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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맛있는 감정과 화목제>의 줄거리:
화목제는 희생물의 콩팥과 온 몸 안에 있는 기름을 걷어 내어 번제단에서 불로 태워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렇게 태워 드리는 제사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 즉 하나님의 마음을 평안히 쉬게 해드리는 냄새가 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또 다시 나의 어떤 면 때문에 마음이 쉬지를 못하시고 불편해 하신다는 것일까요? 바로 맛있는 감정에 관한 것입니다. 맛있는 감정과 관련 된 하나님의 불편하심이 극복 될 때 하나님과 나의 화목이 가능합니다.
맛있는 감정과 화목제
(레3:1~17)
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제물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면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릴 것이며
3. 그는 또 그 화목제의 제물 중에서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4.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쪽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떼어낼 것이요
5.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맛있는 감정과 화목제>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맛있는 감정과 화목제’
저의 가까운 친척 중에 중학교 선생님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께서 하시는 말씀을 들었는데 동료선생님 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4형제가 있는데 아버지 생전에는 알지 못했던 50억이 넘는 유산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서 정확하게 몫을 정해놓은 것이 아니다 보니 유산상속집행이 되려면 4형제가 다 동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4형제 각자가 많이 가져가야 될 이유를 서로 주장하면서 유산을 한 푼도 쓰지 못하고 묶어둔 채 몇 년이 되었다는 얘기를 제가 들으면서 아니 그렇게 묶어둘 바에는 서로 조금씩 양보해서 만족한 선에서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주변에서도 다 그렇게 말들을 하는데 죽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하는 당사자 선생님에게 그러면 너는 양보할 준비가 됐느냐고 하니 자기도 안 된다고 하고 자기는 자기대로 더 많이 가져야 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화목제” 얘기가 나오는데 유산만 없었으면 4형제가 화목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을 유산 때문에 불화합니다.
화목제(和睦祭)의 한자가 ‘화’는 벼 ‘禾’에 입 ‘口’로 ‘벼를 수확해서 모든 사람이 다 골고루 나눠서 배부르게 먹었다’는 뜻으로 화평할 ‘和’자가 성립이 됩니다. ‘목’은 눈 ‘目’에 친할 ‘坴’자로 ‘친근한 눈매’를 말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면서 아, 참 마음에 드는구나. 친할 수 있구나. 내가 저 사람과 참 친하다. 참 그윽하고 만족하고 흡족한 눈길이 이게 ‘睦’자입니다. 친하다는 느낌이 충만해서 바라보는 눈매가 ‘睦’자입니다. ‘화목’을 합치면 수확한 벼를 서로 불평이 없도록 골고루 나누어서 배가 부른 상태로, 내 배가 부르도록 내 몫의 벼를 저 사람이 동의를 해 주었고, 또 저 사람이 배가 부르도록 저 사람의 몫의 벼를 내가 동의를 해주었습니다. 내 것을 챙겨주는 그 사람이 마음에 들어서 그 사람이 참 친근하게 느껴집니다. 똑같이 만족하게 나누어서 밥해먹고 배부른 마음으로 상대방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눈매가 ‘睦’자입니다. 화목입니다. 아버지 유산이 발견이 됐는데 내 몫의 필요한 만큼을 상대방이 인정하지 않으므로 화목이 깨집니다.
이게 한자문화권에만 속한 얘긴가 했더니 오늘 본문에 화목제 얘기를 하면서, 앞에서 번제나 소제를 드릴 때 계속해서 반복되는 구절이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냄새’라고 했는데 오늘 본문 5절에도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나옵니다.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예물인 소나 양이나 염소로 드릴 때 이 세 가지 경우를 구분해서 얘기할 때 전부 ‘향기로운 냄새’라는 말이 나와야 될 부분인데, 11절에서 뭐라고 하는가 하면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니 이는 화제로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니라”라고 나옵니다.
