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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
'朴現圭(順天鄕大中文科)
1. 서론
2.장해빈 사적과 한국절강장씨 유래
3. 張海濱 고향 義烏와 명장 吳惟忠 사적
4.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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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한국민이 다민족이었다는 사실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입증된다. 주변 국가의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경로를 통해 끊임없이 한국으로 들어와 정착하였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외침의 수난시기인 16세기말부터 17세기 중엽까지만 ’하다라도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한반도로 들어와 정착한 사람들이 꽤나 많았다. 숀 논문에서 다룬'한국 절강장씨의 사조 張海濱도 임진왜란시기에 한반도에 들어와 정착한 인물이다.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 전개된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커다란 한 장을 차지한 일대 사건이었다. 5백여 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임진왜란이 동아시아에서 연신 뜨거운 화제로 떠오르면서 학술, 영화, 소설,정치,외교 등 여러 방면에서 활발한 조명을 받고 있다. 필자는 일전에 동아시아 국제 전쟁인 임진왜란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보고자 중국 대륙으로 들어간 조선 유민,鄧子龍,季金, 張良相 등 조선에 파견된 명 장수들이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상과 국내외 유적들을 살펴본 적이 있었다.2〉이번에 또 한명의 명 장수로 한반도에 정착한. 장해빈에 대해 살펴보려고 한다.
한국 浙江張氏는 관향 절강에서 보듯이 중국에서 한반도에 들어온 성씨이다. 후손들이 장해빈을 해동 시조로 하고 그의 고향인 절강을 관향으로 삼았다. 시조 장해빈은 임진왜란 때 명 장수 吳惟忠의 부장으로 한반도에 들어와 울산 도산전투에서 일본군과 맞붙어 용맹하게 싸우다가 심한 부상을 당하여 끝내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군위 북산에 들어와 정착 했다. 현 경북 군위군 군위음 대북 1리가 절강장씨의 세거지이다. 이곳에 절강장씨' 문중과 지역 사람들이 장해빈의 공적을 기리가 위해 세운 北山書院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장해빈의 활동과 명 義烏軍의 관계,좀 더 구체적으로 적자면 장해빈이 한반도에서 활동한 제반사항, 절강장씨의 유래와 유적, 장해빈이 소속된 의오군의 성격, 상급장수 오유충과의 관계와 활동 등을 자세히 분석해본다. 장해빈과 오유충의 고향 절강 의오에 대한 현지 조사는 2015년 6월에 이루어졌고,한국 절강장씨의 세거지인 군위 대북리는동년 8월에 이루어졌다.
2. 張海濱 사적과 한국 浙江張氏.유래
절강장씨 집안은 지금까지 모두 6차례 족보를 편찬했다.: 무인보는 1758년(영조34),경오보는 1810년(순조10), 병진보는 1856년(철종7), 경자보는 1960년, 신유보는 1981년(서문 작)
1)朴現圭,〈임진왜란 시기 명나라로 건너간 조선 유민 고찰〉,《東北亞歷史論叢》, 41집, 東北亞歷史財團, 2013.09, 쪽253~298.
2)朴現圭,〈明將 鄧子龍의 활약과 죽음〉,《韓中人文學硏究》:22집, 韓中人文學會, 2007.12, 쪽237 257. —, <임란시기 明 水將 季金의 군사 행적 고찰〉,《李舜臣硏究論叢》, 21호, 順天鄕大學校 李舜臣硏究所, 2014.08, 쪽347 381.
----,〈明 水將 季金의 유적과 조선 문사의 수창 시편〉.《李舜臣硏究論叢》, 23호, 順天鄕大學校李舜臣硏究所, 2015.08, 쪽229*757. 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朴現圭) 2 성년: 1980년)경인보는2010년(서문 작성년: 2009년)에 편찬되었다. 아래에《절강장씨세보》에 적힌 기록에 의거하여 절강장씨의 시조인 장해빈의 사적에 대해 적어본다.
장해빈의 호는 華軒이고,浙江 金華府 烏江縣 출신이다.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烏江縣은 義烏縣으로 수정해야 한다. 장해빈의 후손들은 시조 고향 의오현의 상급지인 省名을따서 관향으로 정했다. 한반도에 정착한 절강 출신 명 장수의 집안, 浙江施氏(施文用),浙江徐氏(徐海龍의 증손 徐鶴),浙江彭氏(彭友德과 아들 彭信古),浙江片氏,(片碣頌)들도 절강을관향으로 삼았다.
