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基督之神 롬八章九節 宮夕淸三
基督之人 以基督之神 而得名, 基督人始於使徒(十一章卄六節). 主以神而證 三十年間在家 奉父母 外面与人無異. 誰知肉身之內 有眞神乎?
幼時知覺超越, 十二歲入殿 与長老問答 見肉身爲之 是神使之. 承順父母, 助其木手, 幼時動作 与凡人異. 古代聖經之要訓 不學而知 是神使之. 在世肉身与門徒交往 有時形狀變化 是神使之. 医病赶鬼, 使死復活, 叱風履海 是神使之. 至法官之前 言不錯亂 又比十架之苦 是神使之. 入墓復活昇天 亦神使之. 又代遷保惠師 亦神使之.
今入罪人之心 使此罪自服 亦神使之. 神居肉身之內 如人在室內 開戶視外也. 神欲救人 而惟求己益卽 是阻神工作. 思神降耶蘇之身成, 何功用乎? 又思我之生, 當如何功作? 神信時 不能体認 神之意 由此而知十分烟想. 主曰 我在爾內 乃能明知 我之生卽 神之生. 我之願卽 神之願也.
新愛如暖 如染有生卽 覺有認卽 感悔不畢 生之要道. 無悔而信不眞 故當歸服于神, 使我疾惡 如讎. 見惡容之者 甚危也, 陷罪卽 陷死. 見而無心 亦非神之意. 見人芒棘 不覺目梁 亦無神之證. 神入信徒之內 不但祈求 使之甘受神恩. 如結果 果雖多 非樹之功 枝不付 樹不能結果 將自己歸服.
聖神如水隨充之方圓, 神喜卽我喜, 神憂卽我憂, 非此 非基督人也. 然則神如何充滿 我內乎? 先臨自己歸服 不但爲己罪憂慮 亦爲人罪憂慮. 彼等之罪 貽辱天父 与己罪無異, 是神之證也. 主望聖京而哭 神在主之內 而發悲也.
神在我內 亦然. 神不棄罪人 我亦不棄, 神不充滿卽 私欲權行阻人憂世意. 故吾等常體認 聖神之意. 人与人同心 可以起事, 況神与吾 同心則 必起救人之事. 神不棄我 而用之, 神內我在世 掃何故? 救主再臨 將何聲以答? 當從神之意 而歸服歸順 不改也.
198. 그리스도의 영 / 로마서 8:9. 궁정교회 주일저녁, 삼청교회 삼일저녁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영(灵)으로 얻은 이름이며, 그리스도인은 사도행전에서 시작되었습니다(행11:26).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증거하심이니 30년 동안 집에서 부모를 받들고 겉으로는 여느 사람들과 다른 바가 없으셨습니다. 그 육신 속에 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어려서는 지각(知覺)이 뛰어나시고, 12세에 성전에 가셔서 장로들과 문답을 하셨으니 육신으로 하시었지만 이는 하나님이 하게 하심이었습니다. 부모를 순종하고 목수의 일을 도우셨으며, 어려서 동작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셨습니다. 고대에 성경의 중요한 교훈을 배우지 않고 아셨으니 이는 하나님의 하심이었습니다. 세상에서 육신으로 제자들과 왕래하셨으나 형상이 변화하셨을 때가 있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내시며, 죽은 자를 다시 살게 하시고,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걸으심은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재판관 앞에 이르셔서도 말씀이 혼란하지 아니하시고 또한 십자가의 고난을 따르심도 하나님이 그리하게 하심입니다. 무덤에 드시고 부활하여 승천하하심 역시 하나님이 하시었습니다. 또 보혜사(保惠師)를 대신 바꾸신 것도 역시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지금은 죄인의 마음에 들어오셔서 이 죄를 자복하게 하시니 역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성신이 육신 속에 거하심은 마치 사람이 집 안에 있으면 문을 열고 밖을 내다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원하시나 사람이 오로지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면 이는 하나님의 일을 막는 것입니다. 성신이 예수님의 몸에 내리셔서 이루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무슨 공적을 쓰시었나요? 또 나의 생활을 생각해 보십시오, 마땅히 무슨 공로와 같은 것으로 이루었습니까?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뜻을 인식할 수가 없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희 안에 있으면 이에 내가 살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새 사랑은 따뜻하고 물을 들임과 같이 생생하여서 깨달아 인식함이 있게 되면 뉘우침이 다함이 없이 생의 중요한 도리가 됩니다. 회개함이 없이 믿는 것은 참되지 못하기 때문에 마땅히 하나님께 돌아가 자복해야합니다, 그러면 나로 하여금 악을 원수와 같이 싫어하게 하십니다. 악을 보고 용납하는 것은 심히 위험하니, 죄에 빠지게 되고 죄에 빠지면 죽음에 빠집니다. 악을 보고 무심한 것도 역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남의 눈의 티끌을 보면서 자기 눈의 들보를 깨닫지 못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이 없는 증거입니다. 성신이 신도의 속에 들어오시면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달게 받게 하십니다. 마치 열매를 맺는 것과 같아서 과일이 비록 많이 결실할지라도 나무의 공로가 아니니 가지가 붙어있지 않으면 나무가 능히 열매를 맺을 수가 없으니 자기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신은 물과 같아서 모진 데나 둥근 데나 모양대로 다 채웁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근심하시면 나도 근심하니, 이와 같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하면 성신은 어떻게 내 속에 충만합니까? 먼저 자기를 자복하여 자기의 죄만이 아니라 역시 남에게 근심과 염려를 끼친 것도 자복합니다. 저들의 죄가 하늘의 아버지께 욕을 끼쳤으면 자기의 죄와 다름이 없으니, 이는 성신의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바라보시고 우신 것이 성신께서 주님 속에 계셔서 슬픔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성신이 내 안에 계시면 역시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니 나 역시 버리지 아니합니다. 성신이 충만하지 못하면 사사로운 욕망이 마음대로 사람을 가로막아서 세상의 뜻을 근심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성신의 뜻을 몸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도 가히 일이 일어나게 하는데, 더구나 하나님과 내가 한 마음이 되면 필시 사람을 구원하는 일이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버리지 아니하시고 쓰시니, 하나님의 안에서 이 세상을 살게 하심은 무슨 까닭입니까? 구주께서 재림하시면 장차 무슨 소리로 대답할까요?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복하고 순종하는 일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