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슬
연말의 한국 영화관,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추운 겨울 세대 불문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불화와 갈등이 이해와 사랑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며 눈물과 배꼽 다 챙기는 영화, 두말할 것 없이 가족영화가 아니겠는가! 다만, 한국의 이상적 가정상에서 보란 듯이 벗어나 있는 내가 굳이 2년 만에 방문한 한국에서의 시간을 할애해 가며 찾아볼 종류의 영화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은 내가 엄마와 함께 조조영화로, 그것도 무려 개봉 첫날로 예매해 본 영화, <대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아니, 여기에는 다 사정이 있다. 아빠는 내가 집에 와 있다고 부담 없이 밀양으로 일주일이나 출장을 가 버리고, 집에는 나와 엄마뿐이었다. 우리 엄마는 보는 사람 어지럽게 하는 현란한 카메라 무빙을 싫어하고 스트레스에 예민한 심장 질환을 오래 앓아 긴박한 스토리 진행이나 우울한 영화도 딱 질색, 생각 없이 깔깔거리며 웃을 수 있는 영화가 취향이다.
또 비단 엄마를 위해서만도 아니었다. 바로 이 영화의 주연을 맡은 김윤석 배우와 그의 첫 감독 데뷔작이었던 ‘미성년’이라는 영화에서의 인상 때문이었다. 그는 본인의 영화에서 바람을 피워 주변의 네 사람 인생에 큰 파장을 일으킨 유부남으로 분하기도 했는데, 책임으로부터 줄행랑만 치는 한없이 작고 우스꽝스러운 인물을 너무 잘 연기했다. 그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의 영화 안목을 신뢰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제목부터 <대가족>인 이 영화가 완전히 구시대적이지만은 않을 거란 일말의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때는 2000년대, 무옥(김윤석)은 정말 끔찍하게도 전통적인 아버지상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북식 만둣집을 매우 성황리에 운영하고 있는 그는 현재 고층 건물을 몇 채나 보유했을 정도로 부족함이 없지만 고약한 구두쇠로, 모든 것의 가치를 만둣국 몇 그릇을 팔아야 하는가로 치환하는 사고방식을 가졌다. 이렇게 ‘성공’한 그에게 단 하나 오점이 있다면 종갓집 장손으로서 가문을 이어야 할 아들 문석(이승기)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어린 남매가 무옥의 만둣집으로 찾아와 문석이 자신들의 생물학적 아버지라고 주장한다. 정작 문석은 본인이 불교에 귀의하기 전 500여 차례 기증했던 정자를 통해 태어난 이 아이들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당혹스러운데, 무옥은 아들 문석이 가장 최고의 생일 선물을 줬다며 아이들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다.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음에도 아이들이 주는 소주를 목구멍으로 넘기고, 그 노랭이 할아버지가 어린 남매의 보육원 친구들 전체를 놀이공원에 데려갈 정도이다.
놀랍게도, 혹은 너무나 뻔하게도, 그 아이들이 실제로는 문석의 정자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야 판명된다. 영화가 그 반전에서 오는 충격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옥이라는 캐릭터를 자신의 핏줄과 대를 잇는 것에 도를 넘어 집착하는 인물로 그리는 방식은 전형적이다. 무옥의 행동은 호통과 윽박지름으로 과장되게 표현되어 그저 웃어넘기기만은 어려웠고, 어떤 이들에겐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고 염려되는 순간들도 있었다. 코미디영화들이 대개 그렇듯 주요 인물들이 펼치는 약간의 아슬아슬한 범법 행위나 민폐 상황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정자의 주인’이나 ‘친자확인 검사’에 목 매는 영화 속 주요 인물들 누구에게도 이입할 수 없어서였는지 주변 인물들과 사회에 도리어 더 마음이 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무옥과 문석 모두에게 깨달음을 주는 장치를 마련하였다. 아이들이 본인의 혈육이 아님을 알게 된 무옥은 충격에 정신을 잃고 마는데 (어휴), 그 와중에도 저승사자가 찾아오는 대신 부모님 제사상 앞에서 (어휴휴) 부모님의 혼과 대화를 나누는 환영을 본다. 6.25 전쟁 당시 부모님 없이 여동생과 남으로 피란하였으나 그 동생마저 잃은 아픔을 가지고 있는 무옥이, 남한에서 악착같이 살아남고 번창하여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가족 내 어르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일은, 본인의 뿌리를 기억하려는 몸부림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옥의 부모는 ‘우리가 어찌 너의 영혼을 데리러 오겠느냐, 혼자 남은 너를 이렇게까지 길러 준 것은 우리가 아니라 세상이다’라고 말한다. 혈통에의 집착과 그에서 비롯되는 과도한 배타성, 그를 넘어서서 우리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고 나아가 후대가 자라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키는 장면이었다.