절강장씨는 한나라 승상 留侯 張良에서 나왔다고 한다. 아쉽게도 장해빈이 조선 원병에나설 때 족보를 가져오지 않는 바람에 증조부 아상의 계보를 상고할 수가 없다. 증조 孟慶은 진사 출신이다. 조부 忠源은 34세에 문과 급제하여 通州(현 南通),楊州(현 揚州), 溫州등 刺史를 역임했다. 부친 應華는 太醫院監을 역임했고,모친은 朱氏이다.3》
장해빈은 1575년(만력 3; 선조 8) 4월,2일에.:태어났다. 소싯적부터 용맹하고 담력과 지략이 있으며,의약과 수학에 뛰어났다. 23세가 되는 해,.즉 1597난(선초 30) 정유왜란 때 副摁兵 오유충의 左部二司把摁이 되어 '한반도에 들어왔다.11 월 29일에 竹山(현 안성 죽산면)에서 일본군과 맞붙자 앞장서서 싸웠다. 이때 왼쪽 옆구리에 총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동여매고 힘껏 싸워 적을 물리쳤다. 곧이어 충추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뒤에서 언급하겠지만《절강장씨세보》에 적힌 장해빈의 죽산 기톡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
얼마 후 장해빈은 울산 甑城, 즉 도산전투에서 앞장서사 일본군과 대작하다가 왼쪽 다리에 적이 쏜 유탄올 맞아 부상을 당했으나,끼내 상처를 동여매고 다시 일어나 용맹하게 싸웠다.3 4 5)
그 후 부상 정도가 심하여 풍토가 좋은 군위'北山으로 들어와 정착했고, 끝내 본진과 함께 귀국하지 못했다. 훗날 조선 조정으로부터 惠民署參奉, 栗峰察訪의 직첩을 받았으나,모두 부임하지 않았다.5》장해빈의 키는 9척 장신이다. 말 타기를 좋아했고,천문지리와 관상을 잘 보았다. 특히 의약에 정통했다. 한번은 군위현감의 질환이 심하여 여러 약을 쓰도 효과를 보지 못하자, 장해빈이 나서 진료하고 올바른 처방을 내어 치유시켰다. 또 안동부사가 괴질을 앓았는데,장해빈이 처방한 약을 먹고 병이 나았다. 당시 사람들이 장해빈이 황실 태의감인 부친 장응화의 뛰어난의술을 이어받았다고 여겼다.6)
3)《(경인본)浙江張氏世譜》朴慶龜 <參判公行狀>: f參判張公諱海濱, 皇明浙江省金華府烏江縣人也.曾祖諱孟慶,皇明進士.祖諱忠源,行三十四,登文科,行通州•楊州•溫州等刺史.考諱應華,太醫院監.
--- 公乃西漢留侯之後, 而負羽行軍之日, 未得袖來先代系譜,故曾祖以上不可祥考.』朴慶龜가 장해빈 행장을 작성한 연도는 1744년(영조 20)이고, 조선: 조정에서 장해빈에게 예조참판으로 증직한다는 교서를 하사한 연도는 1892년(고종 29)이다. 따라서 경 인본 족보에 ‘적힌 편명〈참판공행장〉은 후대에 고종 연간의 교서를 근거로 수정한 것이다.
4)《절강장씨세보》申海 집안《龍蛇日記》: '■十二月, 麻提督 • 吳游擊領騎步兵數萬, 進攻蔚山賊時,賊將淸正築城蔚山郡東海邊斗絶處,境督與游擊相議欲出,其不意掩之,以海濱爲先鋒,率鐵騎馳擊之,賊披靡不能支.轉闘于釜山,海濱爲流丸所中,深入肩胛二寸,拔刀挑出,血流滿地,猶袠瘡再戰,一軍皆驚歎.j 여기에서 장해빈이 총상을 입은 장소를 부산전투라고 했는데, 이는 울산전투로 수정할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시기에 부산에서는 명군과 일본군이 전투한 적이 없었다. 오유충이 부산으로 내려 갈 때는 사실상 임진왜란이 사실상 끝난 이후이다. 또 장해빈이 총상을 입은 신체에 대해서도《용사일기》는 어깨라고 했고,박경구의 <참판공행장>은 왼쪽 다리라고 했다.
5)《절강장씨세보》朴慶庭 <參判公行狀〉: f(장해빈)公生于嘉靖乙亥四月初二日, 勇健有膽略, 又精於醫藥, 善於學數, 一 逮至丁酉三月初三日, 又遺(遣의 오류)吳游轚惟忠、, 頜兵來救, 公乃左部二司把惚(揀의 오류), 時年二十三歲. 同年十一月二十九日, 與倭遇於竹山縣, 公身先士卒,上馬疾呼, 以短兵相接之時,左脅傷於流丸,袠瘡力戰,則倭寇退山.一追至于廚山甑城,公輕敵先驅,交兵之際,亦爲流丸所中,重傷左脚,不形痛色,策馬撺戈,多斬首級,則倭寇乘間,越海而走.扱其吳游擊竣事振旅之日,公累傷流丸瘡處,久而未完,難與俱去.雅喜東方風土之厚,占地於本道軍威北山里,因居焉.—自本朝特除惠民署參奉,栗峰察訪,公行此數職,亦不喜從仕致仕而止.享年八十三矣
6)南泰普《赤羅誌》권1〈事實> 중 장해빈조:『身長九尺, 善騎射, 如天文地理, 治病相人之法,亦皆精透,---嘗到邑邸,適主悴病,欲服藥無效,海濱問證與藥,曰:此藥非對證之劑,病不可己也.傍聽者走告于縣衙,衙客出迎使視病,投漿卽愈.時安東府伯有怪疾,服其槳,亦愈,自是病家相邀,其所劑活甚衆云.海演之父應華爲皇朝太醫監,抑應華精於醫,海濱世其業歟?至若占候堪興等術,俗傳其善解而未有信徵 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朴現圭) 군위 북산에 정착한 이후에도 장해반은 머나 먼 고향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심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매일 아침 북쪽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한숨을 쉬며 고향의 정을 잊지 못했다.
7)아래에 장해빈이 말년에 지었던 시를 감상해본다.
8) 落腥塵萬事非 비린내 나는 풍진께 떨어져 만사가 글러졌고
六朝文物夢依依 六朝의 문물은 꿈속에 아른거리네
江南庾信平生恨 강남 출신 庾信은 한 평생 한이 되고
塞北蘇郞何曰歸 塞北에 간 蘇武는 언제나 돌아갈까
三十年間風異土 십 년간 풍토가 다른 곳에
八千里外月同輝 팔천 리 바깥에도 달빛은 다 같도다
華音已變明裘弊 華音 은 이미 변했고 명나라 갑옷도 헤어자고
誰識楊江舊布衣 누가 양자강의 옛 포의를 알 것인가
여기에서 장해빈이 고향을 얼마나 그리위 하는 마음을 잘 읽을 수 있다. 살육의 피 비린내가 나는 전장에서 부상을 입는 바람에 치료를 하키 위해 본진과 떨어져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꿈속에서 희미하게나마 고향에 세워진 육조 문물들이 아른거리지만, 타국에서 원하지 않게 오랜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庾信과 蘇武 .고사가 떠올랐다. 남조 양나라 문인 庾信은 西魏로 사신으로 갔다가 조국이 망해 복조에. 마물따 평생 돌아가지 못했고,한 문제때 蘇武가 흉노에 사신으로 갔다가 볼모가 되아 19년간 억류생활을 하며 갖은 고생을 하였다.
