可言矣. 此時意態大判, 我之行補神之攝理, 我之旨成神之旨, 我之善成神之善也. 故雖有困難信仰尤堅. 世人惡我我無關, 世人攻我我無關, 世人搗我我無關. 故主曰我遣汝, 如羊在狼中云. 在何地, 在何時, 神與我共在, 此時人逆我卽逆神也. 人惡我卽惡神也. 人愛我亦愛神也. 一切無關於我, 此時此人萬事可勘當, 能治家, 能治校, 能治國, 能治敎會何也? 此不偏不倚, 此人信神故神亦信之, 萬事有信故耳. 故主曰 凡事非信罪也云.
믿음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제자가 주님을 따를 때, 모두 제 각각의 신앙이 있습니다.
옛날에도 그러하여 생리적(生理的)인 신앙이 있었으니, 아브라함이 아들을 낳게 하여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삭을 얻은 뒤에 믿음에 대한 정이 소홀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바치도록 하여 징계를 하셨습니다.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으나 엘리사의 간절한 치료로 고침을 받았는데, <신약>에는 이러한 믿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생리적 신앙입니다.
그 다음은 경제적 신앙입니다.
가난할 때는 재물을 얻기를 원하나 재물과 신앙은 아무 관계도 없습니다. 그러나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만일 재물이 많은데도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지극히 귀한 사람입니다. 내가 볼 때 교우 중에는 주님을 믿은 뒤에 재물을 얻은 자들도 바빠서 예배에 참예하지 못한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게 다 경제적인 신앙입니다.
그 다음은 직업적인 신앙입니다.
어떤 이는 농업을 지도하고 싶어서 믿고 있습니다. 농장에 가서 부지런히 농사를 짓는 사람을 택하여 예배를 드린 후에, 다른 곳으로 떠나면 예배 드리던 사람은 다 흩어져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직업을 얻고 싶어서 믿다가, 세례를 받고 그 직책을 떠나면 믿지 않습니다. 직업을 가지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한 자는 예로부터 목자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다음은 기적적인 신앙입니다.
어느 부인은 병으로 앓는 중에 천사가 길을 가리키며 ‘이리 가면 지옥이고, 저리 가면 천당이다’라고 하는 것을 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부인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너무나 신기해서 예배당에 가게 되었고, 그 부인은 또한 이 이야기를 하여 사람들에게 신앙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 어떤 좋지 못한 감정 때문에 신앙을 저버리고 여러 번 마귀의 풍속을 따라 장례를 치렀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신앙입니다.
예를 든다면 유럽과 미국에서는 신앙을 갖는 것이 국가의 영광으로 여기는 까닭에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은 국회의원도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세례 받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지만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도 그러합니다. 그 두 아들이 주님의 좌우에 앉으려고 했는데 이는 다 영예를 위한 신앙입니다. 이는 모두 보통의 신앙입니다.
이때는 구원을 얻는가 못 얻는가 하는 때입니다. 어떤 이는 빌립처럼 큰 혼란을 가집니다. 서재덕(徐在德)씨도 그러하였는데 비록 의혹이 있어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구하여 마침내 믿음의 이치를 환하게 깨달았습니다. 또한 이러한 때가 기쁨과 근심의 관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큰 사랑이 있은 뒤에 큰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많은 돈을 빚진 과부가 기도로써 기름을 얻어 빚을 갚은 것과 같습니다.
나인이라는 성(城)의 과부는 외동아들이 죽었고,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은 큰 슬픔이었지만 주께서 그를 살렸습니다. 나병환자도 깨끗하게 고쳐 주셨으니 이때 삶과 죽음의 장소는 죽음이 곧 생명의 문이었습니다.
왕의 신하 아들과 백부장의 종이 다 그 예입니다. 누가 죽음에서 살기를 구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생명의 문을 모르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음의 땅에 빠뜨린 뒤에 살 수 있다’라고 한 것이 또한 그 예입니다.
보통 이상의 계단은 무엇입니까? ‘한 층의 누각을 다시 더 올라가라’고 하였는데, 누각의 한 층 한 층이 기이한 광경을 보여 주기 때문에 이는 마치 산 위로 오르며 변화하는 것과 같습니다. 산위의 영광은 눈부시게 빛나므로 제자들은 마음이 도취됨을 깨닫지 못 합니다. 그러나 산 아래는 원망과 비방과 질투, 분쟁, 그리고 질병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러운 티끌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운을 얻으려면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금강산의 비로봉 위에 있는 만물상에 올라보면 그 기이한 광경을 이루다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 때 우리의 뜻과 태도는 크게 갈리어 나의 행위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게 되고, 내가 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되고, 나의 선한 것은 하나님의 선한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비록 곤란이 있더라도 신앙이 더욱 굳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여도 나와 관계가 없고, 세상 사람이 나를 공격하여도 나와는 상관이 없으며, 세상 사람이 나를 짓눌러도 나에게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느 때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 때 사람들이 나를 거스르면 바로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고, 사람들이 나를 미워하면 바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것이며,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면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 모든 것이 나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 됩니다.
이 때 이러한 사람은 모든 일을 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집을 다스리고, 학교를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교회를 다스릴 수가 있습니다. 이는 어느 한 편에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하나님도 역시 그를 믿게 됩니다. 이는 만사에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일은 죄가 된다’고 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