오랜 지병으로 앓던 어머니를 보냈을 때에도 지체 없이 장사를 재개했던 지긋지긋한 아버지와의 연을 끊듯이 불교에 귀의했던 문석은, 두 남매가 손자라는 말을 듣자마자 애정이 샘솟는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를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승려 문석에게 있어 본인의 과거 행위에서 비롯된 이 모든 혼란은 업보로써 받아들여야 할 것이지만, 다시 홀로가 될 두 남매의 사정은 안타깝게도 이제 문석의 손을 벗어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정신을 되찾은 무옥이 두 남매의 무책임한 후견인을 찾아가 담판을 짓고, 산속으로 달아나 숨은 두 남매를 찾아 깜깜한 숲을 헤매고, 마침내 추위에 떠는 아이들을 들쳐메고 수색대 쪽으로 달음질하는 모습이 그를 따라 나선 아들 문석의 시각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지면서, 우리는 문석이 아버지를 인간으로서 이해하는 순간에 도달했음을 안다. 아이를 안은 무옥의 뒷모습 위로 흐르는 노(老)스님의 나레이션, ‘자식에게 부모는 우주다. 그렇다면 부모에게 있어 자식이란 어떤 존재인가? 부모에게 자식은 신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무능한 신. 그런 신을 부모는 평생 간절히 섬긴다’.
엄마는 완경 후 부쩍, 신혼 초기부터 내 남동생을 낳던 때까지 아빠가 양육적으로 부재했던 시절에 대해 많이 이야기한다. 하나는 손에 붙들고 하나는 포대기 한 채로 눈 덮인 길을 걸어가던 어떤 날을 기억하는 엄마, 유독 열이 자주 났던 영유아 시절의 나를 데리고 응급실에 가는 일이 잦았다는 엄마. 내 상상속의 엄마도, 무옥처럼 표정을 볼 수 없는 뒷모습이다. 내가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의 나를 엄마가 신처럼 섬기던 때를 생각하면서, 오랜만의 가족영화 상영관에서 엄마와 나는 정말 펑펑 울었다.
영화의 감독 각본을 맡은 양우석 감독은 전작 <변호인> <강철비>와 같이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어째서 그의 다음 행보가 ‘가족 휴먼 영화’인지 의아해했다. 영화의 끝에, About Family라는 문구를 보고서야 나는 비로소 ‘아 이 영화는 큰(大) 가족이 아니라 가족에 대(對)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구나’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관객들은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욕망을 지닌 영화속 인물들을 따라가면서 ‘가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는데, 양우석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가족의 형태와 의미가 급격히 변하고 있는 현대 한국사회에 가족영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못내 아쉬운 점은, 영화가 무옥이 죽기 전까지 40여명의 아이들을 입양한 것으로 마무리하며 무옥 개인을 바꾸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이를 길러내는 사회에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있는지 그려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새로운 가족 형태를 영화 중심에 놓고 다각적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 시도, 그럼에도 관객들이 누구 하나 결혼/출산 장려 또는 어떤 특정 가치관을 강요당했다는 불쾌감 없이 영화관을 나올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가족영화’ 그 이름에 걸맞는 영화였다. 2024년 한국 여행에서의 유일한 영화관 기행, 오랜만에 엄마와의 오붓한 데이트, 후회는 없었다.