자신은 풍토가 다른 조선에 정착한지 삼십년이 되었지만,늘 고향 생각이 간절하였다. 북산 하늘에 밝게 비치는 달빛이 팔 천리나 떨어진 고향 의오에도 비쥔다며 긴 한숨만 내쉬었다. 조선에 정착한지 오래되어 중국어호 듣,말할 기회가 없어 말투조차 변했고, 전쟁 때 입고 있었던 갑옷이 오랜 시일이 지나 너덜너덜 해어져 어느 누구도 자신이 중국 강남에 사는 사람인줄 몰라준다.
1657년(효종 8) 11월 19일에 장해빈이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장해빈이 돌아가기 7일 전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잔치를 열어 고마움을 표시하고, 그 날에 이르자 목욕재계하고 새 옷을 갈아입고 북쪽과 서쪽을 향해 사배한 뒤에 서거했다고 전해온다,9 10 11)북면 사배는 한반도에서 정착하고 벼슬을 내준 조선 국왕에게 마지막 인사를 표시하고, 서면 사배는 망국 명나라 황실과 고향을 그리워한 마음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묘소는 장해빈이 생전에 지목한 마을 남쪽 乙坐原에 묻혔다
. ..
부인은 宜寧 南平三의 따님이고,5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德禮로 通德郞이 되었다. 차남은 德智이고, 삼남은 德悌이며,.사남은 德信이며,오남은. 德安으로 通政大夫가 되었다.10) 딸은 鄭繼龍에게 출가했다. 장해빈의 후손들은 대대로 북산에 집단으로 거주했다. 영조 중엽에 북산에 장해빈의 자손 1백여 명이 수십 호를 형성하며 선대의 업을 고수하며 살고 있었고,마을 이름올 성씨를 따서 張村이라고 불렀다11)
. 1717년(숙종 43)에 절강장씨를 向化人으로 여기고 徵布稅役 처분을 내렸다. 향화인은 타국인이 한반도에 들어와 국적을 얻은 자이다. 조선 시대에 간간이 중국인들이 한반도로 들어와 정착했고, 특히 명청교체기에 난리롤 피해 이입한 중국인아 매우 많았다. 숙종은 향화인 을 관리하고 세수를 확대하자는 閔鎭厚의 건의를 받아들어 향화인에게 부역을 부과시키는 조치를 시행했다.
7)《절강장씨세보》朴慶龜 <參判公行狀〉: '•(장해빈)而公一自留東之後, 不忘首丘之情, 每朝北望四拜,噓唏咄嗟,是乃不耐,懷土之意也.j
8)장해빈 시는 山雲 李紫巖의 遺草에 수록되었다.
9)《절강장씨세보》중《軍威邑誌》騰番 <參判公事跡〉: r張察訪海濱,.生于萬歷(曆의 피휘)乙亥, 以崇禎後丁酉十一月十九日巳時歿焉.壽八十三.未歿前七日,戒子孫,具遠行衣物,且買兩牛多釀酒,先宰一牛飼子孫,又宰一牛饗鄕里,曰:吾以某日將死,從此訣矣.至其日平朝沐浴,着新衣,北面四拜,又西向四拜, 拜訖, 命侍子設席而臥, 條然而逝. 云西向, 似出首丘之情.: 이 사적은 1892년(고종 29)에 장해빈을 병조참판에 중직할 때 작성되었다.
10)통덕랑의 품계는 정5품 상계이고, 통정대부는 정3품 상계이다.
11)南泰普《赤羅誌》권1 <事實〉중 장해빈조:「娶宜寧南氏, 生七(五자의 오류)男, 內外孫曾無慮百餘人,至今同居一里,稱張村.—今見其地,在於山谷中,決非豪右所宜居,至今子孫累十戶同居,保守先業.、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朴現圭) 4
여기에 대해 손자 張天益은 시조 장해빈이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러 온 명 장수이므로 자신들은 향화인이 아니고 華人이라며 李如栢 후손의 경우처럼 징포세역을 면해주기를바란다는 상소문을 올렸다.11) 이여백은 1592년(선조 25)에 형 李如松과 함께 조선 원병에 나선 장수이고, 1619년(광해군 19)에 사르후전투에서 전사했다. 이여백의 손자 李成龍이 후금의 추적을 피해 조선에 들어와 정착했다.
