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가시떨기(荊棘)란 무엇인가?
마가복음 4:18
主宣福音, 人未易曉, 故每將植物之眞理, 而說諭者多矣. 今又言荊棘之理, 而使問道者解理也. 荊棘惡木也, 無需於用, 而只作大木而已也. 然其根深其華茂, 其土地之肥沃可知也. 如首善農者, 則用力拔去其根伐其枝條, 則其地化爲良田, 可得百倍之穀矣. 如人心之忠厚聞眞道, 可得百倍之結果, 奈之何爲荊棘所蔽, 靈種不可得矣? 然則荊棘果何物也? 荊棘卽無需於用者, 而反貽害於他物, 菀然成叢, 掩蔽日光, 如可保護良種者, 然而實貽害莫大也. 種子雖好, 發苗雖速, 非太陽之助長則不可, 今棘身尨大獨蒙天惠. 昔宋仁宗有仁心, 編竹渡蟻, 而王安石輩擁蔽聰明, 使發靑苗之法, 民不得被其澤矣. 然則王安石爲宋人之荊棘也. 佛人占領安南, 使安南人不得仰天利用空氣, 必利用空氣, 則必納稅金後用之云, 然則佛人之於安南人, 如荊棘之叢矣. 今世之荊棘何可盡言也? 今却說政治之荊棘, 而欲銘心, 靈之荊棘也. 心棘何也? 主言三種, 一念慮, 二財利, 三物欲也. 一念慮何也? 卽空想也. 主曰爾等以念慮延生一割乎? 念慮卽無用之念也. 周興嗣校綴著千字文一夜頭盡白, 念慮之害人甚矣. 當初念慮之生, 由於違道, 生活無眞理, 又無生命, 故念慮起焉. 若人食之眞理, 衣之眞理, 居之眞理, 動之眞理, 其生活必有生命, 又必進步, 雖無進步, 必無禍患也. 故念慮自取也, 非他來也. 有患欲苟免, 有福欲苟取, 患得患失其行皆苟而已也. 曾於車中, 遇一奇事, 一嫗入阿峴契中, 入契錢五錢者已累月而不出, 故心甚憂慮, 其傍一老翁獻策曰 取一拓魂錢, 而往投則契卽出矣. 其傍一勞働者曰 老人速往共園墓地焉. 天下豈有如許之理乎? 入契本虛欲, 而翁以又虛事托之, 是如盜心無異云. 快哉是言也! 如是心無所主, 則念慮之後心生恐怖, 見燐火而生懼, 聞鬼嘯而生怖, 一人夢死妹, 心恐發病, 家人招巫請瞽, 百方恐動, 病人亦心弱添病而死也. 此皆心靈之荊棘也. 若心內眞理充滿, 外物不能捿惑, 則此荊棘必不得用事也. 其次財利也. 財利本非罪惡, 而反理而後爲罪也. 人欲取財欲反理而取之故生慮. 水之東流理也, 取之無害, 激向在山而取之, 則必有多種障碍也, 取之不可必者違理故也. 此世無數之人溺於利海而死者, 欲取違理之財故也, 此最傷道心是爲荊棘也. 信者當務去此棘, 故保羅曰 財爲萬惡之首, 主曰神與財不可兼事, 皆以此故也. 然則財聚於何也? 聚於勤者, 聚於知者, 勤而爲富者, 最適得財之述, 洪判書曾坐澄淸閣, 言曰 余嘗拾糞而農, 彼富商大賈何嘗一日休息乎? 申興雨氏言, 往美國見大統領不過十分, 見剛鐵大王三日後得見也. 剛鐵王奔走故也, 足證其勤勉. 且旱則貿舟, 水則貿車, 術也. 廉賈五之, 貪賈三之, 亦術也. 此等人皆以智取財, 無傷道心, 知經濟之眞理. 越國大夫之聚千金, 人皆誦之, 馬援北地邊牧以致富, 人皆稱之, 以勤與智取財者, 亦足以貿道也. 然反此欲取財, 此等財利皆荊棘也. 欲不農而食, 欲不商而富, 欲不勤而得, 欲不知而取, 慾火熾盛, 道心從而滅, 如風前之燭, 不滅何爲也? 其次物欲也.此物欲云者, 非但指財利也, 凡物生欲十誡, 人屋人妻不可貪, 余聞在美洲之學生, 不能工夫者非非也, 醉美人之文明, 虛榮滿滿, 工夫之心隨而冷矣. 口含卷煙, 眼掛金鏡, 手持短杖, 欲作紳士之樣, 不欲作學生之樣矣. 吾信者身着極侈之服, 慚看聖書者, 未有不陷罪也. 李明稙氏言, 某牧師陷罪免職, 某敎人言曰, 余嘗怪其行, 爲모본단댄님이證明也. 余亦見之. 高鍾哲氏甚冶容, 竟犯淫免職, 此等物欲皆爲信者之棘也. 不去此棘則道心不能長成, 此人之眼, 物大神小, 陽明(明王陽明)曰 若人有眼大如天, 還見山小月更闊. 人視山大於月, 故陽明言之. 物非不大而更思刱造者, 則物不足大. 觀金剛山九龍瀑眞莊嚴, 觀此佛人拜之云, 此人之拜, 拜於何處也? 神乎,瀑乎? 余亦觀此, 敬而畏之, 非瀑也卽神也. 尊視萬物者, 神不得大也.