‘화목’이라는 한자어가 똑같이 나눠 먹고 똑같이 배부른 상태에서 상대방을 친근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인데 오늘 본문에 화목제가 ‘여호와께 드리는 음식’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배부르게 해드려야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얘기인데, 16절에는 음식과 향기로운 냄새로 합쳐서 나옵니다.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불사를지며 이는 화제로 드리는 음식이요 향기로운 냄새라”고 합니다.
‘향기로운 냄새’는 ‘하나님의 마음을 쉬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마음이 늘 불편해 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집어넣고 있기 때문이고 그리고 소제가 의미하는 모든 시간들이 가루가 된 상태로 지금으로 잘라져서 하나님만을 생각하게 될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 쉼을 얻으시는데 우리는 1년 뒤, 2년 뒤, 또는 5년 전 이렇게 시간을 뭉텅이로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실 때 늘 불편해 하십니다. 마음의 지성소에는 언제나 하나님만 들어오시도록 준비되는 마음상태를 지금 유지하고 있어야 하나님의 마음이 안심을 하시고 휴식을 취하시는데 그러지 않고 우리의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것이 들어가 있거나 번제를 드리고도 생활 속으로 들어가면 또 다시 마음의 지성소가 지금은 돈이 된다든지 가족이 된다든지 하면 또 하나님의 마음이 쉬지 못하시고 역겨워하시고 토악질을 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향기로운 냄새와 음식으로 하나님께서 쉼을 얻으실 뿐만 아니라 배가 부르신 상태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시는데 나와 화목한 상태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과 내가 화목한 상태가 가능할까요?
번제 때는 가죽을 제외하고는 내장을 포함해서 모든 부분을 다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런데 화목제는 제물을 죽여서 피를 제단 사방에 뿌리고 소나 양의 뱃속 전체에 기름기가 있잖아요. 창자라든지 염통이라든지 이런 부분에 붙어 있는 기름과 내장 사이에 붙어 있는 기름을 떼 내고 콩팥과 간에 덮여 있는 기름을 다 떼 내고 두 콩팥만 떼어서 기름과 함께 불사릅니다. 나머지 살이 붙은 부분은 제사장이 먹고 제사를 드린 사람이 자기의 가족과 이웃과 함께 성막 뜰에서 먹습니다. ‘기름과 콩팥’만 화제로 드리는데 구약성경에서 콩팥은 감정의 좌소(座所)로 감정이 발원하는 근원지를 말합니다. 기름은 기름진 송아지를 잡고 기름진 양을 잡는다는 말을 합니다만 요즘은 사람들이 하도 잘 먹으니 기름을 피하려고 하는데 그 옛날에 가장 맛있는 부분이 기름입니다. 쇠고기도 마블링이 살 속에 기름이 꽃무늬처럼 들어있을 때 맛있다고 합니다. 살덩어리에는 아무리 맛있는 소스를 발라도 좋은 스테이크가 될 수 없어요. 마블링이 좋아야 하는데 기름은 맛있는 부분을 말하는 것입니다. 콩팥은 감정의 좌소를 말하고 기름은 맛있는 부분으로 ‘맛있는 감정’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시고 배부르시고 나도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화목이 이루어지는데 배부른 마음으로 친한 눈매로 눈길을 서로 주고받을 때 화목, 샬롬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떻게 배부를 수 있는가가 문제로 화목제의 의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부르게 해드리자.’라고 하는 화목제의 의미가 5절에서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실마리가 제공되고 있습니다. “아론의 자손은 그것을 제단 위의 불 위에 있는 나무 위의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고 합니다.