1748년(영조 24)에 군위현감에 부임한 南泰普가 고을의 역사를 담은《赤羅誌》편찬 작업에 나섰다. 赤羅는 군위의 별칭으로 군위읍 남쪽에 소재한 산명에서 나왔다.《적라지》<事實〉에는 남태보가 조사한 장해빈의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1751년(영조 27)에 남태보가 장해빈의 사적을 동생인 숭지 南泰 통해 영조에게 아뢰자,14)
영조는 화인과 향화인의 정의를 새롭게 규정한 뒤 향화인으로 잘못 편입된 화인들에게 징포세역을 면해주라는 조치를 내렸다.15) 곧이어 예조와 해당 관아가 장해빈의 사적을 조사한 보고서를 올려 보내자,16) 영조는 장해빈의 후손들을 화인으로 편입시키고 세거지인 북산 마을을 중화촌이라는 칭호를 내렸다,17)
1796년(정조 29) 3월 2일에 정조가 皇壇에 올라 황조인과 본조 충신들을 위해 제향을 지낸 뒤에 <皇壇親享日,敬次兩朝御製韻〉올 지어 황조인과 충신 자손,抄啓文臣들에게 나누어주어 화답시를 지어 바치도록 했다18). 이때 장해빈 후손들도 군위관아를 통해 어제시를 받았다. 오늘날 북산서원에는 정조 어제시를 새긴 편백이 걸려 있다19). 1892년(고종 29) 10월에 조정은 장해빈을 嘉善大夫 兵曹參判 兼 同知義禁府訓練院事로 추증하고, 부인 의령 남씨를 貞夫人에 추증한 교지를 내려 보냈다. 현재 이 교지는 절강장씨 집안에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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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군 군위옴 대북 1리가 절강장씨와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는 “절강장씨 입향마을, 北山書院”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대북리 대북길 211-1(구 34번지)에는 절강장씨의묘우안, 북산서원이 있다. 1846년(헌종 12)에 절강장씨의 후손들이 .시조가 살았던 집터에다조상의 유덕을 기리고자 景華祠를 창건했다.20) 고종 초에 홍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887년(고종 24) 훼철된 재실올 다시 손질해 중건하고 조상의고국을 기리는곳에 大明壇을 쌓았다.21) 1926년에 경화사를 보수했다.22》 1958년에 문종과, 사림의 뜻을 모아 사당을 서원으로 숭격했다.23〉
서원 대청에는 정조 어필시,洪在吉의 <景華祠重建上樑文〉,李天英의 <追遠感慕錄〉,金翼鉉의 <北山書院香爐記〉, 李家源의 <宣德香爐銘〉편액이 걸려 있다.24) 왼편에 淸肅齋,
12)《숙종실록》43년 11월 22일(임신〉조.
13)《절강장씨세보》張天益 <上言疏〉참조. 장천익은 장해빈의 고손자이다.
14)남태보《赤羅誌》권1 <事實〉중 장해빈조과《절강장씨세보》<軍威縣監報狀〉참조.
15)〈筵話 • 英廟朝〉1751년(영조 27) 10월 8일조:『承旨南泰耆啓曰:,--- 我國所謂向化, 卽指倭人 • 胡人之在我國者,而聞慶尙道有皇明人屬於禮曹,向化收布云.豈以皇明人而謂之向化乎?上曰:然乎.豈有此事?承旨曰:臣兄泰普方爲軍威縣監,而是邑亦有之云.----上曰:,野人■倭人外,名以向化,其名不可.----此外,野•倭子孫外,其除向化之名,稱以華人子孫,屬禮曹,勿捧其布,亦除没名爲可,以此分付.』
16)《절강장씨세보》〈禮曹關文〉동년 10월 22일, 11월 28일조 등 참조.
17)《절강장씨세보》李建發 <有明金華府張公遺蹟後識>:「(장해빈)公之後嗣,遺落茲土者, 不幸零替,曾無聞知於世.南侯泰普之知縣也,張某雲仍之在治內,轉連于朝.英廟聞而異之,特賜華人之號,而存恤焉. 以所居里名中華村, 數百年湮沒之跡, 於是乎始著矣u 이건발 후지는 1846년(헌종 12)에 작성되었다.
18)《日省錄》정조 20년 3월 2일(무신)조 및《弘濟全番》권7〈皇壇親享日, 敬次兩朝御製韻〉참조.
19)《軍威邑誌》를 인용한《절강장씨세보》의 기록에는 정조 어제시 사적을 1731년(정조 17)으로 잘못 기재되었음.
20)《절강장씨세보》張應奎 <景華齋〉. 張應奎는 9대손임.
21)《절강장씨세보》정해년(1887) 李元英〈追遠感慕錄X
22)《절강장씨세보》병인년(1926) 洪在吉〈景華祠重建上樑文〉.
23)무술년(1958) 洪趟憶〈北山社陞院奉安文〉. 1992년에 편찬된《軍威文化遺蹟誌》에는 북산서원이사당에서 서원으로 숭격한 연도를 1959년(기해)으로 잘못 기재되었음.
24)북산서원에 걸린〈宣德香逋銘〉을 보면 宣德香爐가 조부 忠源이 명 宣宗帝로 받았던 보물이고, 임진왜란 때 장해빈이 가져온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하지만 장해빈이 집안의 족보조차 가져오지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朴現圭) 5
뒤편에 不祧廟가 있다. 마당에는 병인년(1926)에 李中轍이 짓고 崔恒默이 쓰고, 1996년에 후손張應武가 쓰고 다시 세운 <行宣務郞栗峯道察訪, 贈嘉善大夫兵曹參判兼訓練院事, 華軒張先生神道碑〉가 있다.
또 뒤편 왼쪽에는 커다란 회나무가 있는데; 이는 시조 장해빈이 심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마을 입구 오른편 언덕에 절강장씨의 가족요소가 있다. 가장 위쪽이 장해빈과 부안 의녕남씨의 쌍분묘이다.
분묘 오른편에 병인년(1926)에 비문을 柳道龜가 짓고 2012년에 金昌會가적고, 또 같은 해 추진위원회의 후기를 담은 <贈兵曹參判華軒張先生之墓, 贈貞夫人宜寧南氏跗〉가 세워져 있다. 그 아래에 차남 張德智와 부인 豊山柳氏 등 분묘가 있다.
3. 張海濱 고향 義烏와 명장 吳惟忠 사적
《절강장씨세보》를 비롯한 각종 기록에는 장해빈이 浙江 金華府 烏江縣 출신이고,1597년(선조 30) 정유왜란 때 명 副摁兵 吳惟忠의 左部二司把摁으로 한반도에 들어왔다고 했다.