「八月五日夕 體府」
주께서 복음을 선포하셨으나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식물의 진리를 가지고 설명하여 깨우치신 것이 많습니다. 지금도 또 가시떨기의 이치를 말하여 도리를 묻는 자에게 진리를 풀어주었습니다.
가시떨기란 좋지 않은 나무로 생활에 이용할 수 없으며 다만 크게 자랄 뿐입니다. 그 뿌리는 깊이 박히고 꽃은 무성하여 그것이 자라는 땅은 비옥함을 알 수 있습니다. 농사를 잘 짓는 자가 만일 그 뿌리를 힘써 뽑아내고 그 가지들을 베어버린다면 그 땅은 옥토로 변하여 백배의 곡식을 얻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충후(忠厚)하여 진리의 도를 듣는다면 백배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데 어쩌다가 가시떨기에 가려 영적인 종자가 자랄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시떨기는 과연 무엇입니까? 가시떨기는 쓸모가 없는 물건일 뿐 아니라 도리어 다른 것에 해를 끼치는 물건입니다. 이 가시떨기는 울창하게 떨기를 이루어서 햇볕을 가리기 때문에 보호할 다른 좋은 종자에 끼치는 폐해가 막대합니다. 종자가 아무리 좋고 싹이 아무리 빨리 나더라도 태양의 도움이 없으면 자랄 수가 없습니다. 가시떨기가 크게 자라 홀로 하늘의 혜택을 가로막기 때문입니다.
옛날 송(宋)나라 인종(仁宗) 황제는 착한 마음[인심仁心]을 가졌으므로 대나무를 엮어 다리를 놓아서 도랑을 건너려는 개미를 건너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왕안석(王安石)의 무리가 황제의 총명을 가리고 청묘법(靑苗法)이라는 법을 만들어 백성들에게 황제의 혜택을 받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런즉 왕안석은 송나라 사람들에게 있어서 가시떨기입니다.
프랑스 사람이 월남[안남安南]을 점령하고 월남 사람으로 하여금 하늘을 우러러 공기도 이용하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공기를 이용하려면 세금을 내고 이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프랑스 사람은 월남사람에게 가시 넝쿨의 떨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세상의 가시 넝쿨 같은 존재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치에 있어서 가시 떨기는 영적(靈的)인 가시넝쿨입니다. 마음의 가시 떨기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세 가지 종류입니다. 첫째가 염려(念慮), 둘째는 재리(財利), 셋째가 물욕(物慾)입니다.