‘번제물 위에서 사를지니’라고 하는데 번제물이 뭐예요? 번제단에는 일 년 365일 어느 때든지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습니다.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는 중에 화목제의 콩팥과 기름을 올려놓고 태우는 것입니다. 또 다시 불을 붙이고 하는 것이 아니라 번제물이 타고 있는 중에 그 위에 올려놓고 사릅니다. 번제물 바탕위에 화목제가 드려지므로 하나님이 배부르시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이고 화목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번제가 드려질 때는 반드시 소제가 같이 드려집니다. 번제와 소제와 화목제가 의미상 서로 독립적인 다른 제사가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번제를 화목제와의 관계에서 생각할 것은 번제는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이 들어와 있는 상태로 나의 인격이 죽는 것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다른 것을 들여놓은 내가 죽는 겁니다. ‘번제’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올라’인데 ‘알라’라는 동사에서 온 것으로 ‘하늘로 올라간다.’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번제가 ‘올라’로 우리나라 말의 ‘올라감’으로 너무 똑같아요. 번제의 궁극적인 의미가 마음이 이제는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로 올라가서 마음의 지성소에 오직 하나님만 모시겠다는 뜻이지요. 소제는 그렇게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을 모시기 위해서 내 인생의 모든 시간들이 지금만으로 존재하는데 내 미래도 없고 내 과거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고 다시 말하면 하늘로 마음을 올려 보내는 번제가 무한반복 되는 것입니다. 상번제를 아침저녁에 드릴 때 내가 죽는 것으로 동일시해서 번제로 드려져서 마음이 올라가면 지금의 그 번제를 나 혼자서 반복하는 것입니다. 상번제가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데 그 간격을 메우는 백번의 번제, 천 번의 번제, 만 번의 번제가 바로 소제의 의미입니다. 하나님만을 모셔 들이기 위해서 지금의 내 모든 마음을 하늘로 올려드리는데 올려드리면 끝납니까?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의무감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우리 그런 경우 있어요. 부부가 외식하러 갔어요. 중국집에 가서 탕수육을 시켜서 맛있게 먹는데 저 옆쪽으로 TV가 있어요. 남편은 음식 먹는 내내 아내 얼굴을 한 번도 보질 않습니다. 수그리고 탕수육만 먹던 남편이 TV에서 걸 그룹 나오는 것을 보고 활짝 웃어요. 희색이 만면해요. 아내가 기분이 나빴어요. 그런데 걸 그룹이 끝나고 또 남자아이들 그룹이 나왔어요. 아내가 활짝 웃습니다. 이 부부는 절대 헤어지지 않습니다. 이 여자와 살아야 되고 이 남자와 살아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 서로에게 절대 기쁨이 되질 않습니다. 이게 문제라는 것이지요. 거기에 부부생활의 만족이라는 게 없습니다. 내가 남편에게 기쁨이 되고 남편이 내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 부부생활의 맛있는 감정이 없고 부부생활을 통하여 맛있는 감정을 먹음으로 배부름이 없는 것입니다. 절대 헤어지지 않고 죽을 때 까지 사는데 서로에게 기쁨이 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화목제가 바로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번제는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집어넣은 내가 죽는 것이고 소제는 그렇게 죽는 번제의 의미가 매순간 지속돼야 한다는 것인데 결혼한 사람이 매순간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식은 하는데 상대로부터 기쁨이 주어지질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렇게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번제를 드려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만을 마음에 모시는 것이 의무규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맛있는 감정을 먹고 배불러야 되고 또 내가 하나님께 맛있는 감정을 드려야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살벌한 화목제의 모습이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화목제의 제물은 ‘자바흐’라고 하는 히브리어로 ‘죽인다.’는 뜻입니다. 죽여야 화목이 일어난다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면 걸 그룹이 나와서 기쁘다고 하면 아내에게 미안해 할 줄을 알아야 하고, 또 남자애들 그룹이 나와서 기쁘다면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왜 이럴까?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내가 이 세상에서 맛있는 감정인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대상들이 내 마음에서 죽어 없어져야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은 하나님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의무적인 생각을 갖고 있고 실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만족하는 것은 전부 이 세상에 있는 돈 많이 벌고, 사업이 잘 되고, 자식이 일류대학 들어가고, 내 몸이 건강하고 아름답게 유지되고, 하려는 일이 형통하고 기쁨의 근원이 따로 있다고 하면 이것은 명목상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 관계에서는 하나님께서 불편해 하시고 하나님도 굶주려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배부르실 수 있는 것은 내가 기쁨을 기대할 수 있을 만큼 좋고 사랑스러운 이 세상의 것들을 내 마음에서 번제로 죽여야 합니다. 