중국 역대지명을 조사해보아도 烏江縣이라는 지명을 찾을 수 없다. 절강장씨 집안에서는 관향 절강이 중국 동남 연해안에 위치한 성급 행정명이고,. 錢塘江이 절강을 가로지르며 동서로 나누어지고 抗州를 省都라는 사실만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기록들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장해빈의 고향 지역올 정확하게 파악할 수 았다. 義烏는 절강성 중부에 위치하고 있다. BC 222년(진시황 25)에 처음으로 烏傷이라는 현이 건립되었는데,현명은 효자 顔烏와 유래에서 따왔다. AD 9년(新莽 2)에 烏孝縣으로 바뀌었다가,동한 건립 후 다시 오상현으로 회복되었다. 621년(당 武德 7)에 오상현을 오효현과 華川縣으로 분할되었다가 624년(무덕 7)에 두 현이 다시 합병되면서 義烏縣이 되었다. 1988년에 義烏市로 승격되었다.
명청 시대에 의오는 婺州,즉 金華府에 속해 있었고,지금도 의오시는 금화시에 소속된 현급시이다.《절강장씨세보》를 바롯한 각종 기록에서도 烏江縣이 金華府에 속해있다고 했다.
아래에서 언급하겠지만 장해빈이 모신 오유충의 고향은 浙江 金華府 義烏縣 吳坎頭村(현 義烏市 城西街道 吳坎頭村)이다.. 임진왜란 때 오유충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의 주력은 義烏兵출신이다. 따라서《절강장씨세보》를 비롯한 각종 기록에 적힌 烏江縣은 義烏縣으로 수정해야 한다
.
《절강장씨세보》에 보이는 烏江끼라는 기록은 어떻게 나왔을까? 의오 경내에는 義烏江,大陳江, 洪巡溪 등 여러 강이 흐르고 있다. 그 중에 가장 긴 강이 의오강인데, 盤安縣 大盤山에서 발원하여 徐江鎭 中央村에서 南江과 만나 婪江으로 들어갔다. 의오 경내에 흐르는의오강의 길이는 총 39.751애이고, 대소 지류 90여 개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장해빈은 그가살았던 고향 마을에 의오강이 흐르고 있었던 관계로 출신을 행정지 義烏 대신에 烏江이라고말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서 장해빈과 의오군의 관계를 살펴본다. 의오군은 16세기에 의오 출신으로 구성된병사 집단을 지칭하며,중국에서는 통상 義烏兵이라고 부른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왜구들이 대규모로 편성하여 중국 대륙 연해안을 침공하여 인민들을 살육하고 재물 약탈을 일삼아 국가 기반까지 혼들릴 정도로 명 조정에 커다란 골칫거리였다
. 16세기 후기 때 중국 동남연해안에서 활개를 치던 왜구들을 토벌하는데 큰 공올 세운 장수 戚繼光이 있다. 척계광이 절강에서 강한 왜구를 대적하기 위해 군사 소질이 뛰어난 병사들을 모집하여 親軍으로편성했는데, 의오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 의오 사람들의 기질이 씩씩하고 날래며 사나워서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었다.
척계광이 처음에는 의오병 4천 명을 모집하여 親軍으로 편성하여 台州전투에서 대첩을 거두었다.
이후에도 의오령을 여러 차례 모집하여 戚家軍의 주력으로 삼아 절강, 복건,광동연해안에서 왜구들을 물리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척계광이 조정의 명에 따라 하북으로 옮기게 되자 의오군을 거느리고 북상했다.
의오군은 九門口, 老龍頭,金山嶺,董家口 등지의 장성을 수축하고 변방을 수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최근 하북 撫寧縣 駐操營鎭 董家口, 城子峪,板厂峪村 등에 의오군의 후예들이 살고 있던 소식이 전해와 화제가 되었다.
1771년( 건룡36).에 세운 婁府 고분의 비석에서 “原籍金.華府易武(義烏)縣人氏"라는 비문이 있고,25) 1965년에 작성된 吳氏《家譜萬世傳》에 원적이 금화부 의오현이고,명 만력 연간에 장성을지키기 위해 왔다가 董家口에 머무렸다고 했다.26)
한반도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오군은 명 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의오 출신 오유충, 陳蠶, 樓大有, 胡大受,葉邦榮,葉思忠,黃惟遜 등이 의오군을 거느리고 平壤, 順天,南海, 安康 등지에서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절강장씨의 시조 장해빈도오유충의 부장으로 의오병을 거느리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왜구 토벌, 변방 수비,조선 원병 등에 참전한 의오군의 숫자는 매우 많았다. 척계광이 여러 차례 모집한 의오군만 1만 6천 명이나 되었고,또 의오 장수들이 모집한 의오군을 더하면 수만 명이 되었다. 출정한 의오군 가운데 고향으로 돌아온 자가 겨우 10분의 3 정도로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용맹하게 싸워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당시 의오현은 사망 또는부상당한 의오군의 가족들아 넘쳐났고,또한 전체 인구가 대폭 감소되어 사화 기반이 혼들릴 정도로 폐해가 막심했다
.
임진왜란 때 참전한 의오군 장수 가운데 육지에서'뛰어난 공적을 세운 자가 오감두촌 출신의 오유충이다. 오유충의 자는 輿誠이고,호는 雲峯이다. 일찍이 의오군을 거느리고 척계광을 따라 왜구들과의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또 장성을 수축할 때 공을 세워 右營遊擊將軍, 山海關參將 등에 올랐다.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薊鎭參將으로 의오군이 주력이 된 남병1천5백명을이끌고 제독 李始松이 이끄는 대군에 편입되어 한반도 에 들어왔다.