첫째인 염려는 무엇입니까? 바로 공상(空想)입니다. 주께서‘너희가 염려하여 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시켰느냐’고 하셨습니다. 염려는 곧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중국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는 여러 문장을 주워 모아 <천자문千字文> 책을 지은 뒤,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쇠었다고 합니다. 염려는 이렇게 사람을 해치게 됩니다. 애초에 염려가 생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고 생활에 진리가 없게 되어 또한 생명이 없게 되므로 염려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람이 먹는 것과 입는 것과 사는 진리와 움직이는 진리에는 그 생활에 반드시 생명이 있습니다. 또 반드시 진보가 있습니다. 비록 진보가 없더라도 반드시 화는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염려는 스스로 취한 것이고 다른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걱정이 있으면 억지로 면하려고 하고, 복이 있으면 억지로 가지려고 하면 가지려는 걱정과 잃지 않으려는 걱정이 모두 구차스럽게 될 뿐입니다.
일찍이 차를 타고 가다가 기이한 일을 보았습니다. 한 노파가 아현계(阿峴契)라는 계모임에 들어서 곗돈 5전씩을 이미 여러 달 동안 부었는데 그 곗돈을 탈 수가 없게 되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늙은 영감이 방법을 가르쳐 주기를 ‘무덤의 영혼에 바치는 혼전(魂錢) 한 묶음 가져다가 던져주면 곗돈이 곧 나올 것이요’라고 하자, 이번에는 그 곁에 노동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노인 양반은 속히 공동묘지나 가시오. 천하에 그런 이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계에 드는 것은 본래 헛된 욕심에서 나온 것인데 노인 양반 또한 헛된 일을 시키니 이 모두 도둑 심보와 다른 게 무엇이오.’ 하였습니다. 참으로 명쾌한 말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 줏대가 없으면 염려하고 공포심이 생겨 어둔 밤에는 인광석(燐光石)의 불빛을 보고도 두려움이 생기고, 귀신의 휘파람소리가 들려 무서워합니다. 어떤 사람이 죽은 누이를 꿈에 보고 무서워서 병이 나자 집안사람들이 무당과 소경을 불러 푸닥거리를 하고 백방으로 두려움을 없애려고 노력하였으나 병자는 마음이 점점 더 약해지고 병이 깊어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이는 모두 심령의 가시떨기입니다. 만일 마음이 진리에 충만하고 밖의 유혹이 깃들이지 못하게 한다면 이와 같은 가시떨기는 힘을 쓰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 다음 둘째는 재리(財利)입니다.
재물의 이익인 재리는 본래 죄악이 아닙니다. 이치에 어긋난 뒤에 죄악이 됩니다. 사람들이 재물을 가지는데 이치에 어긋난 일을 해서라도 가지려고 하므로 걱정이 생깁니다. 물이 동쪽을 향하여 흐르는 것이 이치입니다. 그 물을 취하는데 해로움이 없다고 하여 산으로 거슬러 올려서 취하려고 하면 반드시 많은 장애를 가지게 됩니다. 가질 수가 없는 것을 가지려고 하니까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무수한 사람이 이익의 바다(利海)에 빠져 죽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게 재물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도덕의 마음을 가장 크게 상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가시넝쿨입니다. 신자는 마땅히 이 가시넝쿨을 제거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재물은 만 가지 악의 뿌리라’고 하였고, 주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은 어디에 모입니까? 부지런한 사람에게 모이고, 지식이 있는 자에게 모입니다.
부지런하여 부자가 되는 것은 재물을 얻는데 가장 알맞은 방법입니다. 홍(洪) 판서가 일찍이 징청각(澄淸閣)이라는 누각에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똥을 주워서 농사를 지었다’라고 하였는데, 저 부자 상인이나 큰 장사꾼이 언제 하루라도 휴식한 일이 있습니까? 신흥우(申興雨) 씨가 말하기를 ‘미국에 가서 대통령을 만나는 데는 불과 10분 걸렸는데, 강철대왕을 만나는 데는 3일을 지나서야 겨우 만나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늦은 것은 강철왕이 너무 바빴기 때문이었다고 하니 그것은 그의 부지런함을 족히 증명하는 것입니다.