번제는 내가 죽는 것이고 화목제는 내 마음에 담을 만하고 그것에서 기쁨을 기대할 만한 다른 것을 내 마음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화목한 믿음의 조상입니다. 온 인류 중에서 하나님과 화목한 선민의 첫째 머리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과 하나님과 화목함이 최고조로 달한 순간이 언제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독자 이삭을 번제단 위에 올려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과의 화목이 최고조로 달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인생의 최고 기쁨이 이삭으로 인생 만족의 최고봉이고 인생 행복의 근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축복이 이삭을 통해서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받고 25년 만에 그리고 100세에 얻은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삭을 죽이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배부르심이 이루어지고 아브라함을 바라보는 눈매가 화목의 눈매가 되고 이삭을 죽이지 말라고 만류하면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화목이 극에 달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알려집니다. 선민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생활화하는 자들입니다. 선민은 십자가를 아는 자가 아니고 십자가를 생활화합니다. 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화목제가 아주 귀한 한 측면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죽음은 번제로 나의 죽음인데 왜 내가 죽어야 됩니까? 마음의 지성소에 살아야 될 이유로 나의 생명으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집어넣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회사에 나가서 돈을 벌고 가족 때문에 삽니까? 그러면 가족이 내 생명으로 안 된다는 것이고 죽어야 합니다. 동시에 주님의 십자가는 내 인생에서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상대방의 죽음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게 화목제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무엇이 죽는 것이냐?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이삭을 마음에 담았던 본인이 죽는 것이고 동시에 이삭의 죽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6:14절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라고 합니다. 세상이 죽고 동시에 내가 죽은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죽음이 결국 하나예요. 의미상으로는 하나인데 두 가지 측면으로 동전의 앞뒷면처럼 우리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린 이렇게 두 가지로 죽을 수 있는 것이지요. 내 자식이 잘 생기고 공부도 잘하고 모든 사람이 칭찬하므로 어디를 가든지 자식 얘기만 나오면 우쭐해진다면 그 자식을 담고 있는 나는 빗나간 것이므로 번제를 통해 내가 죽어야 됩니다. 내가 죽는다는 게 의무감으로 끝나서는 안 되고 이제는 어디를 가든지 나를 우쭐하게 했던 그 자식이 내 만족과 기쁨이 아니라 번제로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오직 하나님으로만 나의 만족과 기쁨이 온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께 마음을 쏟고 그리고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내 자식은 내 마음에서 십자가의 주님이 죽으신 것으로 동일시합니다. 거기서 기름과 콩팥만 태우는 것은 콩팥과 기름을 합치면 맛있는 감정으로 내 맛있는 감정의 출처였던 내 자식을 내 마음에서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나로 인해 배부름이 일어나서 만족하십니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기쁨을 기대하고 있는 나로 인해 하나님이 배불러지시는 것이지요. 여기서 특이한 것이 또 하나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이 세상에 있는 맛있는 감정의 근원을 마음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므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너무 만족스럽고 아브라함도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이삭을 죽였는데 하나님께서는 죽이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삭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이 세상에서 나에게 기쁨과 행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만큼 훌륭하고 사랑스럽고 가치 있는 것들을 내 마음에서 죽여 버리고 그것들에서 나타나는 모든 기대를 하나님에게로 옮겨버릴 때 하나님의 마음이 편해지십니다. 아브라함에 대해서 이제 불편한 마음이 하나도 없으시고 염려가 없으신데 이 말은 이삭에 대해서 당신이 갖고 계신 모든 평강의 계획을 다 마음 놓고 실행해 가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게 확인되기 전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통해서 맛있는 감정을 기대하는 상태가 유지될지도 모른다는 염려가 있을 때는 이삭을 위한 하나님의 평강의 계획을 오롯이 수행해 나가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3자의 역학구도 안에서. 그런데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안심을 드렸고 오직 하나님으로만 기쁨을 기대하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이제 자식에 대한 기대를 버립니다. 