1593년(선조 26) 1월에 조선 .명 .연합군이 평양성 탈환에서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나서 .성곽을 공략하여 대첩을 거두는데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27) 오유충은 가슴에 총탄을 맞아 부상이 심각했으나,다시 일어나 부하들을 독전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이때 오유충 소속에는 천총을 포함하여 많은 의오병이 전사했다.28) 그 후 남하하여 상주, 경주 등지로 옮겨 지켰다. 11월에 안강전투에서 일본군의 침공을 받아 부하227명을 잃었다.29) 1594년(선조 27)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1597년(선조 30)에 정유왜란으로 전쟁이 다시 격화되자,명군이 다시 대규모 조선 원병에나섰다.
5월에 오유충은 欽差備倭中翼副摁兵으로 절강과 복건 출신의 보병 3,997명과 노새 •말 325필을 거느리고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다.30). 6월에 한양으로 들어왔고.,7월에 남하하여 竹山, 忠州,尙州,安東 등지에 옮겨 주둔하였다. 12월부터 이듬쾌 1월까지 經理 楊鎬가 이끄는 대군에 편성되어 일본 加藤淸正이 주둔한 울산 島山城 공략에 나서 용맹하게 싸웠으나,양호의 작전 실패와 대규모 •일본 지원군의 등장으로 실패했다. 그 후 善山,안동,영천,新寧, 河陽 등지에 주둔했다.31)
일본군어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에 부산으로 옮겨 주둔했다.32)
1599년(선조 32)에 한양으로 왔다가,4월에 본국으로 귀국했다.
오유충의 고향 오감두촌은 柳溪 오씨들의 집단촌이다. 오씨 집안에서 편찬한《柳溪吳氏宗譜》에 오유충 일대기를 담은 <雲峯吳將軍傳〉이 기술되어. 있다. 마을 곳곳에는 오유충적올 찾아볼 수 있다. 마을 동편 입구에는 오유충의 호를 딴 雲峰亭과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기념비 전면에는 2005년 5월에 오감두촌이 작성한 <吳雲峰傳記〉가 기술되어 있고,후면에는 동년 6월에 만든 <吳雲峰像〉이 새겨져 있다. 또 서편 입구에는 “千年古都 吳磡頭”라는 커다란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비석 후면에 마을. 명인으로 오유충을 꼽고.있는 기록이보인다. 또 마을 동서로 연결되는 주통로에 소재한 가옥의 벽면에는 오유충의 일대기를 담은 벽화가 그러져 있다.
25)〈義烏兵墓碑〉사진(《千古長城義烏兵》, 人民文學出版社, 北京, 2014.6, 쪽 150).
26)吳氏《家譜萬世傳》:「原籍絶江金華府義烏縣,於明萬曆年間拔山海關,護守長城各口門,次後落在董
家口(《千古長城義烏兵》, 동전서, 쪽143가44)
27)《선조실록》26년 2월 19일(갑진)조.
28)《선조실록》에년 정월 14일(기사)조.
29)《經略復國要編》권12〈參失事將官疏〉(만력 21년 윤11월 28일) 참조.
30)정유왜란 때 오유충이 압록강을 건넌 시점에 대해 신흠의《상촌선생문집》에는 1597년(만력 25:
선조 30) 6월로 적고 있으나,《선조실록》에 의하면 1597년 5월 16일이다.《선조실록》30년 5월
25일(을묘)조 참조.
31)《선조실록》31년 3월 29일(갑인)조, 8월 3일(병진)조.
32)《선조실록》32년 1월 13일(갑오)조.
정유왜란 때 장해빈은 오유충의 부장, 즉 左部二司副將으로 활동했다. 장해빈이 한반도에서 활동한 군사 행적은 동일집단에 속해있는 오유충과 함께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절강장씨세보》에는 장해빈과 오유충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내용이 곳곳에 기술되어 있다.
1744년(영조 20)에 작성된 朴慶龜의〈參判公行狀〉에 1597년(선조 30) 11월 29일에 장해빈과오유충이 일본군과 맞붙은 죽산전투를 언급한 대목이 있다. 죽산(현 안성 소속)전투에서 장해빈이 앞장서서 말을 타고 호령하고 단병으로 적과 직접 맞붙어 백병전을 펼칠 때 왼쪽 어깨에 유탄을 맞아서도 상처를 싸매고 사력을 다하여 싸우니 적들이 무너졌다. 이번 전투에서 대첩을 거둔 공적올 새긴 비석을 죽산에 세우고,그 비석에 "天朝副摁兵吳公惟忠德淸仁勇碑”라고 새겨놓았다. 이때 장해빈이 큰 공적을 세웠으나 상관을 높이고자 비석에 오유충의 이름이 들어갔다고 했다.했ᆻ여기에서 박경구가 기술한 죽산전투가 얼마만큼 는 사건이 있었지만,정유왜란 때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장해빈과 무관하다. 1593년(선조26)에 충청도병마절도사 黃進이 죽산에서 福島正則이 이끄는 일본군과 맞붙여 대파시켜 승첩을 거두었다.