또한 값이 쌀 때를 타서 가물면 배를 사고, 장마가 지면 수레를 사는 것도 재물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옛날 재물을 모으는 방법을 적은 <사기·화식전史記·貨殖傳>이라는 책에 청렴한 장사꾼은 물건을 헐값으로 파니까 결과에 가서는 이익이 원금의 5만큼 얻었지만 욕심 많은 장사꾼은 비싸게 팔려고 하다 보니 도리어 원금에 비한 이익은 3만큼 밖에 안 되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역시 재물을 모으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지혜로써 재물을 취하였으니 도덕적인 양심을 상하게 한 것은 없습니다.
경제의 진리를 아는 사람으로는 옛날 춘추시대 말기의 월(越)나라의 대부를 들 수 있습니다. 대부(大夫)는 천금(千金)을 모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고, 한(漢)나라의 장군 마원(馬援)은 북쪽 변경에 가서 목축을 하여 부자가 된 것을 사람들이 다 칭찬하였습니다. 부지런함과 지혜로써 재물을 모은 자는 역시 장사꾼의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나 이와 반대로 재물을 취하려고 하면, 이렇게 취하는 재물의 이익은 모두가 가시넝쿨입니다. 농사를 짓지 않고 먹으려고 하고, 장사하지 않고 부자 되려고 하고, 근면하지 않고 얻으려고 하며, 아무것도 모르면서 취하려고 하면 욕망의 불꽃이 활활 타 올라서 도덕을 지향하는 마음이 뒤따라 없어지게 되는 것이니, 이는 마치 바람 앞에 촛불 같아서 꺼지지 않고 어찌 견디겠습니까?
그 다음 셋째는 물욕입니다.
이 물욕이라고 이르는 것은 다만 재물의 이익만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물건에서 생기는 욕심에 대한 열 가지 경계할 일인 십계(十誡)가 있습니다. 곧 남의 집이나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고 한 것들입니다.
내가 들으니 ‘미국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공부 못하는 것이 잘 못이 아니고, 미국의 문명에 도취되어 허영심만 가득차서 공부하려는 마음이 뒤따라 식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입에는 권련 담배를 물고, 눈에 금테 안경을 쓰고, 손에는 단장을 짚고 신사 모양을 내려고 하며 학생의 모양을 내지 않으려고 한답니다.
우리 신자 중에도 아주 사치스러운 옷을 몸에 걸치고 <성경> 읽기를 부끄러워하는 자 치고 죄악에 빠지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이명직(李明稙) 씨가 말하기를 ‘어느 목사가 죄에 빠져 면직되었는데 어느 교인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본 것으로 그 목사의 괴이한 행위는 좋은 비단인 모본단 대님을 발목에 매고 다니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을, 나(이명직) 역시 그것을 보았다’라고 하였습니다. 고종철(高鍾哲) 씨도 용모를 매우 잘 가꾸었는데 그도 마침내 간음을 범하여 면직되었습니다. 이러한 물욕은 다 신자의 가시넝쿨입니다. 이 가시를 제거하지 않고는 도덕에 대한 양심을 길러낼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의 눈에는 물건이 커 보이고 하나님이 작게 보인 것입니다.
명(明)나라 왕양명(王陽明)의 시에 ‘사람이 만일 하늘 같이 큰 눈을 가졌다면[若人有眼大如天], 마침내 산이 작고 달이 넓다는 것을 알리라[還見山小月更闊]’고 하였는데 이는 사람들이 산을 달보다 크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왕양명이 한 말입니다. 물건이 크지 않음이 아니나 물건을 만든 창조주를 생각해 볼 때 물건은 그리 큰 것이 못 됩니다.
금강산의 구룡폭을 보면 참으로 장관입니다. 이것을 보고 여기에 있는 부처를 보며 사람들은 절을 하라고 합니다. 어디에 절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입니까, 폭포입니까? 나도 또한 이것을 보며 존경하는 마음과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것은 폭포가 아니고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만물을 존경하는 자는 하나님을 크게 볼 수 없습니다.
「8월 5일 저녁, 체부(體府)동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