자식이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으로 배부른 나에게는 더 이상 기쁨도 행복도 될 수 없고 난 오직 하나님으로만 맛있는 감정을 기대할 것이라고 할 때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맛있는 음식이 되고 동시에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게 되지 않으면 아브라함이 이삭과 마음으로 연결돼 있고 이삭을 통해 기쁨을 요구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자리까지 이끌고 가시려면 이삭을 손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식들이 환난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의 70-80% 이상은 자식의 잘못보다는 내가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끌어 들이셔서 맛있는 감정을 하나님께만 기대하게 하시기 위해서 자식에게 환난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가 자식으로부터 기쁨을 기대하고 만족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화목제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가 자식 때문에 불만이 생기면 기쁨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고 이삭의 자리에 사업이 들어갈 수도 있고 나의 외모가 들어갈 수도 있고 나의 경제형편이 들어갈 수도 있고 나의 건강상태가 들어갈 수도 있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성과가 들어갈 수도 있어요. 선민이 그것들을 통해서 기쁨을 기대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그것들을 안 되게 하실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으로부터만 맛있는 감정인 만족과 기쁨과 행복을 기대하는 것이 하나님과 화목한 선민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꾸 다른 것을 원하고 고쳐지지가 않으므로 이것들에 문제들을 주어서 마음을 돌리게 하십니다. 그것으로는 기쁠 수가 없고,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고, 그것으로는 궁극적으로 행복이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계속 내가 사랑하고 맛있는 감정을 기대하는 대상들에게 환난을 주시는데 다 내 잘못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임으로 더 이상 이삭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행복과 만족을 기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기대하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배부르시고 하나님도 당신을 주심으로 아브라함도 배부르고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므로 이삭의 생애도 평강 속에 머물게 되고 그래서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인 내가 관계하는 모두가 평강 가운데 거하는데 이것을 두 글자로 ‘샬롬’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화목제의 이름이 샬롬에서 나온 것입니다. 샬롬의 제물이고 제사라는 것입니다. 나와 하나님이 만족하면서 나와 관계하는 모든 인간들이 온전한 하나님의 뜻에 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잘못했으면 환난을 줄 것이지만 그 환난은 일어나야 하는 환난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고치시려는 환난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필요한 환난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는 것이고 진정한 샬롬이 우리의 삶에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번제는 ‘올라’로 구름위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것이고, 소제는 그 번제를 지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시간만이 내게 주어진 시간으로 미래는 없는 것이고 과거도 없는 것인데 진짜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으로 이게 소제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을 올려드리고 끊임없이 올려드리되 그 위에 화목제를 드리되 의무감으로 드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옆에 계셔야만 되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이 맛있는 감정의 좌소로 오직 그분만이 내게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분이시므로 마음을 드리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하나님은 나로 인애 배부르시고 화목, 배부르고 만족하고 친근한 그러한 눈길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는 가운데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평강의 뜻을 따라 내가 그를 관계하게 되니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우리에게 그대로 임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번제로서의 나의 죽음이고 화목제로서의 맛있는 감정을 기대하는 대상의 죽음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고 십자가 생활화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맛있는 감정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번제와 소제가 드려짐을 통하여 하나님과 제가 화목하게 하시고 그럼으로써 내가 관계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평강의 뜻 안에 붙잡히는 샬롬이 주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