정유왜란이 재개된 이후 일본군이 북상하여 죽산과 가까운 직산까지 쳐들어온 적이 있었지만,죽산은 끝끝내 전쟁터에사 벗어나 있었다. 1597년(선조 30) 9월에 일본군의 주력이 삼도 지역을 유린한 뒤 파죽지세로 북상하다가 稷山,素沙坪(현 천안 소속)에서 海生,楊登山,牛伯英, 麻貴 둥이 거느린 땅군과 맞붙어 대패를 당했다. 일본군은 직산패전으로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끝내 대군을 이끌고 동남연해안 지역으로 철수하였다. 혹시 직산전투에서 도망친 패잔병이 죽산으로 들어왔던 경우롤 생각해볼 수가 있자만,이. 또한 박경구가 말한 전투 시점이 11월이라 이미 두 달이 넘었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하지만 박경구의 기록처럼 정유왜란 때: 오유충이 죽산에 주둔했고, 또한 오유충 비석이죽산에 세워졌던 것은 사실이다. 1597년(선조 30) .7월에 오유충은 .군사를 거느리고 한양을떠 났다. 당초 명 장수들의 주둔지를 나눌 때 오유충이 남원으로 내 려 가고,楊元이 충주로 내려가려고 하였으나,도중에’충주성이 크게 피폐된 상태라 오유충과 양원이 주둔지를 서로바꾸었다.여) 오유충이 충주로 향하기 전에‘ 잠시 죽산에 머물렀다. 이때 오유충의 청덕을 기린 <天朝副摁兵吳惟忠德淸仁勇碑>가 세워졌다. 조선 후기 실학자 成海應은 2백 년 전에 오유충이 韓濩에게 준 친필 편지를 보고난 뒤에 자신이 일찍이 죽산을 지났을 패 길가에서 조선인들이 세웠던 <天朝副總兵吳惟忠德淸仁勇碑〉를 보았고 했다.35〉
또 박경구는〈참판공행장〉에서 장해빈이 충주에서도 전승비를 세웠다고 했다.예) 이 전숭비는 충주에 세워진 오유충의 청덕비를 지칭한다. 오유충의 인품이 뛰어나고 행실이 바르며유자의 기상이 있었으며, 또한 주둔지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엄격하
게 통제했다. 그래서인지 오유충이 지나가는 지역마다 백성들이 오유충의 청덕을 기리는 비석올 세웠는데, 그 지역이 죽산,주, 안동 등 모두 5곳이나 되었다.33 34 35 36 37) 안동 선비 衰龍吉은상주와 안동에서 오유충의 행실올 지켜본 뒤에 그의 청덕을기린 비명, 즉 <天將吳侯頌德碑
33)《절강장씨세보》朴慶龜〈參判公行狀〉:『(1597년〉同年十一月二十九日, 與倭遇於竹山縣,쇼身先士
卒,上馬疾呼,以短兵相接之時,左脅傷於流丸,袠瘡力戰,則倭寇退山.吳游繫大捷立碑於其縣,銘曰:
天朝副摁兵吳惟忠仁勇清德碑.盖銃於尊也ᅴ
34)申欽《象村先生文集》권57〈天朝詔使將臣先後去來姓名〉참조.
35)成海應《硏經齋全集》권55〈萬曆東征諸公書牘〉:「韓石峯濩, 舊藏萬曆東征諸公書牘•一卷. 至今二
百年,其英風傑氣奕奕,如在紙墨間,眞可寶惜.---此爲遊擊吳惟忠書.《懲毖錄》稱吳公最廉操.余嘗
過竹山,見道傍有碑,書曰:天將吳公惟忠淸勇之碑,意其留鎭忠州也.我人立碑頌德也.今見此書,良然.
J
36)《절강장씨세브》朴慶龜 <參判公行狀〉:「又於忠州戰捷立碑
37)李時發《碧梧先生遺稿》권7 <縵記〉:「吳副總惟忠、,浙江金華府義烏縣人也. 癸巳之役, 攻平壤, 先
登功最.丁酉,再來鎭守忠州,性簡約,馭衆嚴整,秋毫無所犯,民甚悅服,東征諸將之中,’未見其比,忠人
立石而頌之.及移鎭安東,安東人亦服其淸德立碑.其他所過處亦立碑,凡五處.同列有爭名者忌之,言于
監軍陳御史曰:吳某要市名響於外國,到處私餽白金五兩于地方官,立碑五處,老爺可察焉.陳知其誣,卽
應之曰:然乎.吾且餽你五十兩,你可優給十兩,立碑五處而來何如?毀者慙服而退.j
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朴現圭) 8
銘〉올 지었다.38》따라서 죽산,충주에 세웠던 오유충 비석은 배용길의 <天將吳侯頌德碑銘〉
처럼 청덕비이지 전승비가 아닌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박경구가 장해빈이 죽산과 청주에사 일본군을 물리쳐서 숭전을 거두었다고 했을까?《적라지》를 비롯한 각종 장해빈 사적에도 죽산과 청주에 세워진 전승비라고 적혀 있는 점으로 보아 절강장씨 집안에서 장해빈의 공적을 일皁 잘못 전해 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장해빈이 뛰어난 전공을 세우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장해빈이 울산 甑城,즉 도산전투에서 용맹히 싸우다가 부상을 당했던 점만 보더라도 알 수있다.
울산 도산전투는 한마디로 격전이었다. 도산성은 정유왜란 때 太田一吉의 감독 아래 毛利秀元,淺野幸長,加藤淸正 등이 축성한 왜성이다. 조명연합군은 성이 위치한 산명을 따서 도산이라 불렀고,조선 후기에는 모습이 시루와 같다고 하여 甑城이라 불렀으며,근자에는 학처럼 생겼다고 해서 학성이라고 불렀으며,지금은 울산왜성이라고 부른다. 1597년(선조 30)
12월 22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조명연합군은 加藤淸正이 지키고 있는 도산 성을 정복하고자 맹렬하게 공격하여 한때 승전을 목전에 두는 듯하였으나, 가등청정이 사력을 다해 성을 지켜나가 실패로 끝났고, 오히려 일본 구원군이 들어오고 명 양호의 전략 실패로 역공을받아 많은 피해를 입고 패전하였다. 오유충은 울산 도산전투에서도 지난 평양전투처럼 사력을 다해 용맹하게 싸웠다. 장해빈도 오유충의 부장으로 도산전투에서 :선봉으로 나서 싸우다가 유탄을 맞아 커다란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다시 일어나 용맹하게 싸워 적들을 많이 베웠다
4. 결 론
한국 절강장씨의 시조 장해빈은 임진왜란 때 한반도에 들어왔다가 정착한 명 장수 출신이다. 정유왜란이 발발한 1597년(선조 30)에 명 장수 吳惟忠의 부장, 즉 左部二司把摁이 되어조선 원병에 나섰다. 동년 5월에 오유충과 함께 압록강을 건녔고,6월에 한양으로 들어왔다.
7월에 남하하여 죽산,충주,안동 등지에 옮겨 주분했다. 12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경리 양호가 이끄는 명 대군의 알원으로 加藤淸正이 거느린 일본군이 주둔한 울산 증산성, 즉 도산성을 공략하는 작전에 참전했다. 장해빈은 앞장서서 싸우다가 유탄을 맞아 부상을 당했어도상처를 동여매고 다시 일어나 용맹하게 싸웠다
.
1598년(선조 31) 봄에 오유충의 군사들이 안동으로 물러났는데,장해빈은 부상이 더욱 심해져 더 이상 본진과 함께、움직이지 못하고, 군위 북산에 들어와 요양하다가 정착했다. 그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峰察訪의 직첩을 받았으나,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
1657년(효종 8)에 별세하니 향년'83세이다. 묘소는 생전에 지목한 마올 남쪽 乙坐原에 묻혔다.
장해빈의 후손들은 대대로 군위 북산에서 살며 시조의 고향 절강을 관향으로 삼았다
.
1717년(숙종 43)에 조정은 후손들을 向化人으로 여기고.徵布稅役 처분을 내렸다. 1751년(영조 27)에 군위현감 남태보를 통로 편입시키고 세거지를 중화촌이라 명명했다. 1892년(고종 29)에 장해빈을 嘉善大夫 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訓練院事로 추증했다. 현 군위군 •군위읍 대북 1리가 절강장써 세거지이다.
이곳에 문중과 사림들이 장해빈을 향사하는 북산서원이 세워져 있다.
절강장씨 집안에서 장해빈의 고향올 浙江 金華府 烏江縣이라고 적고 있는데, 烏江縣은 義烏縣으로 수정해야 한다. 의오강은 의우 경내의오현 오감두촌 사람이고, 오유충이 거느란 남병의 주력은 의오군이다. 의오군은 명 척계광에 의해 처음 모집£었으며 용맹하고 싸움에 임해서는 물러남이 없는 의오 출신의 군사집단이다
.
오유충은 1592년(선조 25)에 명 지원군의 일원으로 참여했고, 이듬해 평양성 탈환에 결정적인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재개된 이후에 다시 한반도에 들어와 여러 전투에서 나섰의오에서는 오유충을 抗倭장수로 널리 칭송되고 있다.
38)疲龍吉《琴易堂集》권6 <天將吳侯頌德碑銘〉참조.
임진왜란 명 義烏軍 출신 張海濱과 한국 浙江張氏 고찰(朴現圭) 9
장해빈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명 장수이다. 국내외에서 임진왜란을 새롭게 조명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현 시점에서 장해빈과 한국 절강장씨의 사적을 짚어보고, 또한 명의오군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규명한 점이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때 절강장씨가 한때 향화인으로 치부되어 불이익을 받았는데,나중에 다시 華人으로 분류되어 조정으로부터 조선을 도와준 집안으로 칭송받았다. 오늘날에도 한국올 도와준 많은 외국인들이 많이 있다. 훗날 이들이 한국을 도와주었던 역사를 영원히 잊지 않기를 바라면서 본 논문을마친다. [玄風科學: 乙未桂月初一]
한글 초록
본 논문은 임진왜란 때 명 義烏軍 출신 장수로 한국 浙江張氏의 시조가 된 장해빈의 사적
올 고찰한 것이다
.1597년(선조 30)에 장해빈은 명 장수 吳惟忠의 左部二司把摁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에 들어왔다. 죽산, 충주 등자에서 활약하다가 울산으로 내려가 도산전투에 참전했다. 이때 선봉에서 용맹하게 싸우다가 심한 부상을 당하여 더 이상 본진과 함께 하지 못하고 군위북산에 들어와 정착했다. 그 후 조선 조정으로부터 惠民署參奉, 栗蜂察訪의 직첩을 받았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효종 8)에 별세하여 마을 남쪽에 묻혔다.
후손들은 장해빈을 해동 시조로 하고 고향인 절강올 관향으로 삼았다. 현 경북 군위군 군위음 대북 1리가 절강장씨의 세거지이다. 이곳메 장해빈을 기리는 북산서‘원;이 세워져 있다.
절강장씨 집안에서 장해빈의 고향을 浙江 金華府 烏江縣이라고 적고 있는데,烏江縣은 義烏縣으로 수정해야 한다. 장해빈이 모셨던 오유충은 금화부 의오현 吳坎頭村 사람이고,오유충이 거느린 남병의 주력이 의오군이다. 오유충은 임진왜란 때 두 차례 한반도에 들어와 뛰어난 전공을 세웠던 명 장수이며,오늘날 의오에서는 抗倭將帥로 널리 칭송되고 있다
주제어
張海濱,浙江張氏,軍威,北山書院,吳惟忠、,義烏軍,義烏
참고문헌
浙江張氏大宗會,《(경인본)浙江張氏世譜》,浙江張氏大宗會,軍威,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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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海英,《域外長城:萬曆援朝抗倭義烏兵故實》,上海人民出版社,上海,2014.
王賢根‘吳潮海,《千古長城義烏兵》,人民出版社,北京,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